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청하는 남궁세가의 가장 안쪽,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내실로 안내되었다.
지난번 도원맹에서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대접이었다. 그때는 청하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감금의 의도가 강했다면, 지금은 마치 청하를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내실에 홀로 남겨진 청하는 의자에 쓰러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청하의 입술 사이로 앓는 듯한 긴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체 언제부터일까.’
마구 휘저어 버린 것처럼 엉망진창인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런 물음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인 걸까. 제가 백진의 고백을 거절하고 주세민을 따라 도원맹에서 도망친 다음부터? 아니,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난 일일 리 없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아마 그가 청루각주 백청하의 몸으로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백진과 제갈유연은 혈마교와 손을 잡고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를 향해 충성스럽게 빛나던 눈동자, 언제나 그의 한 발짝 뒤에 서서 시중을 들던 모습, 그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짓던 얼굴, 그 목소리, 전부 다 꾸며 낸 것이 분명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 앞에 무릎을 꿇고 같이 도망가자 말했던 백진의 얼굴이, 그 절박한 눈빛이 청하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청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 한숨이 청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며 남궁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휘의 뒤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청연이 따르고 있었다. 청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빠른 걸음으로 청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던 남궁휘가 청하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남궁휘가 청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질문이었다. 청하는 도무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청하야!”
남궁휘의 뒤에 서 있던 청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궁휘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거침없이 청하를 향해 다가온 청연이 다짜고짜 청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던 청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청하는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청연을 마주 끌어안았다.
언제나와 같은 청연 특유의 청량한 향기가 청하의 코끝을 간질였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세민과 함께 도원맹에서 도망칠 때부터 청하는 두 번 다시 제가 속한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변함없는 푸른 대나무처럼 저를 따뜻하게 끌어안는 청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놓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청하는 어리광을 부리듯 청연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청연이 달래듯 부드럽게 청하의 어깨와 등을 쓸어 주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청하가 청연의 품에서 벗어나서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청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남궁휘가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선배님. 누가 봐도 모함이잖아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처음부터 선배님과 계속 같이 다닌 저희는 모를 수 없어요. 그리고 저는…….”
남궁휘의 아름다운 눈매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사백진, 그자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청하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청하가 청연을 돌아보았다.
“사형께선 백진에 대해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으십니까?”
분명 청연은 백진에 대해 그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청연과 백진이 유달리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청연이 망설이는 얼굴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백진이 예전에 네 수련을 방해하여 네가 주화입마에 든 적이 있었다. 그 일로 너는 내공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
“네, 백진에게 들었습니다.”
청연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백진이 그 일을 청하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에 놀란 모습이었다. 그러나 청연은 자세한 내막은 더 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때의 너는 백진이 고의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지. 물론 어떤 증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심증뿐이었어. 그 이후로 너는 백진을 경계하며 그 녀석을 곁에 두지 않았단다. 하지만 네가 기억을 잃은 후에는 그 일 역시 잊어버린 듯해, 나도 굳이 그때의 일을 말하지는 않았지.”
청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역시 청연이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청하는 제 앞에서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지난날의 잘못을 고백하던 백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초조하고 절박해 보이던 눈빛으로 함께 도망가자고 속삭이던 그 목소리. 백진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갑작스레 청하의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때, 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굳은 얼굴의 제갈서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문 채 제갈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여유롭고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던 제갈서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하 역시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제갈서윤의 심각한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청하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갈서윤이 먼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세민의 행방을 알아냈다.”
청하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제갈서윤 쪽으로 몇 발자국을 내디뎠다.
“대체 어디…….”
미처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청하의 말끝이 잘게 흔들렸다. 제갈서윤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가 제갈세가의 본관으로 데려가라 지시하셨다는데, 아무래도 정확한 목적지는 다른 곳 같더군.”
굳어 있는 청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갈서윤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절멸옥.”
* * *
제갈유연은 서생의 옷처럼 펄럭이는 긴 소맷자락을 정리하며 힐끗 문간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백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문간에 기대서서는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런 백진의 모습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피던 제갈유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각오는 된 거겠지?”
백진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바깥을 살피던 시선을 돌려 제갈유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백진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갈유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런 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스승을 고발했으니, 이제 저자들도 네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네 스승과, 네 문파와 척을 질 각오는 된 거겠지?”
백진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시금 무심한 시선을 돌려 바깥을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제갈유연은 그런 백진의 표정을 집요하게 살피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만약 네가…… 네 스승에게 행여나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는 가주님은 준비되셨습니까.”
백진이 제갈유연의 말을 중간에서 끊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가주님 편을 들었으니, 저와 가주님 사이에 무언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금방 눈치챌 겁니다.”
제갈유연은 입술을 비틀었다. 제갈유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껏해야 짐작뿐이겠지. 저들이 어찌 진실을 알겠느냐.”
제갈유연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품은 채 백진을 향했다. 백진 역시 그와 똑 닮은 옅은 갈색 눈동자로 제갈유연의 시선을 받아쳤다. 언제나 충성스러운 강아지처럼 유순하고 부드러운 빛을 품고 있던 갈색 눈동자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자, 놀랍도록 제갈유연의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와 비슷해 보였다. 제갈유연은 그런 백진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갈유연의 입가에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 많은 자식들 중에 나와 가장 닮은 녀석이 하필…….”
그러나 백진은 제갈유연의 혼잣말을 무시한 채 다시금 바깥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남궁세가는 스승님을 내줄 마음이 없습니다.”
백진의 시선 끝에는 엄중한 보호를 받고 있는 남궁세가의 본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안쪽, 가장 깊은 내실에는 바로 청루각주 백청하가 있었다.
제갈유연도 그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제갈유연이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청루각주는 우리의 계획에 반드시 필요해. 예전 무림맹에서 보관하던 혈석 한 개로 천마강림을 시도했다가 철저하게 실패했던 기억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그때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해.”
“하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되지 않았습니까.”
백진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허공을 향해 턱짓을 하며 말했다.
“분명 마교의 장로가 보내온 전갈에는 그리 적혀 있었을 텐데요.”
제갈유연은 즉시 백진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제갈유연이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강재헌이 여러모로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지만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지. 하지만 주세민은 이미 그곳으로 옮기고 있는 중이다.”
제갈유연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세민을 그곳으로 데려가면…… 청루각주 역시 분명 그곳으로 올 테지.”
제갈유연은 말을 마치며 다시금 백진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백진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은 채 그저 남궁세가의 본관 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갈유연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제갈유연은 백진에게서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재헌에게 보낼 전갈을 쓰기 위해 분주해진 제갈유연을 뒤에 두고, 백진은 팔짱을 낀 채 청하가 있는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짙은 빛을 띤 채 가라앉았다.
“내가 제갈세가로 가야겠어.”
청하가 마침내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남궁휘와 청연, 그리고 제갈서윤은 저도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남궁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먼저 청하가 제갈서윤을 휙 돌아보았다.
“네 말을 믿어도 되겠지.”
제갈서윤이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내놓은 자식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선배님, 이자를 믿으시는 건가요?”
남궁휘가 경계의 눈빛으로 서윤을 바라보았으나, 서윤은 당당하게 남궁휘의 시선을 받아쳤다.
“뭐, 아버지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내가 어느 정도 눈치채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아버지가 혈마교 녀석들과 관계가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어.”
제갈서윤이 똑바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남궁휘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이제 와서 나를 속일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내가 제갈세가로 가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정말…… 그리하실 겁니까, 각주님.”
청연이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세민 때문만은 아닙니다, 소각주. 제갈세가가 혈마교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저들의 실체를 밝히고 정파 연합의 협조를 얻으려면 어떻게든 그곳에서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아까 전에도 보셨듯이,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정파 연합은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청연이 여전히 낯빛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청하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제 앞에 있는 남궁휘와 청연, 그리고 제갈서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청하가 느릿하게 말했다.
“위험하다는 것은 잘 압니다. 만일 저와 함께하고 싶지 않다면 괜찮으니 소각주께서도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지만…….”
말끝을 흐린 청하는 힘주어 말을 맺었다.
“전 혼자라도 반드시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힐끗 서로를 향했다.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곧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시작했다.
다음 날, 남궁세가의 넓은 앞마당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으나, 미동도 없이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 그들 사이로는 긴장 어린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청하는 제갈세가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서 있는 제갈유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백진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제 스승을 고발한 그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봤자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테니 현명한 선택이었다. 청하와 제갈유연은 침묵 속에서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첨예한 대립이 있은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청하가 순순히 제갈세가로 가겠다고 한 것은 꽤나 의외의 일이었다. 하유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림맹주를 불러들여 논의를 재개하기로 하지 않았나?”
“맹주가 출타 중이라니 어쩔 수 없지. 남궁세가에는 더 이상 폐를 끼치기 어려우니 그토록 나를 데려가고 싶다는 제갈세가로 못 가 줄 것도 없지 않겠나.”
하유신은 찝찝한 표정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으나 청하는 더 이상 유신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청하가 남궁서련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려 공수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편의를 보아 주신 점, 잊지 않겠습니다.”
남궁세가에게는 고마운 것이 많았다. 청하는 진심을 담아 머리를 숙여 보였다.
남궁서련은 별다른 말 없이 물끄러미 청하를 바라보았다. 남궁서련의 시선이 제 옆에 서 있는 남궁휘에게로 잠시 향했다가 청하의 뒤에 있는 제갈세가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남궁서련은 신중하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유신 정도를 제외한다면, 청하가 제 나름의 꿍꿍이를 위해 제갈세가로 가려 한다는 사실은 이미 그곳에 있는 모두가 다 눈치채고 있었다. 제갈세가에서 모른 척 그것을 받아들인 것 역시 그 나름의 계획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청하와 제갈유연은 서로가 서로에게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겉으로는 모른 척 입을 다문 채 상대방의 생각을 읽으려 애썼다.
“다른 분들은 같이 안 가십니까? 소각주라든가…….”
제갈유연이 점잖은 척 태연한 말투로 먼저 운을 떼었다. 청하 역시 속내를 감춘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만 가겠습니다.”
어차피 다른 이들은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청하의 뒤를 따를 것이다. 제갈유연의 입술 끝이 잘게 비틀렸다. 그 역시 청하가 말은 그렇게 해도 정말로 홀로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청하는 그 말을 끝으로 많은 의혹 어린 시선들과 걱정스러운 눈빛을 뒤로한 채 제갈세가의 사람들과 함께 어검에 올랐다.
어쨌든 청하는 아직 공식적으로는 죄인도 아니었고 오히려 제갈세가의 손님에 해당하는 입장이었으나,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마치 희대의 범죄자라도 압송하는 것처럼 엄중하게 청하를 겹겹이 둘러쌌다. 청하는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묵묵히 검을 타는 것에만 집중했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제갈세가의 본관이 있는 영주에 다다랐다. 거대한 장원의 뒤쪽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이 왜인지 청하의 눈길을 잡아 끌었다. 제갈유연은 청하를 별관으로 안내하며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이곳에서 대기하십시오.”
청하는 웬만해서는 별로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나, 도무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청하가 별관을 나서려는 제갈유연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주세민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갈유연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제갈유연이 눈썹을 치켜올린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자를 데리고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청하의 초조한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침묵 속에서 청하를 바라보던 제갈유연이 마침내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로 마교주가 그리도 특별한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제 청하도 그다지 예의를 차리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제갈유연이 청하를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하긴, 이리도 순순히 이곳까지 온 것도 그자를 찾기 위해서겠지. 그리도 그자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소원대로 그에게 데려다주겠다.”
제갈유연이 차갑게 다음 말을 덧붙였다.
“준비가 다 끝나면.”
그리고 제갈유연은 그대로 청하를 별관에 가둬 둔 채 밖으로 나갔다.
청하는 이제 거의 익숙한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 어딘가에 갇힌 것만 세 번째였다. 도원맹과 남궁세가, 그리고 마지막 이곳 제갈세가까지. 아니, 사실 그 전에 주세민에게 납치된 적도 있으니 네 번째인가.
청하는 대충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제갈유연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준비가 필요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이쪽도 준비를 마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렸다. 청하는 긴장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내게 찾아올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설마 벌써 제갈유연의 그 ‘준비’라는 것이 다 끝난 건가?
그러나 문이 열린 뒤에 보인 얼굴은 청하에게도 지나치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청하의 안색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백진.”
백진은 침착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청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 천천히 제게 걸음을 옮기는 백진의 모습을 경계하듯 빤히 바라보았다. 백진이 단정한 입술을 움직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스승님.”
청하는 백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처럼 백진과 마주 보고 선 채 그의 절절한 고백을 들었던 때가 고작해야 며칠 전이었는데, 마치 전생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아득했다.
“왜……?”
청하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첫마디는 바로 그것이었다. 왜? 대체 어째서?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가만히 청하를 향했다. 백진이 조용히 말했다.
“어째서겠습니까?”
청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청하가 믿기 어렵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내가……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랬다는 것이냐?”
백진은 침묵했다. 청하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정말 그것 때문이란 말인가? 청하가 백진의 고백을, 그 절절한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청하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너는 이미 한참 전부터 저들의 편에서 행동하였던 것이 명백한데, 어째서 그게 이유가 되지?”
백진이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얌전히 눈을 깜빡이고 있는 그 단정한 모습은 또 언제나와 같이 그가 익히 알고 있던 다정하고 충성스러운 수석 제자의 모습이라, 청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복잡해졌다. 백진은 눈을 내리깐 채 잘 들리지도 않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분명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뭐라고?”
청하가 물었으나 백진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백진의 눈빛에 어린 창백하고 음울한 기운은 예전에는 볼 수 없던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백진의 인상은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청하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백진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백진이 청하 쪽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차피 이제 와서야 전부 부질없는 일입니다.”
청하는 점점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백진을 바라보며 천천히 뒤로 한 발짝씩 물러났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 청하의 등골을 따라 흘러내렸다. 청하는 알 수 없는 압박감 속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까지 멈칫거리며 뒷걸음질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하의 뒤가 벽으로 가로막혔다. 청하의 앞에 바짝 다가선 백진이 청하의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백진이 청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왜 그렇게 긴장하셨습니까?”
청하는 대답하지 않은 채 저도 모르게 문 쪽을 힐끗거렸다. 초조한 기분에 절로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 젠장, 아직 시간이 되려면 꽤나 먼 것 같은데……. 청하는 일단 백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백진이 살짝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왜 스승님께 무슨 짓을 하려 한다 생각하십니까?”
네 눈빛이 지금 완전 맛이 갔으니까 그렇지! 청하는 속으로 그런 말을 삼키며 백진을 노려보았다. 백진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청하의 뺨을 감쌌다. 청하는 매몰차게 손을 쳐낼까 하다가 그냥 입을 꾹 다문 채 백진을 내버려 두었다. 부드럽게 청하의 뺨을 쓰다듬던 백진이 천천히 청하를 향해 몸을 숙였다. 백진이 청하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스승님.”
백진의 뜨거운 숨결이 청하의 뺨을 간질였다.
“그자와 둘이서 그렇게 도망가신 뒤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청하는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백진의 눈동자가 짙은 빛을 머금은 채 어둡게 번뜩였다. 다음 순간, 백진의 입술이 청하의 입술을 삼키듯 거칠게 뒤덮었다.
청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백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청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거침없이 청하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러나 부드러운 입술을 헤치고 안쪽 점막을 문지르는 혀는 예전과는 달리 정중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쫓기는 듯한 조급함을 띠고 있었다.
청하는 순간적으로 당황 속에서 몸을 굳혔으나, 최초의 충격이 지나가자 목덜미에 열이 확 솟구쳤다. 분노로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청하는 거칠게 백진을 밀어내었으나 백진의 단단한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청하는 제 입 안을 헤집는 혀에 이를 세웠으나, 백진의 혀를 물어뜯기 직전, 백진이 재빨리 청하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청하가 이를 악문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백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청하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백진이 다시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자와 무엇을 하셨느냐고 여쭈었습니다.”
백진이 옆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뚫어질 듯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진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젖어 있는 청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그자와 입 맞추셨나요?”
백진의 손이 천천히 청하의 입술에서 미끄러졌다. 청하의 옷깃을 따라 더듬어 내려가던 손이 청하의 옷자락을 매만졌다.
“아니, 그 정도만 했을 리가 없지…… 그 전에도 그토록 뻔뻔스럽게 스승님을 탐했던 자인데. 그자가 여기도 만졌나요?”
옷 속으로 파고든 손이 청하의 가슴께를 지분거렸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백진을 노려보았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백진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청하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백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니면, 여기도?”
“닥쳐.”
청하가 씹어 뱉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치심과 분노로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백진이 순진한 듯한 얼굴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번 남궁세가에서 보니, 스승님께선 여인의 복장을 하고 계시던데…… 그자와 부부놀이라도 하신 겁니까?”
“백진.”
“대체 그자는 되고 저는 안 되는 이유는 뭐죠?”
백진이 청하의 말을 자르며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백진이 청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순간적으로 청하의 숨이 턱 하고 막혀 올 정도의 강한 힘이었다. 백진은 청하를 바라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가 먼저 스승님을 뵈었습니다. 제가 먼저 곁에 있었고…… 제가 먼저 스승님을 모셨습니다. 제가 더 충성스러웠고, 제가 더 스승님을 위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는 안 되고 그자는 되는 겁니까? 어째서 그자를 선택하신 겁니까?”
청하는 말문이 막혔다. 백진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청하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백진의 눈동자는 이제껏 청하가 본 적 없던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집착과 절박함과 애절함과 광기로 번뜩이는 눈동자는 오싹했으나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운 느낌을 주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무엇이라도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청하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막상 입을 떼어도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백진은 여전히 뚫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자포자기하듯 말을 이었다.
“나도 몰라.”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에는 이유가 없었다. 어떤 것은 그저 운명처럼 그렇게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결국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하는 세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유도 모르고 설명할 수도 없지만, 어쨌든 그곳에 존재하는 감정이었다. 어느샌가 눈치채지도 못하는 가운데 서서히 스며들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를 키운 감정이었다.
세민을 생각하는 청하의 얼굴이 어느샌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미묘한 변화였으나 청하의 얼굴만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던 백진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백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
다음 순간, 백진이 청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거칠게 이를 박아 넣었다. 그와 동시에, 백진의 손이 거칠게 청하의 옷자락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백진이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께서 끝내 제게 마음을 주지 않으신다면, 좋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해도 스승님께서 저를 선택하지 않으신다면, 그렇다면 저도 제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청하는 당황한 눈으로 백진을 바라보았다. 백진의 눈에서 번뜩이던 난폭한 빛이 더욱 강해졌다. 청하는 백진이 한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자식이 진짜……. 청하가 노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날 강제로 어떻게 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그자도 강제로 하지 않았습니까?”
백진이 차갑게 받아쳤다. 청하는 말문이 막힌 채 백진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가 알던 다정하고 충성스럽던 제자는 그곳이 없었다. 상처받고 거절당한 채 제 감정만을 밀어붙이는 문파의 배신자만이 그곳에 있었다.
청하는 비통한 감정으로 거칠게 제 옷을 벗기는 백진을 내려다보았다. 거침없이 옷자락을 헤친 백진의 손이 청하의 맨살에 닿았을 때, 청하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영기가 그대로 백진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콰쾅!
백진이 충격에 밀려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났다.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일격에 백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애써 내공으로 각혈을 내리누르고는 있었지만, 내부의 타격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았다. 백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분명 오늘은 영기를 받지 못했을 텐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지금의 청하는 꼼짝없이 내공을 운용할 만한 영기가 남아 있지 않아, 일반인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태였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청하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는 백진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청하 역시 속으로 놀라움을 삼키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가운 눈으로 백진을 노려보았다. 청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강한데? 세민에게서 받았던 영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을 줄이야.’
세민의 영력이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이 몸의 기운이 세민과 잘 맞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청하는 며칠 전 세민에게서 받았던 영기로 아직 내공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밤을 꼴딱 새우며 새벽까지 어마어마한 영기를 받았으니 그 효과를 보는 걸지도……. 저도 모르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청하는 뺨이 약간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애써 백진을 노려보았다. 청하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자, 봤겠지? 함부로 내게 손을 대었다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천하의 주세민과도 제법 호각으로 다투었던 청하였다. 영기가 버텨 주는 한, 백진이 그에게 손을 대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백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백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티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확실히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세민의 영기가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영기를 펑펑 날려 대다가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청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싸늘하게 백진을 바라보았다.
“글쎄, 그거야 보면 알겠지.”
청하는 여유 있는 척 오만한 표정으로 백진을 바라보면서도 속으로는 초조하게 바깥의 동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휘나 청연이 등장한 낌새는 아직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청하와 백진은 서로를 바라본 채 한동안 대치했다. 청하는 안쪽 입술을 아프도록 꾹 깨물었다. 아, 여기서 백진이 끼어들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대체 어쩌지?
그때, 귀청을 찢을 듯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있던 건물이 흔들렸다. 청하와 백진은 동시에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백진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서렸다.
“이게 무…….”
다음 순간, 다시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그들이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청하는 놀란 눈으로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고 복면을 쓴 수십 명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주세민이 부하들을 이끌고 구하러 온 건가, 하는 생각이 청하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복면 사내들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굳은 표정의 류재겸이었다.
류재겸은 방 안을 슥 훑어본 것만으로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류재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요.”
백진이 즉시 검을 뽑아 들었으나, 수십 명의 마교원들과 마교의 장로 류재겸을 그 혼자서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올 때까지 버틴다면 조금 승산이 있을 수도 있었으나, 류재겸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류재겸은 즉시 검을 들어 무시무시한 기세로 백진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백진은 검을 들어 재겸의 공세를 막아 내었으나 여기서 진지하게 재겸과 검을 겨룰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백진은 낮게 혀를 차며 검을 뒤로 빼고는 마지막으로 청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다음 순간, 백진은 빠르게 별관을 빠져나가 검에 올라타서는 그대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멀어지는 백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청하의 가슴이 이상하게 술렁거렸다. 씁쓸한 감정이 청하의 속을 심란하게 헤집었다. 비로소 무언가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이, 그가 알던 백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 청하의 가슴에 아프게 와 닿았다.
청하와 함께 별관을 빠져나온 류재겸이 청하를 향해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챙겨 두십시오.”
청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재겸이 내민 것은 바로 창천검이었다. 청하는 얼떨결에 검을 받아들고는 재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을 어떻게……?”
마지막으로 창천검을 쥐었던 것은 도원맹에서였다. 분명 그때 검도 빼앗겼었는데……. 재겸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곳, 제갈세가의 본관에서 보관하고 있더군요.”
청하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지? 검은 어떻게 빼내고?”
“지금 이곳에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재겸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곳 전체가 텅 비어 있는 것 같군요.”
청하의 시선이 문득 주변을 향했다. 그제야 청하는 이 넓은 장원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분명 제갈세가에도 남궁세가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대체 전부 다 어디로 간 거지?
순간, 무언가 오싹한 느낌이 청하의 뇌리를 스쳤다. 지금까지 그들이 마주쳤던 그 수많은 흑마부대들…… 그것들은 원래 전부 인간이었다. 그 많은 흑마부대를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흑마부대의 ‘재료’는 전부 어디서 조달했던 걸까.
청하가 불길한 상상을 하고 있는 사이, 재겸이 빠르게 말했다.
“교주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청하는 애써 꼬리를 무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쓰며 말했다.
“이 근처에 절멸옥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있다고 들었다.”
재겸이 눈살을 찌푸렸다. 절멸옥의 위엄은 그 역시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미 잊혀진 지 오래인 그곳에 왜 세민을 끌고 간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청하가 말을 이었다.
“남궁휘와 청연, 그리고 제갈서윤도 각자 준비를 끝내면 그곳으로 오기로 했다. 그 전에 나를 데려가려 했지만…… 이제 그 부분은 필요 없겠군.”
“준비?”
재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청하는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어쨌든 덕분에 시간을 조금 벌었으니 빨리 그곳으로 가도록 하지.”
재겸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곧 그들은 검은 구름으로 모습을 감싼 채 재빨리 허공으로 사라졌다.
절멸옥은 일종의 거대한 동굴이었다.
청하는 이곳의 모습을 보자마자 비무대회에 참가하러 가던 중 흑마부대와 처음으로 마주쳤던 양산의 동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양산의 동굴은 의도적으로 이곳의 모습을 베껴서 만들어 낸 실험장이었을지도 몰랐다.
절멸옥 입구에는 몇몇 제갈세가의 사람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나 류재겸과 함께 온 마교원들 몇 명만으로도 손쉽게 제압이 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청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많은 흑마부대는 전부 어디에 있지?’
지금까지 혈석을 회수하는 데에 동원된 흑마부대만 해도 기백은 될 것이었다. 그들 중 일부만 입구에 깔아 놔도 만만찮은 전력이었을 텐데, 흑마부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었다. 류재겸이 청하를 향해 물었다.
“들어갈 겁니까?”
잠시 망설이던 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우선은 세민의 상태가 어떨지 너무 걱정이 되어 그것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류재겸은 두 번 다시 묻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청하의 뒤를 따랐다. 망을 보기 위해 나머지 마교원들을 입구 쪽에 남겨 둔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절멸옥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양산에서처럼 결계라도 쳐져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청하는 어딘지 낯익어 보이는 동굴 속 통로를 따라 쭉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양산에서도 분명 이런 동굴이 있었지. 정말 구조가 똑같네.’
그때처럼 쭉 뻗은 통로는 널찍한 광장 같은 곳으로 이어졌다. 광장 안쪽으로는 절멸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감옥으로 쓰였음직한 여러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안쪽에서는 기괴한 소음이 들려왔다. 흑마부대 특유의 바닥을 끄는 듯한 발걸음 소리였다. 청하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했던 흑마부대는 전부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청하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주세민……!’
널찍한 광장의 한복판에는 거대한 제단 같은 것이 놓여 있었고, 섬뜩한 붉은 가면을 쓴 자들이 제단 주변을 돌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의 한가운데에는 온몸이 결박되어 있는 주세민이 있었다.
꽤나 고초를 겪은 듯 몸 여기저기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주세민은 반쯤 정신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청하는 초조한 표정으로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안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옆에서 류재겸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무언가를 소환하는 진 같군요.”
그제서야 청하는 세민이 놓여져 있는 제단 주변 바닥에 넓게 그려진 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의 동굴 안에 있는 광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한 진이었다. 진의 동서남북 네 가장자리에 놓인 붉은 혈석에서 불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로 거대한 진은 청하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청하는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진의 모양이 꽤나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지난번 화룡성에서 탐욕에 미친 곽 가주가 어린아이들을 제물 삼아 그렸던 진과 무척 닮아 있었다.
‘역시 그때의 일도 혈마교가 개입했었던 것이 맞았군.’
청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광장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화룡성에서의 진도 제물을 필요로 했으니, 지금의 저 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제물이라면…….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주세민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때, 제단의 옆에 서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청하는 제갈유연의 익숙한 얼굴이 보이자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제갈유연의 옆에는 처음보는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제갈유연과 심각한 목소리로 진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의 허리춤에는 역시 피처럼 붉은 가면이 걸려 있었다. 청하의 옆에서 류재겸이 앓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역시 강재헌 저자가…….”
배신자를 보는 듯한 류재겸의 눈빛이 예리한 칼날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검 손잡이를 움켜쥔 류재겸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류재겸의 흉흉한 눈빛을 보며 청하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안쪽에 있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청하는 백진의 딱딱한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절멸옥에 도착한 백진이 제갈유연을 향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청루각주가 탈출했습니다.”
제갈유연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그새 그자를 놓쳤단 말이냐?”
“어차피 이곳으로 올 겁니다.”
백진이 별다른 표정 없이 말했다. 제갈유연이 세민을 향해 차갑게 몸을 돌렸다.
“글쎄, 그러기를 바라야 할 거다. 이제 와서 계획이 어그러지면 곤란하니.”
“우선 마교주라도 빨리 제물로 바치는게 좋겠군요.”
강재헌이 세민 쪽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어차피 의식이 시작되면 천하의 청루각주라 하더라도 어쩌지 못할 테니.”
청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들이 정확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대로 세민이 제물로 바쳐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청하는 창천검을 움켜쥐며 류재겸을 향해 말했다.
“일단 저들을 저지하겠어.”
사실 진을 둘러싸고 있는 혈마교원들과 뒤쪽에 있는 흑마부대까지 생각하면, 청하의 행동은 실로 무모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언가를 신중하게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단 당장 저들의 행동을 멈춰야 했다.
청하의 말을 들은 류재겸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가 창천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류재겸이 품 속에서 호각을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동굴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바깥에 있는 마교원들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창천검에서 곧게 뻗어나간 영기가 곧장 제단 근처에 있던 세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쾅!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세 사람은 재빨리 몸을 날려 청하의 영기를 피해내었다. 제단 주변을 돌고 있던 붉은 가면을 쓴 혈마교원들이 순식간에 대형을 갖추는 것이 보였다. 청하가 날려 보낸 영기는 정통으로 바닥에 그려진 진에 내려꽂혔으나, 그 순간 영기는 그대로 빨려 들어가듯 진에 흡수되어 버렸다. 제갈유연이 싱긋 미소 지으며 청하를 바라보았다.
“역시 청루각주로군. 우리의 예상이 빗나가진 않았던 모양이야.”
청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진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진을 망가뜨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세민을 제단에서 끌어내어 이곳에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청하가 창천검을 굳게 움켜쥔 채 진 안쪽으로 한 발짝을 내딛은 순간, 제갈유연이 말했다.
“제물들을 풀어 줘라.”
제물이라니, 그건 주세민이 아닌가? 청하가 멈칫하는 사이, 세 사람은 재빨리 진의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강재헌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원맹에서 들어 본 적 있던 바로 그 소리였다.
다음 순간, 뒤쪽의 감옥에 모여 있던 흑마부대가 낮은 울부짖음과 함께 빠르게 청하를 향해 짓쳐들기 시작했다. 청하는 이를 악문 채 검을 휘둘러 보았으나, 창천검에서 튀어나간 영기는 몇몇 흑마부대의 발걸음을 느리게 했을 뿐,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정파의 고수들 몇십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막을 수 없었던 흑마부대였다. 청하 혼자서 그들을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청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선녀의 날개처럼 촘촘한 그물들이 흑마부대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흑마부대는 몸을 뒤틀며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그물에 닿은 그들의 몸에서 순식간에 마기가 빨려 나가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청하는 환희에 가득 찬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선배님!”
남궁휘가 검을 든 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남궁휘의 뒤에서 청연과 제갈서윤의 얼굴도 보였다. 남궁휘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네요.”
“곤선망은?”
“보시다시피 성공이에요.”
남궁휘의 자랑스런 목소리를 들으며 청하는 그물에 걸려 몸부림치고 있는 흑마부대를 힐끗 바라보았다.
곤선망은 청하도 한번 당한 적이 있던 남궁세가의 법기였다. 원래 영기를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그것을 개조하여, 영기 대신 마기를 흡수하도록 바꾼 것이다. 남궁휘와 청연, 제갈서윤까지 매달려 간신히 늦지 않게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청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빠르게 말했다.
“나를 엄호하도록.”
다수의 흑마부대는 곤선망에 걸려 있었으나, 몇몇 그물을 벗어난 흑마부대와 혈마교원들은 아직 건재했다. 남궁휘와 청연, 제갈서윤은 각자 검을 뽑아 들어 혈마교와 흑마부대를 상대하기 시작했고, 류재겸의 신호에 맞추어 안으로 들이닥친 마교원들 역시 혼신의 힘을 다 해 그들을 제압해 갔다. 그리고 청하는 그 어지러운 혼전을 뚫고 주세민을 향해 곧장 달려갔다.
다행히 곤선망과 지원군 덕택에 청하는 목이 잘리거나 가슴을 꿰뚫리지 않고 무사히 세민이 놓여 있는 제단에 다다를 수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세민은 화룡성의 어린아이들처럼 약에 반쯤 취한 듯한 모습이었다. 세민을 결박하고 있는 끈은 마기를 억누르는 법기처럼 보였으나, 다행히 창천검의 영기를 이겨 내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청하는 반쯤 정신을 잃고 있는 세민을 일으키며 외쳤다.
“이봐, 정신 차려! 주세민!”
그렇게 외치면서도 청하는 정말로 세민이 제 말에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민은 스르르 눈을 뜨며 청하를 바라보았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를 가리고 있던 반지는 벗겨졌는지, 그의 눈빛에는 예전처럼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세민의 입술 사이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청하?”
“그래, 나야.”
청하가 다급하게 외쳤다. 청하는 세민의 얼굴을 붙잡고 빠르게 말했다.
“일어설 수 있겠어? 빨리 도망쳐야 해.”
그러나 세민은 여전히 반쯤은 멍한 것 같은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뭐?”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세민을 보며 청하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널 구하러 왔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빨리…….”
“날 구하러 왔다고?”
세민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청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왜? 왜…… 도망가지 않은 거지?”
청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약간 멍한 빛을 띤 채 빤히 청하를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의 세민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무방비하고 연약하며 또 솔직한 모습의 세민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청하는 이를 악물었다. 울컥하는 감정이 청하의 안에서 솟구쳐 올랐다. 도망이라니,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청하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도망가지 않아.”
세민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녀석은 대체 자기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청하는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올려 세민의 뺨을 감쌌다. 청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특히 ‘너’를 두고는, 절대 도망가지 않아.”
청하의 입술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너는……. 너는…….”
청하의 말끝이 흐려졌다. 지금 이곳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제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다. 그런 강렬한 예감이 청하의 등을 떠밀었다. 청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말을 이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순간, 바닥에 깔린 진에서 눈부신 흰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진에서 우웅, 하는 낮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흑마부대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혼전을 거듭하던 사람들은 순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이 청하의 뇌리를 스쳤다. 소름 끼치는 듯한 쎄한 감각이 청하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청하의 절박한 시선이 세민의 시선과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청하의 얼굴을 본 세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청하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진에서 터져 나온 흰빛이 순식간에 청하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청하의 몸은 눈부신 흰빛에 둘러싸여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진의 가장자리로 물러나 있었던 제갈유연의 입에서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갈유연은 유서 깊은 명문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제 가문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때 강호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문세가였던 제갈세가는, 몇 대 전부터 느리지만 확실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청루각과 도원맹 같은 문파의 득세와 강주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남궁세가의 부상으로, 한때 정파의 맹주라 불리었던 제갈세가의 위명은 세월 속에 빛이 바래 가고 있었다. 시원치 않은 후계자들과 날이 갈수록 말라 가는 자금력, 줄어드는 가솔들과 점점 후퇴하는 무공으로 인해 제갈세가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런 제갈유연의 앞에 붉은 가면을 쓴 강재헌이 나타난 것은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강재헌이 말하는 그럴싸한 혈마교의 장밋빛 약속들을 전부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것들 중 한 가지는 제갈유연의 관심을 끌었다. 그것은 바로 천마강림을 통한 세계 질서의 재편이었다.
강재헌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이 땅에 천마님이 강림하면 온 세상은 피에 씻겨 나가고, 그분의 뜻이 실현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새로운 세상?”
“그분을 섬기는 우리 혈마교와 그분의 숭배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지요.”
제갈유연은 그것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몇 년에 걸쳐 은밀히 흑마부대를 재건하고 정파연합 곳곳에 밀정을 심어 두었다. 제갈유연의 서자인 백진 역시 청루각에 밀어 넣은 밀정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몇 년에 걸친 신중한 공작 끝에 드디어 천마 강림을 위한 준비를 거의 끝마친 그들은, 몇 달 전 무림맹주를 구워삶아 무림맹에서 보관하던 혈석을 빼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혈석을 이용한 천마강림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이 준비한 ‘그릇’에 천마가 강림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혈석의 개수가 모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고작 혈석 한 개로 천마를 강림시킨다는 것이 턱도 없는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곧장 나머지 혈석들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으나, 그 과정에서 청루각주 백청하의 몸에 이세계의 영혼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정말 뜻밖의 수확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제갈유연은 환희에 몸을 떨었다. 왜냐하면, 이세계의 영혼이 빙의한 육신이란 정말이지 말 그대로…….
‘천마를 위한 완벽한 ‘그릇’이다.’
제갈유연은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빛을 뿜어내는 소환진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시린 눈동자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으나, 제갈유연은 그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내공을 이용해 안력을 돋운 제갈유연은 환한 빛이 터져 나오는 소환진의 한복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소환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강해지며, 진 위에 서 있던 흑마부대가 하나둘씩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제갈유연은 그 또한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흑마부대라는 것은 천마에게 바쳐지기 위한 제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흑마부대는 소환진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 타들어 가며 불타오르는 진에 더더욱 힘을 보태 주었다. 온 세상이 타 버릴 것 같은 빛의 폭풍이 몰아치고 어둡고 추레한 동굴 안에 마치 두 번째 태양이 떠오른 듯 눈부신 광휘가 내려앉았다.
순간, 강력한 힘의 파도가 소환진의 중앙을 중심으로 마구 퍼져 나갔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폭발할 것 같은 빛의 한복판에서, 청루각주 백청하가 서서히 눈을 떴다.
태양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는 마치 피처럼 붉은 색깔이었다.
* * *
청하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완벽한 무(無)의 공간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그 한복판에서, 청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청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순간, 강한 기시감이 청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곳은 분명 낯이 익었다. 대림현에서 흑마부대의 습격을 받아 청하가 한 번 ‘죽었을’ 때, 그때도 분명 청하는 이런 곳에 있었다.
“그래, 제법 상황 파악이 빨라졌군.”
무심한 듯 냉랭한 목소리가 청하의 뒤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청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청하의 입이 벌어지며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온통 새하얀 공간에 이질적으로 우뚝 서 있는 존재는 별다른 표정도 없이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는 멍한 표정으로 저를 빤히 응시하는 ‘주세민’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어째서…….
지난번에 그는 분명 ‘백청하’의 얼굴로 청하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세민’과 똑같은 모습의 인영이었다.
‘주세민’은 무표정한 얼굴을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 청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세민과 정말 꼭 닮은 얼굴이긴 했으나, 이 ‘주세민’에게는 어떻게 보아도 인간이라 할 수 없을 정도의 이질감이 감돌았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청하를 향했다. ‘주세민’의 잘생긴 입술이 천천히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내가 지난번에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로군. 내가 분명 인간 앞에 나타날 때는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로 나타난다 했을 텐데.”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멍하던 청하의 눈빛에 순식간에 빛이 돌았다. 청하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주세민은? 그는 괜찮나요?
‘주세민’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살짝 고개를 기울인 얼굴로 청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 같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에는 섬뜩한 스산함마저 감돌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중요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제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거예요!
“글쎄, 내가 세상에 강림한다면 개개인의 안위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될 텐데.”
순간적으로 청하의 말문이 턱 막혔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주세민’의 얼굴을 한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청하의 머리가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청하가 운명을 어그러뜨렸다는 이유로 그를 없애려 했던 지난번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신이…… 천마인 건가요? 내가 운명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이런 파국을 맞이하게 된 건가? 청하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주세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세민’의 잘생긴 입술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너는 운명이 뭐라고 생각하지?”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청하는 말문이 막혔다. 운명이라……. 원작소설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청하는 우선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꺼냈다.
주세민을…… 남궁휘와 이어 주고…….
그러나 청하의 말은 거기서 사그라들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 세민을 마음에 품고 말았다는 양심의 가책이 청하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네 운명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내 운명…….
청하는 당연히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야기상에서는 비무대회 이후로 청루각주 백청하의 등장이 없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그 뒤에 그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원작대로 이 이야기에서 퇴장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을지도. 바로 그것 때문에 지난번 대림현에서 천마가 개입해 그를 죽여 버리려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대체 어떻게 ‘퇴장’한단 말인가? 소설과는 달리 이곳은 그의 ‘현실’이었고, ‘현실’에서 퇴장하는 법 따위는 없었다. 소설 속 엑스트라도 그들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법이고, 청하는 그저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을 뿐이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잘못이었단 말인가? 어쩌면 지난번처럼 ‘주세민’의 발치에 매달려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한 번만 살려 달라고 빌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청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눈앞의 ‘주세민’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불쑥 솟아오른 오기가 그의 가슴속에서 울컥거리며 차올랐다.
그는 그저 천재지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떨어졌을 뿐이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청루각주 백청하인 척 연기하고 이런저런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해 왔지만, 어쨌든 청하는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해 왔다. 만일 그가 제대로 운명을 따라가지 않는 바람에 결국 천마가 이 땅에 강림하고 그들 모두가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닌가? 설사 그의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 할지라도, 청하는 세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저는.
청하는 ‘주세민’을, 아니, ‘주세민’의 모습을 한 천마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이곳에서 자신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육신이 있었더라면 지금 청하는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청하는 천마를 노려본 채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 운명이 무엇이든, 저는 그것을 거부하겠습니다.
‘주세민’의 얼굴을 한 천마는 인간 같지 않은 무기질적인 시선으로 청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하는 차오르는 분노를 연료 삼아 온몸의 용기를 끌어모은 채 말을 이었다.
저는 미리 써 둔 이야기 속 캐릭터가 아니에요. 사실 그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라 해도 마찬가지지만…… 제 운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선택한 이야기는 이것이에요.
청하는 이 이야기가 끝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결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한때는 그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되든, 청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청하는 자신의 운명이 본래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주세민의 손을 잡고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미지의 바깥 세상으로 박차고 나갔을 때 청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저는 누가 미리 써 둔 이야기대로 흘러가지 않을 겁니다. 제 운명은 제 스스로 만들어 나갈거에요.
청하는 저를 바라보는 ‘주세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울컥거리는 감정이 청하의 목을 꽉 메어 왔다.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청하는 나지막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 곁에는, 제가 선택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청하의 시선과 ‘주세민’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청하는 이를 악문 채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천마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내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서, 찰나가 영겁과도 같은 순간이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천마가 미소 지었다.
제갈유연은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외쳤다.
“이 땅에 강림하신 천마시여! 이곳에서 당신의 뜻을 실현시켜 주십시오!”
어지러운 빛무리가 정신없이 온 사방에 휘몰아쳤다. 휘날리는 광풍과 영력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붉은 가면을 쓴 혈마교인들은 경이에 가득 차 바닥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고, 다른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청하를 둘러싼 빛무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청하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태양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 청하는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광기와 환희로 빛나던 제갈유연의 얼굴에 순간 의혹이 어렸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직감이 제갈유연의 뇌리를 스쳤다. 제갈유연은 청하의, 아니, 청하의 몸을 한 천마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뚫어질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영기의 폭풍을 뚫고 그대로 청하를 향해 돌진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무모할 정도로 대담한 행동이었다. 주세민은 청하를 꽉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로 강하게 외쳤다.
“백청하!”
다음 순간, 붉은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청하의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제갈유연을 향했다.
“내가 지상에 강림하여 이 땅에 내 뜻을 실현시키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지.”
천마가 웃는 얼굴로 평온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내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청하는 숨도 쉬지 못하고 ‘주세민’의 얼굴을 하고 있는 천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청하는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들은 이미 한 번 나를 소환하려 시도했지만, 그 시도는 실패하고 대신 엉뚱한 이계의 영혼을 소환해 버리고 말았지. 이계의 영혼에게는 이 세계의 운명이라는 것이 없으니, 운명이 없는 육신이란 그 얼마나 내가 강림하기 좋은 그릇이겠나.”
천마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으나, 그 말을 듣는 청하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저 어쩌다가 우연히 이 세계에 떨어지게 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를 소환한 것이다. 청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래. 네가 다른 세상에서 온 이물질이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천마가 태연하게 말했다. 천천히 청하를 향해 다가온 천마는 살짝 허리를 굽혀 청하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싹 들이대었다. ‘주세민’의 얼굴을 한 천마가 손을 들어올려 청하의 턱을 살짝 잡아쥐었다. 사실상 청하는 육신이 없는 정신체의 상태였으나, 마치 천마의 손아귀에 제 영혼이 틀어잡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피처럼 붉은 천마의 눈동자가 한층 더 강렬한 빛을 품었다. 옴짝달싹도 못 할 정도로 콱 틀어잡힌 영혼의 느낌에 청하의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천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뜻은 이 세계가 운명에 따라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지. 운명이라는 것은 수많은 씨실과 날실로 짜여진 정교한 직조물과 같은 것이다. 그중에 단 한 올만 나가 버려도 그 거대한 천이 전부 못 쓰게 되어 버릴 수 있어. 이계의 존재에게는 이 세계에 속한 운명이라는 것이 없고, 그것은 즉 올이 나가 버린 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존재가 이 세계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며 운명을 어지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천마가 한마디씩 말을 뱉을 때마다 청하는 제 영혼을 움켜쥔 손아귀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숨통을 조여 오는 압박감이 점점 더 심해졌다. 청하는 숨도 쉬지 못하고 제 코앞에 있는 붉은 눈동자를 간신히 바라보았다. 천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천마의 입술이 느릿하게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래, 이계에서 온 자여. 운명은 단순히 쓰여진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 수많은 사람들이 운명에 대해 말하면서도 정작 운명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는 자는 많지 않다.”
천마는 천천히 청하의 턱을 놓아주었다. 짓눌려 있던 영혼이 그제야 놓여난 것처럼 청하는 저도 모르게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천마의 입술 사이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확실히 이곳에서 네 운명을 찾은 것 같구나.”
천천히 몸을 일으킨 천마는 예의 그 인간 같지 않은 이질적인 눈빛으로 청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압도적인 눈빛이었다. 천마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선택한 네 운명을 인정한다. 네 스스로 이 세계에서 찾아낸 네 운명의 실타래가 이 세계의 것과 섞이는 것을 용납한다. 네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이야기가 운명의 천 위에서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천마의 주변으로 강한 빛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눈이 부셔서 청하는 더 이상 천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점점 아득해지는 새하얀 무(無)의 공간에서, 천마의 목소리가 청하의 귀에 날아와 꽂혔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을 환영한다, ‘백청하’.”
그리고 다음 순간, 청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처, 천마시여! 이 땅에 다, 당신의 뜻을 실현시켜 주십시오!”
제갈유연은 저를 바라보는 천마를 향해 더듬거리며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제갈유연의 등허리는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아까부터 제갈유연의 등골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으나, 제갈유연은 애써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것을 참으며 간절한 눈으로 천마를 바라보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었다. 이제 와서 운명이 그를 배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붉은 눈을 빛내고 있는 청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마의 뜻은 이미 이루어졌다.”
“……뭐?”
제갈유연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청하는 붉은 눈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혈마교인들과 경악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천천히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진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천마의 뜻……?”
그 미묘한 어감이 백진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만일 청하의 몸에 천마가 강림한 것이라면, ‘천마의 뜻’이라는 말 대신 ‘나의 뜻’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백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음 순간, 백진은 즉시 몸을 돌려 재빨리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때, 무언가를 느낀 또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백청하……?”
주세민은 여전히 청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였다. 청하의 몸 주변에서 휘몰아치는 빛무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민은 천천히 손을 뻗어 청하의 뺨을 감쌌다.
“너…… 청하 맞지?”
태양처럼 빛나는 붉은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아…….”
청하의 입술이 멍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휘몰아치던 빛무리가 사방으로 확 퍼져 나가며 강한 돌풍이 몰아쳤다. 사람들은 땅에 쓰러지거나 무언가를 간신히 붙잡은 채 눈을 감고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영기의 폭풍이 지나가자, 그 한가운데에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을 한 청하가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세민은 얼른 청하를 부축하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괜찮나?”
청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평소와 같은 짙은 색의 눈동자가 깜빡이는 눈꺼풀 뒤에서 간신히 세민을 향했다. 멍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던 청하는 저를 끌어안고 있는 세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급한 세민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한참 동안 멍하게 세민을 바라보던 청하의 얼굴에, 마침내 흐린 하늘에 번져 나가는 미약한 햇살처럼 천천히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응.”
일그러졌던 세민의 입가가 실룩였다. 세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청하를 끌어안은 제 팔에 힘을 주며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파묻었다. 잠시 당황한 듯 허공을 떠돌던 청하의 손이 세민의 어깨를 더듬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세민과 입을 맞추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세민의 어깨를 짚고 있는 청하의 손아귀에 당장이라도 세민을 밀어내려는 듯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청하는 세민을 밀어내는 대신 그의 어깨를 마주 끌어안았다. 세민의 입맞춤이 더욱 깊어졌다. 청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결국 그는 제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았다. 언제나 청하는 이방인처럼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채 이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방관자의 입장이었으나, 그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청하는 마침내 제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음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청하는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바로 세민의 곁에서.
그렇게 모든 일은 일단락되었다.
제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것을 깨달은 제갈유연은, 아무런 저항 없이 남궁휘에게 생포되었다. 흑마부대를 잃은 혈마교인들은 류재겸이 이끄는 마교원들과 다른 이들의 협공에 손쉽게 제압되었다. 전의를 상실한 그들 중 상당수가 그 자리에서 자결했고, 나머지는 무기력하게 제갈유연의 뒤를 따라 남궁세가로 압송되었다. 강재헌 역시 기세등등한 류재겸의 손에 의해 마교로 끌려갔다. 다만 어디에서도 백진의 흔적만은 찾을 수 없었다.
혈마교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며 강호는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유서 깊은 명문가인 제갈세가가 이 일에 연루되었다는 것은 정파 전체에 대단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 제갈세가의 가솔들 대다수가 흑마부대로 동원되었기에, 제갈세가는 거의 폐문에 가까울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제갈유연과 그의 아들들을 비롯해서 이번 일에 연루된 자들은 전부 정파 회의를 통해 내공이 폐해지는 처분을 받았고, 유일하게 처벌을 피해 간 제갈서윤은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어 봉문을 선언했다.
남궁세가는 이번 일을 통해 확고부동한 정파 제일가문의 위치를 확보했다. 특히 남궁휘는 이번 일을 통해 정파 후기지수의 일인자로 강호에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남궁휘는 뒤늦게 후계자 수업을 위해 강호를 주유하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도원맹은 비록 맹주가 부상을 당하긴 했으나 비교적 큰 타격 없이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며, 하유신은 부상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주세민과 마교는 결국 혐의를 벗었지만, 정파연합과 마교 간의 뿌리 깊은 반목이 단번에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마교를 향해 미심쩍은 시선과 경계의 눈빛을 던졌고, 여러 가지 사소한 분쟁도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청하는 그 모든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세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루각주 백청하의 연인이 마교주 주세민이라는 것은 온 강호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세기의 사랑은 많은 호사가들과 이야기꾼들을 신나게 했다. 그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과일을 파는 아낙네와 뗏목을 끄는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재밌지 않나?”
갑작스레 들려온 유들유들한 목소리에 청하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죽간의 늪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활짝 열어 놓은 둥근 창가에서는 향긋한 봄 내음이 흘러들고 있었다. 청루각이 위치한 청루산의 꼭대기에도 마침내 봄이 찾아와, 따스한 바람과 함께 산봉우리를 뒤덮은 달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아니, 잠깐. 어쩌면 꽃향기는 다른 곳에서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둥근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던 인영이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청하는 한쪽 눈썹을 치켜든 채 세민의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꽃가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민은 붉은 꽃송이가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가지를 마치 갓 벼려낸 검처럼 전투적으로 움켜쥔 채 불쑥 청하를 향해 내밀었다.
“이게 뭐야?”
청하의 질문에 세민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다 주웠다.”
“……오다 꺾었겠지.”
청하가 세민이 내민 꽃가지를 받아 들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내 정원에서.”
세민의 당당하던 표정이 약간 흐려졌다. 세민이 슬쩍 청하의 눈치를 살피며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끝에서 약간 꺾어 왔을 뿐이다.”
세민의 전전긍긍하는 표정을 보던 청하의 입가에 결국 피식거리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청하는 세민에게서 받은 꽃가지를 내실 한켠에 놓인 백자에 꽂아 놓았다. 세민은 어미 오리의 뒤를 따르는 새끼 오리처럼 그런 청하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꽃가지를 매만지던 청하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뭐가 재미있다는 거야?”
“아.”
세민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피식거리며 품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청하를 향해, 세민이 보란듯 두루마리를 펼쳐서는 청하의 코앞에 들이대었다.
“요 아랫마을에 장이 섰는데, 마침 이런 걸 팔고 있더군.”
청하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약간 조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듯하게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었는데, 꽃나무 아래에서 애틋하게 서로 붙어 서 있는 한 쌍의 연인을 그린 것이었다. 청하는 가녀린 표정을 지은 채 연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청초한 미인을 가리키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설마…… 이게 나라고?”
“그럼 누구겠나.”
청하의 손가락이 그 옆에 우수에 찬 표정으로 제게 기대어 있는 연인을 꼭 끌어안고 있는 잘생긴 청년을 가리켰다.
“이게 너고?”
“정말 똑같이 생겼지.”
아니…… 전혀. 청하는 황당하다는 듯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그러나 세민은 그저 좋다는 듯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그 그림을 소중하게 갈무리해서는 제 소맷자락 안에 집어넣었다. 태연하게 그림을 챙기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청하는 세민의 소맷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저 안에 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들이 들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각종 귀한 보물들과 미술품으로 가득 차 있던 세민의 방이 지금은 대체 어떤 것들로 가득 차 있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세민은 소맷자락 안에 그림을 밀어넣고는 은근슬쩍 청하 곁으로 가까이 몸을 붙였다. 세민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청하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오랜만에 봤는데 할 말은 그것 뿐인가?”
청하는 멈칫거리며 눈알을 굴렸다. 사실 그렇게까지 오랜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절멸옥에서의 일 이후로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세민은 청하를 곁눈질하며 슬며시 그의 허리를 감싼 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잠시 망설이던 청하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제 허리를 끌어안는 세민의 손을 떼어 낸 채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할 말이 있어.”
청하의 진지한 눈빛이 세민을 향해 빛났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세민이 말해 보라는 듯 청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던 청하가 세민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혈마교 녀석들이 나를 천마의 그릇으로 낙점한 이유, 그리고 실제로 천마가 내 몸에 강림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있나?”
천마강림 사건이 일단락된 후, 그 뒷수습을 하며 세민과 잠시 떨어져 있던 청하는 그동안 내내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사실 혈마교의 일에 깊숙이 개입해 있던 제갈유연과 강재헌, 그리고 백진 정도를 제외한다면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청하만 입을 다문다면 진실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하는 다른 사람도 아닌 세민에게까지 진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과연 진상을 알게 된 세민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알 수 없으나, 청하는 제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정한 자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고 싶었다. 세민은 분명 진실을 알 자격이 있었다.
청하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세민을 마주 바라보며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천마의 그릇이 될 수 있었던 건, 내가…… 이 육신에 깃든 내 영혼이 진짜 청루각주 ‘백청하’의 것이 아니라 이세계에서 온 영혼이기 때문이야. 나는…… 진짜 ‘백청하’가 아니야.”
청하의 가슴이 거칠게 쿵쿵 뛰어 올랐다. 청하가 스스로 이 사실을 밝힌 것은 이곳에 온 이후로 지금이 처음이었다. 청하는 긴장한 시선으로 세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세민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폭탄선언과 같은 말일 것이다. 청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세민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세민의 잘생긴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게 뭐?”
“……응?”
청하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세민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청하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차피 난 네 껍데기 때문에 네게 끌렸던 게 아니다. 내가 끌렸던 것은 네 영혼이지. 그리고 네가 진짜 ‘백청하’가 아니라고 한들, 어차피 나는 진짜 ‘백청하’가 누군지 몰라.”
세민은 청하의 허리를 감싸안은 팔에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청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세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내게 있어서 ‘백청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한 명뿐이다.”
세민의 입술이 천천히 청하의 눈가에서 뺨을 따라 미끄러졌다. 청하의 입술 근처를 지분거리던 부드러운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내겐 그것으로 충분해.”
세민이 천천히 청하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따뜻한 감각이 입술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청하는 제 안에서 퍼지는 안온한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청하의 팔이 세민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슴속에서 울컥거리며 차오르는 무언가가 자꾸만 청하의 숨을 헐떡이게 했다. 세민은 달래듯 다정하게 그런 청하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위로하듯 청하의 입 안을 쓸어올렸다.
청하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세민의 손이 서서히 청하의 허리띠를 헤치고 옷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한 안온함으로 가득 차 있던 공기에 점점 열기 어린 숨결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청하의 호흡 역시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깊어지는 입맞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청하는 달아오른 머리로 생각했다.
이곳이 그가 발을 디딘 곳이다. 그는 결국 이 땅에 발붙일 곳을 찾아내었다. 그의 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어떤 운명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지는 결코 알 수 없으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옆에는 언제나 세민이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청하는 두렵지 않았다. 그가 써 내려갈 자신의 운명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세민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청하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