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호성아, 미안하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너 꼬셔서 데려왔잖아. 근데 팍팍 밀어주긴커녕 네 덕만 보고 있으니까. 애초에 넌 우리 회사 같은 곳에 있을 인재가 아닌데……. 내가 괜히 꼬드겼지, 그때.”
“에이, 무슨 그런 순진한 연하 꼬셔서 결혼해 놓고서 한량 짓만 하는 남편 같은 말씀을 하세요. 저 그때 어리긴 해도 충분히 사리 분별할 수 있는 나이였어요.”
장시현은 본래 블루길 엔터테인먼트의 중역이었다. 높은 직급만큼이나 성과도 대단했지만, 사내 정치에서 밀려 퇴사한 후 소소리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직후 블루길 엔터테인먼트가 도산했다. 장시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블루길 소속 연예인과 지망생에게 계약을 제의했는데, 그중 한 명이 한호성이었다.
“저도 대표님 회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계약한 건데요. 솔직히 달리 갈 곳도 없었고…….”
“갈 곳이 없다니. 너 오라는 곳 꽤 많았던 걸로 아는데?”
“소소리 엔터보다 좋은 곳은 없어서 안 갔어요.”
“하하, 그래?”
실은 중형 엔터테인먼트 몇몇 군데에서도 이적을 제안받은 바였다. 장 대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한호성은 그냥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 현재 진행형으로 잘되고 있는데 구태여 과거 일을 들출 필요는 없을 터이니.
“어쨌든 이렇게나 번듯하게 잘됐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역시 보석은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 법이라니까. 그런데 호성아,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거 알지?”
“그럼요.”
대중의 호감 어린 시선이 따가운 눈초리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는 지금, 사소한 실수조차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했다.
“조심하는 거라면 자신 있어요. 저 믿으시죠, 대표님?”
“그럼, 당연히 믿지. 믿는데 그냥 해 본 소리야.”
방송국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장 대표는 그 방향을 향해 시원하게 액셀을 밟았다.
“참, 나 아는 선배가 보도국에서 일하고 있거든? 오랜만에 시간이 맞아서 방송국 들르는 김에 얼굴 한번 보기로 했다. 촬영 중에 자리 비울 테니까 나 안 보여도 놀라지 말고.”
“알았어요.”
어차피 촬영 중엔 매니저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스태프들이 살뜰히 챙겨 주는 덕분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엔 스태프한테 무시당하기도 했는데.’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없는 일 또한 아니었다. 인기 없는 아이돌의 설움을 곱씹은 한호성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새로이 깨달은 성공의 특징 네 번째. 성공의 맛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
***
병아리 같은 아이들과 함께 목소리를 맞춘 지 두 시간째. 성인의 기준으론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어린이의 기준으론 긴 시간이었다. 그런 까닭에 ‘천사들의 하모니’는 타 프로그램보다 촬영 시간이 짧은 편이었다.
“선생님 오빠!”
올해 아홉 살인 여자아이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호성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오늘도 노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맑은 눈망울로 올려다보며 하는 말에, 가슴에 다홍빛 물감이 번진 양 기쁨이 퍼져 나갔다. 한호성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도 같이 노래 불러 줘서 선생님도 고마워요. 푹 쉬고, 잘 지내다 다음 주에 또 만나요.”
“네. 선생님도 푹 쉬세요.”
영구치도 다 안 난 입으로 어쩜 저리도 또박또박 말하는지 모르겠다. 다시금 애정 어린 손길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서, 한호성은 걸음을 옮겼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메시지가 꽤 쌓여 있었다. 그중 대부분이 하이파이브 단체 대화방이었다. 이주진이 카페 아르바이트생으로 분한 제 셀카를 찍어 올리고, 촬영 현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했다.
[이주진] 나만 자꾸 NG냄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
[이주진] 쪽팔렸어
[이주진] 대본 리딩 땐 잘했는데 왜 자꾸 실수하는 거지....
[설이태] 긴장해서 그런가 보다
[설이태] 원래 한번 실수하면 당황해서 계속 실수하게 되잖아
[이주진] 첫 촬영부터 나만 너무 못한 것 같아...ㅠ 안 그래도 나만 아이돌 출신이라 신경 쓰이는데
[이주진] 다음 촬영은 잘할 수 있겠지...?
[문해일] 냉장고에 넣어둔 닭가슴살 먹은 거 누구임
[문해일] 그거 후추 뿌려서 숙성시키던 중이라 지금 먹으면 안 되는데
[설이태] 아 미안 그거 나야
[설이태] 맛있더라
[이주진] 형.. 지금 닭가슴살이 중요해?ㅠㅠㅜ
[이주진] 나야 닭가슴살이야
[문해일] 닭가슴살
우영찬에게서 온 1:1 메시지도 있었다.
[제논] 내가 두 번 다시 예능 나가서 입 놀리면 개다
짧지만 굵은 메시지를 본 한호성은 큭큭 웃었다. 오늘도 광고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또 ‘어른이 놀이터’와 관련된 컨셉이었나 보다. 사실 이건 우영찬이 자초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한 방송에서 명대사를 두서너 개나 날렸으니 말이다.
‘수고했어ㅎㅎ’
한호성은 귀여운 이모티콘을 곁들여 답장했다.
그 외에는 노원이 걸어 온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한호성은 그에게 ‘시간 괜찮으면 밤에 전화할게’라고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오늘따라 연락이 많이 왔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호성은 장 대표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장시현 대표님] 호성아
[장시현 대표님] 여기 일이 생겨서 나 아직 보도국이거든?
[장시현 대표님] 미안하지만 카페에서 좀 쉬고 있을래? 아니면 보도국 구경할 겸 와도 좋고
한호성은 잠시 고민하다 ‘그럴게요’ 하고 답장했다. 이번 기회에 보도국에 가 보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뻔질나게 방송국을 드나드는 자신도 아직 보도국은 가 본 적 없으니 말이다.
마침 촬영이 예정보다 일찍 끝난 덕분에 시간도 여유로웠다. 한호성은 장 대표가 보내 준 사무실 주소를 확인하며, 보도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보도국은 예능국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두 부서가 같은 건물에 자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세미 정장 차림의 직원들이 한호성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이답게, 아이돌을 보았음에도 놀라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다. 아무도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데도 한호성은 머리칼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너무 튀나?’
자신은 옅은 갈색의 염색모였다. 아이돌 중에서는 튀긴커녕 얌전 그 자체인 헤어스타일인데, 회사원 사이에선 그렇지만도 않았다. 어쩐지 낯선 세계에 떨어진 듯한 기분에 한호성은 걸음을 재게 놀렸다.
파티션을 세운 책상을 몇 개나 지났을까. 장 대표가 일러 준 사무실이 가까워졌다. 아마 그의 선배라는 이의 개인 사무실일 듯싶었다.
“아.”
때마침 사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정장 입은 사람들이 줄줄이 나왔다. 키가 훌쩍 큰 남자 한 명과 중년인 넷,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난히 격식 없는 차림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장 대표였다.
“어, 호성아.”
한호성을 본 장 대표가 알은체했다. 자신의 염색모처럼, 사실 장 대표도 적당히 격식 갖춘 차림새이긴 한데 하필 주변이 모두 슈트 차림이라 문제다. 한호성은 그들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소소리 엔터테인먼트 소속 한호성입니다.”
“아, 장시현이가 얘기한…….”
남자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가 장 대표의 선배인 듯싶었다.
잠시 한호성에게로 시선이 쏠렸으나 그뿐이었다. 하던 이야기가 남았는지, 그들은 두런두런 대화했다.
“…….”
졸지에 남들 사이에 껴서 대화를 주워듣는 격이 되어 버려 조금 민망했다. 한호성은 시선을 슬쩍 돌리며, 주의를 일부러 흐트러뜨렸다.
“우 전무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영광이라니요. 아닙니다.”
일순, 중저음의 목소리가 귀에 확 들어왔다. 한호성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누가 말한 거지?’
청년의 것이라기엔 중후하고, 중년의 것이라기엔 젊은 목소리였다. 연령대가 도통 짐작 가지 않아, 세 남자 중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정말이지 근사한 목소리였다. 가수를 했어도 잘했을, 아니, 노래보다 무게감 있는 대사를 읊조릴 때 잘 어울릴 법한 목소리.
‘어, 혹시 배우인가?’
한호성은 키 큰 남자의 얼굴을 슬그머니 훔쳐보고서 생각했다. 남자는 180cm인 한호성이 올려다봐야 할 만치 키가 컸고, 이목구비가 조각처럼 뚜렷했다. 목탄으로 그린 듯 선이 굵은 미남이면서 단정한 느낌도 있었다.
‘신인 배우인가 보다.’
호성은 내심 단정 지었다. 저 마스크로 배우가 아닐 리가 없고, 데뷔한 지 오래되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영화든 드라마든 찍었다 하면 무조건 화제 됐을 테니 말이다. 설령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인기가 없더라도, 대중이라면 모를까 연예계 종사자인 자신은 얼굴을 알 법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전무라고 한 것 같은데.’
이 남자를 부른 호칭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남자는 전무 자리에 오르기에 한참은 젊어 보였다. 그러나 드라마 속에선 저 나이대의 전무도 심심찮게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럼 전무 역할로 데뷔한 신인 배우일까……?’
한호성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저 혼자만의 추측일 뿐이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예.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다음에 뵙겠습니다.”
드디어 대화가 끝났는지, 그들이 인사를 나누었다. 장 대표도 그 사이에 껴서 어색하게나마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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