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3. 입덕주의보
“일어나자.”
“…….”
“우영찬, 일어나.”
누군가의 부름에, 우영찬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뮤비를 보다 잠든 성싶다. 제논의 몸이라서인가. 제 몸일 땐 아무리 피로하더라도 이렇게 블랙아웃되듯 잠든 적이 없는 터라 기분이 더러웠다. 어째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찌뿌둥하다.
‘가지가지 하는 몸뚱이 같으니라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키자, 말똥말똥한 시선이 느껴졌다. 다름 아닌 한호성이다.
“왜?”
“아니, 그냥…… 네가 우영찬이 맞긴 하구나 싶어서. 제논이라고 부를 땐 움찔도 안 했으면서 우영찬이라고 부르니까 반응하더라고.”
“……그런 실험을 했단 말이지.”
쉽게 속아 넘어갈 것처럼 생긴 주제에 은근히 의심이 많다. 애초에 한호성을 속이려던 적도 없으니만큼 더 어이가 없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한호성이 변명하듯 말했다.
“네가 우영찬이라는 거 믿지. 믿는데 그냥 신기해서 그래.”
“됐다. 그보다 왜 깨웠는데?”
“연습실 가자고.”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맹연습에 돌입하기로 한 터다. 우영찬 자신이 진정 원해서 세운 계획이 아니었기에 정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싫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옷 갈아입게 잠깐 나가 봐.”
“응.”
‘다시 잠들면 안 돼.’라고 신신당부하며, 한호성이 방을 나섰다. 우영찬은 며칠 사이 입에 붙어 버린 한숨을 내쉬고서는 옷을 갈아입었다.
***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영찬은 한호성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회사까지는 자동차로 약 20분 거리였다. 이전에는 매니저가 운전하는 밴이나 택시를 탔지만 오늘은 달랐다.
“타.”
“……네가 운전하게?”
“응.”
한호성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어쩔 수 없이 차에 타면서도, 우영찬은 제안했다.
“내가 할래.”
“제논은 운전면허 없어.”
“…….”
“그리고 너…….”
“왜?”
“아니다. 일단 가자.”
한호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동을 걸었다.
남의 차에 함께 탈 경우, 보통은 조수석에 앉지 않던가. 그러나 우영찬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뒷자리를 차지했다. 팔짱까지 끼는 자세가 영락없이 거만한 회장님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수 없는데, 자신의 운전 실력을 못 믿겠다는 듯 불안스레 두리번거리는 양은 더 재수 없었다.
“안심해. 회사 가는 길이라면 눈 감고도 운전할 수 있으니까.”
“운전에 자신 있나 보지?”
“아, 그건 아니고. 수백 번 왔다 갔다 한 길이라 익숙하거든.”
이외의 길은 못 간다며 머쓱하게 덧붙이자, 우영찬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차는 왜 산 건데?”
“이거 내 차 아냐, 회사 차지. 가끔 매니저랑 시간 안 맞을 때 써.”
“…….”
“사실 원래는 면허 딸 생각도 없었는데, 데뷔할 때 나만 성인이어서 어쩔 수 없었어.”
이 회사는 소속 연예인에게 운전 일까지 시키나 보다.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원래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업무 분담이 퍽 이상하지 않은가. 우영찬이 혀를 차는 동안, 차는 소소리 엔터테인먼트를 향해 나아갔다.
***
우영찬은 한호성과 함께 연습실로 향했다. 몇 번 온 까닭에, 이젠 이 칙칙한 지하에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우영찬의 입장에선 유쾌하지만은 않은 적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는 왜 없지?”
“나머지? ……아, 다른 애들 말하는 거야?”
한호성이 우영찬을 돌아보았다.
“주진이는 웹 드라마 촬영 있고, 해일이랑 이태는 헬스장 들렀다 올 거야. 특별한 일정 없으면 헬스부터 하거든. 근데 넌 보컬이 제일 급해서 연습실부터 온 거고.”
차라리 헬스라면 그럭저럭 재밌게 할 수 있을 듯싶었다. 우영찬이 내심 아쉬워하는데, 한호성이 악보와 볼펜을 내밀었다.
“자, 받아.”
“이건 왜?”
“배운 거 메모하라고. 그럼 시작하기 전에 발성 연습부터 할 건데…….”
“아직 강사가 안 왔는데?”
“강사?”
무슨 소리냐는 듯 한호성이 눈을 깜빡였다. 나비 날개처럼 팔랑거리는 속눈썹이 퍽 아름다웠지만, 우영찬으로선 답답할 뿐이었다.
“배우라면서. 근데 가르치는 사람이 없잖아.”
“보컬 트레이너 얘기한 거구나. 음, 그게…… 우린 보컬 트레이너가 없어.”
“없다고? 왜?”
프로 운동선수의 경우, 종목을 막론하고 코치를 두기 마련이었다. 축구, 농구, 배구, 수영에 이르기까지 다들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실력을 키우지 않던가. 아이돌이라고 다를 성싶진 않았다.
“어…… 선택과 집중이랄까? 곡과 안무에 투자하기 위해…….”
“예산 부족이냐.”
“……그렇지, 뭐.”
웬만한 문제가 그러하듯 결국은 돈이 원인이다. 올해 들어 크나큰 수익을 벌어들인 건 사실이지만, 신곡 준비에 전례 없이 막대한 투자를 한 것이다. 어느 한 군데에서는 절약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그동안도 보컬 트레이너 없이 활동해 왔지만, 적어도 보컬 때문에 욕먹은 적은 없거든.”
“다른 문제가 더 심각해서는 아니고?”
“반응 찾아봤어? 어디서 뭘 봤길래. 혹시 1집 뮤비인가?”
잠시 씁쓸히 미소한 한호성이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시작하자. 할 게 많은데 컴백까진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어. 시간이 부족해.”
***
사실 한호성과 달리 우영찬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노래 한 곡 익히면 될 뿐 아닌가. 자신이 아무리 기본기가 없다지만, 한 달 동안 단 한 곡만 연습하면 잘 부를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우영찬은 어느 분야에서든 배움이 빠른 편이었다.
“복근에 힘주고! 소리를 안에서부터 끌어낸다는 느낌으로.”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노래를 부르는 건 둘째치고, 발성을 익히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우영찬은 한호성의 지시에 따라 복근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것과 달리 빈약한 복근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때, 한호성이 예고도 없이 손을 뻗었다.
“……!”
타인의 손이 함부로 몸에 닿자 절로 힘이 빠졌다. 단번에 근육을 이완한 우영찬은 그를 노려보았다.
“뭐야?”
“아, 미안.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 같아서 확인해 보려고.”
“힘주라며?”
“그렇게까지는 말고. 최소한 숨은 편하게 쉬어야 할 거 아니야, 봐 봐.”
우영찬의 앞에 딱 버티고 선 한호성이 시범을 보였다.
“복근은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으로 두고. ‘스- 스- 스-’ 하면서 숨 쉬는 거야.”
“스…… 스…… 스…….”
“말로만 따라 할 게 아니라 숨을 쉬어야지.”
한호성이 하는 양을 보면,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따라 하기는 어려웠다. 우영찬은 힘 빠진 매미처럼 ‘스…… 스…… 스……’를 반복하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못 하더라도 이 몸은 잘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몸이 전에 했던 행동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조금 기대했는데 그런 것 따위 전혀 없었다. 애초에 김제국 본인도 발성법이 썩 좋진 않았을 듯싶다. 춤을 춘 것도 아니고, 가만히 서서 목소리만 냈는데 금세 숨이 차 할딱거리는 꼴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못하진 않아.”
“그래?”
“초보치고는.”
“…….”
우영찬이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한호성은 그의 기색을 살핀 후 제안했다.
“발성은 이쯤 하고 한번 불러 볼래?”
기초야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기본기에만 집착하면 자칫 노래하는 즐거움을 잃기 마련이었다. 한호성은 우영찬이 그리되길 바라지 않았다.
“방금 배운 거 너무 의식하지 말고 편하게 불러 봐. 기분 전환 삼아서.”
“어.”
노래 좀 부른다고 기분이 전환되는 성격은 아니지만, 우영찬은 수락했다. 그러자 한호성이 MR을 재생했다.
뽀그르르르, 어느덧 익숙해진 물방울 효과음이 흘러나왔다. 도입부를 맡은 한호성이 먼저 입을 열고서 얼마지 않아 제논의 차례가 되었다.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우영찬은 노래하며 생각했다. 확실히 반나절이나마 연습한 덕분인지 처음보다 좋아진 듯싶었다. 녹음해서 들어 보면 또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나쁘지 않았다. 과장하자면, 한호성과 같은 파트를 부르는데도 심하게 밀리는 느낌이 없었다.
“어때.”
곡을 마친 후, 우영찬은 내심 기대하며 물었다.
“좋아진 것 같아.”
심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진 거면 좋아진 거지 ‘좋아진 것 같아’는 대체 뭔가 싶지만, 어쨌든 긍정적인 평이었다. 우영찬은 입꼬리를 아주 살짝 끌어 올렸다.
***
연습 첫날엔 보컬 트레이너가 없다는 사실에 놀란 터였다. 하지만 막상 연습을 시작하고 보니, 그 정도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한호성이 보컬 트레이너 역할을 톡톡히 해낸 덕분이었다.
“너 그냥 보컬 트레이너 해라.”
연습 도중 잠시 쉬는 시간. 우영찬이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한호성은 물을 마시다 말고 멈칫했다.
“……안 그래도, 잘 풀리지 않는다면 보컬 트레이너로 전향해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어. 사실 그 외에 다른 선택지도 얼마 없고.”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한호성의 입장에선 나쁜 일이었다. 보컬 트레이너라는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돌로서 성공하지 못한 경우’라는 전제가 깔린 까닭이었다.
그래도 우영찬 딴엔 칭찬이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호성은 대강 웃었다.
“보컬 트레이너로 전향하게 되면 포트폴리오에 너도 넣어야겠다. 아예 비포 애프터 녹음본도 첨부해야겠어.”
“됐어.”
농담에 불과한데도 우영찬이 질색했다. 한호성은 이번에야말로 순수한 웃음을 터뜨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