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7/20)

15장

‘아버지라고?’

청하는 놀란 눈으로 흰옷을 입은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과연 선두에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지난번 무림대회의 때 한 번 얼굴을 본 적 있던 제갈유연이 차가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제갈 세가 사람들의 모습에, 하유신을 비롯한 도원맹원들도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갈유연은 저를 향하는 시선들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올려 정확히 주세민을 가리켰다.

“저기 간악한 마교의 교주, 주세민이 있다! 잡아라!”

달빛이 내리쬐는 월정루의 앞마당에 경악이 내려앉았다. 충격으로 굳어 있는 도원맹원들 사이에서 하유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교주 주세민이라고?”

방금 전, 세민이 뿜어낸 마기로 그가 마교의 인물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의 정체가 마교주 주세민이라는 것은 당연히 상상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청하의 일행들 사이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흘렀다. 청하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제갈유연 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저 사람은 어떻게 알고 여기에 나타난 거야?

제갈유연을 따라온 제갈 세가의 사람들은 가주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제히 영기를 발산해 세민의 머리 위로 넓게 영기의 그물을 펼쳤다. 세민이 어검을 타고 도망가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이다. 제갈 세가의 사람들이 둥글게 자리를 잡은 채 세민의 주변을 넓게 둘러쌌다. 순식간에 넓은 월정루 앞의 공터에는 세민을 중심으로 마치 사냥감을 몰이하는 듯한 구도가 펼쳐졌다.

청하는 초조한 얼굴로 세민을 돌아보았다. 세민은 납처럼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린 채 제갈유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민의 손에 들린 천마검에서 검붉은 마기가 위험하게 넘실거렸다. 당장이라도 천마검이 제갈 세가에서 펼친 영기의 그물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것 같았다. 세민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순간 붉은 기운이 번뜩였다. 저쪽에서 하유신이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 마교주 주세민이 확실한 것이오?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 말을 해도…….”

“조금 전에 저자가 마기를 쓰는 모습을 맹주도 보지 않았습니까.”

제갈유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기의 그물을 펼쳐 주세민의 퇴로를 차단한 제갈 세가의 사람들은 제갈유연의 지시에 따라 차근차근히 주세민에 대한 포위를 좁혀 나가고 있었다. 제갈유연이 여전히 냉정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저자가 바로 그 마교주 주세민이 확실하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그 정보를 어디서 얻었느냐는 말이다. 청하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의 옆에 있던 제갈서윤 쪽을 향했다. 그러나 제갈서윤은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제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서윤이……. 청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일단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놓은 채,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일단…… 잠깐 진정하시지요, 가주. 저자가 주세민이라 해도, 가주께서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제갈유연은 세민을 바라보던 싸늘한 표정 그대로 청하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제갈유연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저자도 청루각주의 일행으로 온 것이지요? 적대적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 하시니 묻겠는데, 각주는 저자가 마교주 주세민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갑자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청하에게로 향했다. 청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저를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청하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세민에게로 향했다. 세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청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제갈유연이 저렇게까지 확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청하는 간신히 입술 사이로 말을 뱉어 내었다.

“……그렇습니다.”

“설마, 정말인가?”

하유신이 경악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갈유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당황한 채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도원맹원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주세민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제갈 세가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청하는 그들이 무어라 말을 할 틈을 주지 않은 채 곧장 다음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주세민과는 무관합니다! 그저 흑마부대 건을 해결하기 위해 잠시 그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행동을 같이하다니, 지금 마교와 청루각이 손을 잡았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제갈유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게 왜 말이 그렇게 돼? 청하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었지만 딱히 그의 말을 반박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제갈유연이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각주, 마교는 우리 정파 연합의 공적임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마교주 주세민과 손을 잡았다니, 청루각의 저의가 의심되는군요. 저자와 대체 무슨 짓을 하며 돌아다닌 겁니까?”

“그게 아니라…….”

“설마, 이번 도원맹을 습격한 흑마부대와도 관련이 있는 겁니까?”

그 밑도 끝도 없는 모함에 청하는 그만 기가 막혔다. 청하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외쳤다.

“그러니까 이번 흑마부대 일은 마교나 주세민과는 무관하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방금 전 붉은 가면을 쓴 사내가 바로 이번 일의 원흉인 혈마교입니다. 청루각에서 각 문파와 세가에 띄운 청조를 받지 못하셨습니까?”

“그 혈마교와 마교가 관련이 없다는 말은 어떻게 믿지요?”

제갈유연이 여전히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게까지 꼬투리를 잡아 대니 청하로서도 말문이 막혔다. 하……. 청하의 입에서 기가 막힌다는 듯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주세민이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마침내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를 뱉어 내었다.

“정말이지 기가 차는군.”

세민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때까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단숨에 잡아 빼었다. 세민의 눈동자를 검게 물들이고 있던 법기가 사라지자, 그의 눈동자는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붉은 빛으로 빛났다. 그 전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초조한 표정으로 세민을 바라보았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청하를 향했다가 싸늘한 빛을 품은 채 제갈유연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건, 처음부터 설명을 들을 생각이 없어서인가?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밀어붙이는 자와 더 이상의 대화를 시도할 필요는 없겠지. 시간 낭비다, 청루각주.”

그리고 주세민은 검붉은 마기가 일렁이는 천마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천마검은 하늘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그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던 영기의 그물을 정통으로 찢어 놓았다. 영기를 유지하고 있던 제갈 세가의 사람들 사이에서 커흑, 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세민은 아까 전부터 단번에 그물을 찢어 버릴 수 있었으면서도 여태까지 청하와 제갈유연 사이의 대화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청하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잠깐…… 내가 설명해 볼게.”

그러나 주세민은 선명한 붉은 눈동자로 가만히 청하를 바라볼 뿐이었다. 청하의 머릿속에 왠지 모르게 어젯밤 객잔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던 세민의 고요한 얼굴이 떠올랐다. 갑자기 왜 그때의 모습이 생각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주세민은 그때처럼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무표정 아래로……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얼굴.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무거운 것이 청하의 가슴에 턱 하고 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말 없이 훌쩍 천마검에 뛰어오른 세민은, 마지막으로 청하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지고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제갈유연이 다급히 외치는 것이 들렸다.

“막아!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라!”

그러나 수십 명이 모여 형성한 영기의 그물까지 단번에 찢어 버린 마교주를 제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명이 어검에 올라타 세민의 뒤를 쫓았으나, 그들은 세민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마기를 일으켜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을 튕겨 낸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청하를 향했다. 청하는 그의 눈동자에서 순간적으로 저를 향한 염려를 읽을 수 있었다. 청하는 입을 꾹 다문 채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인데……!

다음 순간, 세민의 주변에 몇 번인가 보았던 검은 구름이 어리더니, 천마검에 올라탄 세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습을 감췄다. 제갈유연이 분통을 터트리며 가솔들을 닦달해 대었으나, 이미 사라져 버린 세민을 쫓는 것은 불가능했다. 청하는 세민이 사라진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사히 도망친 것에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놀랄 정도로 아쉬운 기분이 청하의 가슴을 서서히 채워 나갔다.

‘아쉽다니…….’

청하는 스스로의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이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동행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청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허공으로 사라진 세민의 흔적을 눈으로 쫓았다.

그때, 가솔들을 독촉해 대던 제갈유연이 휙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청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아무래도 마교주와 손을 잡은 일에 대해 정식으로 해명을 들어야겠습니다, 각주.”

제갈유연이 서릿발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미안하지만 각주의 신변을 잠깐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이건 또 대체 무슨 말이지? 그러나 청하가 그 말에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제갈유연의 지시를 받은 세가의 사람들이 즉시 청하의 주변을 둘러쌌다. 청하의 입술이 멍하게 벌어졌다.

제갈 세가의 가솔들은 청하를 향해 검을 들이대지는 않았으나, 여차하면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들고도 남을 기세였다.

청하는 당황한 눈으로 저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던지는 제갈유연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제갈서윤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제갈유연은 아들의 말도 들은 척하지 않았고 가솔들에게 내린 명을 거두지도 않았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백진과 청연의 기세가 대번에 흉흉해졌다.

흑마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뽑아 들었던 검을 아직 집어넣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백진과 청연은 그 즉시 청하를 둘러싸고 있는 제갈 세가의 사람들을 향해 들고 있던 검을 겨누었다.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단번에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유신을 비롯한 도원맹 사람들이 당황하여 허둥대는 것을 보며, 청하는 백진과 청연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멈춰라.”

“스승님.”

백진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내리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연도 형형한 눈으로 청하를 돌아보았으나, 청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하가 제갈유연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해명을 듣기 위해 제 신변을 제한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청루각주께서 지금껏 마교주와 손을 잡아 왔다니, 우리 정파 연합이 그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 잠시 이곳에 머물러 주셨으면 하는 것이지요.”

“대체 무엇을 더 설명하라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지난번 마교주 주세민이 저를 천마신궁으로 납치했을 때부터, 그자는 흑마부대의 배후를 찾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마교는 이번 일과 관련이 없고, 흑마부대의 배후를 캐는 과정에서 서로 목표가 같아 잠시 같이 행동했을 뿐입니다. 그 외의 어떤 설명을 더 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군요.”

청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제갈유연은 당치 않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제갈유연이 한쪽으로 비스듬히 머리를 기울인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갈유연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그것을 말해 주지 않았지요? 무림대회의 때도 분명 그자가 각주를 납치한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청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무림대회의 때 분명 그런 질문을 받았으나, 청하는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알고 있는 것들을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혈마교 놈들이 분명 정파의 무리 중 일부와 손을 잡고 있다고 했으니까!’

청하의 입술이 바싹 말라 왔다. 이 말은 즉, 정파 세력들 중에 혈마교의 스파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 당시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것을 밝혀도 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청하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하유신조차 미심쩍은 눈길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청하를 향했다. 청하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는 없었다. 청하는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주세민이 혈마교와 정파의 세력 중 일부가 손을 잡고 있다 말했습니다. 어느 세력이 혈마교와 결탁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다른 이들 앞에서는 말을 아꼈던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로 경악이 흘렀다. 술렁거리는 목소리가 월정루 앞의 공터를 가득 메웠다.

“혈마교와 결탁을?”

남궁휘가 놀란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말을 완전히 처음 듣는 백진이나 청연, 그리고 제갈서윤조차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청하를 바라보았다. 제갈유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파 중에 혈마교와 손을 잡은 세력이 있다? 마교주가 그리 말했다고요?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것입니까?”

“믿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저는 그 말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청하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갈유연이 청하를 바라보며 의심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 자체를 믿기도 어렵지만, 만약 사실이라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청루각이 가장 의심스럽군요. 사특한 무리와 뜻을 같이하셨으니.”

청하는 황당한 표정으로 숨을 내뱉었다. 대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상식적으로 제가 그들과 결탁하였다면, 방금 그와 같은 사실을 제 입으로 말했겠습니까?”

청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갈유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의심 어린 기색이 남아 있었다. 제갈유연이 냉정하게 말했다.

“어쨌든,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 많군요. 저희들뿐만 아니라, 정파 연합의 수장들 앞에서 정식으로 다시 한번 이번 일을 해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그때까지는 자유롭게 다니시도록 해 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제갈유연이 하유신 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하 맹주도 동의하십니까?”

지금 이곳에 정파의 수장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청루각주와 도원맹주, 그리고 제갈 세가의 가주 셋뿐이었다. 유신은 갈등하는 듯한 눈빛으로 청하를 힐끔 바라보았으나, 결국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모여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군. 그때까지 불편하더라도 잠시 도원맹에 머물러 줄 수 있겠나?”

청하는 꾹 입술을 다물었다. 하유신까지 이렇게 나온다면 사실상 청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며 고민하던 청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런…… 각주님.”

청연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청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하가 안심시키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잠깐 동안일 뿐입니다, 소각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백진이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굳이 이 일에 대해 해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청하는 한 번도 백진의 눈동자가 이토록 차가운 빛을 띠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청수검을 쥐고 있는 백진의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보였다. 백진이 청하 쪽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발을 내딛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스승님.”

동시에 백진의 시선이 청하와 그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제갈 세가의 사람들에게로 가 닿았다. 백진의 눈동자가 뚜렷한 의미를 띠고 청하에게로 향했다. 청하는 제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백진이 이대로 제 앞의 사람들을 베어 넘기고 청하를 빼낼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잠시 망설이던 청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말거라. 잠시 동안이면 되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백진이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 이상 무어라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청하는 제갈유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두 분 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잠시 이곳에 머물도록 하지요.”

제갈유연의 얼굴 위로 순간적인 안도의 표정이 스쳤다. 청루각 사람들과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그로서도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터였다. 그가 얼른 가솔들을 향해 눈짓했다.

“안으로 모셔라.”

청하도 백진과 청연 쪽을 향해 고갯짓을 하자, 둘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청하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둘러싼 제갈 세가의 사람들을 따라 도원맹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백진과 청연, 그리고 남궁휘와 제갈서윤이 그 뒤를 따랐다. 흑마부대의 습격으로 혼란스러웠던 밤은 그렇게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말과 함께 깊어져 가고 있었다.

* * *

“하아…….”

청하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어쩌지 못한 채 굳게 닫혀진 내실의 문을 노려보았다.

흑마부대의 습격과 주세민의 도주, 그리고 제갈유연의 비난과 함께 청하가 도원맹에 억류된 사건이 발생한 그날로부터 5일이 지났다.

그날 도원맹의 본당인 도화당 안쪽, 창문도 없는 깊숙한 내실 한구석으로 정중하게 안내받은 청하는, 무어라 이렇다 할 말을 꺼낼 틈도 없이 그대로 이곳에 갇혀 버렸다. 창천검은 물론이거니와 수중에 지니고 있던 부적들까지 한 장도 남김없이 모조리 빼앗긴 청하는, 백진이나 청연과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그대로 이곳에 억류되고 만 것이다. 그날 흑마부대를 상대하느라 몸속에 남아 있던 영기도 거의 다 써 버렸기 때문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청하는 그야말로 맨몸의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하유신이 내어 준 내실은 정갈하게 단장되어 있었고, 가구나 침구류, 그 밖의 다른 장식품들도 모두 최고급품뿐이었지만 어쨌든 감금은 감금인 것이다. 청하는 다른 무엇보다도 백진이나 청연에게 무어라 말을 남길 틈도 없이 이곳에 갇혀 버린 것이 신경 쓰였다. 제갈유연은 혹시라도 청하가 그들에게 무언가 지시 사항이라도 남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 듯, 그때부터 지금까지 청하는 방문객 하나 받지 못한 채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청하는 이 기가 막힌 상황에 그저 한숨만을 내쉬었다.

“아니…… 정말 진지하게 내가 혈마교 녀석들이랑 내통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청하는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청하를 잘 알고 있는 백진이나 청연, 그리고 남궁휘나 제갈서윤 같은 사람들은 청하를 믿어 주겠지만, 제갈유연이나 하유신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엔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이 조금 석연찮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청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갇힌 지 벌써 닷새나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은 영 이상했다.

남궁 세가의 가주 남궁서련과 무림맹주 금양수 등에게 연통을 넣어 그들을 도원맹까지 불러들이는 데에는 길어 봤자 이삼일 정도가 걸릴 터였다. 그들에게 다시 한번 제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와 양해를 구하면 이 황당한 짓거리도 끝이 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벌써 5일이 지났는데도 굳게 닫힌 내실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청하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긴 의자 위에 방만하게 늘어진 채 발을 까딱거렸다.

“사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혈마교 녀석들의 다음 목표를 찾아내서 습격에 대비해야 하는데…….”

청하는 짜증 난다는 듯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런 급박한 상황에 발이 묶인 것은 상당히 열이 뻗치는 일이었다. 심지어 바깥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으니 답답함은 한층 더 배가 되었다.

문득 청하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주세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주세민은 잘 도망쳤으려나. 제갈유연이 쫓으려는 엄두도 못 낼 정도였으니 알아서 잘 도망갔겠지. 벌써 지금쯤이면 마교의 부하들이랑 합류했을 것 같은데…… 한창 혈마교 녀석들의 뒤를 쫓고 있으려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는 생각을 끊어 낸 것은 갑작스럽게 문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이었다. 청하는 놀란 눈으로 굳게 닫힌 문 쪽을 바라보았다. 삼 일 만에 처음으로 느낀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었다. 대체 누구지? 제갈유연이 절대 아무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큰소리쳤는데…….

“잠깐 들어가겠다.”

문 뒤에서 들려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였다. 하유신의 차분한 목소리가 청하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청하는 늘어져 있던 의자 위에서 얼른 몸을 일으키며 문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굳게 봉해져 있던 문이 스르륵, 소리도 없이 열리며 하유신이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청하는 유신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갈서윤, 그리고…… 백진.”

유신이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랫동안 시간을 벌어 줄 수는 없다. 나라고 해서 마음대로 규칙을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용건만 빨리 이야기하도록.”

그리고 유신은 힐끗 청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청하를 바라보며 약간 착잡한 표정을 지은 하유신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내실 밖으로 나선 유신이 등 뒤로 문을 굳게 닫아걸자, 안에는 청하와 제갈서윤, 그리고 백진만이 남았다. 청하는 5일 만에 처음으로 보는 제자와 친우의 얼굴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청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백진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하 맹주께 부탁해서 잠시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소각주께서는 지금 제갈 세가의 가주와 대화하며 그자를 붙잡아 두고 계십니다.”

청하는 짧게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의 눈동자가 백진과 서윤의 얼굴 위를 번갈아 오갔다. 청하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백진이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청하는 손을 들어 올려 백진을 잠시 제지하고는 그의 뒤에 석상처럼 묵묵히 서 있는 제갈서윤을 바라보았다.

“그 전에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청하의 시선이 똑바로 서윤을 향했다. 서윤은 평소의 능글맞은 표정은 간데없이 입을 꾹 다문 채 물끄러미 청하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갈 세가의 가주에게 내가 주세민과 함께 있다는 것을 말한 사람이 너야?”

백진도 힐끗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은 잠시 침묵했으나 결국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뗀 채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대협!”

백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서윤을 향해 입을 열었지만 청하가 더 빨랐다. 청하가 굳은 표정으로 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닷새 동안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갈 세가에서 그자가 마교주 주세민인 것을 알아낼 방법이 없더군.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지?”

서윤이 약간 망설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서윤이 작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정기적으로 본가에 상황 보고를 하다가 언급하게 되었다. 나도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지만……. 미안하군. 결국 나 때문에 네가 이런 고초를 겪게 됐으니.”

서윤의 눈빛에 얼핏 죄책감이 어렸다. 서윤이 청하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리듯 말을 이었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분명 본가에 보고할 때 흑마부대의 배후는 마교가 아니라 다른 세력으로 보인다고 언급했고, 주세민의 목적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다르게 생각하신 것 같아. 어쨌든 내 책임도 있으니 사과하고 싶다.”

청하는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뜬금없이 제갈 세가가 전면에 나섰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저 멀리 제갈 세가의 본관에 앉아 있었을 제갈유연이 어떻게 청하가 주세민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타이밍도 좋게 단숨에 도원맹까지 달려올 수 있었겠는가? 청하는 복잡한 표정으로 묵묵히 눈을 내리깐 채 청하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제갈서윤을 바라보았다. 결국 청하의 입술 사이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어쨌든 지금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언젠간 이 빚을 받아 낼 테니까 각오하도록 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제갈서윤을 용서한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서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두웠던 제갈서윤의 얼굴에 그제서야 조금 생기가 돌았다. 서윤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청하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약간 민망한 기분이 든 청하는 부러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백진을 바라보았다. 백진은 미묘한 표정으로 서윤과 청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찌푸려진 미간을 보니 그는 청하의 관대한 처사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백진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청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현재 바깥의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계획이라……. 청하는 약간 의아한 눈으로 백진을 바라보았다. 따로 계획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단 말인가? 청하가 백진을 향해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백진은 약간 머뭇거리며 신경 쓰인다는 표정으로 서윤 쪽을 돌아보았다.

백진의 시선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나가서 하 맹주와 같이 기다리도록 하겠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고.”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제갈서윤의 앞에서는 말하기 껄끄러운 것이 분명했다. 섭섭하다 생각할 만도 했으나, 서윤은 깔끔하게 그 말만을 내뱉은 채 그대로 몸을 돌려 내실을 나갔다. 이제 텅 빈 내실에는 청하와 백진만이 남았다. 청하가 눈을 깜빡이며 백진을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계획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백진은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진이 청하 쪽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선 지금 바깥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남궁 세가의 가주와 무림맹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청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청하가 도원맹에 갇힌 지 벌써 5일이나 지났다. 공사다망하신 남궁 세가의 가주 남궁서련은 그렇다치더라도, 지리적으로도 도원맹과 가깝고 별달리 바쁠 일도 없는 무림맹주 금양수는 이미 도원맹에 도착하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었다. 청하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지? 무슨 급한 일이라도 벌어진 것이냐?”

백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 아무래도 분위기가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청하는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백진이 눈썹을 찌푸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제갈 세가의 가주가 스승님의 거취에 대해서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도원맹주와 제갈유연이 몇 번이나 스승님의 문제를 두고 말싸움을 벌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각주께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하고 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청하는 얼떨떨한 눈으로 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거취에 대해 그 둘이 다투고 있다는 말이냐? 그들에게 내 거취를 결정할 권한이 없을 텐데, 대체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면 무림맹주나 남궁 세가에게는 내 이야기를 전하지도 않은 거야?”

청하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백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 공자가 어떻게 남궁 세가에는 소식을 전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도원맹이나 제갈 세가에서는 어느 곳에도 아직 연통을 넣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소각주께서 직접 무림맹에 연락하려 했지만, 제갈 세가의 가주가 저지했습니다.”

청하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대체 그가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청하는 조금 전 백진과 제갈서윤을 이곳에 안내해 준 하유신의 얼굴에서 얼핏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단순히 그에게 이런 고초를 겪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깊은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청하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정말 황당하군.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 잠깐이면 된다고 해서 내 스스로 신변을 제한하는 것에 동의한 것인데, 그때 했던 말과는 다르잖아!”

백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대책을 세워야 할 듯합니다, 스승님. 부족한 식견이지만 제 생각엔…… 무력을 써서라도 이곳을 탈출하시는 것이 나을 듯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청하의 눈에 당혹이 어렸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력을 써서라도? 도원맹과 제갈 세가에게 검을 들이대자는 뜻이냐?”

“예.”

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이 청하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청하는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듯한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백진이 열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스승님의 안위입니다.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도원맹주나 제갈 세가의 가주에게도 검을 들이대야 합니다. 소각주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청하는 당황 속에서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백진을 바라보았다. 청하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복잡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백진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말한 계획은 지나치게 과격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청하가 도원맹이나 제갈 세가를 향해 검을 들었다간 스스로 정파 연합의 공적을 자처하는 꼴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세민과 손을 잡았다는 것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청루각이었다. 그런데 백진과 청연까지 합세하여 마음대로 청하를 탈출시키면서 그 과정에서 도원맹이나 제갈 세가와 무력 충돌까지 일으킨다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마교의 앞잡이이자 정파 연합의 배신자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했다.

하…… 진짜 이게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인지. 진짜 미쳐 버리겠군.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며 신음을 내뱉었으나, 어쨌든 그런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청하는 결국 백진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진이 단정한 눈썹을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외쳤다.

“스승님!”

그러나 청하는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백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된다. 지금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뿐만 아니라 청루각 전체가 강호의 적이 될 것이 분명해. 도원맹주와 제갈유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나을 것 같구나. 일단 지금은 그들도 내게 무언가 위해를 가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스승님, 그들이 정말 스승님께 해가 되는 행동을 하고 나면 늦습니다.”

백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청하는 애써 백진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도 나도 명색이 정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수장들인데, 설마 그들이 내게 무슨 큰일이라도 저지르겠느냐. 지금은 무언가 둘의 의견이 맞지 않아 상황이 지체되고 있는 것 같지만…… 저들도 나를 언제까지나 이곳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 감금되는 것을 본 자들이 한둘도 아닌 데다, 또 남궁휘도 분명 본가에 어떻게든 연락을 취할 테니……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보도록 하자.”

청하의 차분한 목소리가 백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애써 담담하게 말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청하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짜 마음 같아선 정파 연합이고 뭐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이대로 문을 박차고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청하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그 하나만의 목숨이 아니었다. 청하의 어깨에는 청루각 전체의 무게가 얹혀 있었다. 비록 그가 원해서 청루각주의 몸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청하는 청루각주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에 따르는 책임 역시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청하는 씁쓸한 표정으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청하를 내려다보는 백진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흘렀다. 백진이 이를 악문 채 청하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둘 사이에는 거의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청하의 바로 앞에 바짝 붙어선 백진이 청하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

청하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백진을 올려다보았다. 백진의 목소리에는 절절 끓는 듯한 울림이 담겨 있었다. 언제나 나이에 맞지 않게 차분하고 침착하던 백진이었다. 그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동요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짙게 가라앉은 백진의 눈동자에서 격렬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빤히 백진을 바라보았다. 백진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그 사이로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승님…… 그냥…… 그냥, 저와 함께 도망치시면 안 되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청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청하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러나 백진은 입술을 굳게 깨문 채 조금도 물러나지 않는 얼굴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진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저와 함께…… 도망치시면 안 되느냐 여쭈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청하는 당황 속에서 멀거니 백진을 바라보았다.

순간, 청하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단순히 무력으로 이곳을 빠져나가 청루각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백진이 말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사적인 것이었다. 말 그대로, 둘이 함께 도망치자는 것이다. 둘이서…… 이곳을 떠나, 둘이서만.

청하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백진이 청하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자, 청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청하의 뒤에 놓여 있던 긴 의자에 다리가 부딪혔고, 멈칫거리던 청하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백진이 천천히 몸을 숙여서는 청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스승님.”

청하를 올려다보는 백진의 눈에서 일렁이는 열기가 넘쳐흘렀다. 백진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스승님께서 제게…… 곁을 주지 않으려 하시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 얘기다. 청하는 눈을 깜빡이며 백진을 바라보았다. 백진이 청하의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 아니었다. 청하는 일단 고개를 저으며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 나는 그저…….”

그러나 처음으로, 백진은 청하의 말이 끝나는 것도 기다리지 않은 채 그의 앞에서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죄송하지만 스승님께서 기억을 잃으셨기 때문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여기서 기억을 잃은 얘기가 왜 나오는 거지? 당황한 청하를 앞에 두고 백진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청하를 올려다보는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백진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기억을 잃으시기 전, 스승님께서는 절대 제게 곁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도 않으셨고요. 그리고 그것은, 제 잘못입니다.”

청하는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문득, 청하의 머릿속에 언젠가 청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청하가 다른 제자들과는 모두 관계를 가지면서도 백진과는 절대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했던가. 그때도 청하는 원작의 백청하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지금 백진이 하는 말도 그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청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잘못을 저질렀다고……?”

“예.”

백진이 순간적으로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으나, 그는 곧 다시금 청하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선 지금 타인의 영기가 없으면 내공을 움직이지 못하시지요. 그것 때문에 곤란하신 점도 많으실 겁니다. 스승님께선 기억을 잃으신 것 때문에 내공을 운용하는 법도 잊어버려 그리되었다 생각하고 계시지만, 사실…….”

백진의 눈동자가 천천히 청하를 향했다. 강아지를 닮은 옅은 갈색 눈동자가 짙은 빛깔을 품은 채 가라앉았다. 백진이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선, 기억을 잃으시기 전에도 똑같이 내공을 움직이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 때문입니다.”

청하는 충격받은 얼굴로 백진을 바라보았다. 백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가 과거에 실수로 수련하고 계시던 스승님을 방해하여 스승님께서는 주화입마에 들으셨습니다. 다행히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땐 이미 내공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 되신 뒤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온 세상에 저와 소각주님, 둘뿐입니다.”

청하의 입술이 멍하게 벌어졌다. 원작 백청하에게 이런…… 이런 설정이 있었단 말이야? 순간, 청하의 머릿속에서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몇 가지 사실들이 천천히 하나씩 끼워 맞춰지기 시작했다.

원작 백청하는 수련을 위해서라면 아무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침전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과연, 그가 그렇게 해서까지 타인의 영기를 흡수하는 데에 집착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의 영기가 없으면 제 내공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독 백진에게 싸늘하게 굴었던 청연의 태도도 이해가 갔다. 청연은 백진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제가 내공을 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청연에게 털어놓았을 때에도, 청연은 전혀 놀라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었다. 그때는 그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전부 이것으로 설명이 되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청하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원래부터 내공을 쓰지 못했다고…….”

“예.”

백진이 청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진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감히 청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잠시 말을 멈추었던 백진이 다시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진작에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스승님께서 기억을 잃으신 것을 알면서도 미움받기 싫어서 지금까지 비겁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백진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길게 숨을 내쉰 백진이 천천히 토해 내듯 말을 뱉어 내었다.

“제게 이럴 자격도, 염치도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저는 스승님께서 저와 함께 도망치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진의 시선이 다시금 천천히 청하에게로 향했다. 청하는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에 절박한 빛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언제나 어른스럽고 여유롭던 백진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백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저는…… 저는, 스승님을…….”

백진의 목소리는 차마 더 이상 뒷말을 잇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청하는 물끄러미 저를 올려다보는 백진의 단정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청하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백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 차마 무슨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하는 것인지. 비록 백진의 뒷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청하는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묘하게 열기를 품은 눈동자, 청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절박한 시선, 미움받고 싶지 않아 기억을 잃은 그에게 사실을 숨겼다고 고백하던 떨리는 목소리. 지금 이 순간까지 와서 백진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지금에 와서가 아니지.’

청하는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을 향한 백진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백진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던 기회는 많았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청하는 지금껏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애써 백진의 마음을 모른 척 외면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 역시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청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백진의 머리 위에 가볍게 얹었다.

“확실히…… 예상치 못했던 일이구나. 하지만, 지금 와서 과거의 잘못을 꺼내어 너를 밀어낼 생각은 없다.”

백진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옅은 갈색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청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미 너는 충분히 대가를 치렀고, 한참도 더 전에 벌어진 일을 가지고 끊임없이 널 벌할 생각은 없단다. 게다가 나는 기억도 잃었으니……. 어쨌든,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맙구나.”

백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청하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백진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빛이 어렸다. 청하는 백진을 안심시키려는 듯 작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이렇게…… 이렇게 간단히 자신을 용서해 준다고? 백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청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마음대로 내공을 쓰지 못하는 것이 백진 때문이든, 아니면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든 별 상관이 없었다. 힘겨운 수련을 견디며 기를 쓰고 내공을 쌓아 올렸을 원작 백청하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겠지만, 지금의 청하에게는 그저 약간의 아쉬움 정도만을 느낄 뿐이었다. 원래부터 그의 것이 아닌 힘이었기에 그다지 미련이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청하는 백진의 얼굴에 마치 꽃이 피어나듯 희망의 빛이 번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백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럼, 스승님께선 저와 함께…….”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구나.”

청하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진의 입술이 멍하게 벌어졌다. 청하는 백진의 머리 위에 얹은 손으로 가볍게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 내가 몸을 피했다간 청루각 전체가 정파 연합의 공적이 될 거야. 일단은 이곳에서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다.”

백진이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백진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청하의 손목을 붙잡으며 애가 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제 말뜻은…….”

“네 말뜻은 나도 알고 있어.”

부드럽지만 단호한 청하의 말이 백진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백진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하가 다정한 손길로 백진의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청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돌아가서 소각주를 도와주거라. 청루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도원맹과 제갈 세가에 항의를 하는 것이 좋겠군. 그들이 끝까지 무언가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제갈 세가에서 반대하더라도 소각주가 알아서 무림맹에 연락을 넣는 게 좋을 듯하다.”

백진은 무어라 말을 하고 싶다는 듯 청하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청하는 백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곧은 눈동자로 백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둘은 한동안 침묵 속에서 뚫어져라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마침내 백진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기억을 잃은 그의 스승은 그 전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따뜻해졌으나, 그에게는 여전히 똑같이 잔인했다. 그는 용서받았지만, 동시에 거절당한 것이다.

백진의 갈색 눈동자에 폭풍우 치는 파도 같은 거친 일렁임이 스쳐 지나갔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하던 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청하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청하의 앞에 앉아 있던 백진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청하를 향해 두 손을 모으며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인 백진은, 그대로 몸을 돌려 굳게 닫힌 내실의 문을 나섰다.

텅 빈 방 안에 홀로 남은 청하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아아…….”

청하는 벌써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며 침상에 누운 채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백진을 돌려보낸 지 벌써 약 하루의 시간이 지났다.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하고 여유롭게 백진을 돌려보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입에서는 그저 땅이 꺼질 듯한 한숨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백진도 백진이지만, 청하를 이토록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단연 꼼짝달싹 못 하고 이곳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이 상황이었다. 도대체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청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청하는 끙, 하고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냥 모른 척하고 백진이랑 같이 도망칠걸 그랬나.’

문득 그런 생각이 청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청하는 곧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를 꾸짖었다. 백진이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뻔히 알면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제 앞에서 상처받은 눈으로 고개를 늘어뜨리던 백진을 떠올리자니,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속이 한층 더 불편해졌다.

청하는 다시금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며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노려보았다.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내리누르며, 청하는 어떻게든 이곳을 나가기만 하면 하유신이든 제갈유연이든 가만두지 않으리라 이를 갈았다. 감히 나를 이렇게 가둬 놓고 무어라 일언반구도 없어? 아주 청루각을 우습게 보아도 정도가 있지…….

진짜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저 문을 박살 내고 나가 버리고 싶다. 백진에게는 청루각이 정파 연합의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들며 무력 행동은 하지 말라 일러두었지만, 사실 청하의 인내심도 이제 거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몸속에 내공을 운용할 수 있는 영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이미 성질을 못 이기고 벌써 무슨 사고를 쳤을지도 모른다.

“하아…… 그냥 갑자기 벽이 무너져 내린다거나, 뭐 그런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지겹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의 생각이 어이없어 피식, 웃음을 흘리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무언가가 쿵, 하고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뭐지?”

침상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청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온 벽 쪽을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소리가 들려온 쪽의 벽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청하가 바라보고 있던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청하는 얼이 빠진 얼굴로 구름처럼 흩날리는 흙먼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도원맹의 본당인 이곳 도화당 한복판에, 누군가가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을 뚫어 버린 것이다.

어떤 기시감이 청하를 덮쳤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마교의 본거지 한복판에서, 그가 주세민에게 납치되었을 때도 분명 지금처럼 이렇게 벽이 무너지고…….

그때, 뿌옇게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천천히 커다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하는 저를 찌를 듯 응시하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말 황당하고 기가 막히기 그지없었지만, 동시에 왠지 모르게 별로 놀랍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라면 이런 짓을 하고도 남았다. 언제나 한 번 당했던 것은 반드시 그대로 갚아 주고야 마는 성격이니까. 청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무너지는 벽 사이에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주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입에서 먼저 말이 튀어 나갔다.

“미쳤어?”

그러나 주세민은 청하의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세민은 가장 먼저 굳게 닫힌 문 쪽을 향해 휙 손을 뻗고는 무어라 입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검붉은 마기가 세민의 손에서 뻗어 나와서는 문 앞에 복잡한 진을 그렸다. 문을 봉쇄하는 주문일 것이다. 청하를 향해 휙 고개를 돌린 세민이 오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빨리 서둘러라.”

“뭘?”

청하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세민은 그런 청하를 바라보며 답답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세민은 참을성 있게 청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다시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빨리, 여기서 도망가야지.”

청하의 입술이 멍하게 벌어졌다. 청하가 당황한 눈으로 세민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도망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도망이라니?”

세민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힐끗 무너진 벽 너머로 시선을 던진 세민은 약간 초조한 표정으로 청하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별로 없다. 바깥에서 내 수하들이 시간을 끌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버티고 있을 수는 없지. 빨리 내 손을 잡아.”

청하는 저를 향해 내밀어진 세민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나보고 같이 도망가자고? 마교주 주세민과 같이?

세민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청하를 억지로 들쳐메거나 기절시켜서 끌고 가려는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밑도 끝도 없이 무작정 납치부터 해 갔던 지난날을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라 할 수 있었다. 세민은 그저 청하를 향해 굳게 한쪽 손을 내민 채 뚫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청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몰라? 너와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지금 이곳에 갇혀 있는데…… 그런데 너랑 같이 도망을 가자고?”

“내게 납치를 당했다고 해도 상관없다.”

청하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하, 하고 코웃음 쳤다.

“잘도 믿겠군.”

이미 주세민과 청하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정파 연합의 공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백진과 청연이 그를 억지로 빼내는 것도 마다했는데, 이제 와서 주세민과 같이 여기를 빠져나가라고?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단호한 목소리가 청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세민이 형형한 눈동자로 그런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는 다시 한번 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럴 수 없어. 지금 너와 같이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가? 난 그럴 수 없어.”

“그럼 계속 여기 처박혀서 저들이 네게 무슨 짓을 할지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래.”

청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벽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정말로 벽이 무너져 내렸는데도 청하는 그 밖으로 발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벽이 아니었다. 이곳은 단순한 도화당의 내실이 아니라 일종의 틀이자 울타리였으며, 청하가 속한 세계를 의미했다. 청하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청루각의 각주였으며, 정파 연합의 일원이었고, 원작을 따라가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청하가 속해 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를 의미했고, 세민이 손을 내밀고 있는 저 바깥은 그가 알지도 못하고 미래를 장담할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청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갈 수 없어.”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어째 나는 계속 거절하기만 하는군. 청하는 약간 씁쓸한 심정으로 그런 세민의 얼굴을 빤히 마주 바라보았다. 어제는 자신과 함께 도망가자는 백진의 말을 거절했는데, 오늘은 그를 빼내 주기 위해 벽까지 부수고 나타난 세민을 거절했다. 제게 내밀어지는 손을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도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제갈 세가의 가솔들을 피해 도망갔던 주세민이 기껏 수하들까지 이끌고 와서 도와주려 했는데……. 청하는 약간 미안한 마음을 담아 세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에 일렁이는 듯한 빛이 깃들었다. 세민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어제의 백진처럼, 청하는 세민이 복잡한 눈동자로 고개를 숙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하의 마음속에서 무어라 딱 잘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마구 요동쳤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와 함께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손을 잡고 싶지만,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청하는 더 이상 제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세민은 휙 몸을 돌려 진이 쳐져 있는 문 근처의 천장을 향해 마기를 발산했다. 쿠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무너지며 떨어지는 천장의 잔해가 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을 확인한 세민은 문을 봉쇄하고 있던 진법을 그대로 거둬 버렸다. 청하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뭐 하는 거야?”

진법이 사라지자마자 바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방 안에까지 들려왔다. 문밖에는 이미 도원맹과 제갈 세가의 가솔들이 잔뜩 몰려와 봉인을 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봉인이 사라지자, 이제 문을 막고 있는 것은 방금 세민이 무너뜨린 천장에서 쏟아져 나온 나무와 벽돌, 기왓장 같은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자들은 다들 영기를 쓸 수 있는 무림인들이니,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안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청하는 초조한 표정으로 세민을 바라보며 빠르게 말을 뱉었다.

“빨리 가!”

그러나 세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똑바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세민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다시금 청하를 향해 한쪽 손을 내밀었다.

“네가 나와 같이 가지 않는다면,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다.”

진짜 미친 건가? 설마, 농담이지? 청하는 당황한 눈으로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민의 얼굴에는 농담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세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으로 청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에 내밀어진 손은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청하를 향했다. 청하는 그야말로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입술만을 달싹였다.

“……이대로 정파 연합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면 분명 붙잡히고 말 거야. 나도 이렇게 무작정 가둬 놓고 있는데, 네가 붙잡히면 그들이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그러나 청하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세민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세민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최소한 네 곁에는 있을 수 있게 되겠군.”

청하는 당황 속에서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이 또라이가 진짜……. 얼마나 또라이였는지를 잊고 있었다. 청하는 입술이 바싹 말라 오는 것을 느끼며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무어라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고집이었다. 청하의 입술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대체…… 대체 왜 그렇게까지…….”

청하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가. 왜 그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사실 알고 있었다. 왜 세민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지. 차마 말로 내뱉지 못했던 백진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던 것처럼, 청하는 세민이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마교의 교주가 청루각주를 위해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원작이 왜 일그러지기 시작한 건지. 그가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왜 원작의 흐름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인지.

청하는 알고 있었다.

“나와 함께 가자.”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청하를 향했다. 청하는 그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 같은 눈동자 안에 얼핏 연약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원작 소설의 주인공이자 마교주 주세민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불안정하고, 가냘프고, 당장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위태하게 흔들리고 있는 연약한 빛. 청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세민의 손은 여전히 청하를 향해 내밀어져 있었다. 이곳에 쳐들어온 이래, 세민은 단 한 순간도 청하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저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세민은 청하를 대신해 선택해 주었다.

청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머뭇거리듯 내뻗어진 손은, 단단한 나무처럼 저를 향해 내밀어진 커다란 손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뜻밖에도 세민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세민의 입매가 순간적으로 조금 부드럽게 풀어졌다. 세민은 단단하게 청하의 손을 마주 붙잡아 왔다.

다음 순간, 두 인영은 커다랗게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 새까만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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