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
금일은 음악 방송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프로그램 자체는 느지막한 시간에 시작되지만, 이를 준비하기 위해선 이른 시간부터 움직여야 했다.
하이파이브는 졸린 눈을 비비며 숙소를 나섰다. 막 밴에 탄 그때, 한호성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어, 대표님께 전화 왔네. 뭐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옆자리에 앉은 문해일이 물었다. 무슨 용건인지 알 것 같아, 한호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아닐 거야.”
한호성은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저편에서 잠이 덜 깨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호성아. 선배 통해서 답 왔다.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참 신기한 노릇이야.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던데.
“……정말요?”
긍정적인 대답인데도 얼떨떨했다. 그쪽 입장에선 자신이 수상해 보일 텐데, 이렇게나 흔쾌히 만나자고 하다니.
-그러게나 말이다. 선배도 그렇고 나도 깜짝 놀랐지 뭐냐.
“아. 동생분 일 때문이라고 말씀드려서 그런가 봐요.”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던데. 우 전무가 너를 알고 있대.
“저, 저를요? 어떻게요?”
자신의 멍청한 짓이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었던 걸까. 어째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듯싶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혹시 원래 알던 사이야?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냥 그날 방송국에서 몇 마디 나눴을 뿐이에요.”
-그래? 아무튼 네가 바라던 대로 돼서 다행이다. 참, 그런데 문제가 있어. 이분이 오늘 저녁 10시밖에 시간이 안 된다는데. 괜찮겠어? 사내 사무실로 오면 된다는데, 음방 촬영 마치고 달려가면 좀 빠듯하지 싶어서.
“괜찮을 것 같은데요.”
쉴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가는 것 자체는 문제도 아니었다. 아마 자신보다 더 바쁘면 바빴지 한가하진 않을 사람이었다. 시간을 내 줄 때 만나야만 했다.
“괜찮을 것 같은 게 아니라 괜찮아요, 대표님. 촬영 마치는 대로 바로 갈게요.”
-그래, 내가 이야기 전할게. 그럼 오늘도 수고하고.
“네. 들어가세요, 대표님.”
늘어지는 하품 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한호성은 곧바로 우영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너희 형이랑 연락됐대
[나] 오늘 저녁 10시에 사내 사무실에서 직접 만나 이야기하기로 했어
우영찬도 뒷자리에서나마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지, 곧장 답장이 돌아왔다.
[제논] 형이 웬일이지
[제논] 아무튼 잘됐네
[제논] 나도 오늘은 남은 스케줄 없으니까
어느새 프로 아이돌답게 제 스케줄쯤은 외우고 다니는 우영찬이었다. 그의 변화에 감탄하며 한호성은 답장했다.
[나] 너도 갈 거야?
[제논] 당연하지
[제논] 내가 안 가면 어떻게 상황 설명하려고
[제논] 우리 그룹 멤버의 몸에 댁네 동생이 빙의했어요, 그러려고?
[나] 아니 당연히 안 그럴 거긴 한데...
[나] 네가 사고 칠까 봐 그렇지
[나] 처음 빙의했을 때처럼...
하여간에 우영찬이 자신의 빙의 사실을 밝힌 후 상황이 좋게 풀린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일이 잘못된다면 정말 난감해질 터다.
[제논] 내가 애냐
[제논] 사고치게
[제논] 됐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알았어 (웃는 이모티콘)
하긴, 형제간이니만큼 무언가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성한은 우영찬과 말을 섞자마자 그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호성은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큰일을 하나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렸는지, 아침잠이 솔솔 밀려들었다.
***
여러 아이돌 그룹이 출연하는 만큼, 음악 방송의 대기실은 사교장이나 다름없었다.
아는 사람끼리 인사를 나누고, 친한 사이는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모습으로 선배 그룹에게 인사를 돌리고 다니는 후배 그룹도 있었다.
한호성도 친분이 있는 몇몇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때, 누군가 예고도 없이 호성의 등짝을 후려쳤다.
“한호성!”
누가 이런 무례한 짓을 하나, 돌아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킬러보이스의 채현수. 그를 알아본 한호성은 순간적으로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
“오랜만이다, 야!”
“……그러게.”
“오, 더 잘생겨졌는데? 샵을 바꿨나? 아니면…….”
말끝을 늘이는 게 의뭉스러웠다. 한때 불법 성형 루머 때문에 곤욕을 치른 까닭에, 한호성은 ‘혹시 성형했냐?’ 따위의 함의를 품은 말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곤 했다.
“아니면, 왜?”
“잘나가는 만큼 열심히 관리하나 했지. 하긴 뭐, 잘나가는 애들은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얼굴에서 빛이 나더라.”
그조차도 왠지 비아냥거림 같았다. 한호성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응수하지 않았다.
사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었더라면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한호성은 채현수에게 유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즘 바쁘냐?”
“응, 바쁜 편이야.”
“그렇겠지. 그래도 잠깐 친구 만날 시간쯤은 있지?”
채현수가 한호성의 목에 팔을 둘렀다. 오랜만에 만난 절친한 친구에게 하듯이. 한호성은 그의 팔을 풀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아 그럴 수 없었다.
“한호성.”
익숙한 목소리에 한호성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우영찬이 제 곁에 서 있었다.
“어, 제논아. 왜?”
“데리러 왔다. 너무 오랫동안 안 오길래.”
자신이 그렇게나 오래 자리를 비웠나, 싶었지만 잘됐다. 이 핑계로 채현수와 떨어질 수 있을 테니.
그러나 채현수는 어깨동무를 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우영찬에게 눈을 부라리는 것이었다.
“‘한호성’? 말이 짧네. 야, 호성아. 너희 애들은 원래 이러냐?”
“…….”
“뭐, 같은 그룹 멤버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위아래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위아래는. 어떻게 생각하냐?”
마지막 질문은 우영찬을 향한 것이었다.
우영찬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채현수와 한호성을 번갈아 보았다.
오랫동안 안 오길래 데리러 왔다는 건 당연히 핑계였다. 한호성이 웬 남자에게 안겨 있어 무슨 일인가 싶어 왔는데, 생각보다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불편해하는 거 아닌가, 지금?’
좋게 말하면 착하고, 나쁘게 말하면 호구 같은 한호성이 상대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은근히 드러내는 중이다. 어깨동무하고는 있지만, 피부가 닿는 것조차 싫다는 듯 최대한 몸을 웅크린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찌질한 새끼긴 하군.’
가진 거라곤 나이와 연차밖에 없기에, 그걸 무기로 후배를 괴롭히는 인간상이다. 그 외 내세울 만한 성과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우영찬의 눈빛에 가소롭다는 기색이 배어 나왔다. 그것을 알아차린 채현수가 벌컥 성냈다.
“야. 넌 아주 선배가 만만한가 보다? 언제 인사하는지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끝까지 입 꾹 닫고 있네?”
“내 인사가 받고 싶다면 먼저 인사하든가.”
“……뭐?”
채현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필이면 눈자위에 붉은 섀도를 짙게 바른 그였기에, 꼭 놀란 귀신 같은 얼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쳐다보기 거북스러울 정도라 우영찬은 고개를 돌렸다.
“허, 참. 네가 많이 뜨기는 했나 보다. 좀 잘나간다고 선배를 무시해?”
“그만하자.”
상황이 과열될 조짐이 보였다. 결국 한호성이 나서 두 사람을 중재했다.
“채현수, 미안하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그리고 제논. 넌 이리 와 봐.”
한호성은 어깨에 묻은 낙엽을 털어 내듯 채현수의 팔을 치우며, 우영찬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에서 채현수가 다급히 외쳤다.
“야! 나 얘기 아직 안 끝났어! ……한호성, 내 연락 받아라. 알겠지? 온스타 DM 보내 뒀으니까 확인해!”
한호성은 대꾸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슬쩍 바라본 그는, 턱 근육이 불거지도록 이를 앙다문 채였다. 우영찬으로선 처음 보는 화난 표정이었다.
‘한바탕 잔소리할지도 모르겠군.’
귀찮게 됐다 싶었다. 쯧, 혀를 차며 우영찬은 다시금 한호성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처럼 흐린 표정에, 우영찬도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어째서인지 저마저 기분이 좋지 않았다.
***
“형, 왔어?”
“……어? 무슨 일 있었어?”
‘HIGH-5’라고 쓰인 대기실에 들어서자, 다른 멤버들이 한호성을 맞이했다. 워낙 평소 표정이 밝은 한호성이기에 모두가 그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채현수 만났어.”
“뭐?”
“형이 채현수를 왜 만나?”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 중에 채현수가 왔어.”
한호성의 대답에, 문해일이 대신 화를 냈다.
“낯짝 두껍기가 무슨 돼지 오겹살 수준이네. 상식이 있다면, 형이 먼저 만나자 했더라도 그놈이 피해야 하지 않나? 쪽팔림이란 걸 안다면 말이지.”
“채현수 원래 사람 급 따지면서 만나기로 유명한 애잖아.”
“쪽팔린 걸 감수하고라도 형한테 친한 척하고 싶었나 보네.”
설이태와 이주진이 한 마디씩 얹었다. 듣자 하니, 자신만 빼고 다들 채현수라는 놈을 익히 아는 모양이었다.
우영찬은 제일 만만한 이주진에게 물었다.
“채현수가 누구인데?”
“예전에 친했던 친구.”
대답은 한호성에게서 돌아왔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애야. 그래서 마주칠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친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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