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나만 믿어라. 만회해 줄 테니까.”
문해일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섰다.
양 팀 선수가 스타트 라인에 선 그때, MC가 씩 웃으며 끼어들었다.
“두 판이 남았군요. 만약 이번 판에서 도전 팀이 패배하면 2:4로 게임이 끝날 텐데, 문해일 어른이의 부담감이 상당하겠어요?”
“아, 부담감 같은 건 없습니다. 제가 이길 테니까요.”
“이야, 자신감이 대단한데요. 그럼 여기서 새로운 규칙이 추가된다면 어떨까요?”
“설마 ‘그’ 규칙인가요.”
문해일이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지난 방송을 시청해서 예의 규칙에 대해서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MC가 말했다.
“예. 지금부터는 양 팀에게 상대 선수를 방해할 기회가 총 세 번 주어집니다! 각 팀에서 네 명이 방해꾼으로 활동할 수 있는데요. 그러면 선수까지 총 열 명이 겨루게 되겠죠?”
한마디로 ‘어디 한번 재미난 난장판을 만들어 봐라.’라는 뜻이었다. 과연, 선수와 방해꾼이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하는 건 이 프로그램의 백미였다.
“알겠습니다. 각오했습니다!”
“저도 각오했지 말입니다.”
문해일의 상대인 남자 코미디언이 말했다. 그는 문해일 못지않게 키가 크면서도 근육질인 체격이었다. 방송에는 운동광 캐릭터로 출연 중인데, 실제로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까지 있었다.
“아시겠지만 방해꾼 역할도 만만치가 않아요. 모쪼록 안전하고 공정한 경기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예!”
하이파이브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
‘공정은 개뿔.’
우영찬은 수건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안전이라면 몰라도 공정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게 다 ‘방해 허용’이라는 규칙 때문이었다.
어른이 놀이단은 최선을 다해 문해일을 방해했다. 뿐인가, 세 번의 기회 중 한 번은 상대 선수를 방해하는 하이파이브를 방해하는 데 써먹었다. 방해하는 사람이 방해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꼴이라니.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예능 방송이니까 그런 거겠지만.’
스포츠 경기였더라면 레드카드가 날아왔을 법한 비열한 순간도 있었다. 물론 예능 방송엔 예능 방송만의 규칙이 있다는 것쯤은 우영찬도 알았다.
그래도 솔직히, 약이 올랐다.
경기에서 지고 싶어 하는 선수는 없다. 비록 프로 선수는 아니지만,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우영찬은 승리욕이 슬슬 돋아나고 있었다. 다행히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문해일이 승리를 거둔 덕분에 동점인 상황이었다.
“제논, 괜찮아?”
한호성이 우영찬의 상태를 살폈다. 정작 그도 피곤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상대팀에게 집중 마크를 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 너, 아니 형은.”
“나도 괜찮아.”
한호성이 보기보다 체력이 좋다는 걸 알고 있어 걱정스럽진 않았다. 우영찬은 저 멀리 자리한 외나무다리에 시선을 던졌다.
‘저게 문제란 말이지.’
설이태와 이주진도, 상대 팀도 저 외나무다리 때문에 줄줄이 탈락했다. 외나무다리에 비하면 앞선 놀이 기구는 몸풀기 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저기까지 가 보지도 못하다니…….”
“그게 마음 쓰여?”
혼잣말을 들은 한호성이 물었다. 우영찬은 그의 말을 무시하려다, 고개를 끄덕했다.
‘다시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는데.’
우영찬은 예리한 눈매로 세트장을 훑어봤다. 어떻게 해야 구름사다리를 효율적으로 건널 수 있는지, 안전 장비는 어떻게 착용하는 건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이 한 번 경험해 보기도 했고, 다른 이들의 플레이를 유심히 관찰한 까닭이다.
“다음 경기, 내가 나가고 싶다.”
아무래도 미련이 남았다. 이대로는 마음 편히 돌아가지 못할 듯해 한호성에게 말하자, 그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괜찮겠어? 너 아까 다리에 힘 풀려서 주저앉았잖아.”
“……그건 잊어.”
“아니, 그걸 어떻게 잊어. 너 부상한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곧바로 땅을 퍽퍽 내려치길래 괜찮은가 보다 싶긴 했지만…….”
굳이 안 해도 좋을 말을 덧붙이는 한호성이었다. 우영찬은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가 카메라를 의식하고 인상을 폈다.
“형은 작전 있어?”
“어? 작전? ……열심히 뛰는 거?”
“안 돼. 그래선 기껏해야 1점밖에 딸 수 없어.”
대화를 엿듣던 이주진이 쓱 끼어들었다.
“기껏해야 1점이라니. 어차피 1점짜리 경기잖아?”
“아니.”
어느새 문해일과 설이태까지 우영찬을 주목했다. 그는 힘주어 말했다.
“득점만으론 부족해. 난 그냥 이기고 싶은 게 아니라 압도적으로 이기고 싶은 거니까.”
“…….”
하이파이브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게 웃기려고 한 말인지, 진심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아니,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의욕적이었다고.’라고 따져 묻고자 입을 연 문해일은 말끝을 흐렸다. 사석이었다면 백 번도 더 물었겠지만, 지금은 촬영 중이다.
촬영. 새삼 그에 생각이 미친 문해일은 다른 멤버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뭔 예능을 저렇게 진지하게…….’
‘그래도 제논이 나가도 재밌지 않을까?’
‘어설프게 이기거나 질 바에야 와장창 깨지는 게 웃기긴 해.’
‘오늘 보니까 쟤가 몸 개그에 숨겨진 재능이 있더라고.’
우영찬과 달리 하이파이브는 승패보다 예능적인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만들어 가는 거야말로 진정한 승리라 할 수 있었다.
무언의 회의 후, 한호성이 대표로 말했다.
“그래. 그럼 마지막 경기는 제논이 나가는 걸로 하자.”
“좋아.”
“찬성!”
나머지 세 명이 잇달아 동의를 표했다.
우영찬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다른 멤버는 그렇다 쳐도, 문해일까지 자신이 마지막 주자가 되는 걸 찬성할 줄은 몰랐다. 제 뜻대로 되긴 했는데도 무언가 찜찜한 감이 있다.
어쨌거나 이왕 이렇게 된 것, 아까의 굴욕을 만회하면 될 일이다.
‘난 허무하게 패배하는 사람이 아니다.’
비록 제 몸을 잃어버린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기에 더더욱 자신다움을 유지하고 싶었다. 우영찬은 자신이 아는 자신답게 행동하기 위해 스타트 라인에 섰다.
***
탕!
우영찬은 신호탄이 울리기가 무섭게 달려 나갔다. 그는 빠르게 구름사다리를 건너며 선두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하이파이브로선 마음 놓고 응원할 수 없었다.
“또 처음부터 무리하다가 다리에 힘 풀리는 거 아냐?”
“그러게. 체력 배분을 잘해야 할 텐…… 어, 저기!”
어른이 놀이단이 우영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네 명 모두 에이스거나 그 다음가는 실력자였다.
하이파이브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들은 우영찬을 경호하기 위해 달려가며 외쳤다.
“벌써 방해하는 게 어딨어요!”
“크하하, 문해일 어른이, 순진한 소릴 하시네. 원래 이런 건 초장부터 기세를 꺾어 둬야 하는 법이지.”
“무, 무슨 그런 악당 같은 말씀을.”
“나쁜 어른들!”
이주진이 바락 외쳤다. 그러자 덩민이 받아쳤다.
“무지개 반사!”
“그, 그럼 난 안드로메다 반사!”
“블랙홀 반사! 블랙홀이 다 빨아들여서 내가 이겼어!”
“아니거든요? 안드로메다 반사가 이기거든요?”
이주진은 새근덕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프로그램의 취지가 ‘동심으로 돌아간 것처럼 신나게 놀아 보자.’인 만큼, 어찌 보면 그에 어울리게 행동 중인 두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같아.”
“요즘 초등학생은 저런 말 모를걸요.”
윤로희의 말에, 늦둥이 동생을 둔 문해일이 답했다. 그에 윤로희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거짓말. 나 때는 빅뱅 반사까지 있었는데……!”
“괜히 저희가 ‘어른이’겠어요.”
아래에선 말싸움이 벌어진 사이, 위에선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늑목에 오른 선수 둘을 방해하고자 양 팀 모두 달려드는 중이었다.
누군가 우영찬의 발목을 붙잡고자 손을 뻗었다. 우영찬은 그를 민첩하게 피하더니, 아예 늑목 아래로 몸을 날렸다.
“우, 아니, 제논!”
화들짝 놀란 한호성이 외쳤으나 그는 무사했다. 구르듯 착지한 덕분이었다. 짚라인을 향해 달려가는 그를 보며, 한호성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건 또 뭐지? 실수로 떨어져 구른 건가, 아니면 일부러인가?”
“실수는 아닌 것 같은데……. 낙법 아닐까?”
“낙법이라기엔 자세가 좀 허술해서.”
설이태의 평에 한호성도 반쯤은 동감했다. 반쯤은 동감하지 않는 이유는, 우영찬이 제 몸이기만 했더라면 정석적인 자세로 낙법을 구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영찬은 짚라인을 타고 물 찬 제비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설이태가 중얼거렸다.
“우린 인제 뭘 하지?”
“그러게…….”
상대측 선수도 짚라인을 타기 직전이었다. 방해할 기회가 두 번 남았지만, 거리가 너무 벌어져 손도 못 댈 듯싶었다.
한호성은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눈에 익은 금색 머리통이 보였다.
“……어? 저기 주진이 아냐?”
“그러게. 언제 저기까지 간 거지?”
다른 이들이 늑목에서 엉켜 싸우는 동안, 이주진은 짚라인이 아닌 육로로 외나무다리까지 뛰어간 것이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어른이 놀이단이 그리로 달려갔다.
“우리도 가자!”
가뜩이나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를 흔들어 대면 선수가 떨어지기 십상이다. 무엇보다도 외나무다리 쪽에 카메라맨이 모인 것이, 그리로 가야 한 컷이라도 더 찍힐 듯싶었다. 한호성은 설이태와 함께 열심히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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