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혹시 키 커? 목소리도 좋고?”
“어. 우리 집 인간들이 다 장신이어서. 형도 190cm 넘을걸. 그리고 목소리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나쁜 편은 아닌 것 같다.”
우영찬의 형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호성은 우영찬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1분여 동안 침묵한 후,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한호성은 아랫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만약 그 남자가 정말 우영찬의 형이라면, 자신은 얼마나 아쉬운 기회를 날려 보낸 것인가.
아니, 이제 와 후회할지언정 그 남자가 우영찬의 형인 편이 나았다. 그래야 우영찬의 가족에게 연락할 실마리라도 붙잡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혹시 네 형 SNS 아이디 알아? 사진 보고 확인하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아서.”
“사진이라면 아무 포털 사이트에나 검색하면 나올 거다. ‘강문 전자 우성한 전무’라고 쳐 봐.”
“……우성한 전무?”
기시감이 드는 호칭에, 설마 싶던 마음이 확신으로 기울었다. 한호성은 즉시 핸드폰을 꺼내 검색했다. 그리고 한 인터넷 기사에서 그의 사진을 찾은 순간, 확신은 증거를 얻었다.
“이, 이 사람 맞아. 아니, 이 얼굴로 배우 지망생이 아니라니…….”
“지금 그게 중요해? 네가 엔터사 사장이냐, 인재 놓쳤다고 아쉬워하게?”
우영찬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그리고 넌 평소에 경제지도 안 보냐? 나는 몰라도 우리 형 정도는 알아야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간인데!”
“난 모를 만한 사람인가 보지……. 그리고 너도 평소에 연예지 안 보잖아. 마찬가지 아닌가, 뭐…….”
한호성의 목소리가 잦아들어 갔다. 잘못한 게 없다는 것쯤은 자신도 알지만, 우영찬의 말마따나 평소 경제지라도 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영찬이 거친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어쨌든 잘 됐다. 안 그래도 집에 어떻게 연락해야 하나 싶었는데. 형 만난 곳이 어디라고?”
“HBS 보도국. 대표님의 선배님 사무실이었어.”
“그럼 장 대표가 연락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우영찬은 망설임 없이 녹음실을 나섰다. 한호성은 황급히 그를 뒤따랐다.
“어디 가?”
“장 대표 만나러.”
“이왕이면 ‘장 대표님’이라고 해 줄래?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사무실로 쳐들어가면 안 되지!”
한호성은 우영찬을 만류했으나, 지금의 그는 돌풍 같아서 막을 수 없었다.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최선이었다.
어째 일이 복잡해질 성싶은 예감에, 한호성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퇴근하셨을 텐데.”
“그건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한호성은 우영찬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2층에 도착하자마자 우영찬은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호성은 내심 장 대표가 퇴근했길 바랐으나, 그는 사무실에 있었다.
똑똑. 힘찬 노크 후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자, 장 대표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 김제논이. 무슨 일이냐?”
“우성한 전무와 연락할 수 있나?”
다짜고짜 내뱉은 본론에, 장 대표가 한호성을 바라봤다. 제논과는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네가 무슨 일인지 설명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아까 방송국에서 만난 분, 강문 전자 우성한 전무님 맞죠?”
“어어. 그런데 네가 우 전무는 왜?”
“만나 뵙고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요. 혹시 연락할 수 있을까요?”
“허…….”
장 대표는 거한 한숨을 내쉬었다.
“뭣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안 돼. 아니, 안 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야. 나도 선배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뵈었을 뿐이니까.”
“그 선배가 다리를 놓아 주면 되지 않나.”
한호성은 우영찬의 옆구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말본새가 저래서야 해 줄 것도 안 해 주게 생겼다.
“대표님, 부탁드릴게요. 저희에게 중요한 일이어서 그래요.”
“아니, 그게…….”
장 대표가 곤란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제논만이었더라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터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호성이 이유 없이 저런 부탁을 할 리 없었다.
“선배도 소개해 줄 수 없을 거야. 사적인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잠깐,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인걸. 개인적으로 연락해 봤자 그쪽에서 받아 줄지나 모르겠다.”
“대표님…….”
한호성은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우영찬을 은근슬쩍 제 뒤로 숨기며 말했다.
“꼭 부탁드려요. 아까 차에서 말씀하셨잖아요, 팍팍 밀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지원해 준다손 치고 딱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이렇게 상대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화법이 건전하지 않다는 것쯤은 한호성도 알았다. 장 대표에게 미안해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호성은 청탁을 무르지 않았다.
“……연락은 해 보겠지만…….”
은근한 대치 끝에 장 대표가 입을 열었다. 수락이나 마찬가지인 말이었다. 한호성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역시 대표님밖에 없어요.”
“벌써부터 좋아하진 말고. 아마 연락되지 않거나, 되더라도 안 만나 줄 테니까.”
“동생분 일 때문이라고 말하면 만나 주실 거예요.”
“동생분?”
장 대표의 눈빛이 대번에 예리해졌다.
“설마 제논 때문에 그러냐? 김제논이 아직도 자기가 강문 4세라고 우겨?”
“나는……!”
“아니, 그건 아니고요.”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불뚝거리는 우영찬을 한호성은 온몸으로 막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게 이런 걸까. 앞에는 장 대표의 탐색하는 시선, 뒤에는 흥분한 호랑이 같은 우영찬이 있으니 사이에서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용건이 있어서 그래요. 아까 화장실에서도 잠깐 마주쳤는걸요. 말도 몇 마디 나눴어요.”
어째 변명하면 할수록 구차해졌다. 잠시 대화했다는 것만으로 대기업 전무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속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절 기억할지도 모르고…….”
전무씩이나 되는 회사원에게 소속사가 어디냐고 물은 멍청이로 말이다. 한호성은 뒷말을 삼키며 장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알았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겠지. 선배한테 연락해 볼게.”
“네, 대표님. 감사합니다.”
한호성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우영찬을 돌아봤다. 그의 눈치에 우영찬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장 대표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 더 도와줄 건 없고?”
“지금은 괜찮아요. 혹시 또 부탁드릴 일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럼 들어가 봐라.”
장 대표는 사무실을 나서는 두 사람의 등에 대고 외쳤다.
“너무 기대하진 말고!”
“네.”
한호성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뚝 끊겼다.
“우영찬, 너 진짜……!”
“왜?”
“왜냐니? 그걸 말이라고 해?”
팬들에게 하는 걸 보면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더 괘씸했다. 잘할 수 있으면서도 장 대표에게 무례하게 굴었으니 말이다.
“대표님께 뭐 맡겨 놨어? 아무리 마음이 바빠도 그렇지, 부탁하는 처지에 그렇게 목이 뻣뻣하면 안 되지!”
“…….”
저도 잘못한 걸 아는지 입을 굳게 다문다. 지적을 불쾌해하는 기색이 물씬 풍겼으나, 한호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랐다.
“너, 결과가 어떻든 다음에 대표님 뵈면 감사하다고 제대로 인사해. 말도 반토막 내지 말고. 알았어?”
“……어.”
“약속했어. 잘하는지 두고 볼 거야.”
“그러든가.”
대답에 성의라곤 없었다. 한호성은 우영찬을 대놓고 흘겨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잘 처신할 수 있으면서 그러지 않는다니. 우영찬은 대체 왜 이렇게 무람없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성한 대표와 만날 가능성이 생겨 다행이었다.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아예 연락할 방도가 없던 이전에 비하면 희망적이었다.
“……네 형이 우리 얘기를 들어 주면 좋겠다.”
그러면 우영찬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이니. 대신 하이파이브의 활동엔 차질이 생기게 될 것이다. 호성은 벌써 앞일이 염려되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이람.’
이 상황을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자신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자신을 나무라며, 한호성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내리눌렀다.
***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영찬, 그의 형, 그리고 제논. 한호성은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상념을 떠올리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심력 소모만 하는 것 같았다. 경험상 이럴 땐 억지로라도 고민의 고리를 끊어야만 했다.
‘라방을 켤까?’
무언가 기분 전환할 거리가 필요했다. 라이브 방송이 제격일 듯싶었다. 팬과의 소통에 집중하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니 말이다.
마음을 정한 한호성은 준비를 시작했다. 머리칼을 대강 다듬고, 얼굴 상태도 확인한 후 그는 삼각대에 핸드폰을 세팅했다. 파자마 차림인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숙소에서 잘 차려입기도 어쩐지 머쓱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반기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한호성은 라이브 방송을 켰다. 늦은 시간에 예고도 없이 연 방송임에도 시청자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한호성은 빠르게 늘어나는 시청자 수를 보며 내심 뿌듯해했다.
‘난 역시 성과에 집착하는 성격인가 봐.’
작년보다 제곱으로 늘어난 시청자 수를 보자, 찌뿌둥하던 기분이 단번에 좋아졌다. 숫자로 보이는 저 한 명, 한 명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악성 팬도 섞여 있겠지만 그 또한 관심의 일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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