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2)
세민의 입술 사이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청하는 놀란 표정으로 세민을 올려다보았다. 내,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그래?! 청하는 애써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사실 속으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계속해서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어 왔지만, 자신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 주세민이 왜 그런 것에 신경 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청하는 슬쩍 세민의 시선을 피하며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별것 아니야. 이제 차차 익숙해질 거다.”
“익숙해질 거라고?”
세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약간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였으나, 여전히 그쪽을 돌아보지 않은 청하는 세민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지 못하고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세민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다음 순간, 청하는 제 몸을 내리누르는 세민의 몸무게에 퍼뜩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세민이 청하를 침상 위에 밀어붙인 채, 위에서부터 그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무거워, 비켜……!”
청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세민의 어깨를 밀어내었으나 세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민이 왠지 화가 난 것 같은 눈으로 청하를 빤히 노려보았다. 세민의 입술 사이로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스로 누구에게나 그런 짓을 해 줄 수 있다면, 나한테도 해 줄 수 있겠지?”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비켜!”
“말도 안 된다니, 왜지? 익숙해지려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해 주는 게 좋지 않겠나? 나도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나한테도 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억지 부리지 마!”
청하는 이를 갈며 손바닥에 영기를 모아 세민의 가슴을 퍽, 하고 밀쳤다. 그러나 세민은 약간 몸을 움찔거리기만 할 뿐, 전혀 물러나지 않은 채 온몸으로 청하를 단단히 압박해 왔다. 청하는 문득, 지난번 주세민이 자신을 납치해 갔을 때 천마신궁에 있는 그의 방에서 이와 거의 똑같은 실랑이를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대체 왜 자꾸 이러는 거야?! 그때랑 똑같잖아……!
하지만 정말 똑같은 걸까?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눈앞에 있는 주세민을 노려보았다. 그때 주세민의 입가에는 분명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는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청하를 침상에 아무렇게나 밀어붙인 채,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주세민은 얼음처럼 차갑게 얼굴을 굳힌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청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자기가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청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세민의 분노를 납득할 수 없었지만, 왠지 그때처럼 발끈하여 세민을 향해 마구 영기를 퍼붓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청하는 고개를 저으며 세민을 향해 말했다.
“비켜.”
그러나 세민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차가운 얼굴로 청하를 노려보았다. 고집스러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청하와 세민은 잠시 동안 입을 꾹 다문 채 침묵 속에서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문득, 주세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너는 내가 왜 이런 짓을 한다고 생각하지?”
“뭐……?”
청하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세민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그러나 세민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표정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이런 짓이라니…….”
“이런 짓.”
세민이 청하를 내리누르고 있는 몸에 약간의 힘을 가하며 다시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청하는 말문이 막혔다.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왜 자신에게 그런 알 수 없는 질문을 하고, 왜 그와 상관도 없는 일에 화를 내고, 왜 이렇게 막무가내 같은 짓을 하는지. 그것은…… 글쎄, 왜일까?
세민의 입술이 약간 조소를 띠었다.
“왜, 이번에도 설마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려는 건 아니겠지.”
세민의 눈동자가 똑바로 청하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 오롯한 시선에 청하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청하만을 향해 쏟아지는 강렬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에 사로잡힌 듯, 청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세민의 짙은 눈동자 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문득,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스승님, 안에 계십니까?”
백진의 목소리였다. 청하의 시선이 빠르게 세민에게로 향했다.
“빨리 비켜!”
청하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민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청하는 인정사정없이 몸을 뒤틀며 세민의 정강이를 발로 퍽 걷어찼다. 세민이 마지못한 얼굴로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청하는 황급히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리한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청하가 세민 쪽을 돌아보았다.
“어디 숨어 있어.”
“내가 왜?”
세민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스승님?”
밖에서 다시금 백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하가 재빨리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잠시…… 옷을 갈아입는 중이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러고는 세민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럼 나랑 뭘 하고 있었다고 하려고?”
“그냥 있었다고 하면 되지 않나? 왜 그런 걸 신경 쓰지?”
세민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나 청하는 잔뜩 흐트러진 침상과 세민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순종적인 강아지처럼 굴다가도 청하 주변에 있는 청연이나 남궁휘에게 까칠하게 이를 드러내는 백진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또 보나 마나 시끄러워질 게 분명한데…….
청하는 막무가내로 세민의 팔을 잡아끌어서는 침상 옆에 세워진 커다란 병풍 뒤로 그를 밀어 넣었다. 세민은 왜 자신이 여기 들어가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청하는 세민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신신당부했다.
“여기서 조용히 있어.”
그러고는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하며 다시 한번 제 옷자락을 탁탁 털어 내었다. 침상을 정리할 시간까지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청하는 그대로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며 백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하의 모습을 확인한 백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냐?”
청하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물었다. 충성스러운 수석 제자답게, 백진이 청하를 향해 곧장 입을 열었다.
“제갈 공자와 남궁 공자, 그리고 그…… 마교의 교주에게는 전부 손님들이 쓰는 별채를 내어 주었습니다.”
청하는 저쪽 편에 있는 병풍을 힐끗거리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구나.”
백진이 청하가 있는 쪽으로 몇 걸음 더 다가서며 약간 망설이듯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 소각주님을 치료해 주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무리하신 건 아니신지요?”
“뭐……? 아, 나, 나는 괜찮다.”
청하는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라 약간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백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다른 각원들의 말을 들어 보니 보통 상처가 아니었다는데, 그것을 그 정도까지 회복시키셨다니 스승님의 옥체가 염려됩니다.”
“아니 그다지 무리하지 않았으니 괜찮단다.”
“혹, 피곤하시면 제가 운기조식을 도와드릴까요?”
“글쎄…… 구,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구나.”
백진이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자, 청하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아니, 괜찮다는데 왜 자꾸 이러는 거야?! 청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자꾸 침상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백진의 소맷자락을 황급히 붙들었다.
“나, 나는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도…….”
그때, 백진의 시선이 잔뜩 흐트러진 침상에 가 닿았다. 백진의 반듯한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흐트러진 침상과 청하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백진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잠시 침묵하던 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
“으응……?”
“혹시…… 방 안에 다른 이가 왔었습니까?”
청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백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젠장, 들킨 건가?’
청하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백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잔뜩 흐트러진 청하의 침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침상이 좀 흐트러졌다고 대체 누가 왔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게다가 그자가 주세민이라는 것은 더더욱 모를 텐데…….’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일단 발뺌을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청하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여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을 뱉어 내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백진이 한 걸음 더 침상 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침상 가장자리까지 물러났다. 백진이 침상 위의 구겨진 이불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하는 괜히 찔려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바…… 방금 전에 약간 피곤해서 침상에 누워 있었단다.”
백진은 별다른 대답 없이 침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백진의 시선이 문득 침상 한쪽 옆에 세워진 커다란 병풍 쪽을 향했다. 뭐, 뭐야?! 청하는 가슴이 철렁하여 뚫어질 듯 백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진짜 알아챈 건 아니겠지?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주세민 말대로 차라리 그냥 숨지 말라고 할걸, 괜히 더 이상해졌잖아……! 침전의 병풍 뒤에 마교의 교주를 숨겨 놓고 있는 청루각주라니, 대충 보기만 해도 너무 이상한 그림이다.
백진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순간, 청하는 황급히 백진의 팔을 붙잡고 반강제로 침상 위에 앉혔다. 청하가 백진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 운기조식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좀 도와주겠느냐?”
백진이 청하를 향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 예.”
다행히 백진도 무언가 확신은 없었던 듯, 청하가 운기조식을 청하자 약간 망설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는 가까스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냉큼 백진을 향해 등을 보이고 앉았다. 청하의 눈앞에 우아한 청루산의 정경이 그려진 거대한 산수 병풍이 정면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 그래, 빨리 끝내고 백진을 내보내자.’
청하는 뚫어질 듯 병풍을 노려보며 천천히 옷을 끌어 내렸다. 이미 몇 번이나 운기조식을 도와주었던 백진이 능숙하게 청하의 맨등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는 영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청하는 입을 꾹 다문 채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제 몸 안을 순환하는 내공에 집중했다. 그러나 바로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병풍과 그 병풍 너머에 있을 존재 때문에 자꾸만 집중이 흐트러졌다.
백진이 약간 걱정스러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
“스승님, 내공이 좀 불안정합니다. 무언가 염려하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염려하는 일이라……. 당연히 있지! 청하는 눈앞의 병풍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대체 괜히 이게 무슨 고생이야? 진작에 쫓아낼걸 그랬어. 아니, 아예 방에 들이지 말걸! 백진이 부드럽게 청하의 등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소각주님의 부상이 아직도 걱정되시는 겁니까? 스승님께서 치료해 주셨으니 이제 별문제 없을 겁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집중해 주세요.”
그래…… 집중해야지. 청하는 애써 호흡을 고르게 내뱉으며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백진이 청하의 등 뒤로 조금 더 바짝 다가앉았다.
청하의 등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백진은 천천히 청하의 목덜미를 향해 얼굴을 내렸다.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백진의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문질러졌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이대로는 부족한 것 같아, 좀 더 강하게 영기를 주입하겠습니다.”
백진의 입술이 목덜미를 더듬었다. 말캉한 입술이 목덜미를 부벼 오는 것이 간지럽기도 하고 약간 신경 쓰이기도 했다. 묘한 감각이 청하의 목덜미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비어 있던 백진의 손이 청하의 허리를 쓰다듬다 천천히 앞으로 넘어와 청하의 아랫배를 쓸고 가슴으로 올라갔다. 청하는 제 가슴을 뒤에서부터 부드럽게 움켜쥐며 문지르듯 쓰다듬는 백진의 손길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백진의 손가락이 가볍게 유두를 스쳤다. 손안에 빠듯하게 들어차는 가슴을 가득 움켜쥐던 백진이 손가락 사이로 단단하게 솟은 유두를 굴렸다. 백진의 단단한 손끝이 솟아오른 첨단을 긁어내리듯 문질렀다. 청하의 몸이 절로 떨렸다.
‘아, 으…….’
등 뒤에서 흘러들어 오는 백진의 영기와 목덜미를 문지르고 있는 입술, 그리고 가슴을 매만지는 손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백진이 운기조식을 도와줄 때는 한 번도 이렇게까지 짙은 스킨십을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영기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끈질기게 유두를 자극하며 농밀하게 가슴을 주무르는 백진의 손길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견디지 못한 청하가 움찔 몸을 떨며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렸으나, 백진은 개의치 않고 두 손가락으로 청하의 유두를 붙잡은 채 앞으로 잡아당겼다. 청하의 가슴이 반사적으로 침상 앞에 펼쳐진 병풍을 향해 내밀어지자, 청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던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품은 채 가늘어졌다.
한편 끈덕지게 제 몸을 만져 대는 백진의 손길에 곤혹스러워하던 청하는, 갑자기 제 눈앞에 있던 병풍이 약간 흔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청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니, 숨소리도 내지 말고 있으라니까!’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청루산의 푸른 산세와 희뿌연 안개에 뒤덮인 신비로운 정경이 병풍 밖으로 튀어나올 듯 흔들리고 있었다. 청하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있는 백진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청하는 당장이라도 백진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 흔들리고 있는 병풍을 발견하게 될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청하의 영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스승님?”
백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순간적으로 청하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청하는 이를 악문 채 몸속을 순환하고 있는 내공을 빠르게 정리하여 약식으로 운기조식을 마무리 지었다. 백진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끝내셔도 되는 겁니까?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
“아…… 내가 오늘은 마음이 영 진정되지 않아서…… 이대로 운기조식을 계속하는 것이 오히려 몸에 해가 될 것 같구나.”
청하는 황급히 그런 말을 늘어놓으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청하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의 눈앞에서 흔들리던 병풍도 언제 그랬냐는 듯, 우뚝 떨림을 멈추었다.
‘저게 진짜…….’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관리했다. 백진도 얼떨결에 청하를 따라 일어서자, 청하는 흐트러진 옷자락을 추스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백진의 팔을 붙잡은 채 그를 문 쪽으로 데려갔다.
“모처럼 날 생각해서 운기조식을 도와주겠다 했는데, 미안하구나. 다음에 내가 좀 더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 다시 하도록 하자.”
청하는 미안한 듯이 말하며 문을 열어젖혔다. 순식간에 침전 밖으로 쫓겨나게 된 백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결국 백진은 어쩔 수 없이 청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그러면…… 안녕히 주무십시오, 스승님.”
청하는 백진을 향해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너무 서두른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애쓰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몸을 돌리는 청하의 입술 사이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
청하는 병풍을 노려보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전처럼 병풍 앞에 버티고 선 청하는, 팔짱을 낀 채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병풍 뒤에서 기척도 없이 검은 옷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하는 이를 갈며 세민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기척도 없이 나다닐 수 있으면서 아까는 대체 뭐지? 아주 그냥 병풍이 다 무너지는 줄 알았네.”
청하가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세민은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갑자기 손이 떨려서.”
하하…… 이게 진짜……. 청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으나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청하가 한 손으로 문을 가리키며 간단히 입을 열었다.
“나가.”
주세민이 짙은 눈동자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민이 문득 청하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운기조식이라는 거.”
주세민의 입술 사이로 갑자기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청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래? 잠시 말을 멈췄던 세민이 다시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도…… 할 수 있는 건가?”
“뭐?”
청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청하를 바라보는 세민의 시선이 슬쩍 그의 가슴께로 내려왔다 다시금 천천히 그의 얼굴로 향했다. 청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청루각의 심법을 배우겠다고?”
“안 되나?”
“그게…… 되겠어?”
청하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세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세민이 청하를 향해 더욱 바짝 가까이 다가왔다. 청하는 주춤거리며 세민을 올려다보았다. 세민이 짙은 눈동자로 물끄러미 청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심법을 배워 두면 네가 운기조식이 필요할 때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텐데.”
……진짜 어이가 없다, 어이가. 청하는 대체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그저 세민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그러니까, 마교의 교주가 청루각의 심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뭐? 내 운기조식을 도와주려고?!
청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다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청하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다른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냥 가라.”
세민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결국 입을 다문 채 묵묵히 방을 나섰다. 마침내 불청객들이 모두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비척거리며 침상으로 다가간 청하는 훌쩍 그 위로 쓰러졌다. 으아아……. 절로 앓는 듯한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세민은 건물 밖으로 몇 걸음 발을 내딛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인기척을 알아챘다.
일부러 보란 듯 걸음을 멈춰 세운 세민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백진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너였군.”
백진이 적대감을 숨기려는 시늉도 하지 않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민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어린 녀석이 눈치는 제법 쓸 만하네.”
그러나 세민의 눈동자에 웃음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백진을 향해 형형하게 빛나는 세민의 눈동자에 얼핏 붉은 기가 스쳐 지나갔다. 백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과 무슨 짓을 하고 있었지?”
“글쎄,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군. 그리고 그건 네 ‘스승님’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은데.”
정곡을 찌르는 세민의 말에 백진은 입을 다물었다. 청하와 세민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청하가 세민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숨겨 준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에 대해 백진이 무어라 관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백진이 다시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절대 널 믿지 않아.”
“내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거라 생각하나?”
세민이 싸늘한 냉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백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세민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언제나 강아지처럼 부드럽고 순하게 빛나던 백진의 갈색 눈동자가 마치 주인을 지키는 번견처럼 번뜩였다.
“지금은 스승님께서 네 존재를 용납하고 계시니 그냥 넘어가지만, 만약 네가 스승님께 해가 된다고 판단된다면 나도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세민의 입술이 비틀렸다. 세민의 짙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사냥하는 늑대처럼 날카로운 빛을 품었다.
“재밌군.”
세민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세민의 몸에서 제어하지 못한 마기가 넘실거렸으나, 백진이 그에 맞서 영기를 일으키기도 전에 곧 그것은 자취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세민이 싸늘한 눈으로 백진을 노려보았다.
“과연 네가 두고 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나도 기대하고 있겠다.”
싸늘하게 말을 잇는 세민의 기세는 과연 무시무시했으나, 백진 역시 그에 밀리지 않았다. 형형하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세민을 향해 쏘아지듯 날카롭게 빛났다.
번뜩이는 눈으로 경고하듯 세민을 바라보던 백진은 곧 천천히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민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 가는 백진의 등을 눈으로 쫓았다.
제일 거슬리는 자다. 세민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했다. 그가 청루각주의 수석 제자만 아니었더라도 벌써 손을 써 버렸을지도……. 순간적으로 세민의 눈동자 속에 난폭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검은 기운이 세민의 오른쪽 팔 부근에 모여들었다. 세민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세민이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자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세민의 오른손 위에 뭉쳐 들더니, 종잇조각 하나를 뱉어 내었다. 급한 연락을 할 때 쓰는 마교의 연락수단이었다. 세민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강재헌의 필체로 쓰여진 그것은 몇 줄 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그것을 읽어 내리는 세민의 눈동자에는 설핏 놀라움이 스쳤다.
“대림현의 붉은 돌이…… 혈석이라고.”
세민의 짙은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세민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신음 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혈석이라면, 즉 소환석…….”
세민의 손이 천천히 종이를 움켜쥐었다. 세민의 얼굴만큼이나 일그러진 작은 종잇조각은, 곧 세민의 손안에서 검은 마기에 휩싸여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부서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