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타 스위치 스캔들-4화 (4/123)

#4

“뭘 봐?”

시선을 알아차린 제논이 위협적으로 을렀다. 하지만 한호성에겐 최후의 허세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보라며.”

“눈빛이 이상하잖아!”

“내 눈빛이 어떤데?”

“존나 재수 없어.”

“말 한번 예쁘게 한다, 너.”

제논이 신경질적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액정에 엄지손톱이 부딪히며 소리가 탁, 탁 울렸다.

“다른 사이트에 로그인할 거야.”

“그러든가.”

제논은 한호성이 보는 앞에서 각종 사이트에 접속했다. 하지만 로그인에 성공한 사이트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라는 메시지만 얄밉도록 떠오를 뿐이었다.

“이럴 리가 없어. 해킹당한 거라고!”

“가입된 모든 사이트가 동시에 해킹당했다고? 이 타이밍에?”

“이 타이밍이니까! 분명 누군가 작정하고 저지른 짓이다. 아이디가 남아 있는 걸 보면 계정을 탈퇴한 건 아닌데. 비밀번호를 바꿨나? 비밀번호만 찾으면……. 아, 시발. 핸드폰 없는데. 공인 인증서도 없고.”

제논은 ‘본인 인증’ 버튼이 부모님의 원수라도 되는 양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자꾸 나를 증명하래? 소크라테스야? 여기가 무슨 고대 그리스냐고!”

“이제 그만해.”

반쯤 패닉에 빠진 제논을 지켜보는 것도 여러모로 못 할 짓이었다. 한호성 자신의 앞날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제논이 가엽기도 했다. 비록 망상 때문에 괴로워하는 중이나 그 감정만큼은 진짜일 테니 말이다.

한호성은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날 밝는 대로 병원 가자.”

“싫어. 의사가 내 말을 믿겠냐?”

“알긴 아네.”

최소한의 상식은 남아 있는 듯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호성은 제논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졸지에 양손이 붙잡힌 제논이 흠칫거렸다. 뿌리칠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는다.

“병원 가자, 제논아. 너한텐 지금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

호성은 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듯, 마음과 마음이 통하길 바라며. 하지만 제논은 코웃음 치듯 답할 뿐이었다.

“차라리 무당을 불러. 그 편이 도움 될 테니까.”

순간, ‘정말 무당이라도 불러 제논의 몸에 빙의했다는 저놈을 싹 퇴마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까지 이상해지는 중인가.’

한호성은 제논의 손을 놓았다. 애초에 그는 누군가에게 빙의 당한 게 아니라 자살을 시도한 충격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저마저 제논의 망상에 휩쓸릴 순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제논도 충격에서 벗어날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일시적으로 혼란이 와서 빙의니, 강문 4세니 하는 망상을 진지하게 믿은 걸지도 모른다.

“시간도 늦었네. 내일 촬영 있는데…….”

시계를 흘긋 돌아본 한호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안 되는 수면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도 모자랄 판에, 잠을 설치게 생겼다.

“오늘은 이만 쉬어라.”

“…….”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 방이 어딘지는 기억해?”

“집 주소 불러 줘?”

“……됐다. 일어나, 안내해 줄게.”

한호성은 제논을 일으켰다. 조금 전의 난동으로 어지러운 거실을 지나 방문을 열자, 비릿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헉…….”

웬만한 일엔 잘 놀라지 않는 한호성도 이번만큼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방 한가운데에 웬 마법진이 피로 그려져 있으면 누구라도 경악할 것이다. 하물며 그 방이 제 방이기도 하면 더더욱.

“이게 다 뭐야. 저건 촛불인가? 너, 방 안에서 촛불을 몇 개나 켠 거야? 저러다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몰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제논이란 놈한테나 따져.”

“네가 제논이잖아! 와, 저건 또 뭐야. 깨진 거울 아냐?”

방을 둘러볼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걸 다 언제 치우나.’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밀려든 탓이다. 한호성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했다.

“일단 자라. 자고, 내일 맑은 정신으로 다시 이야기하자.”

제논은 대꾸도 없이 침대에 올라갔다. 그러더니 이불을 확 뒤집어쓴다. 부모와 싸우고 잔뜩 토라진 사춘기 중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한호성은 어이없는 나머지 헛웃음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없었다.

***

자정이 갓 넘은 시각.

이주진이 돌아왔다. 그는 근래 웹 드라마의 서브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아 촬영 중이었는데, 오늘도 촬영이 예정보다 늦게 끝난 모양이었다.

“다녀왔…… 헉, 뭐 해?”

막 현관을 지나온 이주진이 흠칫했다. 거실은 어수선하고, 세 형은 음침한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주진아. 잠깐 앉아 봐.”

“왜, 왜 그래? 무섭게. 우리 무슨 일이라도 터졌어?”

이주진이 안절부절못하며 다가왔다. 한호성은 차마 ‘아무 일도 없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를 조금이나마 안심시켜 주고자 말했다.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어. 아직은……. 아마 앞으로도 알려지지 않을 거고.”

“그러도록 해야지.”

문해일이 거들었다. 이주진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세 사람을 둘러보다, 소파 옆 스툴에 털썩 앉았다.

“나 진짜 불안하니까 빨리 말해 주라. 어쩐지 요즘 이상하게 잘 풀린다 싶었어. 슬슬 안 좋은 일이 생길 때가 됐는데도…….”

함께 무명 시절을 버텨서일까. 어째 사고의 흐름이 자신과 비슷하다. 한호성은 이주진을 짠하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논에게 문제가 좀 생겼는데…….”

그가 피로 그린 마법진 위에 쓰러져 있던 일. 정황상 자살을 시도한 듯하다는 말과, 깨어난 후 자신을 ‘재벌 4세 우영찬’이라고 주장한다는 이야기까지 전하자 이주진이 경악했다.

“……뭐?”

“그렇게 됐어.”

“아, 아니. 그렇게 됐다는 게 도대체 뭔 소리야? 이해가 전혀 안 되는데.”

이주진은 설이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논리적인 성격의 설이태라면 더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리라 믿으며. 하지만 설이태는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설이태 지금 고장 났다.”

“그건 또 뭔 소리야?”

“뇌에 과부하 걸린 것 같더라고.”

“아니,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설명 좀 해 줘!”

“방금 호성이 형이 얘기한 대로라니까.”

문해일이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김제국 그 놈, 한마디로 회까닥했어. 성격도 난폭하게 바뀌었다고. 무슨 미친개 같았어.”

“마, 말도 안 돼. 이거 몰래카메라 아냐? 몰카지, 그렇지?”

숨겨진 카메라를 찾고자 고개를 격하게 두리번거리던 이주진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공중파 감은 아닌데……. 다른 것도 아니고, 자살을 소스로 몰카 찍으면 욕 들입다 먹을 텐데…….”

“진짜야.”

한호성은 힘없이 말했다.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을 하루에 두 명이나 만나니 진이 다 빠졌다. 물론 이주진의 경우, 제논이 성질부리는 걸 보지 못했으니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제논 형이 난폭해졌다고? 그 형이? 자살 시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이 말하고도 아차 싶었는지, 이주진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한호성은 그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본래 제논은 극단적으로 소심한 성격이었다. 아이돌 기준이 아닌, 일반인 기준으로도 그러했다. 함께 활동한 햇수가 4년에 다다른 지금도 멤버들과 데면데면할 정도였다.

“오히려 그런 성격이라서 확 터진 건가.”

설이태가 중얼거렸다. 그 옆에 앉은 문해일이 이를 득득 갈며 말했다.

“알 게 뭐냐?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여태껏 오냐오냐해 준 게 문제였다니까. 계속 사정 봐주니까 끝 모르고 미친 짓을 하잖아!”

“해일아, 진정하자. 제논이 들으면 어떡해.”

“들으면 뭐? 형, 솔직히 내가 틀린 말 했어? 블로그 건만 하더라도……!”

예의 사건을 언급한 순간 한호성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를 알아차린 문해일은 입을 다물었다. 제논이야 험한 말을 듣든 말든 상관없지만, 한호성이 심란해하는 건 안 될 일이었으니.

“어쨌든 이 사태를 넘길 방법부터 생각하자. 원인이 뭔진 모르겠지만, 마냥 패닉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주위가 조용해진 틈을 타 한호성이 목소리를 냈다. 그에 설이태가 답했다.

“당장 우리 활동은 어쩌지? 제논이 안무랑 곡을 기억하면 다행이지만 아까 상태로 봐선 못 할 것 같은데.”

“애초에 걔가 활동하려고 하겠냐? 원래도 일하기 오지게 싫어하던 놈인데.”

“지금은 활동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린 제논이었다. 망상증을 떠나서, 그런 제논에게 대중 앞에 서라는 건 가혹한 짓이었다.

“호성 형…….”

이쯤 되니 상황이 장난이 아니란 걸 깨달았는지, 이주진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 당분간 제논은 빠지는 거야? 팬들한텐 뭐라고 얘기하고?”

“적당한 핑계를 찾아 보자. 연습 중에 부상했다거나.”

“부상은 무대만 못 하는 거지, 라이브 방송까지 못 할 이유는 아니잖아. 차라리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하면 어때? 이건 딱히 거짓말도 아니니까…….”

“그래. 최대한 아이디어를 짜 보고, 내일 대표님께 의논드리자. 내가 대표로 다녀올게.”

입맛이 썼다. 한호성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일단은 제논의 망상을 대놓고 지적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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