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후우.”
그들과 헤어진 후, 장 대표가 이마를 훔쳤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몰라도 긴장깨나 한 듯싶었다.
“미안하다.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자. 가뜩이나 피곤할 텐데.”
한호성은 장 대표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보도국은 전체적으로 조용해서 사담을 나눌 분위기가 아니었다. 말 한마디 없이 걸음을 옮기는데, 화장실 표시판이 눈에 띄었다.
“대표님, 저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요.”
“어어, 그래라. 그럼 내가 차 빼고 있을까? 그게 편하겠지?”
미리 차를 빼나 마나 별 차이 없을 듯싶었으나 한호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면 장 대표 마음대로 하는 편이 나을 테니.
한호성은 볼일을 본 후 세면대로 걸어갔다. 손을 씻고자 수돗물을 트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이 쾌적하고 밝은 방송국 화장실에 갑자기 그림자라니. 웬일인가 싶어 시선을 돌리니, 옆 세면대 앞에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조금 전에 본 그 남자였다.
솨아아아아…….
남자가 수도꼭지를 올리자 물이 시원하게 쏟아졌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한호성은 얼른 고개를 바로 했다.
‘손이나 씻어야지, 나도.’
물비누로 거품을 내 손을 문질러 닦으며, 한호성은 자신의 실답잖음을 반성했다. 평소엔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봐도 흘깃거리지 않는데 오늘따라 왜 이럴까.
아마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분위기 때문이지 싶었다. 상대를 압도하는 묵직한 분위기에, 괜스레 쭈그러드는 한편 흥미가 일었다.
‘저런 게 배우의 아우라라는 거겠지.’
먼저 용무를 마친 남자가 세면대를 떠났다. 보폭이 큰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한호성도 손 씻기를 마쳤다.
“어?”
막 화장실을 나서기 직전. 세면대 위에 놓인 핸드폰이 시야에 걸렸다.
그 남자의 핸드폰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호성은 핸드폰을 챙겨 든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가 화장실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곧 따라잡을 수 있을 터였다.
“저기……!”
과연, 화장실을 나서자마자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는 거리가 꽤 있었지만 못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기, 전무님.”
왜 그를 ‘전무님’이라고 불렀는지는 한호성조차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한호성을 돌아보았다.
“핸드폰을 떨어뜨리신 것 같아서요.”
그는 말없이 한호성을 내려다봤다. 어째 예상과 다른 상황에, 한호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 핸드폰 주인이 아니신가요?”
“제 것 맞습니다.”
그제야 남자가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감사 인사 한마디 없는 태도를 평소였더라면 조금 무례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한호성은 그의 목소리에 주의가 팔린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역시 아까 들은 목소리는 이 남자였구나.’
소소한 궁금증이 풀려 후련했다. 한호성은 남자에게 꾸벅 인사한 후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남자도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
남자도 방송국을 나서는 중인 듯싶었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출입구는 하나기에 가는 길이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출입구에 다다르기까지 남자와 나란히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색한 분위기에 한호성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남자는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한호성은 왜인지 모르게 그가 신경 쓰였다.
“저…….”
결국 호성은 입술을 뗐다.
“혹시 소속사가 어디세요?”
남자는 호성을 돌아보았으나 그뿐이었다. 과묵한 인상답게 그는 말이 없었다. 자신을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해, 한호성은 제 소개부터 하기로 했다.
“저는 소소리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에요. 하이파이브…… 혹시 아세요? 거기 멤버인데.”
“…….”
“어디 엔터사 소속이신지 궁금해서요.”
“그런 거 없습니다.”
한호성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직 소속사 선택을 안 하셨어요?”
“…….”
“그럼 데뷔 전이시겠네요.”
“굳이 말하자면 그렇겠군요.”
“그러시구나…….”
소속사들이 이만한 인재를 못 본 체할 리 없으니, 필시 여러 소속사를 후보로 두고 고민하는 중일 것이다.
“저, 그럼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우성한입니다.”
“와, 이름과 이미지가 잘 어울리세요. 예명인가요?”
“아뇨, 본명입니다.”
“예쁜 이름이네요, 흔하지 않아서 기억에도 잘 남겠어요.”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출입구에 도착했다. 한호성은 남자와 함께 보안대를 통과했다. 유리 회전문 너머로 장 대표의 차가 보였다.
“저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방송국에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한호성은 남자와 작별한 후 차를 향해 뛰어갔다.
‘방송국에서 뵐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연예인 지망생에게 으레 하는 덕담이지만, 이 경우엔 정말 그렇게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것도 가까운 시일 내로 말이다. 대한민국 연예계의 수준 상향을 위해서라도 남자는 어서 데뷔해야만 했다.
5. Brother
올해 들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이젠 노를 젓느라 지쳐 나가떨어질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물이 콸콸 넘쳐흐르는데 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하이파이브는 ‘여름, 찰칵!’의 뒤를 이을 신곡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곡은 좋아. 다 좋은데, 준비 기간이 너무 빠듯해서 괜찮을까? 안 그래도 우리 요즘 엄청 바쁘잖아.”
이주진의 말에, 양옆에 앉은 문해일과 설이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호성도 곤란스레 대답했다.
“그러게. 지지난 달만 하더라도 우리가 이 정도로 바빠질 줄은 몰랐지.”
원래 계획은 ‘여름, 찰칵!’을 공개한 지 6주 후에 디지털 싱글을 발매하는 것이었다. 곡 자체는 ‘여름, 찰칵!’과 동시에 받아 얼추 익힌 상태였으나, 곧바로 활동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우영찬이…….’
한호성은 멤버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우영찬을 바라보았다.
우영찬과 제논의 불안정한 상황도 위험 요소였다. 만약 신곡 발표 당일 우영찬의 빙의가 풀린다면, 대형 사고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극단적인 가정이나 영 가능성 없는 일도 아니었다.
‘계속 잘 활동해 줄지도 모르겠고.’
정산도 못 받으면서 소처럼 일만 하는 우영찬이었다. 비록 자신이 나중에 정산해 줄 테지만, 그는 정산금을 ‘푼돈’이라 칭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즉, 우영찬에겐 의욕을 낼 동기도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런 우영찬에게 새로운 일을 시키기도 미안한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우영찬과 진지하게 대화해 봐야 할 듯싶었다.
“얘들아. 나 제논이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쉬고 있을래?”
“어.”
“다녀와.”
다행히 멤버들은 무슨 사정인지 궁금해하지조차 않았다. 원래도 별별 문제로 한호성과 상담하는 경우가 잦던 제논이기에,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생각하는 눈치였다.
정작 우영찬은 자신만 콕 집어 부른 게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는 한호성을 따라 연습실을 나서자마자 물었다.
“왜.”
“우리 활동에 대해서 얘기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음, 누가 들으면 좀 그러니까 녹음실로 가자.”
회사 건물 3층에 작게나마 녹음실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한호성은 우영찬과 한담을 나눴다.
“오늘 촬영은 어땠어?”
“…….”
“왜 말이 없어.”
“됐어. 나중에 광고 나오면 그때 확인하든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에 함께 올라타 3층 버튼을 누르는데, 우영찬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어땠는데.”
어색한 말투였다. 안부를 묻는 게 멋쩍은 모양이었다. 그런 우영찬이 어린 동생처럼 느껴져, 한호성은 웃음을 삼켰다.
“좋았어. 애들이 정말 열심히 하더라. 어른보다 오히려 집중력도 좋은 것 같고, 열정적이어서 나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넌 덜 열정적이어도 된다. 그리고.”
“그리고? 어, 촬영이 일찍 끝나서 보도국 가서 가볍게 구경하고…….”
그걸 ‘구경’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배우 지망생을 만나고 왔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지 않을까.
“아, 그리고 오랜만에 진짜 잘생긴 남자 발견했어.”
“……말투가 어째, 어디 클럽에서 재미라도 보고 돌아온 사람 같군.”
“어?”
돌이켜보니 확실히 불건전한 뉘앙스긴 하다. 한호성은 우영찬을 녹음실로 밀어 넣다시피 하며 변명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이 일을 하다 보면 잘생긴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잖아. 미의 기준이 엄청나게 높아지다 보니 웬만한 사람을 봐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
“근데 그 남자는 잘생겼다?”
“응. 심지어 목소리까지 좋더라고.”
“……흠.”
“이름도 멋있었는데. 뭐였더라……. 아, 우성한이었다.”
일없이 방음벽을 툭툭 건드리던 우영찬이 확 뒤돌아보았다.
“이름이 뭐라고?”
“우성한. 왜?”
“…….”
“어, 그러고 보니 너랑 성이 똑같네?”
우영찬, 우성한. 이름의 초성은 다르지만 어감이 꽤 비슷하다. 우씨가 흔한 성은 아니니, 만약 돌림자였더라면 인척일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형 이름인데.”
“너희 형 이름도 우성한이라고?”
“그래.”
우영찬이 떨떠름하게 내뱉었다.
“형도 봐줄 만하게 생겼어.”
통상적인 형제 관계를 감안하면 저건, 상당히 잘생겼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어디 형제끼리 외모 칭찬을 주고받던가. 한호성 자신도 남동생이 있기에 아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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