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어, 은발이다.’
누군가가 올린 한호성의 과거 사진에 우영찬은 스크롤을 멈췄다.
사진 속 호성은 머리칼을 은색으로 염색한 모습이었다. 분명 4집 앨범 때 찍은 사진일 것이다. 탈색을 잘 하지 않는 한호성이 웬일로 은발로 활동했을 때라, 상당히 귀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 사진은 우영찬이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장해야지.’
데뷔한 지 햇수로 9년 차인 아이돌을 덕질한다는 것은, 9년 치 떡밥을 소화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한호성의 공백기를 제외해도 6년이다.
평범한 사람의 6년 치 기록을 살펴봐도 그 양이 제법 될 터였다. 하물며 한호성은 바지런히 일한 아이돌이었다. 남이 찍은 사진도 많고, 본인이 찍어 올린 사진도 많은 덕분에 자료가 줄줄 흘러넘쳤다. 과거 사진이며 영상이 봐도 봐도 끝이 없을 정도였다.
세이호 @say_ho_sung
이날 헤메코 극락... 은발에 실크셔츠 입히고 누드립 바를 생각 누가 하셨어요 완전 천사잖아ㅠㅠ ㅠ ㅠㅠㅠㅠ
세이호 @say_ho_sung
님들 천사호성도 보고 가주세요 183cm 남성한테 천사 날개가 이렇게 잘 어울릴 일? 위화감 없어서 조금 무서운데... 역시 원래 천사인데 정체 숨기고 활동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춤 출 땐 날개 걸리적거릴 테니까ㅎㅎㅎ
세이호 @say_ho_sung
아악 오늘따라 눈 밑 반짝인다 싶더니 큐빅 붙인 거였어ㅠㅠㅠ 보석 같은 눈 아래 보석이라니 진짜 미치겠다
누군지도 모르는 계정이지만 그의 외침이 곧 우영찬의 감상이었다. 마치 제 마음을 대변해 준 듯한 프윗에 우영찬은 그저 ‘좋아요’를 누를 뿐이었다.
그렇게 정보의 바다를 실컷 헤엄칠 때였다. 우영찬은 자신이 팔로우한 사람이 ‘좋아요’를 누른, 무척 수상쩍은 프윗를 발견했다.
니은히읗 @ansggksg
묺핞 이번 뮤비에선 또 얼마나 신혼부부같은 케미를 보여줄지 벌써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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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은히읗 @ansggksg
아니지 묺핞 사귄지 벌써 4년째라 슬슬 안정기?로 접어들었을듯ㅋㅋㅋㅋ 그래도 밤에는 여전히 신혼ㅎㅎ
“묺핞……?”
처음엔 오타를 낸 건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닉네임부터가 ‘니은히읗’인 그 계정은 꼬박꼬박 묺핞을 외치고 있었다. 그게 대체 뭔진 모르겠지만 광기마저 느껴졌다.
알아봐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우영찬은 필독서를 정독하듯 ‘니은히읗’의 프윗을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니은히읗 @sldmsgldmg42
묺핞 과거 생각하면 나는 진짜 돌아버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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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은히읗 @ansggksg
핞이 ㅍㄹㅇㅅㅌ일 때 묺이 ㅂㄹㄱ 연습생이었다는 거 다들 알지? 본인피셜 핞 보고 아이돌 되고 싶어서 바로 ㅂㄹㄱ 오디션 봤다잖아 완전 직진연하공 그자체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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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은히읗 @ansggksg
어쩌면 소속사 선후배인 묺핞을 볼 수 있었던 거라고.. 지금처럼 같은 그룹도 좋지만 선후배 관계도 존나 맛있어
“……이건 뭐지.”
우영찬은 인상을 찌푸렸다.
프윗 몇 개를 읽어 보니 감이 왔다. 문맥상 ‘묺’이 문해일이고 ‘핞’은 한호성 같았다. 도대체 멀쩡한 이름을 왜 그렇게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내용이었다.
니은히읗 @sldmsgldmg42
아무리 생각해도 묺은 진짜 순정집착계략연하공의 정석이다.. 지고지순하게 핞만을 기다려 마침내 함께하게 된 묺 그 인내심과 순정이 보는 사람을 미치게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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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은히읗 @ansggksg
기나긴 기다림 끝에 핞이랑 같은 그룹으로 데뷔했을 때 묺 무슨 생각했을까...? 늘 뒤에서 지켜만 보던 형 옆에 설 수 있어서 너무너무 행복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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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은히읗 @ansggksg
이건 결코 선동과 날조가 아님 첫 무대 사진을 봐.. 핞 보는 묺의 눈을 보라고ㅠㅠ 이게 짝사랑하던 상대에게 오랜 시간 구애한 끝에 결혼식장에 입장한 신랑의 눈빛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임
우영찬은 ‘니은히읗’이 올린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말마따나 첫 무대 사진이 맞긴 한 듯, 두 사람 모두 초록색 의상을 입고 있었다.
사진 속 문해일의 눈빛은 상당히 그윽했다.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눈을 게슴츠레 뜨니 느끼해 보이기까지 하다.
“아니, 그럴 리가.”
우영찬은 강하게 부정했다.
확실히 분위기가 묘하긴 하지만 고작 사진 한 장일 뿐이다. 문해일이 어쩌다 지은 이상한 표정이 포착된 것일 터였다.
이런 걸 가지고 결혼식장이며 신랑을 운운하다니. ‘니은히읗’의 확대 해석이 분명했다.
그리 단정하면서도 우영찬은 프위터를 끄지 않았다.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으며 ‘니은히읗’의 프윗을 마저 읽어 내렸다.
***
“제논, 연습하자. 쉬는 시간 지났어.”
한호성이 우영찬을 불렀다. 그러나 프위터에 집중 중인 우영찬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쉬는 시간 지났다니까?”
“…….”
“우영찬.”
이름 석 자가 귓구멍에 꽂혔다. 그제야 우영찬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순간,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호성과 눈이 마주쳤다. 우영찬은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왜 그래? 뭘 하고 있었길래.”
“아무것도 안 했다.”
우영찬은 핸드폰을 끄며 답했다.
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안 하긴커녕, 엄청난 걸 보고 있었다. 바로 ‘니은히읗’이 줄줄이 쓴 ‘묺과 핞의 데이트 모먼트’였다.
니은히읗 @sldmsgldmg42
핸드폰 기종도 똑같은 묺핞 여기까진 무난하지? 근데 폰케랑 스마트톡까지 똑같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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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은히읗 @ansggksg
라디오 게스트 출연해서도 절찬리에 핞 얘기 중인 묺ㅋㅋㅋ 아니 신곡 홍보하러 왔으면서 왜 남친 자랑하냐고요~~ 주접 오져 진짜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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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은히읗 @ansggksg
라방에서 육개장 레시피 전수해주는 핞 참고로 묺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육개장ㅎㅎ
글뿐이 아니었다. ‘니은히읗’은 꼬박꼬박 사진과 영상을 첨부했다. 마치 논문 쓰는 학자가 꼬박꼬박 증거 자료를 첨부하듯이.
처음엔 그 모든 걸 ‘니은히읗’의 확대 해석으로 치부한 우영찬이었다. 하지만 프윗을 꼼꼼히 읽다 보니, 슬그머니 의심이 생겨났다.
정말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란 말인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증거가 이렇게나 많으니 개중 몇 개는 사실일 수도 있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게다가 생각해 보면, 문해일이 유난히 한호성을 잘 따르긴 했다. 단순히 친해서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서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때, 불현듯 프윗 하나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니은히읗 @sldmsgldmg42
묺핞 같은 방 쓸 때 과연 순수하게 잠만 잤을까? 불 꺼진 방에서 고요하게 잠든 핞 바라보다 천천히 침대로 올라가는 묺... 뺨이 너무 보드라워 보여서 딱 한 번만 쓰다듬으려고 했는데 체온이 닿은 순간 참지 못하고 입 맞추고 그 순간 핞이 눈을 뜨는데
“아악!”
우영찬은 급기야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연습을 앞두고 몸을 푸는 중이던 멤버들이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우영찬과 가장 가까이에 선 이주진이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우영찬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별것도 아닌 프윗 때문에 자신이 이상하게 구는 중이란 자각은 있었다. 설령 ‘니은히읗’의 주장이 전부 사실이더라도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거렸다.
문해일과 한호성이 꼭 붙은 사진이 자꾸 떠오르질 않나, 두 사람이 애틋하게 사귀는 장면까지 절로 상상되었다. 뇌에서 멋대로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 낼 수도 없고, 아주 미칠 노릇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
“말을 해야 도와주지. 이러다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 그땐 못 도와줄 수도 있어.”
설이태가 차분히 말했다. 우영찬은 설이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그의 뒤에 선 문해일을 보고 말았다.
“그…….”
우영찬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그야, 당사자에게 묻는 게 가장 쉽고 정확할 터였다. 하지만 만약 문해일과 한호성이 사귈 경우, 그리고 다른 멤버들이 그 사실을 모를 경우엔 자신이 아웃팅 시켜 버리는 셈이 된다.
“왜 말을 안 해? 말하다 마는 것만큼 사람 답답하게 하는 짓이 없는 거 몰라?”
이주진이 채근했다. 다른 이들도 우영찬의 뒷말을 기다리는 기색이었다.
결국 우영찬은 에둘러 물었다.
“……아이돌은 연애하면 안 된다던데. 정말 그러냐?”
“가, 갑자기 연애라니 무슨 소리야. 너 설마 연애해?”
“미친, 이젠 연애까지 하냐? 가지가지 한다 아주.”
이주진과 문해일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었다. 설이태마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대체 언제, 어디서 만난 거지…….”
“뭔 소리야? 내가 언제 연애한다고 했냐? 아무도 안 만나!”
강하게 부정해도, 다들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그럼 왜 연애 얘길 해? 수상하게.”
“언제 내가 연애한다고 했냐고. 아이돌이 연애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물어봤을 뿐인데.”
“그걸 말이라고 하냐? 공개 연애는 당연히 안 되지.”
문해일이 답했다. 우영찬은 눈매를 좁히며 그를 응시했다.
“그럼 비공개 연애는.”
“비공개 연애도 안 하는 게 좋지. 근데 어차피 할 연애라면 숨기는 게 낫고. 요즘은 소속사들도 연애 금지하는 대신 비밀 연애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던데.”
문해일의 설명에, 조금 전에 본 프윗이 뇌리를 스쳤다. ‘니은히읗’이 리프윗한 것이었다.
문안인사 @ansgght
요즘 아이돌 연애 특: 같은 소속사 돌이랑 사귀면서 스캔들 피함 ex)묺핞
“……왜 이렇게 잘 알아. 해 봤냐?”
“나? 나보고 지금 비밀 연애 해 봤냐고 물은 거냐?”
문해일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 대신 이주진이 대답해 주었다.
“왜 하필이면 해일 형한테 그래. 형 모태 솔로인 거 몰라? 아니면 기억이 안 나는 거야?”
“…….”
“나도 데뷔한 후론 연애한 적 없고, 이태 형이랑 호성 형도 없어. 물론 너도.”
그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우영찬은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대단치도 않은 일로 자신이 괜히 흥분한 성싶었다.
“……알았다. 연습이나 하자.”
잠시 멈추었던 연습이 재개되었다.
멤버들과 동선을 맞추는 동안, 우영찬은 의식적으로 머리를 비웠다. 지금은 차라리 노래와 안무에라도 집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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