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0)

11장

구름에 가려 달빛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야심한 밤,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화룡성의 어두운 거리를 초조한 듯 빠르게 걷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거의 뛰다시피 하는 발걸음이었으나, 보폭이 그리 크지 않아 느리게만 느껴졌다. 머리 꼭대기까지 장옷을 뒤집어쓴 여자는, 얼핏 보아서는 여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 사이로 잠시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 여자를 향해 쏟아지자,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 앳된 얼굴이 장옷 사이로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무언가 불안한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잔뜩 주변을 경계하며 종종걸음치던 여자가 주거지로 접어드는 골목을 막 들어섰을 때,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여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여자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축축한 천이 순식간에 여자의 코와 입을 덮었다.

버둥거리며 팔을 휘젓던 여자는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금방 인형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시커먼 그림자는 능숙한 손길로 여자의 얼굴에 자루를 덮어씌우고는, 가뿐하게 여자의 몸을 들쳐 메었다. 순간, 예상치 못한 무게에 순간적으로 인영의 몸이 휘청거렸다.

‘아니, 뭐가 이렇게 무거워?’

다행히 곧 중심을 잡은 그는, 제가 들쳐 메고 있는 여자를 돌아보며 황당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금 자세를 고쳐 잡은 인영은 빠른 발걸음으로 여자와 함께 금세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두운 처마 그림자 아래에서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낸 몇 개의 인영이 발자국 소리도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화룡성의 거리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고요한 달빛만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남궁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골이 웅웅 울리는 것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 설마하니 약을 쓸 줄은 몰랐는데. 남궁휘는 제 코와 입을 막았던 시큼한 향이 느껴지는 천을 생각하며 단아한 미간을 불쾌한 듯 찌푸렸다. 지체 높은 세가에서 정도의 무공만을 수련한 남궁휘로서는,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조악한 약품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주변을 좀 둘러보고 싶었지만, 얼굴에 무언가 자루 같은 것이 씌워져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두 손은 뒤로 돌려진 채 단단히 묶여 있었고, 다리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어 본 여성의 옷이 가장 불편하게 남궁휘의 몸을 조여 대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거친 천을 넘어 남궁휘의 얼굴에 와 닿았다. 지하실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신을 잃었던 것은 분명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 텐데, 그사이에 납치범이 대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선배님께선 잘 따라오셨겠지?’

남궁휘는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노력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처음 계획을 들었을 때는 기겁을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미끼 작전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하필 제가 미끼 역할을 한다는 것이 조금 불만스럽긴 했지만, 자신이 가장 예쁜 것은 사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선배님이 이런 짓을 당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남궁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최대한 여자처럼 보이기 위해 몸을 작게 웅크렸다. 이제 누군가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저쪽 편에서부터 돌바닥을 스치는 불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남궁휘는 긴장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미동도 없이 죽은 듯 그 자리에 몸을 움츠렸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남궁휘의 귓가에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는 두 개였다. 그런데 둘 중 하나의 소리가 약간 이상했다.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걷고 있는 다른 하나와는 달리, 그것은 마치 몸이 불편한 사람이 발을 질질 끌고 있기라도 한 듯 불규칙하게 바닥을 스쳤다. 남궁휘의 가슴속에서 의아함이 고개를 들었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온 두 개의 기척은 정확히 남궁휘의 앞에서 멈추었다. 남궁휘의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이 휘몰아쳤다. 대체 누구지? 이런 사악한 짓을 하는 자들의 정체는 뭐지? 정말 마교가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마교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복잡하게 뻗어 나가는 남궁휘의 생각을 끊어 내듯, 정체불명의 사람이 남궁휘의 얼굴을 덮고 있던 자루를 휙 벗겨 내었다. 실눈을 뜨고 있는 남궁휘의 눈에, 아주 작은 등잔불만을 손에 들고 그의 앞에 몸을 숙이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비쳤다.

“……!”

남궁휘는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불꽃이었지만, 후기지수 중에서도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남궁휘의 눈에는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의 앞에 몸을 숙이고 제 쪽을 들여다보고 있는 덩치 큰 사내는, 바로 곽가장의 가주 곽영춘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선 채 따라다니던 그 무뚝뚝한 시종이었다.

‘이게 무슨……!’

그러나 남궁휘가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 시종의 뒤쪽에서 흐음, 하고 만족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남궁휘는, 지팡이를 짚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곽 가주와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혔다. 남궁휘의 얼굴에 낭패한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곽 가주가 이번 사건의 원흉이었나……!’

동시에 식은땀이 남궁휘의 등으로 흘러내렸다. 곽 가주는 물론이고 그의 시종도 남궁휘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기껏 변장을 하고 이곳에 잠입한 것이 소용없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느 곳에 납치되어 있는지를 알아내야 하는데……! 남궁휘는 그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며 저를 공격할 것에 대비해 잔뜩 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꽁꽁 묶여 있는 팔에 힘을 주며, 어느 시점에 밧줄을 끊을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재빨리 그들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남궁휘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놀란 기색도 없이 남궁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시종의 뒤에 서 있는 곽 가주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곽 가주가 슬쩍 눈썹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정신이 들었는데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을 보니 아직 온전한 정신은 아닌 것 같군. 그래도 시끄럽게 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고는 제 무뚝뚝한 시종을 돌아보며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요즘에는 밤만 되면 개 한 마리도 얼씬을 하지 않으니……. 오늘은 운이 좋았군.”

시종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휘는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자들은 아직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마 서로의 이목구비 정도만 간신히 분간될 수 있는 희미한 등잔 불빛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얼굴 위에 짙게 드리운 음영이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만들어, 그렇지 않아도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을 더욱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즉, 눈앞의 곽 가주와 그의 시종은 아직도 남궁휘를 그들이 납치해 온 어느 운 없는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휘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찰나의 시간 동안 상황을 파악한 남궁휘는 잽싸게 입을 다문 채 겁에 질린 듯 몸을 움츠렸다.

“으아…… 사, 살려 주세요…….”

들릴 듯 말 듯 한 가냘픈 목소리로 애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곽 가주와 그의 시종은 남궁휘 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남궁휘가 의도하던 바였다.

“이 아이가 마지막인가?”

곽 가주가 시종을 향해 물었다. 시종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이 아이까지 포함해서 총 77명입니다.”

곽 가주가 다시 한번 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분명 온화하고 심약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던 곽 가주의 얼굴에 깜짝 놀랄 정도로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곽 가주가 흥분을 억누르지 못한 낯빛으로 남궁휘 쪽을 향해 턱짓했다.

“끌고 와.”

시종이 거친 손으로 남궁휘의 다리를 묶은 밧줄을 풀어주며 억센 팔로 그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괜히 제 몸에 손을 대었다가 남자라는 것이 들통나기라도 할까 봐, 남궁휘는 시종이 억지로 제 몸을 잡아채기 전에 알아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겁먹은 듯 주춤거리면서도 착실히 곽 가주의 뒤를 종종거리며 쫓아갔다. 시종은 순간적으로 어이없다는 듯 남궁휘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으나, 별말 없이 남궁휘의 뒤를 감시하듯 걸음을 옮겼다.

축축한 지하 통로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곽 가주가 돌로 된 두꺼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가 시종을 향해 눈짓하자 시종은 말없이 앞으로 나서서는 꽤나 무거울 듯한 돌문을 두 손으로 천천히 밀어젖혔다. 곽 가주가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 들고 있는 지팡이로 남궁휘의 등을 쿡 찔렀다. 마지못한 척 안으로 걸음을 옮긴 남궁휘는, 문 안쪽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치켜떴다.

두꺼운 문 뒤에는 생각보다 널찍한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멍하고 생기 없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남궁휘는 순간적으로 뒷골이 서늘해졌다. 그들로부터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하고 자극적인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아이들이 빽빽이 서 있는 안쪽의 공간에는 거의 바닥을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란 진이 그려져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광경에 잠시 얼어붙어 있던 남궁휘는 다시금 자신의 등을 쿡 찌르는 지팡이를 느끼고는 주춤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남궁휘의 뒤로 두꺼운 돌문이 다시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남궁휘가 두려움에 질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다고 생각한 곽 가주는 그쪽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시종을 향해 말했다.

“약은?”

“준비되었습니다.”

“얘도 마시게 해.”

곽 가주의 명령을 들은 시종은 돌문 근처에 마련된 커다란 약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거의 벽 하나를 꽉 메울 정도로 커다란 약장 안에는 딱 보아도 수상쩍기 짝이 없는 다채로운 모양의 약병들과 약단지들이 세 줄로 열을 맞추어 층마다 빼곡히 차 있었다. 시종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약병들 중에서도 흰 마개가 달린 약병 하나를 조심스럽게 골라 들고는 남궁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이걸 마시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될 거다.”

시종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휘는 제게 내밀어지는 약병을 바라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약병에서 풍겨 나오는 이상한 냄새는 저쪽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아이들에게서 풍기는 것과 똑같았다.

‘약으로 아이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거군!’

남궁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떳떳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남궁휘는 몰래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진을 힐끗거렸다. 사술을 부리는 진법인 것은 확실했지만, 흑마부대와 관련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일반인에 불과한 곽 가주와 그의 시종이 아무리 대단한 사술을 부린다 한들, 흑마부대 같은 것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대체 목적이 뭐지? 아이들을 데리고 뭘 하려는 거지?’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기에 여기서 순순히 약을 마셔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남궁휘는 이대로 제 정체를 드러낼 것인지 고민하며 제게 약병을 내밀고 있는 시종의 손을 피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무공도 수련하지 않은 일반인 둘을 제압하는 것이야 별달리 어려울 것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다른 협력자가 있지는 않은지, 목적은 무엇이고 아이들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혹시 함부로 이들을 공격했다가 세뇌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위해가 가지는 않을지 고민이 되었다.

‘선배님들은 아직이신가?’

남궁휘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청하와 백진, 그리고 서윤이 협공을 해 준다면, 혹시나 등장할지도 모를 협력자를 상대하거나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남궁휘가 순순히 약을 마시지 않고 뒤로 물러나자, 곽 가주는 초조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빨리해라.”

곽 가주가 신경질적으로 명령을 내리자, 시종은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남궁휘를 향해 가까이 다가들며 그의 팔을 억지로 붙잡으려 했다. 남궁휘는 시종의 손아귀를 피해 몸을 뒤틀며 재빨리 옆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던 아가씨가 보인 뜻밖의 날쌘 움직임에, 시종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깐.”

뒤쪽에서 곽 가주의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곽 가주가 남궁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좀 이상하군. 불을 밝혀라.”

시종은 남궁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들고 있던 등잔으로 벽에 있던 커다란 횃불에 불을 붙였다. 곧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어두운 지하실 안을 발갛게 물들였다. 남궁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 얼굴을 알아본다면 어차피 더 이상 위장의 의미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남궁휘는 팔에 힘을 주며 제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향해 영기를 발산했다. 법기도 아닌 평범한 밧줄은 남궁휘의 영기를 이기지 못하고 조각조각 찢겨져 나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벽에 걸려 있던 횃불 빛이 확 밝아지며 남궁휘의 얼굴 위에 붉은 불꽃이 일렁거렸다.

“너는……!”

횃불 빛에 똑똑히 드러난 남궁휘의 얼굴을 확인한 곽 가주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궁휘가 이를 악물며 시종과 곽 가주를 제압하기 위해 몸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킨 순간, 굳게 닫혀 있는 돌문에서 푸른 영기가 번쩍였다.

콰쾅!

남궁휘가 반색을 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돌들 사이로, 창천검을 든 청하가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 뒤를 백진과 제갈서윤이 따랐다.

“받아라!”

청하가 남궁휘를 향해 비류검을 던졌다. 남궁휘가 허공에서 능숙하게 비류검을 받아 들고는 순식간에 곽 가주 쪽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남궁휘가 입고 있던 긴 치맛자락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춤추듯 펄럭거렸다.

무표정한 얼굴의 시종이 당황하며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으나, 넷이나 되는 강호인들을 홀로 당해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곽 가주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청하가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곽가장의 지하에 실종된 아이들이 있었을 줄이야.”

여자로 변장한 남궁휘를 들쳐 멘 인영이 익숙한 길을 되짚어 곽가장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청하도 무슨 못된 장난에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하로 이어지는 입구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곽가장의 하인들을 보았을 때, 의심은 곧 확신으로 변해 있었다. 넓은 지하실에 유령처럼 빽빽이 들어서 있는 멍한 표정의 아이들을 보며 청하는 낮은 신음성을 흘렸다. 지금까지 그들은 며칠 동안이나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 화룡성을 헤매었으나, 그 아이들은 줄곧 청하 일행들의 발밑에 있었다.

“바깥에서 이곳을 지키고 있던 곽가의 하인들은 우리가 모두 제압했다. 순순히 검을 버리고 투항해라.”

백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으나, 곽 가주와 그의 시종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이는데도 곽 가주는 그저 태연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 청하의 등골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때, 곽 가주가 시종을 향해 외쳤다.

“아청!”

시종이 품속에서 재빨리 부적 하나를 꺼내 들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청하가 미간을 찌푸린 순간, 시종이 손에 쥐고 있던 부적을 예고도 없이 반쯤 찢었다.

그와 동시에, 미동도 없이 이쪽을 향해 가만히 서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두 손을 들어 스스로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아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컥컥거리는 숨소리들이 들려왔다.

“머, 멈춰라! 무슨 짓이야!”

남궁휘가 당황한 채 외쳤다. 곽 가주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피식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고고하신 선사님들께서 너무 당황하신 모양이로군. 설마하니, 내가 내 한 몸 지킬 만한 수단도 마련해 놓지 않은 줄 아나? 자, 어떠냐? 총 76명의 어린아이의 목숨이다.”

청하는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시종이 반쯤 찢은 부적을 높이 들어 올렸다. 곽 가주가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뛰어나신 선사님들께선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이 부적을 온전히 찢으면 저 76명의 아이들도 목숨을 잃게 되지. 아직은 그저 약에 취했을 뿐 건강하게 살아 있는 아이들이지만, 너희들이 내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리는 순간 저 아이들은 모두 죽게 될 거다.”

“저런 비열한…….”

제갈서윤이 이를 갈며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청하는 피가 날 정도로 단단히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하니 이런 술수를 부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무런 내공도 없는 일반인이라, 별다른 저항 수단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청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지?”

“스승님!”

옆에서 백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청하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앞에 있는 76명의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있으면서도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애처로웠다. 곽 가주가 씩 미소 지었다.

“허어, 역시 도리와 의를 아는 고명하신 선사님들답군.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나와 내 시종이 오늘을 위해 몇 달에 걸쳐 준비했던 일을 마저 끝낼 수 있도록 협조해 주는 거지. 마침 오늘 납치한 저 선사님까지 해서 필요한 숫자를 딱 채웠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고급스러운 재료가 셋이나 더 늘어났으니…… 다행히 결과가 더욱 좋을 듯하군.”

청하는 곽 가주를 향해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바닥에 그려진 진을 힐끗 돌아보았으나 도저히 무엇을 위한 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궁휘가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아이들을 데리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곽 가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겠지. 지금 모습만 봐서는 짐작하기 어렵겠지만, 나도 젊었을 적에는 꽤나 미남 소리도 들었고 기골도 장대해 세상에 두려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젊어서 결혼한 부인은 일찍 죽고 자식들도 하나같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내 대에서 가문이 끊기게 생겼지만 말이야.”

잠시 말을 멈춘 곽 가주는 청하와 그 일행들을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곽 가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사님들께서는 반로환동에 대해 잘 아시는가?”

청하는 눈을 깜빡였다. 뭐…… 뭐라고? 반로환동?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청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곽 가주를 바라보았다.

반로환동은 무협지에서 흔히 나오는 설정으로, 나이 많은 고수가 깨달음을 얻어 다시 젊은 육체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청하는 이 소설에서 그런 내용은 본 적이 없었다. 내공을 쌓고 일정 경지에 오르면 더 이상 늙지 않고 무척 느리게 나이를 먹게 된다는 설정은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젊고 잘생긴 남정네들끼리 붙어먹게 하기 위한 설정일 뿐이었다. 이미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노인네가 다시 젊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때 옆에 있던 남궁휘가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그것은 사파에서 말하는 허무맹랑한 사술이 아니냐. 설마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곽 가주는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이제 곧 그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겠군. 이 아이들이 영혼을 바치고 이제 나는 다시 젊고 강인한 육체로 돌아갈 테니까.”

청하는 질린 눈으로 곽 가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까 그냥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잖아?! 미친 사람이야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신박하게 미쳤을 줄이야. 자신이 다시 젊어지겠다고 죄 없는 아이들을 수십 명이나 대가로 바치겠다니, 그것도 실제로 가능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사술에 기대어서…….

옆에서 제갈서윤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설사 그런 사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는 내공도 하나 없는 평범한 일반인일 뿐인데, 대체 어떻게 반로환동을 하겠다는 거야?”

그러나 곽 가주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사술을 이용하면 내공이 없는 일반인이더라도 얼마든지 반로환동을 할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들?”

청하가 곽 가주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으나 곽 가주는 더 이상 그에 대한 말은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백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왜 꼭 아이들이어야 했던 거지? 그것도 외모가 예쁘고 잘생긴 아이들만 골라서……. 그 사술에 그런 조건도 달려 있었나?”

그러나 곽 가주는 씩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냥 77명의 영혼을 바치기만 하면 누구든 상관없지.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육체가 젊어지고 아름답게 변하는 것이다. 뭐 하면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어중이떠중이 녀석들을 쓸 수는 없지. 되도록이면 어리고 아름다운 것들을 써야 하지 않겠어?”

청하는 구역질이 다 날 것만 같았다. 근방에서 가장 예쁘고 잘생겼기로 소문난, 부모들이 애지중지 귀하게 키운 아이들을 납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궁휘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겨운 자식…….”

곽 가주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즐겁다는 듯 말했다.

“잡담은 이쯤 하도록 하지. 아청, 이분들을 진 안으로 모셔라.”

시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청하 일행들을 진 안으로 몰아넣었다. 아직도 의식이 없는 아이들은 청하 일행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멍한 표정으로 제 목을 조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진 위에 서 있었다. 곽 가주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내 소원이 이루어지겠군, 드디어……! 고명하신 선사님들의 영혼도 넷이나 바치니 더 효과가 좋겠지? 하하, 드디어…….”

노인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잔뜩 흥분한 듯 말을 내뱉으며, 곽 가주는 품속에서 낡은 종이를 꺼냈다. 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종이를 들고 선 곽 가주는, 종이에 쓰여진 이상한 주문 같기도 하고 경구 같기도 한 문구들을 중얼중얼 외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발밑에 있던 진이 우웅,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난번 주세민의 방 안에서 보았던 진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청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종은 빈틈없는 눈으로 그들을 감시하며 손에 들고 있는 반쯤 찢은 부적을 보란 듯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스승님…….”

백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갈서윤도 초조한 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하지만 아이들을 죽일 수는 없어요.”

남궁휘가 절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바닥을 노려보았다. 이제 바닥에 그려진 진은 옅은 녹색빛을 띠며 빛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술이 완성될 터였다.

문득, 녹색으로 빛나는 진의 한 귀퉁이가 청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보이지 않았으나, 천마신궁에 있는 주세민의 방에서 이와 비슷한 진을 본 적이 있던 청하의 눈에는 무언가 어설퍼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혹시…… 실수한 건가.’

이미 완성된 진을 파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진의 연결 부위 중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미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되든 안 되든 시도해 보는 수밖에.

청하는 시종이 들고 있는 부적을 힐끗 바라보았다. 청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부적도 이 진과 연동되어 있는 거겠지?”

백진이 부적을 돌아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요. 약만으로 이렇게까지 행동을 제어하기는 어려울 테니.”

청하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최대한 입술을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며, 청하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신호를 주면, 곧장 저 시종을 향해 검을 날려라.”

백진이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눈길로 청하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러나 백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가 남궁휘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남궁 공자는 곽 가주를 상대하도록.”

남궁휘도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뒤에서 묻는 서윤을 향해, 청하는 힐끗 시선을 던졌다.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억울한 표정을 짓는 서윤을 뒤로하고, 청하는 순간적으로 창천검에 강하게 영기를 주입했다.

“지금!”

그리고 청하는 푸른 영기를 잔뜩 머금은 검을 들어, 진이 그려진 바닥 중 약간 어설픈 부분이 있는 곳을 향해 쾅, 하고 내리쳤다.

쿠콰쾅!

영기가 사정없이 폭발하며, 바닥이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진이 붕괴되자 진에서 새어 나오던 옅은 빛이 꺼지고 우웅, 하고 울리던 소리도 뚝 끊어졌다.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있던 아이들의 손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밑으로 축 처졌다. 그와 동시에, 백진의 청수검이 허공에 은빛 궤적을 남기며 시종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안 돼!”

곽 가주가 비명을 질렀으나, 동시에 남궁휘가 곧장 비류검을 곧추세운 채 그대로 곽 가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시종이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곽 가주는 남궁휘에게 짓눌린 채 바닥을 굴렀다. 사방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푸른 영기와 새하얀 빛의 영기가 어지럽게 어둑어둑한 지하실 안을 갈랐다.

“괜찮아?”

청하가 흩날리는 먼지 너머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남궁휘가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압했습니다.”

청하는 백진을 돌아보았다. 백진은 쓰러져 있는 시종의 시체 위에서 검을 거두고 있었다.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백진을 보자, 청하는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아…… 그럼 이제 빨리 아이들을 내보내고…….”

그때, 저쪽 벽 너머에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하를 비롯한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했다.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청하의 배 속을 오싹하게 휘저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중얼거리는 청하의 뒤에서, 갑자기 미친 듯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소리냐고?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이곳이 무너지는 소리지, 무슨 소리냐!”

곽 가주의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너진다고?”

백진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궁휘가 이를 악물며 곽 가주의 멱살을 잡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장치를 설치해 둔 거냐?”

그러나 곽 가주는 대답 없이 그저 미친 듯 킬킬거리며 웃기만 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곽 가주와 쓰러져 있는 그의 시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곽 가주의 짓인지, 그렇지 않으면 죽은 시종의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곽 가주의 통쾌한 듯한 웃음소리를 보아하니 둘 중 하나가 지하실을 무너뜨리는 장치를 작동시킨 것이 분명했다.

청하가 빠르게 백진과 서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선 아이들을 내보내야 해!”

지하실이 무너지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진과 서윤이 재빨리 멍하게 서 있는 아이들을 이리저리 밀고 당기며 한데 모아 왔으나, 아직 약 기운이 가시지도 않은 아이들을 인솔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은 무척 어려워 보였다. 그들이 들어온 돌문은 아직까지 굳게 닫혀 있었으나 그 밖에서는 계속해서 지하실이 무너지며 우르르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청하가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잠입할 때 본 바로는 이곳은 그렇게 깊은 지하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쪽이 더 빠를지도 몰라. 청하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창천검을 들어 올렸다.

쿠쾅! 쾅!

창천검에 서려 있던 푸른 영기가 맹렬한 기세로 천장을 향해 뻗어 나갔다. 영기가 길게 꼬리를 끌며 천장에 깊게 패인 듯한 흔적을 남겼다. 청하의 의도를 깨달은 백진과 남궁휘도 옆에서 검을 휘두르며 힘을 보탰다. 몇 번이나 혼신의 힘을 다해 영기를 집중시키자, 천장을 받치고 있던 돌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며 드디어 위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밀려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너진 천장 틈 사이로 별이 총총한 검은 밤하늘이 보였다.

“빨리! 서둘러!”

청하가 백진과 서윤, 그리고 남궁휘를 재촉했다. 백진과 서윤이 재빨리 어검에 올라타서는 아이들을 몇 명씩 들쳐 메고 지상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점점 더 가속화되는 붕괴 속에서, 남궁휘도 버둥거리는 곽 가주를 기절시킨 채 아이들을 옮기는 일에 뛰어들었다. 청하도 정신없이 아이들을 대피시키며 한 명도 남겨지는 아이가 없도록 지하실 안을 샅샅이 수색했다.

“선배님!”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문득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본 청하는, 자신이 뚫어 놓은 구멍이 무너질 듯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쪽 편에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청하는 이를 악물며 재빨리 손을 뻗어 멍하게 서 있는 여자아이를 끌어당겼다.

남궁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무너지려는 틈 사이를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청하는 흔들리는 구멍의 틈새 사이로 아이를 밀어 넣었다. 바깥에서 백진과 서윤이 초조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서 나오십시오, 스승님!”

백진이 애타게 외쳤지만 이미 틈새는 너무 좁아져 있었다. 무너지려는 틈새를 지탱하고 있던 남궁휘와 청하의 시선이 서로 맞부딪혔다. 남궁휘의 머리 위쪽으로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지려는 듯 흔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청하는 두 번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즉시 남궁휘의 팔을 붙잡고는, 그를 감싸며 안쪽으로 몸을 굴렸다.

쿠르릉! 쿠콰쾅!

정신없이 돌들이 무너져 내리고, 청하와 남궁휘는 낙석을 피해 더욱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아직 안쪽에는 무너지지 않은 공간이 약간 남아 있었다. 그들이 들어온 돌문 근처까지 물러난 청하는, 위쪽에서 무언가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선배님!”

놀란 남궁휘가 소리쳤고, 청하는 영기를 주입한 창천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푸른 영기가 빛나는 검이 청하의 머리 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쿨럭!”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냄새에 청하가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리며 쿨럭거렸다. 돌문 근처에 놓여 있던 곽 가주의 약장이 무너지며 수백 개는 족히 될 듯한 약병들이 청하의 머리 위로 우르르 쏟아졌던 것이다. 창천검이 갈라 버린 수많은 약병과 단지의 파편들 사이로,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를 붉은 가루가 순간적으로 청하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괜찮으세요?!”

남궁휘가 걱정스럽게 외치며 가까이 다가왔다. 청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스듬히 쓰러진 돌문 아래쪽으로 날쌔게 몸을 날렸다.

“이리로 들어와라!”

청하는 그렇게 외치며 둥글게 영기를 펼쳐 무너지는 공간을 지탱했다. 천둥처럼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길게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남궁휘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이 그들을 뒤덮었다.

“선배님? 선배님, 괜찮으세요?”

마침내 돌과 바위가 무너지는 소리가 멈추고 정적이 찾아들었다. 어둠 너머에서 나지막하게 으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궁휘는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설마 아까 떨어지는 돌에 어디를 잘못 맞기라도 하신 걸까? 남궁휘는 재빨리 입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품속에서 부적을 꺼내 들었다. 곧 부적이 푸른빛을 내며 타오르더니 허공에 몇 개나 되는 파란 불꽃이 날아올랐다.

다행히 푸른 불꽃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청하는 어디 다친 듯한 모습은 아니었다. 곧 남궁휘는 그들이 비스듬히 쓰러진 두 개의 돌문 사이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에는 마구 무너져 내린 돌과 바위들이 가득했다. 두 사람이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은 아니었으나, 함부로 영기를 날려서 길을 트기에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남궁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한쪽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청하를 돌아보았다.

“선배님, 이 안쪽에서 돌을 무너뜨리는 건 무리 같아요. 밖으로 몸을 피한 사람들이 길을 뚫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나 남궁휘의 말에도 청하는 여전히 대답 없이 웅크린 몸을 떨고 있었다. 남궁휘는 의아한 눈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 것 같은데, 왜 저러시지? 남궁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청하의 어깨를 살짝 잡은 채 흔들었다.

“저…… 선배님? 괜찮으신가요? 왜 갑자기…….”

“으아아아아!”

남궁휘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제게 와락 매달리는 청하의 모습에 깜짝 놀라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선배님?”

당황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남궁휘에게 더욱 바싹 제 몸을 붙이며, 청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나, 나는 괜찮…… 으, 으아아!”

그들의 머리 위에서 작게 부스러지는 돌가루에 깜짝 놀란 청하가 더욱 남궁휘의 팔을 꽉 붙잡았다. 어리둥절하던 남궁휘는 문득, 지난번 양산의 동굴에서 흑마부대와 마주쳤을 때에도 청하가 비슷한 모습을 보였던 것을 기억해 냈다.

설마…… 선배님께서 어두운 곳을 좀 무서워하시나? 남궁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 지었다.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천하의 청루각주에게 이런 의외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분명 많지 않을 것이다. 제 품에 파고들 듯 몸을 웅크리는 청하를 내려다보며, 남궁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째 좀 뿌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남궁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청하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아요, 선배님. 제가 지켜 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바깥에서 사람들이 길을 뚫어 줄 겁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견디시면…….”

청하의 어깨와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내뱉던 남궁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붙잡고 있는 청하의 팔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니, 뜨거워지는 것은 팔만이 아니었다. 청하의 몸 전체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청하의 입술 사이로 헐떡거리는 숨소리까지 새어 나오기 시작하자, 남궁휘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궁휘는 제 품에 안겨 있다시피 하는 청하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애쓰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선배님, 괜찮으세요?”

“자…… 잠깐…… 그, 그만…….”

“예?”

“소, 손 떼…….”

청하는 가냘프게 속삭이면서도 말과는 다르게 더욱더 남궁휘의 품 안으로 몸을 웅크렸다. 남궁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청하의 창백한 이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배님,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거예요? 혹시 뇌진탕이라든가…….”

“……니…….”

“예? 잘 안 들립니다.”

남궁휘는 고개를 숙이며 무어라 중얼거리는 청하의 모습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남궁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청하의 어깨를 잡은 채 강하게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선배님, 무슨……!”

남궁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의 얼굴은 푸른빛 아래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창백했으나, 동시에 그의 뺨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술은 살짝 벌어진 채 뜨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헐떡거렸다. 울긋불긋한 청하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청하의 몸은 자꾸만 간헐적으로 파드득 떨려 왔다. 남궁휘는 제가 붙잡은 청하의 어깨가 불에 덴 듯 뜨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궁휘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 증상들이 가리키는 것은 한 가지였다.

“아, 아까…… 이상한 약을 뒤집어쓰신 게 설마…….”

남궁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했다. 이것은 미약에 중독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증상이다.

남궁휘는 침착하기 위해 애쓰며 천천히 청하에게서 손을 떼어 내었다. 미약에 중독된 사람을 대책 없이 자극하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다. 일단 선배님에게서 최대한 떨어진 다음에, 더 이상 상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자극하지 말고, 그리고,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돌을 치우고 길을 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그러나 간신히 이어지던 남궁휘의 이성적인 사고는, 청하가 뜨겁게 달아오른 자신의 뺨을 천천히 뒤로 물러나던 남궁휘의 손바닥에 가져다 댄 순간, 덜컥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청하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남궁휘의 서늘한 손바닥에 부비며, 그의 손이 마치 저를 구해 줄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절박하게 붙들었다.

“그…… 아, 으…… 미, 미안…… 그, 그런데, 나…….”

청하의 목소리가 약 기운에 흐릿하게 젖어 들어갔다. 남궁휘는 무언가 제 아랫배를 오싹하게 스치는 듯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손을 붙잡은 것은 떨쳐 내려면 얼마든지 떨쳐 낼 수 있는 미약한 힘일 뿐이지만, 남궁휘는 마치 거인의 손에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빨리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남궁휘의 시선은 주박에 사로잡힌 듯 청하의 달아오른 얼굴에서 떼어 낼 수가 없었다.

청하가 뭉개지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휘…… 휘아야, 나…… 나, 몸이 이상해…….”

순간, 남궁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억누른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열기에 반쯤 풀려 버린 눈동자가 애처롭게 남궁휘를 향했다. 발갛게 젖은 눈가가 자석처럼 시선을 끌어당겼다. 남궁휘는 턱이 얼얼해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선배님…….”

끓는 듯한 목소리가 남궁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남궁휘는 뒤로 물러나고 있던 몸을 다시금 천천히 청하 곁으로 붙였다. 뜨거운 뺨을 서늘한 손으로 쓸어 주고 목덜미로 타고 내려가자, 청하의 몸이 가냘프게 떨렸다. 남궁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청하의 얼굴을 뚫어질 듯 들여다보았다.

“선배님, 이건…… 이건, 치료예요.”

그래, 이것은 치료였다. 독에 당한 선배를 후배가 치료해 주는 행위일 뿐이다. 청하의 열 오른 눈이 멍하게 남궁휘를 향했다. 남궁휘는 그 부드러운 두 뺨을 감싼 채 천천히 뜨거운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남궁휘의 눈이 조금 짙게 가라앉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며, 남궁휘는 가슴속에 맴도는 뒷말을 삼켰다.

그러니…… 저를 밀어내지 마세요.

남궁휘의 서늘한 손이 청하의 옷자락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청하는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열이 올라 어른거리는 시야에 굳은 표정의 남궁휘가 일렁이듯 비쳤다. 아름다운 흰 얼굴에 자신에게서 옮아 붙은 것 같은 열기가 서서히 번져 나갔다.

‘아, 젠장.’

청하는 자꾸만 배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은 불꽃을 어찌하지 못하고 둥글게 몸을 말았다. 그러나 남궁휘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길로 청하의 옷자락을 헤치며 서늘한 손을 거침없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상대적으로 차가운 손가락이 민감한 속살을 헤치며 열 오른 피부 위를 야릇하게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청하의 몸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극적인 기분이었다.

“아, 으…… 그, 그만…… 나, 이상…….”

청하의 발음이 절로 뭉개졌다. 청하는 자꾸만 드문드문 끊어지려고 하는 사고의 끈을 애써 붙잡으며 남궁휘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남궁휘는 그런 청하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청하의 몸을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헐떡거리는 청하를 아래에 둔 남궁휘의 눈빛이 푸르게 타오르는 불빛을 받아 번쩍거리며 빛났다.

“선배님…….”

남궁휘의 입가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왔다. 거침없이 옷자락을 헤치고 드러낸 울긋불긋한 흰 가슴 위에 남궁휘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단숨에 유두를 물어 오는 남궁휘의 행동에 절로 청하의 허리가 들렸다. 남궁휘가 손바닥으로 한쪽 가슴을 크게 주무르며 입으로는 반대쪽 유두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애처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 하으…… 으읏, 아…….”

미약에 중독된 것은 청하였지만, 남궁휘는 마치 자신의 뇌도 약에 당하기라도 한 듯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단하게 솟아오른 살덩이를 혀로 굴리며 자극하던 남궁휘는, 부드러운 살결에 이를 세우며 달아오른 피부를 마음껏 주물러 대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드러운 피부가 뜨겁게 달아오르기까지 하자, 마치 손바닥 위에서 꿀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청하는 점점 더 참을 수 없어지는 열기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이며 습기 어린 눈으로 남궁휘를 올려다보았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더 거세지는 간지럽고 애달픈 느낌에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청하가 단단한 남궁휘의 허벅지에 저도 모르게 제 아랫도리를 비비며 뚝뚝 끊어지는 말을 뱉어 내었다.

“아, 나, 흐으…… 어, 어떻게 좀…… 읏…… 응…….”

남궁휘의 허벅지가 더욱 단단해졌다. 남궁휘는 숨을 들이켜며 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이미 질척해진 속옷이 남궁휘의 시야에 들어왔다. 남궁휘는 이를 악물며 축축이 젖은 속옷을 헤치고 이미 바짝 일어선 청하의 것을 손바닥 가득 잡아 쥐었다.

“하윽……!”

단순히 물건을 쥐었을 뿐인데도 청하가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남궁휘는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청하의 것을 손아귀에 단단히 움켜쥔 채 강하게 압박하듯 위아래로 문질렀다. 동시에 뾰족하게 일어선 붉은 유두를 깨물고 강하게 빨아들이자, 청하가 쾌감을 참지 못하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애달픈 신음을 뱉어 내었다.

“하, 자, 잠까…… 아, 으…… 아……!”

불타오르는 것 같은 쾌감이 척추를 따라 달렸다.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동시에 발끝이 감전이라도 된 듯 오므라들었다. 미처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에, 청하의 것이 남궁휘의 손안에서 흰 백탁액을 뿜어내었다. 청하는 단숨에 끌어 올려진 거친 쾌감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벌벌 떨었다.

“하아…… 으, 흐윽…….”

그러나 배 속을 온통 새까맣게 태우는 것 같은 불꽃은 한 번의 분출로는 도무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하는 반쯤 울먹이며 남궁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수치스럽고, 민망하고, 쾌감에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죽을 것만 같은데 또 아직 부족하고, 더 이상 남궁휘의 손 아래에서 이런 짓을 당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자신을 어떻게든 해 줬으면 좋겠다는 이율배반적인 감각이 어지럽게 청하의 머리를 휘저어 대었다.

남궁휘는 청하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과연 주인공다운 단정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나 남궁휘의 눈동자는 입가의 부드러운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칠고 격정적인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아직 부족하세요?”

남궁휘가 속삭이듯 물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하라고 남궁휘를 밀쳐 내고 싶었지만, 청하의 몸은 그와는 달리 자꾸만 남궁휘에게 닿으려는 듯 들썩이고 있었다. 발갛게 짓무른 눈꼬리를 타고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남궁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하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남궁휘는 방금 사정했는데도 벌써 다시 반쯤 일어선 채 선액을 흘리고 있는 청하의 것을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청하의 물건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남궁휘의 얼굴 옆으로 하나로 올려 묶은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남궁휘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등 뒤로 넘기며 코앞에 다가온 청하의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배님은 어떻게 이런 곳도 이렇게 예쁘세요?”

남궁휘가 홀린 듯이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청하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심정이 되었다. 거, 거기가 제일 예쁘다는 설정을 가진 건 너 아냐? 분명 그런 묘사를 본 것 같은데! 그러나 미처 생각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남궁휘가 입을 벌리더니 청하의 것을 단숨에 머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달아오른 민감한 곳이 갑작스럽게 뜨겁고 축축한 점막에 감싸이자, 청하는 짜릿할 정도로 단숨에 치받는 쾌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꺾으며 신음을 내질렀다.

“아아, 으, 하…… 너, 너, 뭐 하는, 아…… 그, 그만…… 아…… 으……!”

남궁휘가 혀로 단단한 기둥을 휘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청하는 그나마 이어지던 생각이 뇌 속에서 조각조각 흩어져 버리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 머릿속이 곤죽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청하는 난폭하게 몰아치는 쾌감을 어쩌지 못하고 제 사타구니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남궁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청하는 차마 남궁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그 머리통을 붙잡기만 했다. 오히려 남궁휘가 단단한 손길로 청하의 허벅지를 힘껏 움켜잡고는 더욱 양옆으로 벌려 대었다. 청하는 속수무책으로 다리를 벌리며 남궁휘의 뜨겁고 좁은 입 안에서 제 것이 마음껏 유린당하는 것을 느꼈다.

남궁휘가 혀를 뾰족하게 세운 채 청하의 물건 끝부분 갈라진 틈새를 파고들자 청하는 자지러지듯 몸을 떨며 아, 아, 하고 넋 나간 듯한 신음을 흘렸다. 머릿속을 텅 비워 버리는 것 같은 폭력적인 쾌감이 거칠게 청하의 온몸을 휩쓸었다. 양옆으로 넓게 벌려진 다리가 경련하듯 떨렸다. 남궁휘는 하얀 허벅지에 붉게 남은 자신의 손자국을 타오르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청하의 것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가슴 위로 더듬어 올라간 남궁휘의 단단한 손톱이 빳빳이 솟아오른 청하의 유두를 사정없이 긁어 대었다. 청하는 위아래에서 몰아치는 자극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두 번째로 남궁휘의 입 안에 파정하고 말았다.

뿌옇게 안개가 끼인 것 같던 청하의 머릿속이 그제서야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아직 청하의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청하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게 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남궁휘는 자신의 손바닥에 청하가 분출한 정액을 뱉어 내고 있었다. 희뿌연 백탁액이 남궁휘의 아름다운 손가락 위에서 끈적하게 엉겨들었다. 미친 듯이 자극적인 장면에, 청하는 약간 현실감 없이 멍한 눈으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손끝에 달라붙은 흰 점액질의 액체를 문지르던 남궁휘가 천천히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하는 남궁휘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청하의 안을 불태우던 불꽃은 서서히 열기가 수그러들고 있었지만, 이제 그 열기는 남궁휘에게로 옮겨 간 것 같았다. 어둑어둑한 푸른 불꽃 아래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남궁휘의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선배님…….”

남궁휘가 천천히 제 몸을 청하에게 붙여 왔다. 청하는 문득 제 아래에 와 닿은 남궁휘의 하반신이 방금 전의 저 못지않게 뜨겁게 달아올라 있음을 깨달았다. 단단하고 묵직한 무게감이 청하의 아래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청하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이, 이게 무슨……! 남궁휘의 뜨거운 숨결과 단단한 치아가 청하의 목덜미에 닿아 왔다. 청하는 남궁휘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남궁휘의 가슴을 밀어내듯 손을 올리며 더듬거렸다.

“자, 잠깐만, 저기…….”

“선배님.”

남궁휘가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남궁휘가 청하를 내려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다시 휘아라고 불러 주세요, 선배님.”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청하의 머리를 스쳤다. 청하는 일단 흥분한 것 같은 남궁휘를 달래기 위해 그의 단단한 어깨를 붙잡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저…… 휘, 휘아야, 잠깐…….”

그러나 청하의 입에서 휘아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청하의 아래를 압박하고 있던 남궁휘의 것이 한층 더 단단하게 부피를 키워 갔다. 청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숨 막히게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남궁휘의 몸을 밀어내려는 듯 다시금 부질없이 바르작거렸다.

“선배님…….”

남궁휘가 뜨거운 눈으로 청하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청하는 반쯤 풀린 것 같은 남궁휘의 눈이 자신을 향해 위험하게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큰일 났다…….’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촉이 청하의 가슴을 선뜩하게 했다. 진득하게 제 것을 청하의 아래에 문지르던 남궁휘의 손이 청하의 엉덩이를 움켜쥔 순간, 갑자기 그들의 머리 위에서 콰쾅, 하는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청하와 남궁휘가 동시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주변을 꽉 메우고 있던 커다란 돌덩이들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 한번 더, 쾅, 하는 소리가 울리자, 머리 위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밖에서 길을 뚫고 있구나!’

청하는 황급히 제 위를 짓누르고 있는 남궁휘를 밀쳐 내며 엉망이 된 옷자락을 간신히 추스렸다. 남궁휘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으나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허겁지겁 옷자락을 여민 청하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차림새를 갖추었을 때, 그들의 바로 위쪽에서 콰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머리 위로 구멍이 뻥 뚫렸다.

시원한 공기가 막혀 있던 구멍으로 흘러들어 오며 청하의 폐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는 새벽하늘이 제일 먼저 청하의 눈에 들어왔다. 반색을 하며 위를 올려다보던 청하의 시야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는 붉은 두 개의 눈동자가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청하는 웃던 얼굴 그대로 몸을 굳힌 채 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검붉은 마기가 넘실거리는 천마검이 종잇장처럼 갈라낸 바윗덩어리 사이로, 차갑게 굳은 주세민의 얼굴이 청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하는 저를 향해 수없이 굽신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관원들을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사태가 다 끝난 뒤에야 불려 온 화룡성의 관리들은, 몇 달이나 이어진 실종 사건의 범인이 바로 다름 아닌 곽가장의 가주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에 더해, 이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그 유명한 청루각주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강호 세력인 금가장에서 뒤늦게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겠다 하였지만, 남궁휘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단호한 표정으로 금가장의 개입을 차단했다. 금가장을 제외하면 이곳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남궁 세가였기에, 남궁휘는 가문으로 연락을 하여 사후 처리를 도와줄 사람을 보내 달라 하였다.

‘나이가 어리긴 해도 후계자는 후계자라는 건가, 상황 판단이 빠르네.’

아마 오늘 이후로, 화룡성은 금가장이 아닌 남궁 세가의 영향력 아래 새롭게 편입될 것이다. 청하는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곽가장의 지하실에서 풀려난 아이들이 엉엉 울면서 제 부모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맨 처음 청하 일행을 곽가장으로 안내해 주었던 채소 장수도 있었다.

몇 번 얼굴을 보았던 늙은 채소 장수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제게 달려와 안기는 어린 딸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딸을 잃고 몸져누웠다는 그의 아내도 수척한 얼굴에 눈물을 가득 매달고는 딸의 얼굴을 하염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청하는 부모의 품에 안긴 채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앳된 소녀가, 그가 맨 마지막 순간에 좁은 구멍 틈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던 바로 그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하는 넓은 소맷자락으로 반쯤 입가를 가린 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쨌든 일어나야 하는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청하가 마지막 순간에 끝까지 그 소녀를 포기하지 않았던 결과가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알 수 없는 어떤 따뜻한 것이 청하의 배 속을 자꾸만 간지럽혔다. 몸 안에서 파도가 치는 듯한 잔잔한 울렁거림이 몇 번이나 청하의 심장을 안쪽에서부터 두드려 왔다.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었다. 청하가 했던 선택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바라보는 청하의 시선을 눈치챈 채소 장수가 저쪽에서 청하를 향해 몇 번이나 허리를 굽히며 절을 했다. 주름진 얼굴이 온통 눈물로 글썽이고 있었다. 청하는 그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소매를 한 번 떨치고는 휙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눈앞에 불쑥 나타난 시꺼먼 그림자가 청하의 몸을 뒤덮었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는 주세민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청하는 속으로 살짝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그런 세민의 얼굴을 마주 올려다보았다. 잠시 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주세민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 말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 순간 청하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너도 알았겠지. 이번 일은 흑마부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이었어.”

주세민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청하는 그런 주세민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마교에서 신경 쓸 일도 아니었던 거지.”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청하는 세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러니 그렇게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좀 그만해 줄래?

이미 오늘 새벽, 엉망이 된 곽가장에서 모든 설명을 다 듣고 난 뒤에도 주세민은 이곳을 떠나는 대신 묵묵히 이렇게 청하의 곁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민의 끈질긴 시선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청하에게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은 채 집요하게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지금도 세민의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빛을 띤 채 청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세민을 힐끔거리며 모르는 척 소맷자락을 정리했다. 세민과는 지난번 온천에서의 민망했던 만남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청하는 아직도 주세민이 약간 불편했다.

청하는 마른 헛기침을 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때, 세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구덩이 안에서 남궁 세가의 어린애랑 뭘 하고 있었지?”

청하의 몸이 우뚝 멈췄다. 청하가 천천히 세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민이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청하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그때 뭔가를 눈치챘던 건가? 청하는 낭패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새벽빛과 함께 나타났던 주세민의 강렬한 붉은 눈동자가 제 눈동자와 맞부딪혔던 그 찰나의 순간이 청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던데.’

세민의 뒤에서 곧장 하얗게 질린 얼굴을 내밀었던 백진과 서윤을 떠올리며 청하는 슬쩍 초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세민은 청하의 조그만 머리통 속에서 무슨 생각이 흘러가는지 빤히 보인다는 듯,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세민이 청하 쪽으로 조금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그런 분위기도 알아보지 못할 줄 아나.”

하…… 젠장. 청하는 속으로 난처한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를 챘더라도 그런 건 좀 모른 척해 주면 안 되나? 청하는 억울한 기분에 세민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말 그대로였다. 그래서, 네가 짐작하고 있는 그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뭐 어쩌라는 거지.

세민은 뚫어질 듯한 눈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세민의 눈이 순간적으로 불쾌한 듯 가늘어졌다. 그러나 세민은 결국 입술을 비틀며 숙였던 몸을 천천히 바로 세웠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가늘게 숨을 내뱉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세민에게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청하를 불편하게 했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청하의 눈을 응시하자, 청하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얘 또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 또 무슨 이상한 말 하려는 거 아냐?

불길한 예감은 어찌나 그렇게 잘 들어맞던지, 마침내 세민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당분간 너와 행동을 같이하겠다.”

그것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청하는 순간적으로 세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한 박자 늦게, 청하가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외쳤다.

“뭐,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나 주세민은 별다른 동요도 없는 얼굴로 청하를 향해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말 그대로다. 당분간 너와 함께 움직이겠다는 말이야.”

“왜…… 왜?”

청하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순간적으로 세민의 입이 다물어졌다. 청하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런 세민의 얼굴을 관찰하듯 빤히 들여다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세민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청하를 향해 붉게 빛나는 세민의 두 눈동자가 움찔거리는 입술 대신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청하는 세민이 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어 그저 의아한 마음으로 그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답지 않게 잠시 침묵하던 세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곽영춘이라는 자가 분명 누군가로부터 내공이 없는 일반인도 반로환동을 할 수 있는 비책을 전달받았다고 했었지.”

“아…… 음, 그래. 분명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했었다.”

세민이 살짝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세민의 입술 사이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이라…….”

그러고 보니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그 당시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곽 가주의 이런 행동을 부추겼음이 분명했다. 세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로환동같이 오래전에 잊혀진 사술을 미끼로 무언가를 꾸미려는 집단이 강호에 그렇게 많을 리가 없지. 흑마부대, 반로환동. 전부 다 오래전에 우리 천마신교에서 만들었고, 또 잊혀졌던 사술이다.”

청하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세민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청하가 신중하게 말했다.

“그 말은…… 흑마부대를 만들어 낸 자들이 곽 가주에게 반로환동의 사술을 가르쳐 줬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지.”

세민이 담담하게 말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청하는 세민의 추측이 그럴듯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대체 그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청하는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세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것과 네가 나를 따라오겠다는 건 무슨 관련이 있지?”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가만히 청하를 향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세민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차피 너도 흑마부대의 흔적을 쫓아갈 생각 아닌가? 앞으로 계속해서 마주칠 듯한데, 그러느니 그냥 같이 행동하는 게 나을 거다.”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던 세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번에도…… 만약 내가 같이 있었더라면…….”

“뭐라고?”

청하가 의아한 얼굴로 세민을 올려다보았으나, 세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청하는 잠시 세민이 말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하긴, 원작에서도 남궁휘의 뒤를 쫓아다니던 주세민이 어느 시점부터는 같이 여행을 다녔으니, 이것도 원작 전개랑 비슷한 흐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어쨌든 주세민과 남궁휘가 붙어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둘 사이에 어떤 감정이 생겨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청하의 머릿속에 오늘 새벽 곽가장의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과 그 전날 온천에서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지하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청하는 순식간에 얼굴로 확 열이 몰리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치료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남궁휘와 그런…… 그런 짓까지 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주세민도 그렇고 남궁휘도 그렇고, 어째 청하가 의도했던 것과는 자꾸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이제부터 잘하면 돼, 이제부터.’

청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힐끗 시선을 돌려 저쪽을 바라보았다.

아이들과 눈물겨운 재회를 나누고 있는 부모들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뒷정리를 하고 있는 남궁휘의 모습이 보였다. 제갈서윤과 백진도 마찬가지로 한창 뒷수습에 여념이 없었다.

물끄러미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청하는, 문득 갑작스럽게 이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남궁휘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남궁휘의 날카로운 시선이 청하와 그 앞에 서 있는 주세민 사이를 번갈아 가며 한참이나 머물렀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남궁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모르게 뜨끔한 청하는 슬쩍 다시 앞에 있는 세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드는 세민을 향해, 청하는 우선 가장 현실적인 문제부터 입에 올렸다.

“하지만 네가 마교주 주세민이라는 것을 온 강호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와 같이 움직이겠다는 거야? 지금 다른 사람들은 모두 흑마부대가 네 짓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모를 리 없겠지.”

그러나 세민은 태연하게 청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세민은 별다른 말 없이 소매 속에 손을 집어넣고는 안에서 검은 빛깔이 도는 투박한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대체 저 소매 속에는 얼마나 많은 물건이 들어갈 수 있는 거지? 청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민의 소맷자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소매가 특별히 넓게 제작된 건가? 그게 아니라면 무슨 주머니 같은 거라도…….

그사이, 세민은 소매 안에서 꺼내어 든 검은 반지를 천천히 보란 듯 청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뭐야?”

반지와 세민을 번갈아 보며 묻는 청하의 앞에서, 세민은 여유 있는 동작으로 제 검지 손가락에 검은 반지를 끼워 넣었다.

그와 동시에, 청하가 보는 앞에서 세민의 얼굴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눈동자에 어려 있던 붉은빛이 사라지고 흑요석처럼 짙은 검은 눈동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청하는 얼빠진 얼굴로 그 마법 같은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뭐지? 붉은빛이 사라지고 짙은 검은 빛깔의 눈동자가 청하를 똑바로 바라보자, 세민의 얼굴은 놀랍도록 다른 인상을 주었다.

“어떤가?”

세민이 슬쩍 미소 지으며 물었다. 청하는 입까지 조금 벌린 채 세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강호인들 중에 주세민을 알아보는 자가 많다 하나,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민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붉은 눈동자가 사라지고 나니, 도저히 눈앞에 있는 이 수려한 청년이 바로 그 마교주 주세민일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청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지난번 청루각에 쳐들어왔을 때도 이렇게…….”

주세민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청하는 나지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청하는 간신히 내키지 않는 입을 떼어 놓았다.

“확실히…… 알아보긴 어렵겠네.”

세민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 어리석은 자가 결국 제 명을 재촉했군.” 

몇 개 되지 않은 등불이 어둑어둑한 실내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불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 반쯤 몸을 묻고 있는 사내는 손에 들린 작은 쪽지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코웃음을 내뿜었다.

벌레 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밤이었다. 고급스럽고 정갈한 물건으로 가득한 실내는, 어느 유력 세가의 정실이나 서재처럼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띠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사내는 곧 미련 없이 손에 들린 쪽지를 작게 타오르고 있던 등불에 던졌다. 순간적으로 밝게 타오른 불꽃 아래에서 검은 재로 화한 쪽지가 가볍게 흩날렸다. 사내가 탁자를 부드럽게 톡톡 두드렸다. 짧은 비웃음이 사내의 입가에 떠올랐다.

“반로환동같이 터무니없는 말을 정말 믿을 줄이야. 하지만 어차피 내공도 없는 일반인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 제물이 조금 부족하게 되겠지만, 전반적인 일에 큰 지장은 없겠지.”

짙은 어둠 속에서 가벼운 인기척이 들렸다. 사내의 시선이 힐끗 그리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온통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인영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씌워진 피처럼 붉은 가면이 기묘한 분위기를 띠었다.

붉은 가면의 인영이 아무런 말 없이 탁자 뒤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두 번째 종이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남자는 종이에 쓰여진 암호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뭐, 이미 혈석을 확보했으니 혈석의 존재가 발각된 것은 상관없다. 다른 혈석들의 확보를 서둘러야겠군. 지난번의 실패도 결국 혈석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으니. 흑마부대는 예정대로…… 좋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암호를 읽어 내려가던 남자의 시선이 문득 어느 한곳에 머물렀다. 남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영맥이 끊겼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남자가 붉은 가면의 인영을 힐끗 돌아보았다. 붉은 가면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짙은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남자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세계의 영혼…….”

* * *

청하는 난처한 얼굴로 제 앞에 있는 일행들의 눈치를 살폈다.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까지 못마땅하다는 듯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청하의 옆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청하의 시선이 슬그머니 그쪽을 향했다. 키가 크고 탄탄한 체격의 청년이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어 올린 채, 운신하기 편한 검은색의 무복을 입고는 단단히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수려하며 단정하게 선이 굵은 얼굴은 무표정하게 입을 다물고만 있으면 귀하게 자란 어느 명문 세가의 도련님 같았다. 그러나 이쪽도 저를 향한 적대적인 시선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청하는 난감한 마음에 슬쩍 눈을 굴렸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그들은 화룡성에서 약간 떨어진 인적 드문 길가에 서 있었다. 주세민이 화룡성을 벗어난 즉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은, 지금 막 마교주가 외양까지 바꾼 채 기어이 청하의 뒤를 쫓아오겠다는 선언을 듣고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참이었다.

남궁휘가 먼저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희가 어째서 마교의 교주와 같이 움직여야 하죠?”

청하는 애써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지금 당장은 이자와 우리의 목적이 같기 때문이다.”

“목적이 같다는 말을 믿을 수가 있나요?”

남궁휘가 여전히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남궁휘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노골적인 불신으로 물든 채 세민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난처한 미소를 지은 청하가 힐끗 옆을 곁눈질하자, 세민의 입꼬리가 대놓고 불쾌하게 뒤틀리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게 허공에서 부딪혔다. 아이고, 살벌하구나……. 청하는 속으로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아니, 지금 너희는 서로한테 그럴 때가 아닌데, 이게 참…….

세민이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날 못 믿겠으면 네가 떠나는 건 어떤가? 나와 청루각주는 목적이 같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알아서 빠지는 것이 좋겠군. 어차피 갈 길 간다는 사람을 잡지는 않을 것이니.”

“뭐라고?”

뭐라고?

청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세민을 힐끗 바라보았다. 지금 누구 맘대로 남궁휘한테 빠지라 마라 하는 거야?! 그러다가 정말로 남궁휘가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 난다고! 내가 지금 이 고생을 왜 하고 있는데?!

앞에서는 남궁휘가 발끈하여 세민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양식 있는 세가의 자제답게 당장 검을 뽑아 든다거나 하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먹을 불끈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니 세민의 빈정거림을 참아 주기 힘든 모양이었다.

청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 마음대로 누구한테 빠지라 마라 이런 소리는 하지 마.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나 세민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청하를 향해 백진이 보기 드물게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정말 이자를 믿으시는 겁니까?”

“뭐, 그래, 일단은…….”

“일단은?”

세민이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청하는 이를 악물며 세민을 돌아보았다.

“일단은.”

청하가 단호하게 말을 맺자, 세민이 재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백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으나, 청하는 부러 그를 외면한 채 다시금 일행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뭐든 이용해야 해.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마교와 대립할 필요는 없겠지. 같이 행동하며 이쪽의 정보도 활용할 수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분명 흑마부대를 만들어 낸 자들은 마교 내의 어떤 세력이라고 했다. 이 중에서 흑마부대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주세민일 터였다. 청하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자, 다른 이들도 일단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청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아까부터 침묵하고 있는 제갈서윤을 돌아보았다.

“넌 어때?”

서윤은 냉정한 눈으로 세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서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담담한 무표정이었으나, 청하는 그 인간 같지 않은 냉정하고 싸늘한 눈빛이 그의 아버지인 제갈 세가의 가주 제갈유연을 꼭 빼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쟤는 평소에는 얼빠진 듯 굴면서도 가끔 저럴 땐 좀 무섭다니까. 청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서윤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서윤이 어깨를 살짝 추켜세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내가 반대한다고 해서 결론이 바뀌지는 않겠지. 너는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으니까.”

그것은 맞는 말이었으므로 청하는 입을 다물었다. 서윤이 날카로운 눈으로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저자의 목적이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세민의 형형한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제갈서윤을 향했다. 그러나 서윤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작게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거슬린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서윤은 청하를 향해 휙 몸을 돌렸다.

“어쨌든 그렇게 결정된 것으로 알고, 그럼 이다음 목적지는 어디야?”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일제히 청하를 향했다. 청하는 갑작스러운 시선 집중에 살짝 당황한 채 말을 더듬었다.

“어, 음…… 이다음은…….”

이다음은…… 어디로 가야 하지? 청하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원작의 남궁휘가 화룡성을 나와서 간 곳이 어디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잠깐, 지금은 주세민이 이 일행에 끼어들었으니까, 원작에서도 주세민이 합류하고 난 다음의 전개로 건너뛰어야 하는 것 아니야?

청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잘 기억나지도 않던 원작의 내용이 더욱더 복잡하게 머릿속에서 엉켜들어 갔다. 그러니까, 분명 원작에서는 이다음에…….

그때, 청하의 귓가에 무언가 날카롭고 높은 새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백진도 번쩍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청하를 바라보았다.

“들으셨습니까, 스승님?”

백진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청하와 백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제갈서윤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청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푸른색 깃털로 뒤덮인 청조(靑鳥) 한 마리가 푸른 화살처럼 청하를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청루각의 청조……?”

남궁휘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청하는 살짝 굳은 얼굴로 아름다운 청조가 우아하게 날개를 접으며 제 손가락 위에 내려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직 청루각에서만 쓰는 청조는 온 강호를 통틀어 가장 빠른 연락 수단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청조는 청루각에서조차 무척 귀한 것이기 때문에, 아주 급한 연락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청조를 쓰는 법이 없었다.

청하는 청조의 다리에 매달린 작은 쪽지를 펼쳐 보았다. 청조는 청루각주의 손길이 기분 좋은 듯, 자꾸만 청하의 손가락에 몸을 비비며 꾸룩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무의식적으로 청조의 깃털을 쓰다듬으며 쪽지를 펼치던 청하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덜컥, 내려앉았다. 쪽지에는 단 두 문장만이 쓰여져 있었다.

<흑마부대 습격. 소각주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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