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타 스위치 스캔들-8화 (8/123)

#8

“제논 옷 입는 거 도와주는 중.”

“다 끝났어?”

“어.”

“그럼 영찬이도 메이크업 받고 와. 난 끝났으니까.”

한호성이 말했다. 어쩐지 눈매가 그윽하고 입술이 빨갛게 반짝이더라니,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을 거친 모양이었다.

“잠시만, 나 먼저 수정 화장 받으면 안 될까? 블러셔가 조금 번져서. 금방 끝날 것 같은데.”

이주진이 부탁했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는 우영찬은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든가.”

“고마워!”

이주진이 뒤뚱거리며 달려갔다. 커다란 레몬 인형 옷을 입은 까닭이었다.

그 꼴을 보니 새삼 착잡해져, 우영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또 그래.”

“뭐가?”

“하기 싫은 기색이잖아.”

한호성이 물었다. 담담한 어조였으나, 힐난처럼 들리기도 했다.

우영찬은 억울함이 울컥 치밀었다.

“너 같으면 하기 좋겠냐?”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빙의한 것만으로도 미칠 노릇인데, 적성에도 안 맞는 아이돌로 활동해야만 한다. 다 때려치우고 될 대로 돼라 식으로 막 나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히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나 우영찬의 사정을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작작 막말해라. 그렇게 하기 싫으면 깔끔하게 탈퇴하든가. 위약금 물 능력 없어서 남은 주제에 일은 하기 싫어? 넌 우리가 일 골라 가며 받을 위치 같아 보이냐?”

문해일이 툭 끼어들며 을렀다. 그 바람에 토마토 인형 탈이 딸기 인형 탈에 퉁, 부딪혔다.

평소라면 문해일을 말렸을 설이태가 잠잠했다. 그도 슬슬 인내심이 다한 듯, 차게 식은 눈빛으로 우영찬을 바라보는 중이다.

그에 우영찬은 더욱 억울했다. 제 잘못이 아닌 일로 비난당하다니.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한 소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 잘못이냐? 너희가 진작 잘했으면-!”

“그만해.”

한호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숙소에서 싸워. 밖에서 무슨 짓이야.”

“형, 근데 저 녀석이…….”

문해일은 우영찬을 손가락질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먹구름 낀 하늘처럼 어두운 한호성의 표정을 본 까닭이었다.

“씨…….”

해일은 분을 삭이느라 씨근덕거렸다. 설이태가 그를 토닥이며, 대기실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

우영찬은 죄 없는 바닥만 노려봤다. 기분이 무척 더러웠다. 김제국인지 제논인지 하는 몸뚱이에 빙의한 이후로 매 순간이 끔찍했지만, 지금이 단연 최악이었다.

“영찬아.”

한호성이 입을 열었다. 또 잔소리나 하겠지, 싶었으나 이어지는 말은 우영찬의 예상과 달랐다.

“네 질문에 먼저 답하자면, 나 이 CF 찍는 거 싫지 않아. 오히려 좋지.”

“…….”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우영찬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호소력 짙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본다. 불그스름한 눈 화장의 위력일까, 한호성의 시선이 가슴에 내리꽂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건 내게 아주 중요한 기회니까.”

“왜. 돈 벌 수 있어서?”

우영찬 자신이 듣기에도 퍽 재수 없는 말투였다. 딱히 한호성에게 유감이 있는 건 아닌데. 그로선 자신이 답답한 게 당연한데, 우영찬에겐 그런 걸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아니라고만은 못 하겠지만, 돈을 떠나서 하이파이브로 활동하는 모든 순간이 내겐 소중해. CF 촬영이든, 무대든, 예능이든. 우릴 찾아 주는 사람, 날 좋아해 주는 팬이 있다는 게 행복하니까.”

“…….”

“내 기회와 네 기회의 가치가 다르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왕 같은 길을 걷기로 한 거…… 좀 더 프로 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어.”

결론은 ‘잘 좀 해라.’라는 꾸지람이다. 우영찬은 반항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데 시야 끄트머리에 한호성의 손이 걸렸다.

파르르 떨리는, 빨간 벨벳 장갑을 낀 손.

우영찬은 조금 당황했다. 떨림이 꽤 심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너…….”

“준비 끝! 제논, 네 차례야.”

이주진이 대기실 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우영찬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괜찮으냐고 굳이 묻지 않아도, 한호성의 몸은 한호성이 알아서 챙길 터였다.

“이 분위기 뭐야. 또 싸웠어?”

대기실을 휘 둘러본 이주진이 혀를 찼다. 우영찬은 그에 답하지 않으며 대기실을 나섰다.

***

강렬한 백색 조명이 내리쬐는 가운데, 다섯 과채가 춤을 췄다.

대기실에서의 험악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과즙이 톡톡 튀듯 상큼한 분위기다.

“온 가족이 안심하고 꿀꺽, 영양 만점 과채주스~.”

문해일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우영찬은 그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냥 시비 거는 놈인 줄만 알았는데 아이돌이 맞긴 하나 보다. 이런 CM 송도 노래랍시고 즐기는 걸 보면.

‘저런 게 프로 의식인가.’

우영찬으로선 알 듯 모를 듯 했다. 프로 의식이 대체 무언가. 애초에 자신은 아이돌도 아니지만, 딸기 인형 탈을 뒤집어쓰고 무슨 프로 의식을 불태우란 말인가!

“잠깐 중지. 제논 씨, 좀 더 상큼한 표정 부탁해요. 딸기처럼!”

감독이 지시했다.

딸기 같은 표정은 또 무엇일까. 도대체가 촬영장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우영찬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그만두며, 차라리 머리를 비우기로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춤추길 얼마간. 음악이 뚝 끊겼다.

“흠. 아까부터 딸기 안색이 어두운데……. 아무래도 다크서클 때문인 것 같다. 컨실러로 좀 가리자.”

“그건 안 되죠. 퇴폐적인 다크서클이 제논 씨 아이덴티티인데.”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양배추 역을 맡길 걸 그랬네. 양배추가 다크서클에 그렇게 좋다잖아. 지금이라도 바꿀까?”

“양배추 역이 다크서클 달고 있으면 어떡해요. 딸기인 게 낫죠.”

촬영분을 모니터링하며, 감독과 스태프가 수군거렸다. 딱히 숨길 대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우영찬에게까지 닿았다.

우영찬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다크서클은 김제국의 문제니 어쩔 수 없지만, 표정은 자신의 문제가 맞긴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영찬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표정 관리란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상큼한 표정을 짓는 방법은 고사하고, 그게 어떤 표정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하, 제논 씨가 긴장해서 굳었나 보다. 너무 잘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평소에 춤추듯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다시 갑니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영찬은 그에 맞춰 춤췄다. 묵직한 딸기 인형 탈을 뒤집어쓴 탓에 몸이 둔해졌지만, 동작엔 한 치의 실수가 없었다. 벼락치기 하듯 연습한 효과였다.

“표정 조금만 더 자연스럽게!”

그러나 감독의 지적은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촬영이 멈추고, 같은 춤을 또 춰야만 했다. 입꼬리를 파들파들 떨며 춤추던 도중, 우영찬은 퍼뜩 깨달았다.

‘지금 나 때문에 촬영이 지체되는 건가?’

아닌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다른 이들은 한 번도 지적당하지 않았으니. 자신만 잘했더라면 진작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을 터다.

그리 생각하니 더욱 표정이 굳었다. 우영찬은 애써 입매를 끌어 올렸으나 ‘상큼한 미소’를 도무지 지을 수 없었다.

“음, 잠깐 쉬고 가도록 합시다.”

감독이 미간을 긁적이며 말했다. 스태프들이 하나둘 촬영 장비를 내려놓았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이 입안에서 윙윙 맴돌았으나, 우영찬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우리도 쉬자.”

이주진이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우영찬은 그를 따라 촬영장 구석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어쩐지 낙오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지금의 자신은 낙오자다.

익숙지 않은 무력감에, 우영찬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도록 꽉 주먹 쥐었다.

***

“많이 힘들어?”

“…….”

“왜 그렇게 멍해? 당 떨어진 거면 이거 마셔.”

이주진이 어디선가 과채주스를 가져와 내밀었다. ‘많이 마시면 살찌니까 조금만.’이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우영찬은 과채주스를 마시지 않았다. 과채주스라면 이제 지긋지긋하고, 입맛도 뚝 떨어진 탓이다.

“형! 이번엔 나 안아 줘!”

“내 차례야, 나 먼저!”

그때, 어딘가에서 병아리 삐악거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우영찬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촬영장 한쪽에서 한호성이 어린이들과 놀아 주는 중이었다. 그가 번쩍 들어 올린 남자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린이 합창단이래. 합창하는 컷이 들어간다더라고.”

이주진이 설명했다. 어쩐지 다들 흰 유니폼 차림이더라니, 촬영 때문이었나 보다. 저 아이들이라면 인형 옷을 입혀도 봐줄 만할 성싶었다.

“애들을 모델로 기용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왜 성인 남성한테 이런 옷을 입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감사한 거지, 광고주님이. 그리고 옷도 나름 괜찮지 않아? 귀엽고. 난 맘에 드는데.”

이주진이 레몬 인형 탈을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과연, 그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데다 옅은 금발이어서 레몬 인형 탈이 그럭저럭 어울렸다.

“혀엉, 나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아이들이 한호성에게 졸라 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옆에 문해일과 설이태도 있는데, 한호성이 유난히 인기가 많았다. 그가 워낙 적극적으로 아이들과 놀아 주는 덕분일 듯했다.

‘저러다 허리 나가면 어쩌려고.’

우영찬은 호성의 가는 허리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마른 몸인데, 체중 대비 근육이 많다고 한들 어린애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까는 손도 파르르 떨지 않았던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