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산자락 사이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불길한 검은 구름이 인적 드문 산자락의 상공으로 흘러들더니, 검을 탄 일단의 무리가 검은 구름 사이에서 속속들이 튀어나왔다. 천마검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청하는 산등성이의 커다란 바위 위에 내려섰다. 주세민의 뒤에 매달려 천마검에 얻어 탄 채 하루 종일 이동한 청하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땅으로 내려서고 싶었다. 천마검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절대 승차감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대체 검은 구름 속에서 어떻게 이동하나 했는데…… 이런 식으로 이동했던 거였군.”
청하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교에서 쓰는 검은 구름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은폐함과 동시에 어검의 속도를 높여 주는 효과가 있었다. 다만, 그러다 보니 검이 너무 흔들려 요령이 없는 청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멀미 아닌 멀미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세민 역시 청하의 곁으로 뛰어내리자, 그들을 따르고 있던 마교의 수하들 역시 검에서 뛰어내려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 중 선두에 서 있던 류재겸이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교주님.”
청하는 저도 모르게 힐끗 세민을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청하 역시 같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세민이 무슨 생각인지, 대체 앞으로는 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러나 세민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세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하고 싶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청하에게로 쏠렸다. 눈을 깜빡이며 세민을 바라보던 청하가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을 가리켰다.
“나? 지금…… 내 생각을 물어보는 거야?”
“그래.”
세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청하는 당황한 눈으로 세민을 바라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겠다는 건가? 세민은 말문이 막힌 것 같은 청하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민이 약간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너를 그 안에서 꺼내 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라. 청루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 그곳으로 데려다주고, 정파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면 도와주지. 제갈 세가를 치고 싶지는 않나?”
“무서운 얘기 좀 하지 마…….”
청하는 세민을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는 건가. 청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청루각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기껏 백진과 청연의 계획을 마다하면서까지 청루각을 연루시키지 않으려 한 의미가 없었다. 청하는 자신이 다시는 청루각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세민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그러한 결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청하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처음부터 각오하고 벌인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정말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청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은…… 청루각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이 좋겠군. 흑마부대는 혈석을 쫓아 움직일 테니, 이다음 목적지 역시 혈석이 있는 곳이겠지. 중원에 남아 있는 혈석이 이제 하나밖에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
세민이 류재겸을 힐끗 바라보았다. 재겸은 내키지 않는 듯했으나, 주군의 눈짓에 따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제갈 세가의 사당에서 관리하던 혈석, 그리고 청루각과 도원맹에 각각 하나씩. 그 외에 남은 마지막 혈석은 남궁 세가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남궁 세가에서……?”
청하가 눈썹을 치켜뜬 채 중얼거렸다. 하긴, 생각해 보면 정파의 양대 문파인 청루각과 도원맹, 그리고 무림 세가의 두 대표 가문인 남궁 세가와 제갈 세가에서 각각 혈석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청하가 별생각 없이 말했다.
“무림맹에서 혈석을 보관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군.”
“무림맹에서도 혈석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재겸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하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자, 재겸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혈석에 대해 조사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몇 년 전에 무림맹 본원에서 보관하고 있던 혈석이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원래 혈석은 총 다섯 개였다고 합니다.”
“그래……?”
대체 왜 그런 거지? 청하는 혼란 속에서 생각했다. 어디까지가 원작 설정이고 어디서부터 원작이 어그러지며 새롭게 등장한 설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혈석의 존재라든가 개수와 같은 것은 당연히 원작에서부터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왜 다섯 번째 혈석이 없어졌던 거지?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청하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뭐…… 좋아. 어쨌든, 지금 남아 있는 마지막 혈석은 남궁 세가에 있다는 거로군. 그렇다면…… 이다음 흑마부대의 목표는 남궁 세가일 것이 확실해.”
“남궁 세가로 가려는 건가?”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세민이 문득 입을 열었다. 청하는 세민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다면 당연히 흑마부대가 혈석을 가져가는 것을 저지해야겠지. 그리고 만약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흑마부대와 혈마교에 대한 단서를 조금이라도 더 모아서 혈마교의 본거지를 알아내야 해. 지금까지 가져간 혈석들도 모두 그곳에 있을 테니까.”
그리고 천마를 소환하는 의식 또한 그들의 근거지에서 이루어질 확률이 높았다. 어떻게든 혈마교의 근거지를 알아내서 천마를 소환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것만 해내면, 그 이후에는…… 그 이후에는, 다시는 청루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평범한 인간이 되어 이 세계의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청하는 애써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설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가슴 한편은 바위에 꽉 짓눌리기라도 한 듯 무겁기 그지없었으나, 청하는 그 저릿한 감각을 모른 척 무시하며 천천히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청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세민이 부하들을 향해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와 청루각주는 지금부터 남궁 세가로 간다. 나머지는 각각 도원맹, 제갈 세가, 그리고 무림맹의 본원으로 가서 동정을 살피도록.”
“그건 왜?”
청하가 의아하다는 듯 세민을 바라보았다. 세민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혈마교에서 정파의 일부 세력과 손을 잡은 것은 확실하니, 그들 중 혹시 심상치 않은 행동을 하는 자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청하는 멈칫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현재 그들은 전부 정파를 이끌고 있는 세력들이니, 그들 중 스파이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 청하는 힐끗 세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청루각에는 보내지 않는 건가?”
세민이 청하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리며 태연히 말했다.
“원하면 보내 주고.”
……하여간 한마디를 안 지는군. 청하는 피식 웃으며 되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세민의 입가 역시 미세하게 실룩이는 것이 보였다. 세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재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강재헌은 아직 임무에서 복귀하지 않은 건가?”
“예.”
재겸이 얼른 대답했다. 재겸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결국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세민은 살짝 눈썹을 찌푸린 채 별말 없이 몸을 돌렸다.
“이상이다.”
“존명.”
세민의 수하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대답하고는 곧 하나둘씩 검을 타고 사라졌다. 재겸은 마지막까지 망설이는 듯한 눈길로 세민과 청하 쪽을 돌아보았으나, 끝내 입을 다물고는 검에 올라탔다.
마지막 마교원까지 전부 사라지자, 마침내 황량한 산등성이에는 청하와 세민 둘만이 남았다. 청하는 세민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나와 같이 행동할 건가?”
“당연한 소릴.”
세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청하는 할 말이 없어 그저 입술만을 꾹 깨물었다. 그래,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그런 대답을 들으니 정말 부담스럽군. 청하는 제게 손을 내밀던 세민의 단단한 눈동자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청하는 세민의 눈치를 살피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그, 그래…… 뭐, 좋아. 일단 여길 좀 내려가 보도록 하지. 민가에 가서 상황을 좀 살펴야겠어.”
그러고는 세민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휙 몸을 돌려서는 성큼성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청하의 뒷모습을 보며 세민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곧 세민의 무거운 발걸음이 청하의 뒤를 쫓았다.
* * *
강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에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마을에 자리 잡은 단 하나의 객잔은 저녁때가 다 되었는데도 손님이 별로 없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저녁에 쓸 채소를 다듬고 있던 객잔의 주인 장 씨는 삐걱거리는 문을 밀고 들어오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떴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근방에서 보기 드물게 잘생긴 미청년이었다. 비록 얼음처럼 싸늘한 눈매와 차가워 보이는 표정이 흠이긴 하지만, 허름하고 평범한 옷을 입고서도 탄탄한 체격과 수려한 미모를 감추기 어려웠다. 허리에 검이라도 하나 차고 있다면 어느 귀한 무림 세가의 공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검은커녕 흙먼지 묻은 봇짐에 다 낡아 헤져 가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어디 먼 길이라도 가는 중인가 보지?’
장 씨가 그런 생각을 하며 손님을 받기 위해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려는 찰나, 남자의 뒤에서 불쑥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은 흰 면사가 치렁하게 늘어진 멱리를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치고는 무척 훤칠한 키에 걸음걸이가 거침이 없으면서도 우아한 것이, 멱리 너머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왠지 모르게 엄청난 미인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장 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객잔 안으로 들어서는 범상치 않은 두 남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키가 큰 남자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룻밤 묵어 가려고 하는데.”
그제서야 겨우 정신을 차린 장 씨는 허겁지겁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 예…… 예, 묵어 가시려고요? 방은 많이 있습니다요.”
“방이 많다라……. 요즘엔 손님이 별로 없는 편인가 보군.”
장 씨는 저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 가는 남자를 보면서 약간 위화감을 느꼈다. 남자는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어딘가 모르게 쉽게 말을 붙이기 어려운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는데, 그것만 본다면 객잔의 주인과 살갑게 이것저것 수다를 떨 만한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장 씨의 말을 받아 화제를 이어 가는 것이, 생각보다 사교적인 성격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 씨는 위화감에 눈을 껌뻑이면서도 선선히 말을 이었다.
“예에,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평소 같으면 강주로 가는 여행객들이라도 몇 명 있었을 텐데, 요즘 시절이 하도 수상하다 보니…….”
“시절이 수상하다고?”
남자가 순간적으로 제 뒤에 서 있는 여자 쪽을 힐끗 곁눈질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장 씨는 그런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예…… 손님께서는 이곳저곳을 많이 다니셨으니 저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요? 저기 강주의 남궁 세가에서 외유를 나간 가문의 식솔들을 전부 본가로 불러들인다고 합디다. 그 뭐라더라…… 가주의 총동원령? 뭐 그런 게 내려왔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아주 그냥 분위기가 흉흉합니다요.”
“그게 무슨 소린가?”
그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남자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여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성적인 목소리에 장 씨는 깜짝 놀라 멱리를 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 전. 청하와 세민은 그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을 내려다보며 어떻게 마을로 들어갈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청하와 세민이 내려선 지역은 남궁 세가의 본관이 있는 강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어검을 타면 강주까지는 금방이겠지만 사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어검을 타고 남궁 세가의 본관까지 날아가는 것은 너무 눈에 띄었다. 현재 정파 연합의 공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교주와 그의 손을 잡고 요란스럽게 도원맹을 탈출한 청루각주가 태평하게 검을 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녔다가는, 당장에 근처 모든 무림인들의 주목을 끌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조금 원시적이긴 해도,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편이 나았다.
때문에 청하와 세민은 상황도 좀 살피고 다른 탈것도 좀 구할 겸, 우선 산자락 아래에 자리한 자그마한 마을로 향하기로 결정한 참이었다. 그 전에 지금의 차림새부터 손을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위장을 하든 그들의 외모가 워낙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지라,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세민이 생각해 둔 것이 있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내게 맡겨라.”
청하는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며 자신의 안일했던 결정을 후회했다.
“정말…… 진심이야?”
“그래.”
“정말 이러고 갈 거라고?”
“그렇다.”
몇 번을 물어도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민의 얼굴을 노려보며, 청하는 새삼 세민의 뻔뻔함에 치를 떨었다. 세민이 재촉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빨리 입어라.”
청하는 세민이 구해 온 옷을 다시금 힐끗 내려다보았다. 변장을 위해 가까운 민가에서 슬쩍해 온 옷은 언뜻 보기엔 그저 일반인들이 입는 평범한 옷처럼 보였지만, 한 가지 큰 문제점이 있었다. 청하는 제 손에 들린 옷을 내려다보며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지금 그러니까…… 나보고 여장을 하라는 말이야?”
세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협박하듯 제게 옷을 들이대는 청하를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세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너무 눈에 띄니까. 위장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지.”
“그러면 왜 너는 여장 안 하는데?”
“이 체격으로 여장을 하면 사람들이 속을 것 같나?”
세민이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하는 그만 말문이 막혀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그건, 확실히 그렇긴 하지. 청하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세민은 청하보다도 한 뼘 이상 훌쩍 더 컸다. 청하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제 손에 들린 옷을 바라보았다. 세민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림인도 아닌 여자 둘이 여행한다고 하면 오히려 더욱 이상하게 보일 거다. 그보다는 남녀가 같이 여행하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지.”
그렇게까지 말하니 청하도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다. 얘가 원래 이렇게 말을 잘했던가? 청하는 세민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야말로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말에는 막힘이 없었지만, 청하는 제게 여자 옷을 입히려는 세민에게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심증일 뿐, 무어라 반박할 말이 없는 완벽한 논리에 결국 청하는 세민이 내미는 옷으로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난번 화룡성에서는 아이들을 납치하는 범인을 잡겠다고 남궁휘도 여장을 했었잖아. 그땐 내 일 아니라고 태평하게 웃고 있었는데, 결국 업보는 돌고 도는 것이로구먼……. 청하는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그사이 평범한 여행객 같은 옷으로 갈아입은 세민은, 옷을 바꿔 입은 청하의 모습을 보고 실룩거리려는 입꼬리를 슬쩍 한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과연 잘 어울리는군.”
“조용히 해.”
청하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씩씩거리며 마을 쪽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는 청하를 바라보며, 세민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청하는 의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객잔의 주인장을 보고는 황급히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 좀 피곤하군…….”
청하는 괜히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목이 아픈 척 헛기침을 계속했다. 다행히도 주인장은 청하의 중성적인 목소리를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듯, 별다른 말 없이 청하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듣기로는 저 간악한 마교의 무리들이 남궁 세가에 있는 어떤 물건을 탐내고 있다 하더군요. 그 때문에 남궁 세가의 가주님께서 가문의 방어를 위해 식솔들을 전부 불러들이시는 거라 합디다.”
청하는 멱리 너머에서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남궁 세가에서는 청루각에서 띄운 청조를 받자 자신들이 보관하고 있는 혈석을 노리고 흑마부대가 쳐들어올 것이라 예견하고는, 가솔들을 불러들여 가문을 방어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내가 주세민과 손을 잡고 도원맹을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아직 여기까지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로군. 하긴, 무림 세가도 아닌 이런 곳에 소식이 그렇게 빨리 퍼지기는 어렵겠지. 이 틈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겠다.’
청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청하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청하와 세민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던 주인장이 궁금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손님들은 무슨 일로 이런 시기에 여행을 다 하십니까요? 그것도 이렇게…… 아리따우신 여성분까지. 혹시 저, 귀하신 분께 제가 실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힐끔힐끔 청하와 세민의 눈치를 보며 말을 잇던 주인장의 말끝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아무래도 청하의 말투 때문인지, 어딘가 지체 높은 가문의 여인이 신분을 숨기고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듯한 말투였다. 사실 귀한 가문의 아가씨와 그 호위 무사라는 설정도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기에, 청하는 에둘러 주인장의 말에 긍정을 표하고자 입을 열었다. 그러나 청하가 말을 잇는 것보다 주세민이 더 빨랐다.
세민이 불쑥 입을 열었다.
“부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세민에게로 향했다. 청하는 늘어진 면사 뒤에서 입을 떡 벌렸다. 뭐……? 아니 지금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러나 청하가 경악에 빠져 있는 사이, 사회생활로 단련된 객잔 주인 장 씨는 재빨리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세민을 향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그럴 것 같았습니다요! 부부라니,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그렇지?”
“아이구, 그렇습죠.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기에 여행을 다니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요. 그래도 부부가 함께 다니니 서로 의지도 되고 좋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좀 그런 편이지. 아직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에, 게다가 신혼이셨구먼! 좋을 때입죠.”
청하는 얼이 빠진 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가는 세민과 주인장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자신만 혼자 쏙 빼놓고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청하는 자신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집안 사정 때문에 멀리 있는 강주의 친척 집으로 여행을 떠난 금슬 좋은 신혼부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언제 이렇게 구체적인 설정을 짠 거야?
그러나 청하가 미처 입을 뗄 겨를도 없이 청산유수처럼 주인장과 모든 이야기를 끝낸 세민은 어느새 객실 열쇠까지 받아 낸 뒤였다.
“빨리 올라가시죠, 부인.”
세민이 태연하게 한쪽 손으로 위층을 가리키며 청하를 향해 말했다. 청하는 면사 뒤에서 입술을 꽉 깨물며 세민을 노려보았으나, 어차피 밖에서는 그저 사이좋은 신혼부부의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주인장의 시선을 뒤로하고, 청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성큼성큼 객실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세민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객실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청하는 답답하게 시야를 가리고 있던 멱리를 벗어 던지며 세민을 향해 휙 돌아섰다.
“미쳤어?”
“뭐가 말이냐.”
세민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받으며 신중하게 객실 문을 걸어 잠갔다. 청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굳이 부, 부부라고 할 것까진 없잖아! 이미 여장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그럼 무림인도 아닌 남녀가 이런 시절에 같이 여행 다니는 걸 무슨 수로 설명하려고?”
“왜 설명을 못 해? 아까 주인장이 물어본 것처럼 어느 귀족 집 여식과 호위 무사라고 해도 되고, 아니면 차라리…… 그래, 차라리 남매라고 하든가! 왜 꼭 부부여야 하는데?”
“그게 제일 평범하니까.”
세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했다.
“부부가 같이 여행하고 있다는 게 아무래도 가장 평범하고 쓸데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지. 불필요하게 남들의 시선을 끌 필요는 없지 않겠나.”
청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세민의 말은 논리 정연하고 빈틈이라고는 없어 보였지만, 청하는 왠지 처음에 여장을 했을 때부터 세민에게 약간 말려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청하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글쎄, 딱히 다른 이유가 뭐가 있을지 모르겠군.”
청하는 세민의 차분한 말을 들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청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대체 왜 방을 하나만 잡은 건데?”
다시 손가락에 눈동자 색을 감춰 주는 반지를 끼고 있던 세민이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검은빛 눈동자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민이 답지 않게 슬쩍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부부니까?”
……역시 이 자식 이거 일부러 그런 거잖아!
류재겸은 차가운 눈으로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는 제갈세가의 으리으리한 전각들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장원은 소리도 없이 고요한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완벽하게 통제된 정적이었다.
재겸이 힐끗 뒤쪽에 있는 어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스산하게 불어닥치는 바람이 울창한 나뭇가지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사실 어둠 속에는 잘 훈련된 정예 마교원 30여 명이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재겸은 흠, 하고 낮게 숨을 내쉬고는 다시 제갈세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민의 명령 이후 마교의 장로들은 각자 수하들을 데리고 각 문파와 세가들을 감시하기 위해 흩어졌다. 재겸은 며칠째 제갈세가 근처의 야산에서 잠복한 채 무언가 특이한 점은 없는지, 누군가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는 자는 없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제갈세가는 마치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전혀 아무런 특이점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하단 말이지.’
류재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며칠 동안 계속 생각해 왔던 것을 다시금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평범한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약간 말이 되지 않긴 하지만,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치게 조용한 제갈세가의 분위기는 오히려 재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재겸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제갈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그가 은신해 있는 곳에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수풀 속에서 무언가 거뭇한 형체가 움직이는 것이 재겸의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그다지 주의 깊게 보지 않았을 사소한 움직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한 느낌이 재겸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뭐지? 재겸은 내공을 실어 안력을 돋우며 그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곧 재겸은 어렴풋이 그것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재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건…… 강재헌이잖아?’
평소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강재헌의 등장에 재겸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저자가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재겸이 알기로 강재헌은 아직 지난번 임무에서 복귀하지 않았고, 이번 도원맹에서 청루각주를 빼낼 때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재겸이 하필 그가 잠복하고 있는 제갈세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 퍽이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뭐지? 혹시 교주님께 무언가 다른 임무라도 받은 건가?
시야에 잘 띄지 않는 으슥한 수풀 속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살펴본 뒤에야, 그는 강재헌이 어딘가로 전갈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교 특유의 검은 안개가 강재헌이 들고 있는 종이를 감싸더니 다음 순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쪽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교에서 쓰는 전형적인 연락 수단이었다. 전갈을 받는 쪽에서도 마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하니, 그쪽 역시 마교원인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별다를 것 없는 일이었지만, 류재겸은 왠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임무에서 복귀하지도 않은 사람이 하필 제갈세가 근처에서 어디로 무슨 전갈을 보내고 있는 거지?’
주세민에게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류재겸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어쩌면 그가 평소 강재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에 부러 꼬아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재겸은 수하들에게 자리를 지킬 것을 명하고는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재헌의 뒤를 쫓았다.
* * *
청하는 방 한가운데에서 팔짱을 낀 채 세민을 노려보았다. 세민은 그런 청하의 따가운 시선은 모른 척하며 태연히 아담한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은데?”
세민이 중얼거리며 괜히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 과연 그리 크지 않은 객잔에 딸린 방치고는 깔끔하고 정갈한 편이었지만, 청하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세민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침상은 내가 쓸 테니 넌 알아서 해.”
그리고 청하는 쌩하고 세민을 지나쳐 단 하나 있는 침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청하가 침상에 드러누워 냉큼 이불을 덮는 것을 본 세민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벌써 자려고?”
“해 떨어진 지가 언젠데 빨리 잠이나 자지, 그럼 뭐 하나?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즉시 마차라도 구해서 강주로 가려면 지금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지.”
청하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민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청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멱리는 한참 전에 벗어 던졌지만 몸에는 여전히 그가 구해 온 여인의 옷을 걸친 채였다.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채 감춰지지 않는 훤칠한 몸매과 늘씬한 허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세민은 은근슬쩍 청하 뒤에 몸을 뉘였다.
“저리 안 가?”
청하는 제 등에 바짝 몸을 붙여 오는 세민을 느끼며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세민이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이 좁은 방 안에 갈 곳이 어디 있다고. 야박하기는.”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댈 생각 하지 마.”
“참 걱정도 팔자구먼 그래.”
세민은 핀잔을 주면서도 슬쩍 청하의 등 뒤에 제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청하는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지만 세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하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자꾸만 제 등 뒤에 붙어 오는 세민의 거대한 몸을 무시하려 애썼다. 세민이 아니더라도 청하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청하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단연 완전히 틀어져 버린 원작의 흐름이었다. 청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 이제 어떻게 하지? 뭐 운명이 이랬다저랬다 따질 것도 없이, 이제 와서는 진짜 다 망한 것 같은데…….’
이미 원작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했다. 청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제 뒤에 바짝 붙어 있는 세민을 의식한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은 도대체 어쩌자고 나를…….’
푸념처럼 시작되었던 청하의 생각은 거기에서 툭 끊겨 버렸다. 청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나는 도대체 어쩌자고 이 녀석을.’
세민을 탓할 것도 없다. 청하는 이미 도원맹에서 세민의 손을 잡았을 때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제게 내밀어진 세민의 손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대답이었다.
청하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뒤에서 슬금슬금 뻗어 온 커다란 손이 은근슬쩍 그의 허리를 감싸 왔다. 이것 봐라. 무어라 한마디 할까 싶었던 청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입을 다문 채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세민이 마치 청하를 달래기라도 하듯 느릿하게 그의 배를 토닥거렸다. 대체 누가 누굴 달래는 건지. 청하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을 향해 속으로 눈을 흘기며 삐죽하게 말했다.
“넌 이제 앞으로 어떡할 거야?”
“뭐가 말인가.”
담담한 세민의 목소리가 어둑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청하는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말이야. 이제 대체 어쩔 작정이야.”
나와 같이 둘이서…… 대체 뭘 어쩔 작정인 거지.
“너는?”
세민이 평온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막막한 느낌이 청하의 가슴 속을 순식간에 잠식해 갔다.
이미 원작의 전개는 전부 틀어져 버렸다. 저를 향한 세민의 감정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청하가 알고 있는 원작의 내용은 이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분명 원작에서는 남궁휘가 가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던 주세민이 남궁휘와 함께 강호를 누비며 온갖 사건 사고에 휘말리게 되는 전개였는데, 이제 남궁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엉뚱하게 자신이 그들 사이에 휘말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좌충우돌 사건들을 헤쳐 나가다 남궁휘에게 제 마음을 고백한 세민은, 결국 과감하게 남궁휘와 사랑의 도피를 시도하는데…….
문득, 청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잠깐, 이거…… 정말로 원작의 전개가 전부 틀어진 것이 맞나? 청하는 눈을 굴리며 방금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을 곱씹어 보았다.
아니,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은 원작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남궁휘 자리에 바로 그 자신을 넣기만 한다면.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소름이 돋았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멍하게 입을 벌렸다. 눈앞을 뿌옇게 가리고 있던 안개가 일시에 걷힌 듯,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원작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원작 남궁휘의 자리에 자신을 넣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놀라울 정도로 원작의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청하는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왜 지금에서야 이걸 깨달은 거지? 잠깐만, 그러면…… 원작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야기는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남궁휘가 아니라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건가?
세민이 청하 쪽으로 조금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생각 하나?”
……이런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청하는 결국 옅은 한숨과 함께 아무렇게나 말을 뱉어 내었다.
“……네 생각.”
뒤에서 나지막하게 기분 좋은 듯한 그르렁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민은 청하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법 예쁜 소리도 하는군.”
목덜미에 세민의 숨결이 느껴졌다. 노골적으로 닿아 오는 뜨거운 숨결에, 청하의 입술 사이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 이럴 때냐. 하여간에 남의 속도 모르고…….
절로 뾰족한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넌 참 태평해서 좋겠다.”
“내가 태평하다고? 누가 그러지?”
“말하는 거 보면 그런데.”
“오, 고명하신 청루각주께선 말하는 것만 봐도 상대방의 생각을 다 읽으시나 보군.”
세민이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울컥한 청하가 발끈한 채 받아쳤다.
“그래. 넌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글쎄,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어. 하지만 넌 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겠지.”
아무렴, 청하는 주세민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세민은 이 몸뚱어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 몸속에 어떤 영혼이 들어 있는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제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세민은 대체 제게 무슨 감정을 품어 버린 것일까.
만일 제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때에도 그는 과연 지금과 똑같은 마음일까.
문득,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 청하의 안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청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삼켜 내었다. 바보같이 도대체 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청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이건 전부 부질없는 생각이다.
청하의 빈정거리는 듯한 말을 들으며, 세민은 잠시 침묵했다.
“……그래?”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세민이 마침내 작게 중얼거리듯 속삭였다. 세민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기운이 왠지 모르게 심상치 않아, 청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다음 순간,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있던 청하의 어깨가 커다란 손에 붙잡혀 휙 침상으로 내리눌러졌다. 청하는 순식간에 천장을 바라보며 똑바로 눕는 자세가 되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눈앞에는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세민의 얼굴이 있었다. 붉은 기운이 번뜩이는 눈동자는 뚫어질 듯 곧장 청하를 직시했다. 순간, 청하는 마치 덫에 걸린 사냥감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강렬한 세민의 눈동자가 그대로 자신을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세민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렇게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니, 과연 대단하군. 그럼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혀 봐.”
세민의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더욱 짙어졌다.
“지금부터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
세민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맞혀 봐.”
“……장난하지 마.”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고작 그것이었다.
청하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리며 어떻게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뱉어 내려 노력했지만, 세민은 그런 청하의 노력을 간단히 무시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세민이 아랑곳하지 않고 청하의 목덜미에 당연한 듯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세민의 입술이 노골적으로 목덜미를 비벼 대자, 청하의 허리께가 오싹해졌다. 청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다시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 마.”
“왜?”
세민이 태연하게 물었다.
“어차피 영기를 보충해야 하지 않나? 이미 쓸 수 있는 영기가 거의 없을 텐데.”
하…… 진짜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몸이다.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순간적으로 제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의 과거 실수를 고백하던 백진의 절박한 얼굴이 청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원래부터 제 것이 아니었던 무공이었으므로 이런 몸이 되어 버린 것이 딱히 억울하다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하필 이런 때 세민 같은 녀석이 제게 집적거릴 편리한 핑계가 되어 준다는 사실이 조금 짜증 났다.
청하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이걸 맞혀 보라고 한 건가? 이제부터 네가 뭘 할지? 맞히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너무 뻔한 것 아냐? 시꺼먼 속이 아주 그냥 여기까지 철철 흘러넘치는데.”
“시커먼 속이라니, 말이 섭섭하군.”
세민이 여유롭게 말을 받아쳤다. 세민의 커다란 손이 자연스럽게 청하의 옷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난 정말 순수한 마음이라고.”
청하는 다시금 무어라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세민은 개의치 않고 그대로 입술을 아래로 미끄러뜨리며 유두를 물었다. 청하는 어쩔 수 없이 헉,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세민의 손은 벌써 거침없이 내의 자락 안으로 파고들며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상당한 위기감이 청하의 마음속에서 솟구쳤다. 세민은 백진이나 남궁휘, 청연 같은 사람과는 달리 청하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영력이 바닥나 있는 상태의 청하는 그저 체술을 조금 할 줄 아는 일반인과 거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세민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에게 손을 대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청하는 긴장한 눈빛으로 세민을 올려다보았다. 세민 역시 청하의 눈빛을 알아챘다. 세민의 입꼬리가 다시금 실룩거렸다.
“내가 무섭나?”
유두를 머금고 있던 세민이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하의 허벅지를 쓸어 올리던 세민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잡아 빼었다. 달빛을 받은 세민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내가 널 어떻게 할까 봐 두려워?”
……솔직히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청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청하가 애써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날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 건 너잖아.”
최대한 동요한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즐거운 듯 반짝였다.
“과연, 나를 잘 안다고 큰소리칠 만하군.”
세민이 여전히 청하의 가슴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붉은 눈꼬리를 휘어 미소 지었다. 세민의 입술이 달싹이는 감각이 청하의 가슴을 간지럽게 했다.
“하지만, 내 손을 잡고 그곳을 빠져나오기로 선택한 건 너였어.”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비록 반쯤은 세민의 협박 아닌 협박 때문이긴 했지만, 애초에 그 협박이 먹힌 것도 자신이 세민을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청하는 세민을 ‘선택’했다.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던 청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은 어딘가 모르게 궁색해 보이는 한마디였다.
“……너는 나를 몰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너를 선택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앞으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무슨 일이 닥칠지. 우리 모두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
세민이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알아 가면 되겠군.”
청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세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맥이 탁 풀릴 정도로 오만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는 것이 기가 막혔지만, 청하는 세민의 말을 들으며 이상하게도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어쩔 줄 모르고 초조하게 두근대던 마음이 묘하게도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청하는 스스로를 달래듯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어쩌면 이런 제 심란한 마음을 알고 저를 달래기 위해 세민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순간, 세민의 손이 청하의 내의를 지나 순식간에 속옷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거침없이 민감한 부분을 자극해 대는 손길에, 청하의 입술 사이로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허, 허윽…… 아읏…….”
청하가 황당하다는 눈길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세민이 예의 그 조각 같은 얼굴에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영기 보충은 해야지.”
이 자식이 진짜……! 그러나 세민은 청하가 두 번 다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곧장 옷자락을 흐트러뜨리며 아래쪽으로 얼굴을 내렸다. 세민의 더운 숨결이 아래쪽에 훅 끼쳐 왔다. 청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
세민은 그대로 청하의 것을 입에 머금었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극에 청하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순식간에 부드럽고 축축하며 뜨거운 곳으로 빨려 들어간 청하의 성기가 세민의 입 안에서 꿈틀거렸다. 청하는 어쩔 줄 모르고 침상에 깔린 애꿎은 이불만을 꽉 움켜쥐었다.
“대, 대체…… 다, 당장 그만…… 아흑, 아…… 읏……!”
청하가 소리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세민이 청하의 것을 입에 문 채 웅얼거렸다.
“입술 깨물지 마. 상처 나니까.”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때냐……!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남의 입 안에 성기가 들어간 것이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은 그 전까지의 느낌과는 전혀 차원이 달랐다. 세민이 청하의 것을 입에 문 채 강하게 빨아들이자, 청하의 고개가 뒤로 확 꺾이며 입에서 속절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뒷골이 확 뻐근해질 정도로 강렬한 성감이 순식간에 청하의 몸을 달궜다.
세민은 청하의 것을 그대로 뿌리 끝까지 깊게 머금은 채 강하게 빨아들였다가 혀로 기둥을 휘감은 채 쓸어 올렸다. 세민은 얼굴을 강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청하의 것을 귀두 끝에서부터 뿌리 끝까지 빨아들이듯 삼켰다 뱉어 내는 것을 반복했다. 청하는 쏟아붓듯 밀려들어 오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아래에서부터 세민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 으, 으응, 흐, 아……. 흣, 아윽, 아……!”
청하는 본능적으로 마구 고개를 저으며 아래쪽을 더듬어 세민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세민을 밀어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강하게 청하의 성기를 빨아들인 세민이 이번에는 귀두 끝을 혀끝으로 문지르듯 핥으며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잡아먹으니까 겁먹지 마라.”
마치 청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어, 어떻게 알았지. 청하는 정신 없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고 세민을 노려보았다. 괜히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세민이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네 녀석이 하는 생각이야 뻔하지.”
“……잘났군.”
청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세민은 제 옷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청하의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세민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병을 열어서는 안에 있는 것을 그대로 청하의 아래에 들이부었다.
“뭐야……!”
차갑고 미끄러운 느낌이 청하의 아래를 적셨다. 향긋하고 어딘가 모르게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향기가 좁은 객실 안을 채워 나갔다. 청하가 뜨악한 얼굴로 세민을 올려다보았으나, 세민은 여전히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에 나쁜 건 아니니 안심해라.”
“무슨…… 헉!”
청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세민은 다시금 청하의 것을 입에 물었다. 향유에 적셔진 허벅지와 엉덩이 위로 세민의 손이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세민이 집요하게 청하의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하자 다시금 몸 안의 불씨가 확 당겨진 듯 열기가 솟구쳤다. 청하가 더듬거리며 간신히 말을 뱉어 내었다.
“뭐, 뭘 하려는, 거, 야…… 흐읏…… 앗!”
자꾸만 엉덩이 골 사이로 미끄러지는 세민의 손가락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설마 정말 진짜로…… 하려는 건 아니겠지? 청하의 시선이 어지럽게 세민을 향했다. 그러나 세민이 정말 무언가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지금의 청하는 세민을 저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를 못 했는데……!
세민이 혀끝으로 귀두를 세심하게 핥아 내리고 귀두 아래의 움푹 들어간 곳을 이로 살살 긁어내리자 청하의 허리가 절로 꺾였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쾌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허벅지 안쪽 예민한 살에서부터 고환까지 매끄럽게 쓸어 올리며 기둥을 붙잡고 자극하는 손길은 능숙하기 짝이 없었다.
얘는 어떻게 이런 일도 이렇게 잘하는 거지? 청하는 정신없이 신음을 뱉어 내면서도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바로 BL소설 메인공의 능력인가? 진짜 불공평하군…….
“이 상황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있나 보지?”
청하의 귓가에 심술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아래를 내려본 곳에는 세민이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으로 청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위험하게 번뜩이는 붉은 눈이 포식자의 그것처럼 빛났다. 쾌감에 멍해졌던 머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가 처한 위태로운 상황이 그제야 청하의 뇌리를 울렸다. 청하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 잠깐!”
그러나 세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청하의 몸을 휙 뒤집었다. 순식간에 침상에 엎드린 채 향유로 미끌미끌해진 엉덩이를 세민을 향해 내밀게 된 청하는 다급한 마음에 휙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반항을 해 보기도 전에 세민의 몸이 곧장 청하를 짓누르듯 덮어 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열기가 느껴지는 기둥이 순식간에 청하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헉……!”
청하는 파드득 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렸으나 세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하는 당황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세민의 뜨거운 물건이 향유로 미끄러운 청하의 허벅지 사이 좁은 틈새로 파고들었다. 세민은 청하의 두 허벅지를 양쪽에서 단단히 모아 쥔 채 청하의 등 뒤에 제 몸을 바싹 붙이고는 그대로 추삽질을 시작했다.
청하는 어쩔 줄 모르고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싹 붙여진 허벅지 사이로 미끌거리는 향유가 흘러내리고, 세민의 거대하고 흉흉한 성기가 허벅지 사이의 좁은 틈새로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세민의 귀두가 허벅지 사이의 틈을 꿰뚫고 청하의 고환 아래쪽을 쿡쿡 찔러 대었다. 무시무시한 두께감이 느껴지는 기둥이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거칠게 쓸고 지나가자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묘한 느낌이 청하의 아래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이, 이게…… 무슨…….”
청하가 경악 속에서 더듬더듬 말을 뱉어 내었다. 그저 제 허벅지에 문지르고 있는 것일 뿐인데도 세민의 물건은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며 청하의 모아 붙인 허벅지 사이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청하의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
예전에도 얼핏 본 적이 있긴 했지만, 확실히 이건 장난이 아니다. 행여나 이런 것이 제 뒤에 들어오는 장면을 상상하기만 해도 정말이지 무섭기 짝이 없었다.
청하가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이를 갈며 말했다.
“하으, 읏, 너…… 설마 이, 이딴 걸 나한테 넣으려고…….”
“그래서 지금, 안 넣고 있잖아.”
세민이 거칠게 허리를 짓쳐 올리며 들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청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청하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뱉어 내는 세민의 목구멍에서 맹수의 그것처럼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청하의 귓가에서부터 오싹한 소름이 퍼져 나갔다.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듯한 세민의 욕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청하의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 닿았다. 순간, 청하의 아랫배가 찌릿해지며 아까부터 바짝 일어서 있던 청하의 물건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하, 읏…… 응, 아, 으응…… 아……!”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에 청하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그 와중에도 세민의 것은 착실히 청하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 분명했지만, 세민은 거친 숨소리를 뱉어 내면서도 끈질기게 청하의 부드러운 허벅지에 제 것을 비벼 대었다. 예민하고 여린 살결에 뜨거운 기둥이 쓸리는 감각은 생소하고 낯선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앞쪽으로 손을 가져간 세민이 바짝 일어선 채 흔들리는 청하의 것을 움켜쥐고는 강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청하의 어깨가 속절없이 파드득 튀어 올랐다. 앞에서는 세민의 손이 청하의 것을 움켜쥔 채 귀두 끝부터 아래까지 쓸어내리고, 뒤에서는 허벅지 사이로 파고든 세민의 물건이 청하의 것을 뿌리에서부터 긁어 올리고 있었다. 청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불에 얼굴을 처박았다. 청하는 침상에 엎드려 엉덩이만을 들어 올린 채 세민의 거친 몸짓을 받아내었다.
“아, 으응…… 으, 아흣, 하, 그, 그만…….”
청하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이불자락 틈으로 새어 나왔으나 세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날 선 쾌감에 청하의 머리카락이 바짝 곤두섰다. 고작 이런 정도의 행위로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아진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세민의 반대쪽 손이 청하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약간 큰 듯한 청하의 가슴을 움켜쥐고 주물거리던 세민은 두 손가락 사이에 돌기를 끼운 채 문질거리다 손끝으로 바짝 솟아오른 청하의 유두를 긁어내렸다. 짜릿한 쾌감이 청하의 전신을 따라 달렸다. 청하의 입술이 멍하게 벌어지고 세민의 손안에서 바짝 일어선 성기가 움찔거렸다. 사정감이 순식간에 아래로 몰려들었다.
“아직 안 돼.”
세민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세민의 단단한 손끝이 청하의 귀두 끝을 틀어막았다. 청하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 하지…… 하읏, 으, 그, 그만, 하, 하지 마……!”
청하가 제 성기를 움켜쥔 세민의 손등을 더듬으며 외쳤다. 그러나 세민은 여전히 청하의 뒤에 허리 짓을 하며 말했다.
“나는 아직 가려면 멀었는데, 같이 가야지.”
“그, 그만…… 아, 안…… 아흣, 흐윽…….”
대체 언제 가겠다는 건데?!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며 헐떡이는 신음을 뱉어 내었다. 강제로 사정을 저지당하자 갈 곳 없는 쾌감이 배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것 같았다. 청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내저으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결국 청하가 애원하듯 세민을 향해 말했다.
“제, 제발…… 하아, 놔, 놔 줘…… 읏…….”
세민이 거친 숨소리 사이 웃음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청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고 싶나?”
청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세민이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내가 그럴 마음이 들게 만들어 봐라.”
이 자식이 진짜……!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지금은 세민과 말씨름을 하고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청하는 세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돌려 온몸으로 저를 덮쳐 누르고 있는 세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대로 몸을 비틀어 세민의 옷깃을 움켜쥔 청하는 거칠게 세민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세민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스쳤다. 청하의 혀가 세민의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 굳어 있는 세민의 입 안을 애닳게 핥아 대며, 청하는 뜨거운 숨을 뱉어 내었다.
다음 순간, 세민의 붉은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세민의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청하의 턱을 꽉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제 입 안으로 파고들어 거칠게 입 안을 헤집는 뜨거운 세민의 혀에, 청하는 숨 막히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세민이 강하게 청하의 아래를 짓쳐 올렸다. 거대한 세민의 것이 미끌거리는 향유의 힘을 빌려 부드럽게 청하의 허벅지를 가르고 안으로 박혀 들어왔다. 세민의 것이 꿈틀거리며 청하의 엉덩이골 사이를 지분거렸다. 세민이 조급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넣겠다.”
청하는 정신 없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며 세민을 노려보았으나 세민은 나름대로 한계에 다다라 있는 듯했다. 세민이 청하의 것을 움켜쥔 손을 강하게 위아래로 훑어 올리며 구멍을 막은 손가락을 치웠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극에 성감이 단숨에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청하의 아랫배에 힘이 바짝 들어가며 입술이 멍하게 벌어졌다. 다음 순간, 청하의 것에서 흰 백탁액이 뿜어져 나왔다.
“하아, 읏, 아아…… 아, 으, 하앗, 아……!”
절정에 오른 몸에서 긴장이 서서히 풀어지는 순간, 청하는 녹진하게 풀어진 제 입구에 단단한 무언가가 닿아 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세민의 거대한 귀두가 천천히 청하의 엉덩이골 사이를 파고들었다. 청하의 것을 쥐고 있던 세민이 정액과 향유로 축축해진 손으로 청하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벌름거리는 구멍에 귀두 끝을 맞춘 세민이 천천히 제 것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며 거대한 이물감이 청하의 뒤를 파고들었다. 약간 공포에 질린 청하가 황급히 세민의 손목을 잡아 왔다.
“자, 잠깐……!”
진짜 죽는 거 아냐? 그, 그걸…… 그 무식하게 큰 걸 지금 내 뒤에 넣겠다고?!
그 전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의 청하에게는 이것이 첫 경험이나 다름없으니 덜컥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세민은 청하를 달래듯 그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느릿하지만 끈질기게 청하 뒤를 파고들었다. 청하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삽입은 그렇게까지 못 견딜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절대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청하의 뒤는 그럭저럭 유연하게 벌어지며 세민의 것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민도 힘이 드는지 입술 사이로 후, 하는 신음을 뱉어 내었다. 세민이 제 것을 물고 있는 청하의 구멍을 내려다보며 약간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과연, 천하의 청루각주는 다르군.”
청하는 눈을 치켜뜬 채 휙 고개를 돌려 세민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청하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나 정도가 아니면, 이 무식하게 큰 걸 받아 낼 수나 있을 것 같아?”
청하의 말에 세민의 입가가 다시금 실룩였다. 세민이 푸흐흐, 하고 바람 빠지는 것 같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세민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방금 전까지 빈정거리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다정한 울림이 세민의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청하는 머뭇거리는 사이, 세민이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게 청하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갖다 대었다. 달래듯 쏟아지는 애정 어린 입맞춤에 청하는 조금 전보다도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슴께가 왠지 모르게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청하의 뒤에 파고들던 세민의 것이 한층 더 크기를 키웠다. 청하는 경악 어린 눈을 번쩍 떴다. 세민은 모른 척 입맞춤을 계속하며 착실히 청하의 뒤를 슬금슬금 파고들었다.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지자 청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더, 더 이상은, 허윽, 무, 무리야…….”
“조금만 더.”
세민이 답지 않게 조르듯 말하며 청하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욕심껏 제 것을 밀어 넣자, 열기가 느껴지는 단단한 기둥이 온통 청하의 내벽을 짓뭉개듯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쫀득하게 제 성기를 감싸 오는 내벽의 느낌에 세민의 입가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청하 역시 헐떡이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때, 세민의 귀두가 청하의 내벽 안쪽,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정통으로 짓뭉갰다. 청하의 허리가 펄쩍 튀어 올랐다. 청하의 손이 허우적거리며 이불을 더듬었다.
“자, 잠깐, 거, 거기……! 하읏, 아……!”
세민은 다급한 목소리도 들은 척하지 않고 그대로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히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릿하게 안으로 짓쳐들어오는 세민의 몸짓에 청하는 그야말로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제어되지 못한 신음이 마구 흘러나왔다. 저릿저릿한 손끝의 감각과 함께 발끝이 자꾸만 곱아들었다.
청하가 신음을 지르며 버둥거리기 시작하자, 세민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청하의 등을 제 몸으로 내리눌렀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으나 지금은 그 역시 한계였다. 조급한 마음이 자꾸만 그의 등을 떠밀었다. 세민은 이를 악문 채 청하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옆으로 잡아 벌렸다.
“그냥 빨리할 테니 조금만 참도록.”
“무…… 뭐? 잠깐……!”
그러나 청하의 말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 세민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청하의 뒤에 제 것을 퍽, 박아 넣었다.
청하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차마 비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숨이 목 끝까지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골반을 단단히 움켜쥔 세민이 다시 한번 더 콱 하고 뒤를 쳐올렸을 때야, 청하는 밭은 숨을 내뱉으며 비명 섞인 신음을 흘렸다.
“허윽, 아, 으, 자…… 잠깐, 그, 아, 으응, 으…… 하읏, 아……!”
지금까지는 마치 장난이었다는 듯,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압박감이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세민이 강하게 뒤를 쳐올릴 때마다 한계까지 벌어진 청하의 구멍이 경련하듯 꿈틀대었다. 세민이 이를 악문 채 낮게 그르렁거리듯 말했다.
“힘을 빼.”
“아, 읏…… 아, 아으, 흐읏…… 흐…….”
“힘을 빼는 게 네게도 내게도 좋다.”
세민이 다시금 달래듯 말하며 청하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었다. 세민이 부드럽게 땀에 젖은 청하의 목덜미에 입술을 부볐다. 미안하다는 듯 힘들어하는 그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대체……!
청하는 고통에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세민의 말대로 어떻게든 몸에서 힘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강하게 조여 대던 구멍에서 조금 힘이 빠지는 순간, 다시금 세민이 퍽, 하고 제 것을 더욱 안으로 박아 넣었다. 청하의 입에서 기어이 앓는 듯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그만해……! 어, 어디까지, 하윽, 아, 어디까지 들어올 참이야?!”
내장이 다 밀려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몸속이 전부 세민의 것으로 꽉 찬 듯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진짜 남은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그걸 꼭 그렇게까지 다 넣어야겠냐?! 그러나 청하의 일갈에 세민이 억울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반밖에 안 넣었다.”
……뭐? 청하는 어이없는 심정으로 저도 모르게 뒤로 홱 고개를 돌렸다. 세민이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청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실제로 꽤나 억울한 듯 보여 청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청하의 표정을 보던 세민은 입을 꾹 다물고는 청하의 손을 휙 낚아채었다. 청하의 손을 움켜쥔 세민이 억지로 접합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네가 만져 봐라.”
청하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제 뒤를 뚫고 들어온 세민의 것을 더듬었다. 체감상 거의 목 끝까지 치고 들어온 것 같은데, 정말 놀랍게도 세민의 것은 아직도 반쯤이나 남아 있었다.
“미친…….”
청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 정말로 끝까지 다 넣었다간 죽는다…… 진짜로. 청하가 신음과 함께 말했다.
“알겠으니까…… 여, 여기까지만 넣어. 진짜 나…….”
나는 지금이 처음이라고……! 청하는 차마 뒷말을 뱉어 내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아 진짜 이걸 말할 수도 없고……! 그런 청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세민이 천천히 몸을 숙여 청하의 뺨에 입 맞추었다. 느릿하게 입술을 비벼 대는 몸짓이 답지 않게 부드럽고 다정해 청하의 마음도 다소 진정되었다. 세민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 네가 싫은 건 나도 하고 싶지 않아.”
세민이 잘게 치대듯 뭉근하게 안을 비벼 대며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뭐, 못다 한 건 다음에 해도 되니까.”
뭐……? 잠깐, 지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러나 청하가 무어라 말을 뱉을 틈도 없이, 세민은 제 것을 천천히 뒤로 빼었다가 다시금 콱, 하고 청하의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벌어진 청하의 입술 사이로 앓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세민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청하의 뒤를 쳐올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처음의 고통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자, 무시무시하게 뒤를 짓눌러 오는 압박감에서 점점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쾌감에 청하의 허리가 파드득 떨려 왔다.
세민의 커다란 귀두가 청하가 느끼는 극점을 쿡 찌르고 긁어 올리면, 뒤이어 단단하고 뜨거운 기둥이 청하가 느끼는 곳을 길게 짓누르듯 비벼 대었다. 청하의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잔인하게 몰아붙여진 쾌감이 정수리를 뜨끈하게 달궜다. 청하는 미처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두 번째 절정에 이르렀다.
“아, 아…… 아으, 아…… 잠, 나, 으, 으응…… 가, 가고 있…… 아앗……!”
흰 백탁액이 청하의 앞에서 뚝뚝 흘러내렸다. 그러나 세민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거칠게 퍽퍽 제 것을 박아 넣는 것에 집중했다. 절정이 채 가시지 않아 예민해진 몸에 난폭한 쾌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청하는 멍하게 입을 벌린 채 눈앞을 번쩍이게 하는 긴 절정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였다.
“으읏…….”
세민의 입가에서도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세민이 제 것을 뒤로 쭉 빼내자, 청하의 내벽이 수축하며 쫀득하게 세민의 것을 물고 늘어졌다. 마치 빠져나가는 세민의 것을 놔주기 싫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거의 귀두 끝까지 빼내었던 것을 다시금 퍽 하고 안으로 처박자, 내벽이 경련하듯 꿈틀거리며 세민의 것을 꽉꽉 조여 대었다. 세민의 눈가에서 불꽃이 튀었다.
“진짜…… 하읏, 정말 미치겠군…….”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순진한 듯 굴면서도 몸은 이리도 능숙한 것이 세민을 더욱 안달 나게 했다. 천하의 청루각주 백청하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남자들과 관계를 해 왔는지 세민도 익히 모르지 않았다. 청하가 쌓은 무공 자체가 남자들과의 교접으로 얻은 것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 빙설처럼 싸늘한 표정. 무표정한 얼굴에 말조차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하고 차가운 미인. 그것이 청루각주 백청하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그러나 세민은 다른 모습의 청하를 알고 있었다. 차가운 얼굴 뒤에 가려진 겁먹은 듯한 표정, 기가 약한 듯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성질머리, 위험에 처한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다정함과 곧은 마음. 세민은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아는 청루각주 백청하였다. 그리고…….
세민은 마지막으로 청하의 안에 제 물건을 강하게 박아넣었다. 그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으나, 마침내 청하의 안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세민은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제 것을 꽉 물어오는 내벽 저 깊은 안쪽에 정을 토해 내며, 세민은 청하의 몸을 뒤에서부터 강하게 끌어안았다.
청하는 힘없이 세민의 품 안에서 늘어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사정에, 청하의 앞에서는 묽은 정액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하의 목덜미께를 지분거리던 입술이 천천히 귓가를 거쳐 입술에 가 닿았다. 청하의 부드러운 입술을 가르고 뜨거운 점막을 욕심껏 훑어 내리며, 세민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자를 사랑한다.
알 수 없는 충만감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흥미와 호기심이었을지 모른다. 그토록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에 어린 눈물에 마음이 조금 동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민은 결국 처음부터 그의 시선을 잡아끌던 이 묘한 인간을 사랑하고 말았다. 단 한 번도 제 곁에 다른 사람을 둔 적 없던 그가 모든 것을 내던지고 구하러 가게 만들었던 자. 처음으로 그가 손을 내밀었던 자. 그에게 초조함과 불안감과 질투심과 안타까움과 애틋함이라는 감정을 가르친 자. 그는 세민의 모든 처음이었다.
세민은 청하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청하에게는 그가 처음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그의 마음과 같은 크기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청하는 그가 내민 손을 붙잡았고, 그들은 함께 도망쳤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세계로 함께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세민은 절대 청하를 놓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가 싫다고 해도, 제 결정을 후회한다 해도 세민은 이제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절대로, 이 품 안의 온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세민의 붉은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 * *
청하는 뻑뻑한 눈을 간신히 치켜떴다.
한가로운 햇살이 작은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와 좁은 방 안에 어른거리는 빛무리를 던지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방 안은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흐릿한 머릿속으로 천천히 지난밤의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청하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미쳤다…….”
진짜 미쳤어…… 완전 정신이 나갔지 내가……. 청하는 저도 모르게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긴 머리카락을 마음껏 헤집으며, 청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마구 내질렀다. 어젯밤 제가 저지른 짓이 그제서야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청하는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며 애써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래, 뭐 언젠가는 남자랑 이런 짓을 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잖아……. 그 빌어먹을 청루각인지 뭔지에 떨어졌을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다고……. 근데 왜 하필 주세민이야?! 왜 하필 저 녀석이냐고……!”
스스로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작했던 중얼거림은, 결국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끝이 났다. 진짜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그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어쩌다가 메인공 주세민이랑……. 원작은 또 어떻게 하고, 하, 진짜…….
그러나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청하는 어쩐지 어제의 행동이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비록 분위기에 휩쓸려 어쩌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짓까지 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청하가 마음만 먹었다면 분명 세민을 거절할 수 있었을 터였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긴 했지만, 어제 세민과 그런 짓까지 하게 된 것은 분명 청하의 의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잖아.”
청하가 스스로를 향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사실, 나쁘기만 한 게 아닌 수준이 아니고, 너무 좋긴 했지……. 설마 그렇게 무식하게 큰 것을 받아 낼 줄이야, 이 몸도 진짜 보통이 아니구먼. 청하는 푹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헝클어뜨리는 생각들을 애써 무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왜 세민을 거절하지 않았는지, 애초에 왜 세민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인지, 원작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원작과 위배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생각이 청하의 머릿속에서 마구 휘몰아쳤다. 아직은 그도 이 모든 것들을 명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어제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선택한 건 나 자신인데 주세민만 탓하고 있어서야 비겁한 짓이지.’
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상에 앉았다. 몸은 누가 씻겨 주기라도 한 듯 깨끗하고 뽀송했으며, 옷도 다른 것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어젯밤 그렇게 커다란 것을 받아 내었는데도 생각보다 아래의 통증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뻐근한 둔통만이 남아 어제의 기억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오히려 청하의 몸은 그가 이 세계로 온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고 힘이 넘쳤다. 온몸에서 강하게 휘몰아치는 강력한 내공의 흐름이 느껴졌다. 청하는 한 손으로 허리를 콩콩 두드리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게 청루각주 백청하의 내공인 건가……. 어제의 느낌으로는 오늘 제대로 허리도 못 펼 줄 알았는데, 자는 사이에 내공으로 스스로 몸을 회복했나 보네.’
확실히 청루각주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청하는 스스로의 내공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얘는 또 아침부터 어딜 간 거야.”
마치 그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객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저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본 청하는, 문간에 서 있는 세민이 답지 않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침상을 쟁반에 받쳐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민의 시선과 청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살짝 어색한 듯한 공기 속에서, 세민이 먼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침 가져왔다.”
청하의 얼굴을 힐끗거리던 세민이 슬쩍 다음 말을 덧붙였다.
“……부인.”
“…….”
청하의 손에서 날아간 베개가 세민의 얼굴을 향했으나, 세민은 한 손에 쟁반을 받쳐 들고서도 여유롭게 날아오는 베개를 피해 내었다. 청하가 이를 갈듯 외쳤다.
“누가 네 부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