#51
“……너넨 또 뭐 하냐?”
뒤돌아서자마자 멍청한 얼굴을 셋이나 마주하고 말았다. 우영찬은 눈살을 찌푸리며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저, 저 사람은 누구야? 누군데 널 도련님이라고 불러?”
“김제논, 너 출생의 비밀이라도 있었냐?”
“혹시 단역 배우 고용한 거야? 컨셉에 충실하려고?”
각각 설이태, 문해일, 이주진의 말이었다. 하는 말은 달라도 자신을 우영찬이라고 믿지 않는 건 똑같았다.
이만치 증거를 보여 줬는데도 딴소리하면 자신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우영찬은 그들을 지나쳐 거실로 향했다.
“알아서들 상상해.”
“상상이 안 되니까 그러지!”
“그럼 아예 생각을 말든가.”
우영찬은 쇼핑백에 든 상자를 열었다. 강문 전자에서 가장 최근에 출시한 핸드폰이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보호 필름을 떼 버리고 전원을 켜는데, 이주진이 바싹 다가와 조잘거렸다.
“저런 단역 배우는 건당 얼마나 받아? 나도 할 수 있나? 돈만 주면 도련님이라고 불러 줄 자신 있는데. 제논 도련님! 쇤네 준비된 머슴 이주진입니다요.”
“……너한테 도련님 소리 들어서 뭐 하냐. 그리고 왜 사극 톤으로 바뀐 건데.”
“언젠가 사극 대본이 들어올 때를 대비하여…… 헤헤. 이건 농담이고, 진짜 뭐야? 뭐 하는 사람이길래 너한테 핸드폰을 주고 가?”
“내 친형의 비서다.”
“하지만 넌…….”
촐싹거리던 이주진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아무리 그라도 ‘넌 가족이 없잖아.’라는 말을 내뱉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작은 방 문이 달칵 열렸다. 한호성이었다.
“형, 일어났어?”
“응. 오늘은 내가 제일 늦게 일어났네. 다들 웬일로 일찍 일어났어?”
“…….”
네가 주인공인 야한 꿈을 꿔서 일찍 일어났다고 고백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른 이들 또한 ‘제논’이 자기 성기를 때리는 소동에 놀라 깼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네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자, 분위기가 서서히 침잠했다.
“마침 잘 나왔다, 한호성. 안 그래도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얼마간의 침묵을 깨고 우영찬이 선언했다.
“오늘부터 연습실을 바꿀 거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누구 마음대로 연습실을 바꿔?”
문해일이 따져 물었으나, 우영찬은 한 마디로 그를 닥치게 했다.
“리더 마음대로.”
“…….”
“한호성도 동의했다. 어제 단둘이서만 외출한 것도 연습실 문제 때문이었고.”
한호성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 건 사실이지만, 딱히 제 의지는 아니었다. 그저 우성한한테 맡겨 둔 것처럼 당당하게 연습실을 요구하던 우영찬을 말리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대표님께 아무런 설명도 못 들었는데. 아니, 애초에 대표님은 우리가 연습실 바꾸려는 거 알고 계셔?”
“그건 내가 따로 말씀드릴게.”
설이태의 물음에 한호성이 답했다. 장 대표라면 분명, 의아해할지언정 결국엔 수락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장 대표도 소소리 엔터테인먼트 사옥 내부의 연습실 환경을 뻔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다 좋은데 난 왜 이렇게 사기당하는 기분이지.”
설이태가 중얼거렸다. 한호성은 그의 심정에 십분 공감했으나, 말로 표하진 않았다.
6. Challenge
다소 잡음이 있었지만, 결국 하이파이브는 연습실을 옮기기로 했다. 새로운 연습실이 기존 연습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쾌적했기 때문이다.
“와……. 햇살 들어오는 것 좀 봐. 이게 남향 건물의 위엄이구나.”
“그러게. 이런 데선 곰팡이가 필래야 필 수 없겠다.”
이주진과 설이태가 감탄했다. 아무런 말도 안 하고 있지만, 문해일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우영찬이 이렇게까지 좋은 연습실을 구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 시설에 규모면 대체 한 달 대관료가 얼마일까. 게다가 교통도 좋은데.”
한호성이 중얼거렸다. 좋은 것과 별개로 현실적인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연습실의 열쇠를 지닌 장본인은 심드렁했다.
“나도 몰라. 형이 알아서 했겠지.”
“나중에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다.”
“연습실은 마음에 들어?”
“물론이지!”
“뭐가 가장 마음에 드는데.”
“조경. 초록색을 보니까 눈이 편해지는 것 같아. 그리고 햇살이 들어오는 것도 좋아.”
연습실 건물 옆엔 작은 정원이 있었다. 붉은 벽돌 담을 둘러 행인의 시선을 차단하고, 각종 나무를 심어 둬 비밀스러운 숲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한여름인지라 나무 이파리가 생생한 초록빛을 뽐냈다. 그 사이로 스미는 햇살이 사람의 마음마저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듯했다.
“그러냐. 연습실 알아봐 달라고 하길 잘했네.”
우영찬이 씩 웃었다. 괜히 겸연쩍어져, 한호성은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얘들아, 연습실 구경은 나중에 마저 하고 촬영부터 하자.”
“좋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멤버들이 모여들었다. ‘제논 챌린지’를 촬영하기 위함이었다.
설이태와 문해일이 카메라를 세팅하는 동안, 이주진은 노트북을 켰다. 오래된 노트북이 요란한 모터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우영찬은 노트북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노트북 바꾸는 걸 잊었군…….”
한호성은 그 말을 못 들은 체했다.
“형, 그냥 기획 팀 도움 받을 걸 그랬나 봐. 이거 제대로 세팅된 거 맞을까?”
“기획 팀 분들도 촬영이 본업이 아니라서 잘 모르실 거야. 우리끼리 잘해 보자.”
호성은 카메라 앵글을 확인하며, 멤버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다섯 명이 반원 형태로 앉는 구조였다. 중심은 오늘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우영찬이 차지했다.
“Hi, High-Five! 안녕하세요, 하이파이브입니다.”
“눈썰미 좋은 분들은 알아차리셨을 텐데요. 처음 보는 장소죠? 예, 저희가 연습실을 바꾸기로 했답니다. 이곳은 새 연습실이에요.”
“오늘이 새 연습실에서의 첫날이라, 기념으로 특별한 게임을 준비했는데요. 바로바로……!”
한 명씩 준비한 멘트를 읊었다. 이윽고 우영찬이 정답을 공개했다.
“……제논 챌린지를 할 겁니다.”
우와아아, 멤버들이 환호하며 떠들썩하게 박수 쳤다. 비단 촬영 분위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쪽팔림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우영찬은 하하 웃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악랄한 새끼들.’
그래도 이 쓸데없는 게임에 참여하는 게 자신뿐만이 아니란 사실이 심심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규칙은 다들 알지? 웃으면 안 돼.”
“순서는 어떻게 할까?”
“제논부터 시작해서 시계 방향으로 돌자.”
문해일이 제시한 대로라면 그가 마지막 순서가 된다. 속으로 ‘치사한 놈.’이라고 욕하면서도, 우영찬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럴까. 모든 건 나로부터 시작했으니까.”
“오, 원조 바이브 나왔다!”
“역시 원조는 달라.”
어째 요즘 들어 자신에게 이상한 이미지가 생긴 것 같았다. 정확히는, 원래 있던 중2병 이미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강화된 것이다.
뭐가 됐든 화제성만 얻을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멤버 개개인의 화제는 곧 팀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하이파이브가 잘돼야 한호성이 승승장구할 테니까.
‘역시 내 팬심은 에로스가 아닌 필리아다.’
이 정도면 숫제 아가페(agapē: 고대 그리스인들이 분류한 사랑의 종류 중 하나. 종교적인,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한호성도 인정한 세인트 영찬은 노트북을 받아 들었다.
“엔터를 누르면 랜덤으로 포스팅이 나오는 거지?”
“응.”
인터넷 방송인 사이에서 ‘제논 챌린지’가 인기였던 까닭에, 아예 제논의 블로그 포스팅이 랜덤으로 나오는 사이트까지 있었다. 우영찬은 ‘세상엔 참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쏟는 사람이 많군.’ 하고 감탄하며 엔터키를 쳤다.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천사의 깃털처럼. 어쩌면 이 기나긴 밤. 함께 군고구마를 먹을 사람도 없는. 나를 위한 천사의 선물인가 봐.’”
우영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포스팅을 읽어 내렸다. 원체 무표정한 성격이기에,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가볍게 통과! 다음, 호성 형!”
이주진의 외침에, 우영찬은 한호성에게 노트북을 넘겨주었다. 엔터를 누른 한호성이 포스팅을 조심조심 읽어 내렸다.
“‘스스로 만든 눈물바다에 잠겨, 목소리를 주면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바다 마녀를 찾는다. 소원이라면 오래전부터 생각해 두었다. 부디 나도 ……처럼 되게 해 주세요.’”
“호성 형도 통과! 그런데 제논, 되고 싶다는 사람이 누구야?”
어느새 사회자를 자처하고 있는 이주진이 물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라는 말이 치밀었으나, 우영찬은 온화하게 둘러댔다.
“그건 비밀.”
“왜?”
“원래 진짜 이루고픈 소원은 비밀로 하는 거다.”
‘오오올’, ‘우와’ 따위의 의미 없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무난하게 대답한 듯싶었다.
1라운드가 끝나기까진 아직 세 명이 남아 있었다. 한호성은 다음 차례인 이주진에게 노트북을 넘겼다.
***
워낙 웃음이 많은 탓에, 이주진은 제논의 포스팅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설이태는 운이 나빴다. 하필이면 A4 용지 한 면을 가득 채울 만한 분량의 포스팅이 걸린 것이다. 설이태는 중간까지 잘 읽다가, ‘나는 콘크리트 밀림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 재규어.’라는 대목에서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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