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해일 형이 뒤처졌는데……!”
“아직 괜찮아. 외나무다리가 남았어.”
때마침 카메라가 외나무다리를 로 앵글(Low angle)로 보여 주었다. 강에 설치된 두 개의 외나무다리는 폭이 좁아, 삐끗했다간 그대로 넘어질 듯싶었다. 아마 그게 PD가 원하는 그림이기도 할 터였다.
“으롸아아아아아!”
덩민이 기합을 내지르며 외나무다리를 건넜다. 그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균형을 잡았다. 반면, 문해일은 정석적인 달리기 자세로 뛰었다.
“어머, 균형 잡는 거 좀 봐.”
“평균대 선수라 해도 믿겠네.”
어른이 놀이단이 감탄할 정도였다. 우영찬도 내심, 문해일의 활약에 놀란 터였다.
‘……못 하진 않는군.’
앞선 놀이 기구 때문에 지쳤을 법도 한데 문해일은 오히려 펄펄 날뛰었다. 그는 덩민과 거리를 좁히더니 마침내 역전에 성공했다. 문해일이 결승점에 들어온 순간, 하이파이브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형, 멋지다!”
“잘했어!”
첫 경기부터 득점이라니, 느낌이 좋았다. 한호성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몸을 풀었다. 다음 차례가 바로 자신이었다.
“얘들아, 1점 따고 올 테니까 잘 봐둬.”
저답지 않게 허세를 부리고서 한호성은 스타트 라인으로 향했다. 그 옆에 머리칼을 질끈 묶은 여자가 섰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잘 부탁해, 후배님.”
여자, 윤로희가 생긋 웃었다. 그는 본업이 가수인 까닭에 한호성과 안면이 있었다. 음악 방송 대기실에서 만났더라면 한담을 나눴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준비하시고…… 시작!”
탕, 신호탄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한호성과 윤로희가 구름사다리에 매달렸다.
‘진짜 크다.’
한호성은 구름사다리에 힘껏 매달려 생각했다. 멀리서 볼 때도 크게 느껴지더라니, 가까이서 보는 지금은 훨씬 크게 느껴진다. 길이도 길이거니와 높이가 보통이 아니다.
안전망이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떨어지면 가슴이 철렁할 것이다. 호기심에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 한호성은 얼른 시선을 올렸다. 까마득히 먼 땅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져서였다.
그사이 윤로희는 구름사다리를 다 건넜다. 어른이 놀이단의 에이스답게 몸이 무척 날랬다. 한호성도 지지 않고 윤로희를 뒤따랐다.
늑목에서는 한호성이 앞섰으나 짚라인에선 그가 뒤처졌다. 이제 외나무다리 건너기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후배님, 나 먼저 갈게!”
윤로희가 상큼하게 외쳤다. 한호성은 그를 따라잡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달리다, 퍼뜩 후회했다.
‘센스 있게 대꾸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런 멘트 따위 떠오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게임이 시작된 후 지금까지, 딱히 재밌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못한 듯싶었다. 게임에 몰입해서만은 아니었다.
‘난 역시 예능 타입은 아닌가 봐.’
한호성은 자신이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재미없는 편이 아닐까. 코미디언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재치 있는 친구 수준만 되어 줘도 좋을 텐데 그게 어려웠다.
때아닌 자아 성찰을 하면서도 한호성은 다리를 재개 놀렸다. 그때 옆에서 꺅, 비명이 들리더니 첨벙 소리가 잇달았다.
“푸하, 아, 거의 다 왔는데!”
강에 빠진 윤로희가 수면을 내리치며 아쉬워했다. 한호성은 그를 뒤로하고 결승점에 들어왔다.
“이겼어요!”
한호성은 카메라에 브이를 그려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라리 자신도 물에 빠졌더라면 더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예능감은 타고나는 거니까.’
그리 생각하니 아쉬움이 잦아들었다. 한호성은 즐기며 촬영하겠다는 초심을 곱씹으며, 대기 장소로 돌아갔다.
***
“제논, 파이팅!”
“이 기세로 쭉쭉 가자.”
“할 수 있다! 아자!”
우영찬은 하이파이브의 응원을 받으며 스타트 라인에 섰다. 그는 심드렁히 생각했다.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군.’
자신이 잘하는 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몸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알맹이는 여전하니 말이다.
김제국으로서 지내며 깨달은바, 음악적 재능이나 운동 신경은 타고난 대로와 거의 똑같았다. 아이돌의 성대로 노래를 부르는데도 썩 잘하지 못하는 게 그 일례였다. 그러니 본래의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김제국보다는 잘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을게!”
익숙한 목소리에 우영찬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호성이 손으로 확성기까지 만들어 보이며 자신을 응원하는 중이다.
“…….”
우영찬은 운동화 앞코를 세워 땅을 툭툭 두들겼다. 어째서인지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는 욕심이 치밀었다.
이윽고 신호탄이 솟아올랐다.
우영찬은 자리를 박차고 구름사다리에 매달렸다. 이 몸은 체력도 약하고 근력도 형편없었지만, 장점이랄 게 딱 하나 있었다. 바로 가벼운 몸무게였다.
‘무겁기까지 하면 최악이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군.’
우영찬은 김제국의 신체 조건을 십분 활용하여 구름사다리와 늑목을 가뿐히 지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빙의한 직후였더라면 이렇게는 못 했겠지만, 컴백을 준비하는 동안 체력이 붙은 덕분이었다.
-제논 어른이, 하강하기 전에 할 말 있습니까?
안전 장비를 착용하자 MC가 무전기를 통해 물었다. 순간 ‘나는 제논이 아닌 우영찬이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제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하이파이브의 평판을 망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하이파이브가 아닌 제 자존심 때문에라도 결심을 어길 순 없었다. 다만 조금, 아주 조금 미련이 있을 뿐이다.
-제논 어른이? 할 말 없나요?
“……아. 음, 할 말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시원하게 외쳐 주세요!
미처 할 말을 정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우영찬은 짚라인 손잡이를 불끈 붙잡고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외쳤다.
“나는 세균이 아니다!”
***
“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세균?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설이태가 황당해했다. 한편 어른이 놀이단은 폭소를 터뜨렸다.
“세균이라니! 으하하하.”
“그러고 보니 제균이 뮤비에서 세균 역할이었지?”
“오빠, 제균이 뭐야. 제논이잖아.”
“아! 죄송합니다, 전국의 클랩 여러분. 제가 그만 말실수를……!”
“제논도 세균이 아닌 치아 하고 싶었나 보네. 근데 솔직히 세균 역할이 너무 잘 어울렸어.”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에, 한호성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웃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영찬은 세균 역할이 그토록 싫었던 걸까.
‘아니, 동요 부르는 게 싫다는 뜻이겠지.’
이걸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르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한호성은 조마조마해하며 우영찬을 지켜보았다.
우영찬은 외나무다리를 향해 기세 좋게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어? 어어.”
“왜 갑자기 주저앉지?”
우영찬이 외나무다리를 앞두고 갑자기 주저앉은 것이다. 장애물도 없고, 발목을 삔 듯싶지도 않은데 참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그러자마자 도로 주저앉았다. 우영찬은 분을 못 이기고 땅바닥을 내리쳤다.
“이! 약해빠진! 몸뚱어리! 근육도 없고! 쓸모없어!”
급기야 제 다리까지 퍽퍽 때리는 우영찬이었다. 그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모니터에 전송됐다.
영상을 본 모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진심으로 답답해하는 그가 안쓰럽긴 한데, 솔직히 너무나 우스운 모습이었다.
그러는 동안 상대는 외나무다리를 끝까지 건넜다. 1:2, 어른이 놀이단이 처음으로 거둔 승리이자 하이파이브의 첫 패배였다.
한바탕 성질부리고서야 이성을 되찾은 우영찬이 대기 지점으로 돌아왔다. 하이파이브는 물론 어른이 놀이단까지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타깝습니다, 제논 어른이. 잘하다가 갑자기 넘어지다니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아, 앞에서 너무 열심히 하느라 체력이 닳았나 보군요.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다니, 그게 바로 스포츠 정신 아니겠습니까? 수고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며, 우영찬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한계까지’라니. 자신의 한계가 고작 이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우영찬이 아는 자신은 모든 종류의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가정 환경, 전공 등과 더불어 우영찬이란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특성 중 하나였다. 한데 몸이 바뀌며 그런 특성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수고했어.”
한호성이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으나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되레 갓 빙의했을 때만큼 착잡할 따름이었다. 자신을 통째로 잃어버린 듯한 기분에, 우영찬은 음울한 한숨을 삼켰다.
***
점수가 벌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우영찬에 이어 설이태, 이주진까지 패한 탓이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강에 풍덩 빠져 버린 이주진이 털레털레 돌아왔다.
“미안…….”
“아냐, 잘했어.”
한호성은 물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그의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그래도 강에 들어갔다 나오니까 시원하다, 헤헤.”
이주진이 해맑게 웃으며 티셔츠를 비틀어 짰다. 물이 주르륵 흐르며 그의 발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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