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일단은 신용 카드를 쓴다손 쳐도, 자산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계좌 비밀번호쯤은 알아야 한다. 애초에 그 신용 카드조차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뿐인가. 김제국의 통장이며 인감도장, 주민 등록증 따위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몸뚱이만 김제국이면 뭘 하나, 서류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는데…….”
‘우영찬’으로만 인정받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김제국’으로도 인정받지 못할 듯싶었다. 정말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라도 된 듯 막막했다.
하지만 지금은 구질구질한 기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아니다. 우영찬은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음까지 으드득으드득 씹어 먹으니, 한껏 달아오른 머리가 좀 식었다.
“됐어. 어차피 조금만 버티면 돼. 집에서 날 찾을 때까지.”
자신도, 가족도 연락을 살뜰히 주고받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니 하와이에 체류 예정인 두 달 동안은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그 후는 아닐 것이다.
“내가 귀국하지 않으면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지. 내 몸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김제국이 빙의해 있거나, 영혼 없이 텅 빈 상태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어? 그중 뭐가 됐든 큰일이니까 한바탕 난리 날 거야. 그리고 날 찾겠지.”
한호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우영찬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헛소리 같았는데, 이젠 한호성이 듣기에도 그럴듯했다.
“문제는 가족에게 어떻게 내 상황을 알리는가인데……. 두 달 후에 확 회사로 쳐들어가야 하나?”
우영찬이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순간 ‘‘하이파이브’ 제논, 강문 그룹 본사에서 난동 부리다 체포되다’라는 기사 제목이 한호성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안 돼.”
그랬다가는 하이파이브까지 구설에 오를 것이다. 가뜩이나 코어 팬 수도 적은 하이파이브에겐 작은 이슈도 치명적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이왕이면 너도 좋고 나도 좋을 방법으로.”
“내겐 이 이상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우영찬은 한호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한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고마운 편이지, 나름대로 날 도와줬으니까.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래대로 돌아갈 거다. 내 몸, 내 인생 절대 못 뺏겨.”
우영찬의 눈동자가 맹렬하게 이글거렸다. 설득이 먹힐 기색이 아니었지만, 한호성은 입을 열었다.
“네 인생을 포기하라는 게 아니잖아.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오길 바라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잘 생각해 봐, 우린 목표가 같아.”
우영찬은 제 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한호성은 제논을 되찾기 위하여.
이유는 다를지언정 결과적으로 바라는 건 똑같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끼리는 어깨동무할 수 있기 마련이다.
“내가 널 도와줄게.”
“무슨 수로.”
“정보력은 너보다 내가 나을걸. 방금 다녀온 점집도 내가 찾아온 곳이잖아. 서양 주술사에 대해서도 한번 알아볼게.”
“…….”
“네 가족과 연락할 방법도 생각해 보고.”
물론 정상적인 방법을 말하는 거라며, 한호성이 덧붙였다.
“장담하는데 나 같은 조력자는 어디서도 못 구할 거야. 나처럼 돈도 있고, 네가 우영찬인 걸 믿는 사람이 또 어딨겠어?”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너도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마스크를 쓴 까닭에 얼굴의 반이 가려진 호성이나, 간절한 표정은 여실히 드러났다. 오히려 눈만 보여서 더 절박하게 느껴졌다. 애원하는 듯한 눈빛과 눈물이 고이지 않았음에도 그렁그렁한 눈동자라니. 그에 우영찬은 잘못한 것도 없이 가슴이 뜨끔했다.
“……나더러 김제국 대신 너희 그룹 활동하라는 거지.”
“맞아.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고 치지 말고.”
“솔직히 말하자면 전자도 후자도 자신 없다.”
“나도 네가 계속 아이돌로 사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 하지만 네 말마따나 두 달이잖아. 살면서 아이돌 해 볼 일이 또 언제 있겠어. 누구는 데뷔 하나만 바라보며 청춘을 연습실에서 썩이고, 누구는 조금이라도 떠 보려고 별 기상천외한 컨셉까지 시도하는데 넌 바로 활동할 수 있는 거야.”
우영찬은 예의 ‘누구’가 한호성의 과거이리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흥미롭지 않아? 인생 경험한다 치고 같이 활동하면 안 돼?”
“…….”
우영찬은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뭐라도 해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어디까지나 기분일 뿐. 냉정하게 따져 보면 ‘서양 주술사를 찾아라.’라는 힌트만 얻었을 뿐이지 갓 빙의했을 때보다 나아진 게 없었다. 하다못해 김제국의 핸드폰 속에도 쓸 만한 정보가 없던 바였다.
“좋아.”
제 몸을 되찾을 때까지는 김제국인 척하며 사는 게 가장 유리하다는 것쯤은 자신도 알았다. 그렇기에 ‘제논’으로서 살려고 작정한 게 아니었던가. 상황이 바뀌지 않았으니 계획도 바꿀 수 없었다.
“기브 앤 테이크 하자는 거지.”
“응.”
“내 쪽이 손해인 것도 같지만, 그래. 사고 치지 않도록 노력은 해 볼게.”
“그런 두루뭉술한 말은 못 믿어. 확실히 약속해 줘, 사고 치지 않겠다고.”
우영찬은 ‘어쭈.’ 하는 감탄을 삼켰다. 영 호구 같아서 사기당하지나 않을까 싶더라니, 제법 단호한 면도 있다. 어째 무당에겐 무르고 자신에게만 엄격한 것도 같으나 불쾌하진 않았다.
“알았다. 사람을 무슨 트러블 메이커로 보나 본데, 나도 어디서 사고 치고 다니는 놈은 아니야. 네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할 거다.”
“고마워.”
“대신 너도 적극적으로 날 도와야 해. 그러지 않으면…… 알지?”
“알았어. 꼭 적극적으로 도울게.”
짐짓 협박조로 말했음에도 한호성은 흔쾌히 답했다.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지, 마스크를 벗고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도 한다. 슬쩍 올라간 입매가 퍽 흐뭇해 보였다.
“…….”
우영찬은 한호성을 흘깃 바라보았다. 마주 앉아 있음에도 어쩐지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 박자 늦게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의 한호성은 표정을 꾸미지 않은 상태이다. 평소라고 가식적인 표정을 지은 건 아니나, 이 순간만큼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진 않았다. 그간의 가슴앓이부터 현재는 얼마나 안도 중인지까지 훤히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깊은 산 속 맑은 시냇물을 들여다보면 꼭 이런 느낌일까. 지극히 사적인 감정마저 투명하게 드러나니,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너무 만만하다고. 그렇게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니까.’
다시금 든 생각이었으나, 이번엔 한호성에게 일러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영찬은 남은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셨다.
“저…….”
그때, 초면인 남녀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어정쩡한 미소를 띤 채였다.
“혹시 한호성 씨…… 맞죠? 치카치카송 부른.”
“아까부터 긴가민가했는데 마스크 벗은 걸 보니까 맞는 것 같아서…….”
한호성은 그들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네, 맞아요.”
“어머! 웬일이야. 봐, 내 말 맞지?”
“어어, 신기하다. 우와.”
두 사람이 속닥거렸다. 딴엔 귓속말인 것 같지만, 워낙 호들갑스러워 우영찬에게까지 들렸다. 한호성이라고 못 들었을 리 없는데 그는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무언가 다르다.’
언뜻 똑같은 웃음인데, 조금 전에 비해 정돈된 느낌이었다. 우영찬은 그것이 ‘연예인 한호성’의 표정임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표정 관리를 아예 못 하는 건 아니었나?’
연예계에서 구른 연차가 있으니만큼 당연하겠지만, 여태껏 호구 같은 모습만 보아 온지라 신기했다. 우영찬은 한호성이 때아닌 팬 미팅을 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와! 노래 잘 듣고 있어요. 좋은 노래 내 줘서 너무 고마워요.”
“하하, 감사합니다.”
“우리 애가 원래 양치하는 걸 죽어라 싫어했는데 치카치카송만 틀면 알아서 칫솔 쥐거든요. 아휴, 애 유치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인데. 우리 슬미도 치카 오빠 봤으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아쉽네요.”
“아, 어린 친구 이름이 슬미인가 봐요. 저도 슬미랑 못 만나서 정말 아쉽네요. 슬미한테 인사 전해 주세요.”
“그럼요. 저, 혹시 사진 찍어 줄 수 있어요?”
“물론이죠.”
한호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눈짓했다. 너도 일어나란 뜻 같아, 우영찬도 일어섰다. 그러나 남녀는 우영찬을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한호성을 중간에 세워 두고 사진 찍기 바쁠 뿐이다.
“자기야, 고개 내밀지 말아 봐. 얼굴이 한 컷에 안 담긴다.”
“고개 내민 게 아니라 그냥 얼굴이 커서 그런 건데…….”
수선이 길어지자, 다른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까지 이쪽을 힐긋거렸다. 카페가 한적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러다간 사람이 더 몰려올 듯싶었다. 결국 우영찬이 나서서 말했다.
“제가 찍어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여자가 우영찬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우영찬은 ‘사고 치지 마.’라는 한호성의 당부를 떠올리며, 성의껏 사진을 찍었다.
“고마워요. 어쩜 친구분도 너무 잘생기셨다.”
“어, 잠시만. 이분도 어디서 뵌 것 같은데…….”
“제논입니다.”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우영찬은 설명을 덧붙였다.
“세균입니다.”
“아! 아, 세균분이시구나! 어쩐지!”
알아보지도 못했으면서 놀라워하는 게 우스웠다. 우영찬은 싱긋 웃었다. 굳이 따지자면 조소지만, 조소도 어쨌거나 웃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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