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청하는 한밤중에 문득 옅은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몸을 뒤척이며 다시금 잠을 청했으나,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잠이 들기는커녕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영기를 흡수한 덕분에 피곤은 많이 가셔 있었으나, 노곤하고 나른한 감각이 몸을 감싸고 도는 반면 정신은 도통 다시 잠에 빠져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아…… 빨리 자야 하는데, 큰일이로군.’
이러다간 내일 꽤나 고생할 것이 분명했다. 오늘 온 것만큼 더 가야 겨우 도원맹에 도착하는데, 도원맹에 도착해서도 쉬기는커녕 당장 흑마부대를 막아 낼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침상에 누운 채 몇 번이나 뒤척이며 눈을 끔뻑이고 있던 청하는, 결국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수면제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으니, 아래층에 내려가서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혹시 자고 있을 일행들을 방해하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간 청하는, 탁자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객잔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주세민이 객잔 구석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열린 창가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하나로 올려 묶은 세민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세민의 앞에는 작은 술병과 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청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혼자 뭐 하는 거지?’
청하는 계단참에 멈춰선 채 머뭇거렸다. 인기척을 내면 어색해질 것 같은데……. 이대로 다시 모른 척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을지 어떨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저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 있다는 거 알고 있다. 너도 이리 와서 한잔하지 그래?”
청하는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있는 세민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어차피 술 한잔하러 온 것이긴 하니까. 망설이던 청하는 결국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민이 앉아 있는 탁자 옆에 멈춰 서자,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세민이 이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세민이 맞은편을 향해 턱짓했다.
“앉아.”
입을 꾹 다문 청하가 세민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민이 소맷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술잔을 하나 더 꺼내고는, 청하의 앞에 내려놓은 채 작은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 주었다. 청하는 말 없이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세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객잔 주방에 있던 술인데, 아주 고급은 아니어도 한잔하기에 나쁘진 않더군.”
비어 있던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른 세민이 잔을 들어 올린 채 재촉하듯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청하는 세민을 향해 마주 잔을 들어 올려 보이고는 잔에 있던 술을 단숨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꽤 도수가 높은 것 같았지만, 깔끔하고 알싸한 향이 퍼지는 것이 제법 나쁘지 않았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그래.”
담담히 대답하는 세민을 향해 청하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세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따라 세민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다른 때와는 약간 다른 것 같았다.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듯한 분위기가 약간 누그러져 있는 것이, 술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얼굴 위에 내려앉는 달빛 때문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청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한밤중에 왜 청승맞게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거지?”
세민의 눈동자가 천천히 청하를 향했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세민이 피식,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청승맞아 보이나?”
청하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의 주세민은 정말 이상했다. 평소처럼 능글맞거나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가늘게 눈을 뜬 채 그런 세민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세민이 청하를 향해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이 밤중에 왜 내려온 거지?”
“중간에 깼는데 다시 잠이 안 와서.”
“나랑 비슷하군. 나도 잠이 오지 않아 내려왔다.”
딱히 할 말이 없어진 청하는 다시금 입을 다물고 세민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것보다는 오늘따라 그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이 신경 쓰였으나, 굳이 그것을 물어보기도 여의치 않았다. 청하는 입을 다문 채 앞에 놓인 술병에 손을 뻗어 스스로 잔을 채웠다. 세민이 뻔뻔스럽게 청하를 향해 빈 잔을 내밀었다. 잠시 눈을 치켜들고 세민 쪽을 힐끗 바라본 청하는, 인심 쓰듯 그의 잔도 채워 주었다.
매끈한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청하를 향해 세민이 말했다.
“몸은 괜찮나?”
세민의 시선이 물끄러미 청하를 향했다.
“영기를 마음대로 못 쓰니 피로 회복이 어려울 텐데…… 또 누군가가 도와준 건가?”
마지막 질문에서 왠지 미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붉은 기운이 도는 눈동자가 집요하게 청하의 얼굴을 살폈다.
또 알 수 없는 질문. 청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그런 세민을 마주 바라보았다. 세민이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청하는 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청하는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최대한 평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뭐…… 그렇다면? 어차피 너랑은 상관없잖아.”
세민의 입술 끝이 약간 실룩거렸다. 달빛을 받은 세민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상관없다라…….”
나지막이 그런 말을 중얼거리던 세민이 들고 있던 술잔을 들어 올려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기울어지는 술잔 너머로 세민의 날카로운 시선이 곧장 청하에게로 날아들었다. 어두운 동공이 어둡게 가라앉으며 그 안에서 일렁이는 붉은빛이 스쳐 지나갔다. 청하는 문득 짙은 기시감을 느꼈다.
청하는 며칠 전 청루각의 침전에서도 세민과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 세민은 청연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 왜 그가 그런 짓까지 해야 하는 것이냐 물었고, 자신은 그것이 그와 무슨 상관이냐 되물었다. 그리고 세민은 그때도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어둡게 번쩍이는 눈동자로 청하를 노려보았었다. 계속해서 대화가 반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청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왜 그러는 거지?”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세민의 얼굴을 향해, 청하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왜 자꾸 내게 그런 것을 물어보고…… 왜 너와 상관도 없는 일에 신경을 쓰는 거지?”
“글쎄, 왜일까?”
세민이 술잔을 내려놓고는 탁자 위에 두 팔꿈치를 기댄 채 청하를 향해 살짝 몸을 숙였다. 청하의 앞으로 세민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들었다. 옆으로 슬쩍 고개를 기울인 세민은,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왜 내가 흑마부대의 흔적을 쫓기 위해 굳이 너와 행동을 같이하고, 네 사정을 궁금해하고, 네 몸 상태를 신경 쓰고, 왜 나와 상관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그것은 바로 청하도 궁금해하던 것이다. 세민의 눈동자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바로 청하를 향했다. 세민의 손가락에는 여전히 그의 눈동자 색을 바꿔 주는 반지가 끼여 있었지만,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 안쪽 저 깊은 곳에는 감출 수 없는 붉은 빛깔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세민이 청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체 왜일까?”
청하는 말문이 막힌 채 그런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청하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달싹거렸으나, 그 뒤의 말은 쉽게 뱉어지지 않았다. 그건…… 그건, 글쎄.
당혹스러운 기분이 서서히 청하의 몸을 잠식해 나갔다. 주세민이 의뭉스럽게 구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한밤중의 달빛 아래에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오늘따라 묘하게 누그러진 듯하기도 하고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한 세민의 분위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청하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세민의 얼굴을 뚫어질 듯 마주 바라보았다. 세민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분명 코앞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청하는 시선을 내려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세민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알 수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와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 드는 것일 수도 있었다. 청하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주세민은…….
다음 순간, 청하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찰랑거리는 술잔에서 흘러나온 술이 청하의 손가락을 적셨다. 청하는 잔을 들어 올려 다시금 단숨에 입 안에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빈 잔을 탁자 위에 탁, 내려놓은 청하는 빠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이만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군. 내일 갈 길도 머니, 너도 빨리 들어가서 쉬는 게 좋을 거야.”
아무 말이나 뱉어 낸 청하는 그대로 휙,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놓았다. 등 뒤로 세민의 말 없는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으나, 청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른 청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털썩 침상에 몸을 뉘였다.
벽 쪽을 향해 돌아누운 청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복잡한 상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으나, 청하는 의식적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잠을 청했다. 도수 높은 술을 두어 잔이나 단숨에 들이켠 탓인지,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더 수마 속으로 잠겨 들며, 청하는 아직도 홀로 아래층에 앉아 있을 주세민에 대해 생각했다. 곧 어둠이 빠르게 청하의 의식을 잠식했다.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도원맹을 향해 출발한 일행들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마침내 월정호 옆에 위치한 도원맹의 본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청하 일행들은 이마에 푸른 띠를 두르고 있는 맹원의 안내를 받아 이곳 월정원의 중심에 위치한 도화당 안으로 들어섰다. 도원맹에는 벌써 두 번째 방문하는 것이지만, 월정원의 중앙에서 으리으리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도화당 안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화당 곳곳을 지키고 있는 맹원들의 얼굴에는 서늘한 긴장감과 함께 옅은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청루각 제자들의 얼굴에 서려 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도화당 깊은 안쪽에 위치한 내실로 안내받은 일행들은, 맹원이 조심스럽게 열어 주는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청하가 막 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을 때, 안쪽에 늘어뜨려져 있던 발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빨리 와 주어서 고맙군.”
남자다운 목소리가 청하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청하는, 발을 걷어 올리며 모습을 드러낸 도원맹주 하유신을 발견했다. 하유신의 안색을 살피던 청하의 미간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너……!”
청하는 말을 멈춘 채 입술을 깨물었다. 하유신의 얼굴은 창백했고, 몸에 걸치고 있는 가벼운 내의 안쪽으로 언뜻언뜻 흰 붕대의 모습이 비쳤다. 며칠 전에 보았던 청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유신도 부상을 입은 건가? 청하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런 하유신의 모습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청하의 시선을 느낀 유신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표정으로 볼 것 없다. 그냥 가벼운 상처일 뿐이니. 차림새가 가벼운 것은 좀 이해해 주길.”
가벼운 상처라고? 청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말 가벼운 상처라면 하유신 정도 되는 고수가 아직까지 상처 입은 티를 내고 있을 리 만무했다. 이미 한참 전에 전부 회복했겠지. 어쩌면 청연이 했던 말과 저리 변명이 똑같을 수가 있는지……. 그러나 청하는 더 이상 아무런 말 없이 입을 다물었고, 유신 역시 입을 다문 채 청하 일행들을 내실 한편에 마련된 자리로 안내했다. 커다란 탁자 주변에 일행들이 자리를 잡고 나자, 유신이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빨리 와 준 덕분에 두 번째 습격 전에 시간을 맞출 수 있었군. 다행이네.”
“어떻게 된 겁니까, 하 맹주.”
청연이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청연의 날카로운 시선이 며칠 전의 자신과 비슷한 상태인 듯한 유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유신이 그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레 전쯤, 흑마부대가 도원맹을 습격했소. 내가 선두에서 그들을 막은 덕분에 가까스로 흑마부대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그만 예기치 못한 부상을 입게 되었지.”
“두 번째 습격이 예상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남궁휘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하유신이 힐끗 그쪽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숨을 내뱉었다.
“녀석들은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었다. 월정원 북쪽에 있는 월정루에는 도원맹에서 대대로 내려온 여러 가지 기물들이 봉인되어 있는데, 흑마부대가 그쪽을 습격했지.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쫓겨났기 때문에 분명 다시 습격해 오리라 예상하고 있다.”
잠시 말을 멈춘 유신은 청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틀 전에 청루각에서 보낸 청조가 도착했다. 흑마부대를 부리는 자들이 혈마교라는 집단이고, 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이 혈석이라고?”
청하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조가 먼저 도착해서 설명을 덜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유신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그것인지는 확신할 수는 없어도, 월정루에도 분명 비슷한 물건이 봉인되어 있다. 녀석들이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군. 내가 알기로, 중원에 그와 같은 혈석은 총 네 개가 있다. 그중 하나가 이곳 도원맹에 있는 것이지.”
“네 개밖에 없다고?”
청하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청하의 시선이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세민의 시선과 부딪혔다. 예상했던 대로 이곳에도 혈석이 봉인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설마하니 온 중원을 통틀어 그러한 혈석이 총 네 개밖에 없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첫 번째 혈석은 제갈 세가의 사당에 있었고, 두 번째 혈석은 청루각의 수장고에 있었다. 세 번째 혈석이 이곳, 도원맹에 봉인되어 있는 것이라면, 만일 이것까지 빼앗기게 될 경우 이제 혈석은 단 한 개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청하는 당황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초조한 감각이 청하의 등골을 타고 달렸다.
백진이 나이에 맞지 않게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월정루에 혈석이 봉인되어 있다면, 흑마부대가 다시 그것을 찾으러 올 것은 거의 확실히 보입니다. 도원맹과 함께 저희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절대 두 손 놓고 혈석을 빼앗기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유신이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청하는 유신의 얼굴에 짙은 피로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저 자존심 강한 도원맹주가 청루각에까지 도움을 구하는 전갈을 보낸 것을 보면, 이번 일로 얼마나 도원맹의 타격이 컸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유신은 흑마부대를 격퇴했을 때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가 입은 상처나 맹원들의 얼굴에 내려앉은 불안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청하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월정루를 좀 둘러보겠네.”
하유신의 안내에 따라 일행들과 함께 월정루 근처를 둘러보던 청하는, 저를 잡아끄는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세민이 딱딱한 얼굴로 청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청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민이 약간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마음에 걸려서…. 혈마교가 어떻게 천마를 소환하려는 건지 짐작이 가나?”
“글쎄…….”
청하는 멀뚱히 눈을 깜빡이며 세민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꺼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혈마교에 대해서는 나보다 오히려 네가 더 잘 알 텐데, 네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지. 혈석을 이용해 소환하려는 것 아닌가?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오히려 청하는 세민에게 질문을 되돌렸다. 세민은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민의 모양 좋은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혈석은 그냥 매개체일 뿐이다. 혈석이라는 것은 과거 천마가 이 땅에서 흘렸다는 피로 만들어진 돌이지. 혈석은 본래부터 천마의 것이니, 그 혈석을 매개체로 사용하면 천마를 더 쉽게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내가 궁금해하는 것은 다른 것이지.”
“그게 뭔데?”
어느새 세민의 말에 푹 빠져든 청하가 황급히 되물었다. 세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청하를 마주 바라보았다. 세민이 월정루 근처를 둘러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힐끗 시선을 던지며 느릿하게 말했다.
“천마라는 것이 정말 실존한다면, 그것은 실체가 없는 어떤 초월적인 힘 내지는 영혼 같은 것일 거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는 그것을 강림시켜야 할 육신이 필요하겠지.”
청하는 문득 뒷목을 따라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세민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제야 비로소 약간 감이 잡혔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말은, 제물이 필요하다는 건가?”
“엄밀히 말하면 그릇에 가깝지. 천마를 강림시켜야 할 살아 있는 인간의 육신이 필요하다.”
세민 역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세민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천마를 소환하는 데에는 혈석과 그릇이 필요하다. 그러나 혈석에 대해서는 그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혈마교가 천마의 그릇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육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세민이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계속 그것이 신경 쓰였다. 녀석들이 혈석을 확보하기 위해 이 정도로 노력을 하고 있다면, 분명 그릇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계획이 있을 텐데……. 지금으로써는 짐작도 할 수 없군.”
“그냥 아무 사람이나 그릇으로 쓸 수는 없는 거지?”
청하의 말을 들은 세민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 리 없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청하가 그것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묻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먼 곳에서부터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삽시간에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리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하유신의 얼굴빛이 하얗게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귀청을 찢을 듯한 커다란 경고음 소리가 월정루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저쪽에서부터 이마에 푸른 띠를 두른 몇몇 도원맹원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며 소리쳤다.
“결계가 깨졌습니다, 맹주님! 침입자가 있습니다!”
침입자라고? 이런 상황에서 침입자라면 그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긴장된 분위기가 그들 주변을 감쌌다. 유신이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1급 이상 맹원들은 전부 이쪽으로 집결하라! 2급 이하 맹원들은 후방에서 대기한 채 부상자가 생겨나는 즉시 엄호하라.”
흩어져 있던 도원맹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청하는 당장 허리춤에서 창천검을 뽑아 들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고, 월정루 앞의 공기는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하유신 역시 검을 뽑아 들었으나, 그는 앞으로 나서는 대신 후열에 머문 채 영기를 끌어 올렸다. 아직 일선에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제갈서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
“하필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습격이라니, 재수도 없군.”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습격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청하가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백진이 검을 든 채 청하를 호위하려는 듯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서는 것이 느껴졌다. 청하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청하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주세민의 훤칠한 몸이 청하의 앞을 가리듯 막아섰다. 청하는 황당한 눈으로 그런 세민의 넓은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청하가 미처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바람 소리에 섞여 스스슥 하는 불길한 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지난번 대림현에서 들어 본 적 있던 바로 그 소리였다.
“흑마부대……!”
옆에서 남궁휘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청하는 검을 단단히 고쳐 잡은 채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별다른 예고도 없이, 온통 검은색으로 몸을 뒤덮은 흑마부대가 북쪽에서부터 그들을 향해 까맣게 짓쳐들어왔다.
“사방진!”
하유신이 짧게 소리쳤다. 도원맹원들이 일제히 진을 구사하며 북쪽에서부터 그들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흑마부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흑마부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맹원들이 형성한 진과 정면으로 맞부딪혀 왔다. 맹원들이 일으킨 영기가 흑마부대의 몸에 둘러져 있는 마기와 충돌하자 주변까지 공기의 떨림이 전해져 왔다. 흑마부대의 엄청난 기세에 몇몇 맹원들의 입술 사이로 크윽,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진이 곧 뚫리겠군.”
청하의 앞에 서 있던 세민의 입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민이 유신 쪽을 힐끗 곁눈질했다. 여기서 세민이 마기를 일으키면 그의 정체가 탄로 날 것이 분명하니,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참나, 그러면서 무슨 내 앞을 가로막는 거야?’
청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세민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세민이 예상했던 대로, 고작 일각도 버티지 못한 채 맹원들이 형성한 진의 일부가 어그러지며 그 틈새로 흑마부대가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맹원들의 검에 영기가 어리며, 순식간에 혼전이 시작되었다.
“하앗!”
청하는 세민의 앞으로 팔을 뻗어 오는 흑마부대를 향해 거침없이 영기를 쏟아 내었다. 세민의 검이 미처 휘둘러지기도 전이었다. 세민이 힐끗 뒤를 돌아보며 못마땅한 시선을 던졌다.
“영기도 얼마 없으면서 나서지 마라.”
세민이 경고하듯 청하를 향해 말했다.
“넌 마기도 못 쓰면서 잘난 척하지 마.”
청하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영기를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별다른 타격 없이 다시금 이쪽을 향해 짓쳐 드는 흑마부대원을 향해 날렵하게 검을 휘둘렀다. 흑마부대원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은 창천검에 순간적으로 영기를 집중시켰다가 폭발시키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흑마부대원의 몸이 저만치 나가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주변 몇 명의 흑마부대원이 그 폭발에 휩쓸리며 같이 나동그라졌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대로라면 온몸이 산산조각 나야 하는 영기 폭발이었다. 그럼에도 단순히 흑마부대원을 뒤쪽으로 나가떨어지게만 하는 데에 그쳤으니, 다른 사람들의 사정은 그보다 더욱 힘들 것이 분명했다. 백진이 청하의 옆에서 흰빛으로 빛나는 영기를 쏘아 대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대림현 때보다 숫자가 많습니다.”
청하도 그것을 눈치챈 참이었다. 저쪽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청연이 외쳤다.
“청루각에 쳐들어왔던 때와 비슷한 숫자다!”
청하의 눈이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청연과 유신 정도의 고수들이 어쩌다가 그토록 깊은 상처를 입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이 많은 숫자들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맹원들 중 일부가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맹원들이 황급히 단체로 영기를 쏘아 보내며 그 틈을 타 부상자들을 뒤로 빼돌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청하 일행이 가세한 덕분에 월정루로 향하는 길이 뚫리지는 않았으나, 이대로는 끝도 없었다. 지난번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분명 저쪽도 작정을 하고 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뒤쪽에서 전투 상황을 살피고 있던 몇몇 도원맹원들의 입에서 탄식과 함께 절망에 휩싸인 비명이 흘러나왔다.
“북서쪽! 북서쪽에서 또 몰려옵니다!”
청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쪽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그 말대로였다. 이미 한 차례 흑마부대가 몰려온 북쪽이 아닌, 월정호와 맞닿아 있는 북서쪽에서부터 또 한 무리의 흑마부대가 새까맣게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건 무리 같은데?”
옆에서 제갈서윤이 이를 악문 채 속삭였다. 청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다 뿐이지, 지금 이곳 월정루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스승님.”
백진이 초조한 표정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연 역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려 달라는 뜻이었다. 도원맹원들이라면 당연히 하유신의 명을 따르겠지만, 백진이나 청연의 경우는 달랐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청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일단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버티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물러나라. 혈석을 빼앗기더라도 어쩔 수 없지.”
청하의 입장에서는 청루각의 일원인 백진이나 청연의 목숨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혈석보다 더 소중했다. 그것은 하유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청연 같은 경우는 아직 부상이 완전히 다 낫지도 않았는데, 더 이상 무리를 시킬 수는 없었다. 청하는 백진과 청연 사이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며 가슴 위로 창천검을 들어 올렸다. 정말로 버티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오면, 자신이 이들을 지켜야 한다. 청하는 이를 악문 채 흑마부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새까맣게 몰려온 두 번째 흑마부대가 월정루 앞을 덮치는 순간, 그때까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도원맹원들의 진이 완전히 깨졌다. 아까보다도 훨씬 더 숫자가 늘어난 흑마부대는 그대로 월정루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두 번째 부대까지 가세하자, 이제 힘의 균형은 누가 보아도 명백히 한쪽으로 기울었다. 후열에 물러나 있던 도원맹원들까지 일제히 달려와 간신히 흑마부대를 저지하고는 있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전선이 무너질 것은 자명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몸을 빼내야 하나?’
청하는 영기로 감싼 창천검을 정신없이 휘두르며 생각했다. 하지만 청루각 일원들이 빠져나간다면 그나마 이만큼 유지되던 균형조차 그 즉시 무너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청하는 제 앞으로 달려드는 흑마부대원의 가슴에 곧게 창천검을 찔러 넣고 영기를 터트리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이들을 너무 위험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물러나는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청하는 하유신과 암묵적인 시선 교환이라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전이 시작되자 후열에 물러나 있던 하유신도 한참 전에 일선으로 달려들어 싸우고 있었다.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흑마부대와 맹원들 사이에서 유신의 모습을 찾던 청하의 귓가에, 갑작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청하야!”
청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청연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흑마부대원 하나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기괴하게 뒤틀린 팔을 내려치는 것이 보였다. 청하는 본능적으로 이 공격을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렬한 기시감과 함께 청하의 등골로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난번 대림현에서 흑마부대에게 배가 꿰뚫려 한 번 ‘죽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청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도 또 죽는다면 아마 다시는 살아나지 못할 텐데, 젠장!
청하는 충격에 대비하며 온몸으로 영기를 끌어 올렸다. 조금이라도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흑마부대원의 팔이 청하를 내려치기 직전, 그는 팔을 높이 치켜든 채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퀭한 동공이 생기 없이 청하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청하를 알아보고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청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흑마부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그 순간, 그의 뒤에서 강력한 마기가 터져 나왔다.
쿠콰쾅!
강한 마기가 폭발을 일으키자, 청하를 공격하던 흑마부대원도 그에 휩쓸려 저만치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했다. 흑마부대원이 사라진 자리에, 검붉은 마기를 검에 두른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주세민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청하와 세민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이런…….’
청하는 속으로 낭패한 신음을 흘렸다. 세민의 눈동자는 아직 반지의 영향으로 검은색을 띠고 있었으나, 그가 들고 있는 천마검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마기였다. 기껏 외모까지 바꿔서 그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는데, 이러면 위장을 한 의미가 없잖아!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공기가 술렁거리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저건 마기?! 마교인가?”
“설마 마교의 기습인 건가?”
“하지만…… 왜 흑마부대를 공격했지?”
이곳저곳에서 놀라움에 가득 찬 외침이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청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는 세민의 얼굴에는 일말의 후회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세민이 청하를 향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것으로 지난번의 빚은 갚았다.”
빚? 무슨 소리지? 청하는 순간 세민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지난번 대림현 전투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분명 내가 세민에게 향하던 공격을 막아 주었지……. 설마 그것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청하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그저 묘한 표정만을 지었다.
그때, 저쪽 편에서 하유신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집중해라! 녀석들이 월정루로 향한다!”
청하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월정루를 돌아보았다. 과연, 흑마부대 중 일부가 기어이 월정루로 이어지는 길을 뚫는 데 성공한 것이 보였다. 일부는 월정루 안으로 뚫고 들어가고, 나머지는 밖에서 도원맹원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이성이 없는 흑마부대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누군가 지휘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청하의 머릿속에 조금 전 자신을 향해 팔을 휘두르려다가 마치 누군가의 명령을 받기라도 한 듯 갑작스레 멈춰 서던 흑마부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청하가 재빨리 유신을 향해 외쳤다.
“월정루 안에 저들을 막을 수 있는 진이나 장치가 있나?”
하유신이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 순간, 월정루 안에서 큰 폭발음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안쪽으로 몰려 들어갔던 흑마부대가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유신이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유신의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이제 그것은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흑마부대는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했음이 분명했다.
유신이 맹원들을 향해 외쳤다.
“오행진을 펼쳐라! 붉은 돌을 가져가지 못하게 해!”
진으로 유명한 도원맹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오행진이었다. 현재 도원맹에서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최후의 수단이자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도 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도원맹원들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일제히 진을 이루며 후퇴하려는 흑마부대의 뒤를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청하 역시 검을 다잡으며 세민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마기는 써 버렸으니까, 이렇게 된 거 저것들이라도 막아 내.”
세민은 청하를 힐끗 돌아보며 묵묵히 검을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눈으로 흑마부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궁휘가 외쳤다.
“가운데에 있는 저것이 붉은 돌을 들고 있어요!”
청하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중앙에 있는 흑마부대원 하나가 붉은색으로 빛나는 혈석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청하가 이를 악문 채 외쳤다.
“절대 못 가져가게 막아!”
청하는 몸에 남아 있는 영기를 아낌없이 끌어모으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백진과 청연, 그리고 남궁휘와 제갈서윤도 마찬가지로 청하의 곁에서 영력을 끌어 올렸다. 세민은 온몸에 검붉은 마기를 두른 채 청하의 바로 곁에 붙어 섰다. 세민이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청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처럼 흑마부대가 막무가내로 오행진에 부딪혀 온다면, 그 틈을 타서 중앙으로 파고들어 혈석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흑마부대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청하의 집중력도 극에 달했을 무렵, 갑자기 나지막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뭐지?”
남궁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흑마부대가 이곳을 습격하기 직전에 들려왔던 그 불길한 소리와 꼭 닮아 있었다. 청하는 이유 없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간, 도원맹원 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저쪽에 침입자다!”
청하는 휙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월정호를 배경으로, 높은 전각 위에 서 있는 한 인영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 전체를 덮는 새빨간 가면이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청하는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혈마교…….”
마침내 혈마교가 처음으로 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원작에서는 극후반부에 가서나 모습을 드러내는 혈마교의 때 이른 등장에, 청하는 긴장된 눈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민은 달랐다. 혈마교를 발견한 세민의 눈은 긴장 대신 타오르는 듯한 분노로 번쩍였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건방진 녀석들이……!”
세민의 입술 사이로 짓씹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세민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마기가 솟아나며, 세민은 천마검을 높이 들어 올려 전각 위에 서 있는 인영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부터 뻗어 나온 검붉은 채찍 같은 마기가 곧장 붉은 가면을 쓴 인영에게로 쏘아졌다.
그러나 그는 훌쩍 뛰어올라 가볍게 세민의 공격을 피하고는, 옆에 있던 다른 건물의 지붕 위에 내려앉았다. 세민의 마기는 애꿎은 전각에 부딪혀 지붕을 반쯤 무너뜨렸다.
“이봐!”
하유신이 세민을 향해 소리치는 것이 보였지만 세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민의 눈동자에서 순간적으로 붉은 기운이 번쩍이는 것을 보며, 청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와 붉은 가면의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일촉즉발의 대치가 이어졌다.
다음 순간, 붉은 가면을 쓴 자의 품속에서 붉은 종이로 만들어진 부적이 튀어나왔다. 부적이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자, 멈춰 있던 흑마부대가 다시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마부대는 아무렇게나 오행진에 부딪쳐 오는 대신, 정확히 오행진의 가장 약한 연결 고리를 노리고 집중적으로 마기를 두른 팔을 휘둘러 내며 도원맹원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소환술을 조금 다뤄 본 적이 있는 제갈서윤이 혀를 내둘렀다.
“흑마부대를 이렇게 정교하게 다루다니…… 청루각이고 도원맹이고 당할 수밖에.”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도원맹이 자랑하는 오행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찢어진 진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가는 흑마부대를 바라보며 이를 갈던 세민이, 결국 훌쩍 몸을 날려 흑마부대의 앞을 막아섰다. 세민의 몸에서 검붉은 마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천마검이 마구잡이로 흑마부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붉은 가면을 쓴 혈마교의 사내가 두세 장의 부적을 더 꺼내 태우자, 흑마부대는 세민의 공격에 반응하는 대신 그대로 그를 무시한 채 월정호 쪽으로 줄줄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세민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다시금 붉은 가면을 쓴 사내를 돌아보았으나, 그는 두 번 다시 세민이 자신을 공격할 틈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흑마부대와 함께 순식간에 호수 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스승님, 쫓을까요?”
백진이 청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달려들어서도 멈추지 못했던 흑마부대였다. 여기서 소수의 인원이 뒤를 쫓아 봤자 흑마부대가 반격해 오면 그대로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힐끗 청연 쪽을 돌아보니, 평소보다도 더욱 창백해진 얼굴이 보였다. 괜찮은 척은 하고 있지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역시 안 되겠다. 청하는 깊게 숨을 내쉬며 세민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라면 몰라도 세민은 혈마교와 흑마부대의 뒤를 쫓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세민은 즉시 검에 올라타 흑마부대를 쫓을 채비를 했다. 괜찮을까? 청하는 약간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런 세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흑마부대 무리를 쫓겠다니, 저쪽에는 혈마교 사람도 있는데……. 아무리 주세민이라 해도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청하의 생각이 미처 다 이어지기도 전에, 저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잠깐, 멈춰라!”
청하 일행은 물론이고 당장이라도 어검을 타고 날아오르려던 주세민조차 퍼뜩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길게 늘어진 흰 장포를 입고 머리에는 유건을 쓴 키가 큰 사내가 그와 비슷한 흰옷을 걸친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청하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여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의 옆에 있던 제갈서윤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