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타 스위치 스캔들-16화 (16/123)

#16

한호성은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반쯤 녹은 얼음끼리 부딪치며 달그락거렸다. 손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는 것도 모른 채 그는 생각에 잠겼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우영찬의 웹사이트 비밀번호가 모조리 바뀐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본인이 직접 호소한 적은 없지만 한호성은 제논이 데뷔한 걸 줄곧 후회했다고 느꼈다.

‘어쩌면 연락을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걸지도 몰라.’

가뜩이나 비공개 블로그가 만천하에 까발려진 후 자기 세계로 더욱 숨어들던 제논이었으니, 아예 모습을 감췄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휴…….”

“왜 자꾸 한숨이냐.”

“그냥. 내가 이렇게 제논을 못 믿어 줘서 더 힘들어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리더로써 더 잘 챙겨 줬어야 했는데. 한호성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리자, 우영찬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웬 자기혐오냐?”

“자기혐오까진 아니고 그냥 반성. ……영찬아.”

“왜.”

우영찬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제논.’이라고 불릴 때도 그랬지만, 제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소름 돋았다. 아무래도 한호성에겐 사람 이름을 간질간질하게 부르는 이상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너는 꼭 잘 챙겨 줄게. 모르는 게 있으면 뭐든 나한테 물어보고, 얼마든지 의지해.”

“그래.”

안 그래도 우영찬은 한호성의 쓸모를 골수까지 빨아먹을 작정이었다. 그런 속내도 모르고, 한호성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더 궁금한 건 없어? 제논에 대해서든, 그룹에 대해서든.”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데.”

“컴백 준비해야지.”

반가운 화제인지, 한호성의 목소리가 확 높아졌다.

“아! 오늘 저녁부터 연습할까? 연습실에서 타이틀곡 들려줄게. 우리 이번에 플레이리스트 진짜 잘 뽑혔어. 너도 들으면 좋아할걸.”

오늘이 휴일이라는 건 잊어버린 모양이다. 우영찬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휴일이라고 해도 딱히 할 것도 없고, 지금은 상황을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할 성싶었다.

***

한호성은 우영찬을 데리고 연습실로 향했다.

회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자 특유의 냄새가 훅 끼쳤다. 환기가 잘 안 되어 답답한, 곰팡내가 조금 섞인 공기. 우영찬으로선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꺼림칙했으나 한호성은 망설임 없이 연습실 문을 열어젖혔다.

“뮤비는 편집이 아직 안 끝나서. 일단 곡부터 들려줄게.”

연습실 한편에서 노트북을 가져온 한호성이 맨바닥에 털썩 앉았다. 우영찬은 찜찜하다는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몸을 낮췄다.

“곡명은 ‘여름 찰칵’이야. 누가 맡아 주셨는지 알아?”

“누군데.”

“놀라지 마. 너클즈야!”

“…….”

“어? 안 놀라네.”

“놀라지 말라며.”

작곡자 명을 듣는다 한들, 이 업계에 문외한인 우영찬이 알 리 없었다. 한호성은 그를 위해 ‘너클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얼마나 유명한 곡을 작곡했는지, 스타일이 어떠한지, 너클즈에게 작업을 의뢰하기 얼마나 어려웠는지 따위였다.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우영찬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더럽게 느린 노트북이군.’

사양이 어찌나 나쁜지, 한호성이 열 마디쯤 하는 동안에도 부팅이 끝나지 않는다. 저런 건 차라리 박물관에 유물로 기증하는 편이 낫지 않나. 우영찬이 숫제 신기해하는 사이, 웨에에에엥, 격렬한 모터 소리와 동시에 바탕 화면이 떠올랐다.

MP4 파일을 더블 클릭했음에도 재생되기까지 또 한참 걸린다. 이윽고 노트북과 연결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두둔, 둔, 둔.

경쾌한 드럼 소리. 뽀그르르르, 물거품 같은 효과음에 뒤이어 노래가 시작된다.

찰칵! 두 눈에 담아

푸른 하늘, 빛나는 바다, 그리고 너

네가 있어 완벽해진 moment

눈꺼풀 속에, 찰칵 간직할게

우영찬은 멜로디나 창법보다, 가사에 집중하며 곡을 들었다.

벼르고 벼르던 여름휴가 첫날. 실수로 카메라를 바다에 빠뜨려 못 쓰게 되었는데, 대신 눈으로나마 상대의 모습을 담겠다는 내용이었다.

3분 남짓한 곡이 끝난 후, 한호성이 눈을 반짝이며 물어 왔다.

“어때?”

“정상적이네.”

“당연하지. 그거 말고 다른 감상은 없어?”

“카페나 백화점에서 나오는 노래 같다.”

“대중적이란 뜻인가……. 그럼 좋은 뜻인 거 맞지?”

한호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우영찬은 메마른 감상을 쥐어짜 냈다.

“정말 노래 같다.”

“……평이 어째 미묘하네.”

한호성이 실망한 기색을 비쳤지만, 우영찬은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곡이 나쁘게 느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좋게 들렸지만,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우영찬은 노래를 들으며 마음 깊이 감동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무난하고 좋다고 생각해.”

“그래, 뭐.”

건성으로 대답한 게 느껴졌는지, 호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번 곡 진짜 잘될 것 같거든. 처음 들은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니까. 아, 이건 된다! 싶어서.”

여름을 겨냥한 전형적인 썸머 송이었다. 무더위를 싹 날려 줄 시원한 느낌에, 자꾸 듣고 싶어지는 매력까지. 게다가 청량 컨셉을 고수해 온 하이파이브의 이미지와 잘 맞아, 팬과 대중 모두에게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냄 직한 곡이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거든. 너한텐 다행이지.”

동요 3종의 인기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누구나 따라 하기 쉽다는 점이었다. 이의 연장선으로 신곡도 기획 단계에서부터, 대중이 따라 하기 쉽도록 작정하고 제작한 바였다.

“특별한 기교가 필요한 구간도 없고 안무도 쉬운 편이야. 사실 난 우리 실력을 더 보여 주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회의 때 내 의견이 안 먹혀서 다행인가.”

“뭘 어떻게 자랑하려고 했는데.”

“하이라이트를 더 화려하게 구성하거나 안무 난이도를 올리는 식으로. ‘우리 이런 멋있는 것도 잘해요. 동요랑 율동만 잘하는 거 아니에요.’ 하고 어필할 수 있도록 말이야.”

다행이라고 했으면서도, 한호성은 내심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아쉬운 눈치였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기에.’

가소로움 섞인 궁금증이 들었다. 우영찬은 한호성에게 턱 끝을 까딱하며 말했다.

“보여 줘.”

“뭘? 아, 안무?”

‘하긴, 시범을 보여 주면 익히기 수월하겠지.’라며 한호성이 중얼거렸다. 딱히 건설적인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우영찬은 굳이 그의 착각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

“근데 나 혼자 하기엔 파트가 너무 빌 텐데.”

“무슨 상관이야. 그냥 대충 해.”

“대충이란 게 어딨어? 하나를 해도 제대로 해야지.”

“……또 잔소리.”

우영찬이 인상을 찌푸리든 말든, 한호성은 꿋꿋이 말했다.

“일단 커버할 수 있는 데까진 해 볼게. 음, 공간이 필요하니까 뒤쪽에 서 있을래?”

우영찬은 아예 연습실 벽에 기대어 섰다. 그사이 한호성은 가볍게 몸을 풀었다. 말마따나 ‘제대로’ 하려는 듯, 시범에 불과한데 무슨 오디션이라도 앞둔 듯한 모습이었다.

‘……눈빛이.’

일순 깊어진 것처럼 느껴진 건 자신의 착각일까.

우영찬은 주의 깊게 한호성을 관찰했다.

두둔, 둔, 둔.

그가 음악을 틀었다. 보컬이 없는 MR 버전이었다.

이어 한호성이 입을 열었다.

“…….”

시원한 목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맑고 청량한 미성이었다. 곡을 녹음할 때 프로듀서가 ‘바다 마녀가 탐낸 인어의 그것처럼 예쁜 목소리다.’라며 극찬했을 정도지만, 우영찬은 그 사실까지 알지 못했다. 자세히 감탄하기엔 대중음악적 소양이 부족한 그였다.

다만,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이 있었다.

한호성의 미소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아니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듯한 얼굴. 그에겐 곰팡내 나는 연습실도 일순 진짜 무대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다섯 명 구성의 곡을 원래부터 솔로 곡이었다는 듯 소화해 내는 한호성은 평소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손을 떨거나, 무당에게 어수룩하게 속아 넘어가는 남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연예인이 맞긴 하군.’

어째서인지 한호성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연예인이 대중의 주목으로 먹고사는 직업이란 걸 생각해 보면, 확실히 직업 하나만큼은 잘 선택한 셈이다.

둔, 둔, 두둔-.

곡이 후렴을 지났다. 경쾌한 드럼 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마침내 사그라졌다.

그제야 오묘한 마법에서 벗어난 듯, 우영찬은 눈꺼풀을 깜빡일 수 있었다.

“어때? 좋지?”

“……좋긴 뭐가 좋다고.”

“어? 별로야? 안무 잘 나오지 않았나?”

한호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우영찬은 고개를 휙 돌리며 대꾸했다.

“잘 못 봤어.”

“뭐야, 그럼 뭘 본 건데? 빤히 쳐다보길래 집중하는 줄 알았더니만.”

한호성이 뒤늦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노래는 그렇다 치더라도 즉석에서 다섯 명분의 안무를 한 명분으로 바꾸는 건 역시, 조금 무리였다. 체력을 더 단련해야 할 듯싶었다.

“안무 영상 보여 줄까? 이리 와 봐.”

권유가 아닌 강요였다. 그러나 우영찬은 군소리 없이 한호성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 털썩 앉자, 한호성이 노트북으로 동영상을 클릭했다. 노트북은 역시나 오랜 버퍼링 끝에 동영상을 토해 내듯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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