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한밤중, 청하는 불쾌한 기분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늦봄으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더운 날씨는 아니었으나, 잠에서 깨어난 청하는 제가 입고 있는 침의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건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밤새 악몽을 꾸면서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렸던 것이 분명했다.
하아, 가지가지 하는군. 청하는 한심한 마음에 혀를 찼으나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을 좀 씻고 싶었으나, 객으로 있는 처지에 곽 가주의 그 무뚝뚝한 시종을 깨워 한밤중에 목욕물을 달라고 하기도 미안한 일이었다.
문득, 청하의 머릿속에 후원에 있는 온천이 떠올랐다. 어차피 한밤중이라 아무도 없을 테니, 살짝 가서 몸만 담그고 오면 좋을 것 같았다. 청하는 침의 차림 그대로 겉옷만 가볍게 어깨에 걸치고는 침실을 빠져나와 온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온천은 어제와 별반 달라진 것 없는 모습이었다. 어두운 후원 한편에 작게 빛나고 있는 석등 사이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이 보였다. 수증기가 흐릿하게 피어올라, 온천의 반대편은 잘 보이지 않았다. 청하는 온천가의 청석에 겉옷을 벗어 놓고는 입고 있는 침의를 벗을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어제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기에 내의를 입고 들어갔지만, 지금은 보는 눈도 없는데 그냥 다 벗고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한번 땀으로 젖었던 침의를 입고 물에 들어가기가 조금 찝찝하기도 했다. 결국 망설이던 청하는 허리띠에 손을 가져갔다.
온천물로 데워진 미지근한 돌 위에 허리띠가 툭 떨어지고, 곧 흰 침의가 청하의 몸을 따라 부드럽게 아래로 미끄러졌다. 청하는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 하얀 나신을 드러낸 채, 주춤주춤 온천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구름에 반쯤 가려진 투명한 달빛이 청하의 흰 어깨 위에서 반짝이며 부서져 내렸다. 뜨거운 물에 가슴께까지 몸을 담그자, 긴장해 있던 근육이 노곤하게 풀어지며 낮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제갈서윤이 여독을 풀어야 하니 어쩌니 했지만, 진짜 온천욕이 필요했던 건 오늘이었어.’
청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온천가에 기대앉았다. 이리저리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을 하던 청하는, 천천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온천 위로 잔뜩 뻗어 나간 만개한 흰 꽃가지가 시야 가득 들어찼다. 물안개가 살며시 피어오르는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앉아, 별이 가득한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그윽한 향기를 뿌리고 있는 흰 꽃들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신선이 따로 없었다.
청하는 약간 나른해진 눈동자로 멍하게 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꽃은 무슨 꽃일까.”
꽃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청하는 그저 어렴풋하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꽃이다, 정도의 생각을 하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흰 꽃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꽃잎 한 장이 팔랑거리며 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나풀거리는 나비처럼 이리저리 팔랑거리며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흰 꽃잎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떨어지던 꽃잎을 휙 낚아채었다.
“……!”
깜짝 놀란 청하가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은 이화(梨花)다. 천하의 청루각주가 그런 것도 모르는 건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서늘한 손이 목덜미를 낚아채는 듯한 느낌에, 청하는 황급히 물속에서 몸을 돌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온통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주세민이, 거의 어둠과 하나가 된 것 같은 모습으로 그림자 속에 반쯤 몸을 숨긴 채 우뚝 서 있었다.
한 손은 허공에 내민 채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이 약간 우스꽝스러워 보였으나, 청하는 그 주먹 안에 방금 낚아챈 흰 꽃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하는 뚫어질 듯한 눈으로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주세민의 얼굴을 경악 속에서 마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 청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한쪽 팔을 꼬집어 보았다. 따끔하게 퍼지는 고통이 아득히 멀어지려는 현실 감각을 간신히 이곳에 붙들어 두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퍼뜩, 청하의 머릿속에 잠시 잊고 있던 원작 내용이 스쳐 지나갔다. 남궁휘가 가는 곳마다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존재감을 드러내던 주세민. 그것이 바로 원작의 줄거리가 아닌가? 그중에는 분명 주세민이 생각지도 못한 한밤중에 등장하는 장면도 있었을 것이다.
아…… 조만간 주세민이 나타날 것이라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재회에, 청하는 당황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뭐 하나?”
세민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제 팔을 마구 꼬집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청하를 향해, 세민이 슬쩍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청하는 애써 낭패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거지?”
“어떤 불청객이 내 꽃구경을 방해하기 전부터.”
“뭐……?”
그렇다는 건, 완전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다는 말이잖아?! 대체 어디서? 전혀 기척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청하는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제 뺨을 의식하며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처음부터…… 제가 옷을 벗기 시작하던 그 순간부터, 이미 세민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일단 거기 있는 옷 좀 던져 줘.”
청하가 약간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미있다는 듯이 그런 청하를 바라보고 있던 세민은 힐끗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청석 위에 벗어 둔 청하의 침의와 겉옷이 그의 발아래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흐음.”
세민이 잠시 뜸을 들이며 옷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져 있던 세민은, 다시금 시선을 들어 올려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저를 빤히 쏘아보고 있는 청루각주를 바라보았다. 가슴께까지 푹 물속에 몸을 숨긴 채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변태 파렴치한을 만난 듯한 반응이었다. 세민의 입가가 슬쩍 비틀어졌다.
다음 순간, 세민은 훌쩍 온천 안으로 뛰어들었다.
청하는 그야말로 기겁하였으나, 이대로 벌떡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물속에 잠긴 청하의 몸은 완전한 나신이었다. 청하는 황급히 더욱더 뒤로 몸을 물렸으나, 세민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성큼성큼 청하를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왜, 왜 자꾸 이쪽으로 오는 거야?”
“그냥 대화를 하려는 것뿐이다.”
“대화? 그건 거, 거기서도 할 수 있잖아. 왜 안으로 들어온 거야? 멈춰! 이쪽으로 오지 마!”
“그렇게 멀리 떨어져서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건가? 기본적인 예의가 없군.”
세민은 그렇게 말하며 거침없이 청하와 자신 간의 거리를 좁혀 왔다. 아니, 그러니까 옷을 던져 달라고 했잖아! 내가 옷을 입고 나갔으면 됐을 것을!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던 청하의 등이 마침내 온천 반대편 가장자리에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청하가 안절부절못하며 멈춰 서자, 느긋하게 그쪽으로 다가가던 주세민도 청하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물에 젖은 검은 옷자락이 주세민의 몸에 자꾸만 달라붙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이 물에 젖은 채 물속에서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청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든 손으로 제 몸을 가려 보려 했으나,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달빛이 반사되어 수면 아래는 잘 보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흰 나신을 드러낸 채 홀딱 벗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검은 옷으로 칭칭 온몸을 휘감고 있는 세민의 모습이 적나라한 대비를 이루었다. 온 얼굴이 다 타 버릴 것만 같은 수치심에, 청하는 이를 갈며 제 앞에 선 세민을 노려보았다. 청하가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대체 이곳엔 무슨 볼일이지?”
적대적인 목소리에도 세민은 그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세민이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물에 젖은 손으로 쓸어 넘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너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들었으니 하루 종일 그렇게 종종거리며 돌아다녔던 거겠지.”
……아예 낮부터 줄곧 내 뒤를 따라다녔다는 건가. 청하는 소름이 다 돋았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청하의 행보를 주시하던 그가 화룡성의 소식을 들었다면 분명 관심을 가질 법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이 야심한 한밤중에 곽가장에는 왜 숨어들어 온 건데?!
그때, 주세민이 슬쩍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게 볼일도 있고. 분명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지? 오늘은 내 소원을 받으러 왔다.”
“소원?”
청하가 황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세민은 청하의 기가 막히다는 듯한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뻔뻔한 얼굴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소원이라니?”
“지난번 대결에서 내가 지면 창천검을 돌려주고, 네가 지면 내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했잖아?”
“그래서 내가 졌나? 분명 비겼다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그때 승패가 확정 나기도 전에 흑마부대가 쳐들어왔잖아?! 이제 와서 갑자기 무슨 소리람? 그러나 주세민은 낯빛도 바꾸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데 왜 네 수중에 창천검이 있는 거지?”
청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건…… 그건 흑마부대 때문이었잖아……! 창천도 없이 그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흑마부대를 어떻게 상대하라고……. 내가 달라고 하니까 지도 줘 놓고서.
그러나 청하가 입술을 뻐끔거리는 사이, 세민이 먼저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비겼기에 네가 내 소원을 들어줄 필요가 없다면, 나는 네게 창천을 돌려줄 필요도 없었던 것 아닌가?”
그거야…… 그렇긴 하지. 청하는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렇다고 치사하게 이제 와서 창천을 다시 뺏어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분명 말하지만 그건 원래 내 검이었고…….”
“하지만 내게 빼앗겼지. 그리고 정정당당한 결투로 검의 행방을 정하자고 한 것인데, 치사하다니, 섭섭한 말을 하는군.”
세민의 차분한 목소리에 청하는 대답이 궁해졌다. 아니…… 뭐 그렇다고 반대로 내가 엄청 치사하게 창천을 받아 간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어쨌든 승패가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청하가 창천을 돌려받은 것도 사실이긴 했다. 잠시 침묵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청하의 입에서 약간 소심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러니 너도 내 소원을 들어줘야 공평하다는 것이지. 그게 싫다면 다시 창천을 돌려주거나…….”
“그, 그건 안 돼!”
청하가 다 듣기도 전에 세민의 말을 잘랐다. 창천을 돌려 달라니, 그건 절대 안 되지! 얼마나 중요한 검인데!
창천을 사용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영기의 위력 차이를 몸소 느껴 본 청하로서는 창천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선택지였다.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검을 확실히 돌려받기 위해 이런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쨌든 별다른 수가 없는 청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소원이라는 게 뭔데.”
일단 말이라도 한번 들어 보자. 일단 한번 들어 보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요구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그렇게까지 창천을 빼앗아 가겠다면 무력시위라도 불사하는 수밖에.
청하는 속으로 전투력을 불태우며 세민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싱긋 미소 지은 세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니야, 그저…….”
말꼬리를 흐리며, 세민이 불쑥 청하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청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청하의 뒤는 커다란 청석으로 막혀 있었다. 온천 가장자리에 몰려 꼼짝도 하지 못하는 청하를 향해, 세민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느긋이 다가들었다. 찰박이는 물소리가 청하의 귓가에 거슬리게 울려 퍼졌다.
“뭐…… 무슨…….”
청하가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청하의 바로 앞까지 바싹 다가선 세민이 슬쩍 시선을 내리깔아 제 앞에 선 청하를 바라보았다. 약간 방어적으로 움츠린 흰 어깨와 물방울이 맺혀 있는 쇄골,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진 가슴을 따라 검고 긴 머리카락이 물에 젖은 채 달라붙어 있었다. 세민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휘었다. 제 목덜미와 가슴을 따라 내려가는 노골적인 시선의 움직임에, 청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된 공기 속에서, 세민의 매끄러운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네가 내게 입을 맞춰 주었으면 좋겠군. ……내가 원할 때까지.”
청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후원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뭐……? 청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주세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입을 맞춰 달라고? 대체 왜? 아니, 그리고…… 정말 그것으로 괜찮겠어?
천하의 청루각주에게 소원을 요구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반대급부는 창천검. 청하는 짧은 시간 동안 속으로 마교주가 제게 요구할 수 있을 법한 수백 수천 가지의 대가들을 떠올려 보았으나, 그중에 고작 입맞춤 한 번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청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세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입맞춤을……? 왜……?”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가만히 청하를 응시했다. 청하는 세민의 눈동자에 얼핏 미묘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뭐지? 청하가 당황해하는 사이, 세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인해 보고 싶어서.”
무엇을……?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문 세민은 더 이상의 질문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청하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입맞춤으로 뭘 확인해 본다는 거야?! 하여간 진짜 이상한 놈이다……. 문득, 청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혹시…… 주세민이 남궁휘한테 뭔가 어떤 감정이 생기기 시작한 건가?!’
생각해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까지 주세민과 남궁휘가 이곳저곳에서 마주친 것이 벌써 두어 번이나 되었다. 원작에서도 주세민은 남궁휘를 첫눈에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으니까, 이 정도쯤 됐으면 뭔가 어떤…… 감정이 생겨날 만하지. 그렇다면 자신과 한번 입맞춤을 해 보고 남궁휘에 대한 감정과 비교해 보려는 시도일 수도 있었다. 그래, 그거야! 청하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제야 드디어 가능성이 보이는 건가…….
게다가 고작해야 키스 한 번으로 더 이상 창천의 소재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자신에게는 더더욱 나쁠 것도 없는 거래였다. 어차피 사내놈들이랑 키스는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주세민이랑 입을 맞추는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 소원을 갈음해 준다는 것이 자신으로서는 약간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청하는 슬쩍 세민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지, 지금?”
“지금.”
세민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옷이라도 좀 가져다주면…….”
그러나 바늘도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세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턱도 없는 소리인 모양이었다. 아니, 옷이라도 좀 두르고 하면 안 되나, 민망하게……. 청하는 새삼스레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며 슬쩍 얼굴을 붉혔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그래, 일단은…… 빨리 해치우자.
청하가 세민을 향해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오직 입맞춤만이다.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그리고 청하는 세민이 무어라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빠르게 몸을 붙였다. 혹시라도 세민이 말을 바꿀까 약간 조바심이 난 청하는, 젖은 손으로 세민의 뺨과 목덜미를 붙잡고는 얼른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젖은 입술이 약간 거칠게 서로 맞부딪혔다. 제 이빨에 부딪힌 세민의 입술을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살짝 혀로 핥아 준 청하는, 조심스럽게 입을 벌려 세민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세민은 마치 석상처럼 우뚝 선 채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든 청하는 세민의 얼굴은 바라보지도 않고, 그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입을 맞추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세민의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혀를 밀어 넣자, 약간은 뜨거운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청하는 고개를 기울여 조금 더 깊게 세민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질척이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열기가 느껴지는 세민의 혀를 문지르며 입맞춤에 열중하던 청하가 저도 모르게 세민을 향해 더욱 몸을 기울였다. 체중이 쏠리며 살짝 휘청거리는 청하의 허리를 세민의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따뜻한 온천물 속에서도 한층 더 뜨거운 손바닥의 열기에, 청하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얘 왜 이렇게 손이 뜨거워? 온천 안에 있어서 더운 건가? 그러나 다음 순간, 뜨거운 손바닥이 청하의 맨허리와 등을 천천히 더듬어 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청하가 살짝 당황하는 사이, 주세민의 단단한 팔이 청하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졸지에 알몸으로 세민의 품 안에 갇히게 된 청하가 세민의 입 안에서 허윽, 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뱉어 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강한 팔 힘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체 무슨……! 청하가 입술을 떼고 막 항의의 말을 뱉어 내려던 찰나, 세민의 팔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그 대신, 이번에는 커다랗고 단단한 두 손바닥이 청하의 목덜미에서부터 벗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라는 사실이 청하에게 또렷한 자각으로 다가왔다. 세민이 걸치고 있는 검은 옷자락이 자꾸만 맨살에 쓸리는 것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늘씬하게 뻗은 허리를 따라 점점 더 아래로 쓸어내려 가는 뜨거운 손바닥이 너무 신경 쓰였다. 청하는 세민에게서 황급히 입술을 떼어 내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이, 이제 됐겠지, 그럼…… 허윽.”
청하는 제 입술을 강하게 파고드는 혀에 그만 숨 막히는 신음을 흘렸다. 세민이 거침없이 청하의 안으로 파고들며 거칠게 입 안을 희롱했다. 당혹스러운 눈을 들어 올려 세민의 얼굴을 바라본 청하는,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당황한 눈을 깜빡였다.
지금까지…… 이런 눈으로 날 보고 있었나? 붉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짙은 너울을 만들며 일렁이고 있었다. 그 강렬한 눈동자에 잠시 넋을 빼앗긴 사이, 세민은 청하의 혀를 뿌리째 뽑아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강하게 입 안을 휘저어 대었다. 동시에, 움푹 들어간 허리를 더듬던 세민의 손바닥이 더욱 아래로 내려가 청하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미, 미쳤나 봐……!’
경악한 청하가 움찔거리며 몸을 떼어 내려 하였으나, 강철 같은 팔 안에 갇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성질이 뻗친 청하가 주먹으로 세민의 가슴을 퍽 하고 내리쳤으나, 요란한 물보라만 튈 뿐, 세민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자식이 진짜……! 그때, 세민이 살짝 입술을 떼어 내고는 빠르게 말했다.
“아직 입맞춤이 끝나지 않았다.”
“너 이 자식, 이 손은…….”
“분명 조건은 ‘내가 원할 때까지’ 입을 맞춘다는 것이었지. 그러니 물러나지 마라.”
“이 손은 뭐냐고!”
“입을 맞추는 동안 내 손을 어디에 둘지는 내 마음이지.”
뭐라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러나 청하가 더 이상 말을 잇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세민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청하의 입 안을 깊게 파고들었다.
“으읏……! 하…… 읏, 음…… 응…….”
청하는 저도 모르게 숨 막히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세민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혀에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사이, 엉덩이를 아프게 움켜쥔 세민의 손이 청하의 하반신을 제 쪽으로 콱 끌어당겼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된 아랫도리에서, 청하는 뜨거운 무언가가 제 아랫배에 비벼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미친…….’
이제 청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다른 무언가와 헷갈리지도 않았다. 청하는 기겁하며 어떻게든 몸을 뒤로 빼기 위해 노력했으나, 세민은 청하의 하반신에 제 것을 밀착한 채 엉덩이를 꽉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더욱 기겁할 만한 것은, 세민의 단단한 아랫배와 청하의 몸 사이에 끼인 청하의 것도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배 안쪽 깊숙한 곳에서 불을 당긴 듯, 열기가 확 치솟았다.
“하으…… 읏, 응, 으흡…….”
빈틈없이 맞물린 입가로 물기에 젖은 신음과 함께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주륵, 흘러내렸다. 마찬가지로 틈 없이 밀착된 하반신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열기가 뜨거운 물과 함께 청하의 몸을 삽시간에 달구기 시작했다. 세민의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뜨겁게 달아오른 물건이 서로 맞닿았다. 청하의 목구멍으로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열기가 흘러나오는 입 안에서 둘의 혀가 얽힌 채 비벼질 때마다, 아랫도리의 물건도 서로 맞닿은 채 비벼졌다. 몸이 거칠게 맞닿을 때마다 찰박이는 물소리가 청하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민감하게 달아오른 물건이 거친 천에 비벼지며,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날카로운 자극이 청하의 몸을 덮쳤다. 엉덩이를 꽉 움켜쥔 채 하반신에 빈틈없이 밀착시킨 세민의 손아귀 때문에 조금도 몸을 빼낼 여유가 없었다. 젠장, 엉덩이에 시뻘겋게 손자국이 남겠군.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청하는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세민의 젖은 옷자락에 아무렇게나 마구 비벼지던 청하의 물건이 시간이 지날수록 열기를 더해 갔다. 몸과 몸 사이에 끼인 물건을 짓눌러 버릴 듯 압박해 오는 세민의 팔 힘에, 청하는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파득거리며 몸을 떨었다. 청하가 움찔거리며 밭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청하의 입 안을 점령한 세민의 혀가 집요하게 안쪽의 점막을 찔러 대며 위아래로 청하를 자극해 대었다.
숨 막히는 신음을 흘리는 청하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며,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습기에 젖어 그렁거리는 청하의 긴 눈꼬리를 바라보는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짙은 빛을 띠었다.
다음 순간, 세민의 허리가 다시 한번 더 강하게 청하의 하반신을 쳐올렸고, 청하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륵 아래로 흘러내렸다. 다음 순간, 어찌할 새도 없이 청하는 세민의 검은 옷자락에 정을 토해 내고 말았다.
“하읏…… 아…… 앗!”
청하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세민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날카로운 쾌감이 정수리에서부터 아랫도리까지 단숨에 청하의 몸을 꿰뚫었다.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눈부신 듯 새하얘졌다, 다시금 빠르게 지상으로 추락했다. 긴장했던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청하의 무릎이 절로 휘청거렸다. 순식간에 탈력한 청하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아직도 청하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있는 세민의 손이 청하의 몸을 단단히 받치며 다시금 아랫도리를 비벼 대었다. 절정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청하의 것이 다시금 몸과 몸 사이에서 짓눌리며 벌벌 떨렸다. 가혹한 자극에 청하가 진저리치듯 몸을 떨며 세민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 잠깐, 그, 그만…….”
이어지는 입맞춤 사이로 헐떡이는 숨을 내뱉으며 청하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청하를 빤히 응시했다. 또 내가 원할 때까지 어쩌고 운운하며 계속하려는 건가? 아, 나 너무 힘들어 진짜로, 못 하겠어…….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청하는 간절함을 담아 힘겹게 세민을 올려다보았다. 짙게 물든 시선이 청하의 젖은 눈매와 발갛게 부어오른 입술, 그리고 가쁘게 오르내리는 하얀 가슴을 천천히 스쳤다.
청하의 엉덩이를 붙잡고 있던 세민의 손아귀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빈틈없이 밀착되었던 몸이 떨어지자, 세민에게 기대고 있던 청하의 몸이 비틀거렸다. 단단한 손이 청하의 팔을 붙잡아 주었다.
청하의 팔을 부축한 손은 청하가 온천가의 청석에 주저앉았을 때에야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청하가 돌 위에 앉자마자 세민은 청하에게서 손을 떼어 내고는, 심지어 그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헐떡이는 호흡이 서서히 가라앉고 탈력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자, 그제서야 비로소 방금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자각이 뒤늦게 청하의 뇌리를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청하의 뺨이 서늘한 공기 속에서 다시금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갈 데 없는 충격이 청하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청하의 눈가가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주, 주세민이랑…… 내가, 지금.’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던 청하의 눈동자가 간신히 제 앞에 묵묵히 서 있는 검은 그림자에게 가 닿았다.
“바…… 방금,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청하의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도저히 실수라거나 그런 말로 어떻게 변명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진 행동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러나 분명 입맞춤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법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세민의 얼굴에서는 지금 어떤 표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청하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세민을 빤히 응시했다. 마침내 세민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너는…….”
달빛을 받아 빛나는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청하를 꿰뚫어 버릴 듯 응시했다. 잠시 말꼬리를 흐리던 세민이 다시금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잔뜩 쥐어짜인 듯한 뇌가 제대로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라는 게 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인 건데. 지나친 과부하로 사고의 흐름이 자꾸만 뚝뚝 끊어졌다.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거친 숨만을 몰아쉬고 있던 청하는, 불쑥 입을 열어 지금 이 순간 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단 하나의 질문을 뱉어 내었다.
“그럼…… 그럼, 남궁휘는?”
세민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조각같이 생긴 입술이 조금 멍하게 벌어졌다.
“……뭐?”
“남궁휘는…… 어떻게 생각해?”
남궁휘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데? 애초에 그것을 확인하려던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청하의 질문을 들은 주세민의 얼굴은 도저히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한 표정이 되었다. 당장 폭발해 버릴 듯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했으며, 도무지 청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침내 세민의 입술이 살짝 비틀리며 무언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대체 그 녀석 이름은 왜 입에 올리는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지난번에도 이 비슷한 말을 듣지 않았던가? 청하는 강렬한 기시감에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분명 남궁휘도 이런 말을 했었는데……. 두 번이나 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돌연 청하의 뇌리를 스쳤다.
갑자기, 청하는 세민이 도대체 어떤 캐릭터인지, 어떤 사람인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 원작의 주세민이 맞는 건가? 청하는 낯선 무언가를 보는 듯한 생경한 시선으로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원작의 캐릭터들을 잘 알고 있다고, 그들의 행동이나 심리를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지금 이 순간, 청하는 세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문득, 청하의 가슴속에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갑작스레 자신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는 날카로운 깨달음이 청하의 가슴속에 선뜩하게 스며들었다.
잠시 동안, 청하와 세민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뒤얽힌 실타래처럼 잔뜩 엉켜 버린 머릿속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그때, 수증기로 가려진 온천 반대편에서 옷과 풀이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사람이 온 건가?! 멍하게 정신 줄을 놓고 있던 와중에도, 인기척을 눈치챈 청하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퍼뜩 고개를 돌렸다. 혼란스럽던 머릿속에 차가운 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민은 처음에는 인기척에 신경도 쓰지 않았으나, 부스럭거리던 반대편의 온천가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에는 그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승님? 스승님이십니까?”
백진의 목소리였다. 청하의 가슴이 철렁했고, 세민의 눈가는 명백한 불쾌감으로 일그러졌다. 수증기가 자욱한 반대편이 잘 보이지 않는 듯, 백진이 머뭇거리며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이 옷은 스승님의 것인데…….”
곧이어 온천 가장자리를 따라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 안 돼, 더 이상 다가오면 들킨다! 청하는 재빨리 세민을 올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빨리 가!”
세민이 사납게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세민은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마음이 급한 청하는 황급히 손을 뻗어 어서 가라는 듯 세민의 가슴을 마구 밀어내었다. 이런 시각에 이런 곳에서, 게다가 이런 모습으로, 다른 사람도 아닌 주세민과 붙어 있는 것을 남에게 들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도저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세민도 입을 꾹 다물고는 백진의 인기척이 들려오는 반대편으로 조용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검은 인영이 어둠과 물안개 사이로 사라졌다.
청하는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과 헐떡거리는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은 몸이 뜨거운 물속에서 자꾸만 움찔거렸다. 안 돼, 침착하자, 침착해……! 청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아직도 뜨거운 뺨을 두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때, 수증기를 헤치며 걱정스러운 표정의 백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님……? 스승님 맞으시군요.”
청하는 가까스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온천 가장자리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백진을 올려다보았다.
“아, 백진이구나. 이 밤중에 여기엔 웬일이냐.”
“스승님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방금 제 목소리는 듣지 못하셨나요? 스승님이신 것 같은데 대답이 없길래 순간적으로 걱정이 되어서…….”
백진은 말끝을 흐리며 물속에 잠겨 있는 제 스승의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청하의 두 뺨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붉게 달아오른 채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하얀 가슴과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인지 물방울인지 모를 것이 백진의 시선을 진득하게 잡아끌었다. 언제나 단정하고 가지런하던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흐트러진 채 젖은 몸에 아무렇게나 달라붙어 있었다. 백옥같이 흰 살결이 열기로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야릇했다.
백진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그런 청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하의 몸에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어젯밤, 흰 내의를 입은 채 온천에 들어서던 청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백진은 제 속을 내달리던 열기를 참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청하는 그 늘씬한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그저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물 안에 잠겨 있는 것이다. 붉게 달아오른 채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순수한 신뢰의 표정만이 떠올라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스승은 제가 남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백진의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욱신거리는 열기가 장작불처럼 천천히 백진의 속을 달구기 시작했다.
“아, 미안하구나. 생각에 잠겨 있느라 네 말을 못 들은 모양이다.”
청하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백진은 잠시 동안 입을 꾹 다문 채 그런 청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하는 약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힐끗거리며 백진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초조한 감각이 자꾸만 청하의 발바닥을 간질거렸다.
“그…… 왜 그러느냐?”
청하가 슬쩍 백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진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살짝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로 청하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백진의 입가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음 순간, 백진은 갑자기 제 겉옷을 휘릭 벗어 들고는 온천 안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청하는 깜짝 놀라 몇 걸음 옆으로 물러났으나 백진은 언제나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을 살짝 굳힌 채, 성큼성큼 청하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아니, 얘들이 오늘 왜 이래? 왜 자꾸 안으로 들어오는 거야?’
방금 전의 주세민처럼 청하의 앞에 우뚝 멈춰 선 백진은, 딱딱한 얼굴을 한 채 들고 있는 제 옷자락을 청하의 어깨 위에 휙 둘러 주었다. 갑작스러운 백진의 행동에 청하는 동그란 눈으로 백진을 올려다보았다. 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에도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조심하십시오, 스승님. 이런 모습은…… 위험합니다.”
낮게 책망하는 듯한 백진의 목소리에 청하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아니, 혼자서 목욕하는데 좀 벗고 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물론 예상치도 못한 불청객이 오늘 밤에 너무 많긴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방금 전 주세민이 왔을 때도 옷을 입고 있었더라면 조금 더 상황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청하가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을 다물자, 백진이 청하의 어깨에 걸쳐 준 옷깃을 더욱 꼼꼼하게 목덜미에 둘러 주며 말을 이었다.
“많이 더우십니까? 얼굴이 무척 빨갛습니다.”
그리고 몸도요. 백진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손을 뻗어 울긋불긋한 기운이 남은 청하의 하얀 쇄골과 가슴팍을 슬쩍 쓸어내렸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움찔 떨며 몸을 뒤로 물렸으나, 세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뒤에 자리한 청석이 청하의 움직임을 막았다. 하하……. 청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 조금 덥긴 하구나. 그래도 괜찮다.”
백진은 입을 꾹 다문 채 뚫어질 것 같은 시선으로 청하를 응시했다. 색이 옅은 갈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짙은 빛을 머금고 청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청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보다, 이 밤중에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 나는…… 좀 전에 자다가 깨 보니 식은땀을 좀 흘렸길래, 찝찝해서 몸을 씻으려던 참이란다.”
청하는 괜히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잠시 침묵하던 백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잠이 오지 않아 계속 뒤척이다가 바람이나 쐬러 나왔습니다. 걷다 보니 이곳까지 왔더군요. 그러다가 저쪽 편에 스승님의 옷가지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며, 백진은 물에 젖어 늘어진 청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넘겨 주었다. 백진의 손바닥이 옷자락에 덮인 청하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직 아랫도리의 열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청하는, 제 몸이 평소보다도 훨씬 더 민감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아 했을 백진의 손길이 오늘따라 더욱 자극적으로 와 닿았다. 자꾸만 미묘하게 달아오르려는 몸을 억누르며, 청하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구나. 이번 사건이 걱정된 것이냐?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어떻게든 방도를 찾을 수 있겠지.”
그러나 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청하는 제 앞에 우뚝 선 채 비켜설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 같은 백진을 힐끔거리며, 저 눈을 피해 어떻게 제 몸 상태를 들키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청하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백진의 손이 천천히 청하의 목덜미로 향했다. 젖어 있는 목덜미를 매만지던 백진의 커다란 손바닥이 점점 위로 올라와, 아직도 열기로 홧홧한 청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렇지 않아도 타들어 가는 청하의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백진이 약간 망설이는 듯한 어조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번엔…… 정말 스승님을 잃는 줄 알았습니다.”
청하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백진이 뚫어질 듯 청하를 바라보며, 그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점점 좁혀 드는 둘 사이의 거리에, 청하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제 몸 상태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청하의 아랫배로 오싹한 긴장감이 달렸다. 허벅지가 후들거리며 그렇지 않아도 미묘하게 달아오른 아래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백진이 살짝 눈을 내리깔며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전…… 저는.”
수면에 반사된 빛을 받아 일렁이는 백진의 눈매가 애틋했다. 청하는 가까스로 백진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괜찮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나도 멀쩡하게 다 회복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스승님…….”
그러나 백진은 물러날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오히려 더욱더 청하를 향해 제 몸을 가까이 붙여 왔다. 으아, 가까이 오지 마, 자, 잠깐만! 청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조금이라도 백진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청석에 기대어 허리를 뒤로 꺾었다. 그러나 백진은 도리어 청하의 몸을 제 팔 사이에 가둔 채 청하가 기대고 있는 청석을 두 손으로 단단히 짚었다.
“제가 요 며칠 동안 했던 생각이 있습니다.”
“무…… 뭐…… 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좀 떨어져 주면 안 될까? 그러나 초조하기 짝이 없는 청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진은 그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스승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스승님 곁에서 스승님을 바라보고 스승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백진이 몸이 천천히 청하를 향해 기울었다. 물에 잠긴 청석에 거의 반쯤 눕다시피 한 청하는, 백진의 검은 그림자가 제 위로 길게 늘어지는 것을 당황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백진이 청하의 몸을 덮다시피 하며 천천히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백진이 걸쳐 준 옷자락 틈 사이, 벌거벗은 허리 아래로 커다란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백진의 얼굴이 청하의 목덜미에 파묻혔다. 청하는 백진의 단단한 팔이 저를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으스러질 정도로 꽉 끌어안는 것을 느꼈다.
“아, 그…… 헉…….”
숨이 막히도록 저를 끌어안는 백진의 팔 안에서 답답한 숨을 뱉어 내던 청하는, 젖은 천에 휘감긴 탄탄한 허벅지가 제 다리 사이로 파고들자 그만 숨 막히는 듯한 신음을 뱉어 내었다.
“스승님…….”
백진이 애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 대체 왜 그렇게 자꾸 불러 대는 거야! 청하는 제 다리 사이에 단단히 자리를 잡은 백진의 허벅지를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오히려 그 탄탄한 허벅지에 제 아랫도리를 비비는 꼴이 되고 말았다. 기겁한 청하는 어떻게든 제 몸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 백진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뱉어 내었다.
“그래, 나 여기 있으니까…… 그렇게 자꾸 부르지 않아도 된다.”
백진이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청하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비볐다. 아니,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진짜! 청하는 이를 악물며 백진의 두꺼운 어깨를 밀어내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스승님.”
백진이 슬쩍 시선을 들어 올리며 청하를 바라보았다. 으, 응? 청하가 더듬거리며 그를 마주 바라보자, 백진이 어딘지 모를 열기를 품은 옅은 갈색 눈동자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강아지처럼 순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괜찮으세요?”
“뭐, 뭐가?”
“이쪽이요.”
백진이 중얼거리며 청하의 다리 사이에 끼워져 있던 제 허벅지를 청하의 아래에 강하게 문질렀다. 청하의 몸이 펄쩍 튀어 올랐다.
“그, 그, 무, 무슨…….”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거면…….”
“아니야, 괜찮아!”
청하는 빽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민망함으로 화끈거렸다.
아니, 내 몸 상태가 이런 줄 알고 있었으면서 자꾸 자극하긴 왜 자극해, 이 녀석이……!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오늘은 정말 난처한 일들뿐이다. 청하는 필사적으로 백진의 몸을 밀어내며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물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 거야! 이, 이제 밖으로 나가면 괜찮아질 거다.”
“하지만…….”
“괜찮대도!”
청하는 제 아래로 슬그머니 손을 가져가는 백진의 손을 황급히 움켜쥐었다. 백진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서 감출 수 없는 미련이 뚝뚝 흘러넘쳤다. 간신히 그 집요한 시선을 피하며 옆으로 몸을 빼낸 청하는, 크흠, 흠, 하고 잔뜩 갈라진 목을 가다듬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자꾸나.”
순간적으로 백진의 눈매가 깊어지며 강렬한 빛이 흘렀다. 백진은 잠시 동안 무언가를 갈등하는 것처럼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순종적인 강아지처럼 부드럽게 빛나던 백진의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위험한 열기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청하는 어떻게든 최대한 백진에게 닿지 않기 위해 몸을 움츠리며, 잽싸게 온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백진이 또 저를 붙잡아 올까 걱정이 되어 발걸음이 절로 급해졌다.
그때, 청하의 몸이 그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뜨거운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던 데다 방금 전 세민과 생각지도 못한 격렬한 행위까지 하느라 진이 다 빠져 있던 탓이다. 미끄러운 온천 바닥 때문에 균형을 잡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비틀거리던 청하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눈앞에 있는 청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뒤에서 불쑥 단단한 팔이 뻗어 나왔다. 미처 청하가 무어라 말을 꺼낼 틈도 없었다. 백진이 한 팔로는 청하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고 다른 팔로는 청하의 다리 아래를 받친 채, 마치 어린아이를 안아 드는 것처럼 가볍게 그를 안아 들었다. 청하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백진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아 옅게 빛나는 갈색 눈이 청하를 향해 부드럽게 휘어졌다.
“물속에 너무 오래 있어 어지러우신가 봅니다. 제가 별채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백진은 마치 청하의 무게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그를 안은 채 온천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청하를 땅에 내려놓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백진의 흰 옷자락에서 뚝뚝 흘러내린 물방울이 푸릇한 돌 위에 검은 자국을 만들었다.
청하는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백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난 이제 괜찮으니까 그냥 내려 줘도 된다.”
“안 됩니다. 또 방금 전처럼 비틀거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다치실 수도 있어요.”
아니, 내가 무슨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멀쩡한 두 다리 가진 성인이 갑자기 땅 위에서 픽픽 쓰러질 리가 있겠어?! 청하는 어이가 없었으나 백진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청하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백진의 품에 안긴 채 별채로 향했다.
따뜻한 물속에 있던 몸에 서늘한 밤바람이 닿아 오자, 청하는 몸을 떨며 반사적으로 백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백진이 덮어 준 겉옷을 걸치고 있긴 하지만, 그 안의 몸은 여전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신이었다. 청하의 물에 젖은 흰 다리가 옷자락 사이로 길게 드러났다. 왠지 부끄러운 느낌에 청하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자, 청하를 안아 들고 있는 백진의 손이 부드럽게 청하의 젖은 등을 쓰다듬었다.
“추우십니까?”
“아…… 아니, 괜찮다.”
청하는 힐끗 시선을 들어 저를 안아 들고 있는 백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진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백진의 갈색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빛깔을 띤 채 은은한 꽃향기가 가득한 후원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위험한 열기는 다행히도 자취를 감춘 듯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청하는 슬쩍 시선을 들어 점점 멀어지는 온천 쪽을 바라보았다. 석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을 향해 가늘게 눈을 떠 보았지만, 다른 이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 들어올 때도 귀신처럼 기척도 없이 들어왔으니, 나갈 때도 알아서 잘 몸을 피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청하는 왠지 모르게 그리로 향하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잠긴 온천을 힐끗거리며, 청하는 백진의 품에 안겨 천천히 멀어져 갔다.
사람들이 사라진 온천가에는 반짝이는 수면에 부서지는 달빛과 함께 졸졸거리며 흐르는 물소리만이 남았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수면 위로 아름답게 빛나는 흰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그 꽃나무 그림자 속에서, 아직 젖어 있는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 어두운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민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 * *
제갈서윤은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침실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좀 피곤하긴 했나 보네……. 온천욕이나 하면 딱 좋겠구먼.’
입가로 새어 나오려는 하품을 억누르며 그런 생각을 하던 서윤은, 별채의 거실에 단정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세 명의 인영을 발견하고는 주춤 발걸음을 멈췄다.
백진은 평소처럼 청하의 곁에 앉아 제 스승의 차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이 특징인 백진은, 오늘따라 차를 따르면서도 줄곧 옆자리에 앉은 청하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그것은 맞은편에 있는 남궁휘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하고는 있지만, 찻잔을 들어 올리는 남궁휘의 시선은 자꾸만 앞에 있는 청하에게로 향했다.
‘쟤네들 또 왜 저래.’
서윤은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리며 그들의 중심에 있는 청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청하는 옅은 푸른색 장포로 몸을 감싼 채 반쯤 눈을 내리깔고 입가에 찻잔을 가져가고 있었다. 어제 잠자리에 들 때도 꽤나 피곤한 안색이었는데, 오늘은 단순히 피곤하다는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윤은 청하의 미간에 자리 잡힌 미미한 주름과 눈 밑에 짙게 내린 검은 그림자,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하루 사이에 꽤나 수척해진 것 같은 부드러운 뺨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무슨 일 있어?”
결국 서윤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남궁휘와 백진의 시선이 서윤에게로 향했으나 청하는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찻잔만을 기울였다. 서윤이 백진을 돌아보았으나, 백진은 슬쩍 서윤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금 청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궁휘를 돌아보자, 그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침내 찻잔을 내려놓은 청하가 짙은 피로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너무 피곤해서.”
“정 그러시면 제가 운기조식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스승님.”
옆에서 백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으나 청하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윤은 청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서윤이 손을 뻗어 청하의 단정한 손목을 잡아 쥐었다. 청하는 약간 내키지 않는 듯했으나, 제 맥을 짚는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흰 손목을 잡아 쥔 채 한동안 영기의 흐름에 집중하던 서윤이 청하를 돌아보았다.
“어디가 안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 몸은 괜찮다니까. 피곤해서 그래.”
“하지만 영기 흐름이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라…… 좀 심신을 안정시키는 게 좋겠어. 어제 뭘 했길래 그렇게 피곤해?”
그런 말을 하며 서윤은 손끝으로 청하의 손목 안쪽 부드러운 살결을 슬쩍 매만졌다. 청하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으나 슬그머니 서윤의 시선을 피해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 헛기침을 했다.
서윤이 청하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해서 잡고 있는 손등을 만지작거리자, 백진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나지막하게 헛기침을 했다. 참나, 눈치 주기는. 서윤은 속으로 코웃음을 흘리며 부러 그쪽은 외면한 채 더욱 다정하게 청하의 손등을 토닥였다.
청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제 이번 일을 어떻게 할 건지 계획을 좀 세워야겠는데.”
아직 백진이나 서윤, 그리고 남궁휘는 까맣게 모르고 있지만, 이번 일은 마교의 교주까지 움직인 일이다. 대충 어물쩍 넘어가거나 흐지부지 잊혀질 사안이 아니라는 뜻이다.
골치 아프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하의 앞에서 남궁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좀 이상한 사건이긴 해요. 이상하긴 한데, 또 이상하다는 것 말고는 딱히 알 수 있는 게 없으니…….”
“뭔가를 알아내기엔 정보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백진도 말을 덧붙였다. 청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 사람들을 더 찾아가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다고 특별히 더 쓸모 있는 정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실종된 아이들을 찾는 것인데, 아이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그때, 청하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서윤이 문득 입을 열었다.
“단서가 없으면…… 우리가 단서를 만들어 내는 건 어때?”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서윤을 향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청하의 의아한 목소리에 서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턱을 쓰다듬었다. 제갈 세가 특유의 명민한 눈동자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 빛을 발했다. 서윤이 손가락을 하나씩 세우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나씩 생각해 보자고. 우리는 납치가 언제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지. 해 질 녘부터 밤 사이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하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아이들이 납치되는지도 알고 있어. 예쁘장하게 생긴, 십 대의 어린아이들이 가장 많이 납치된다고 했었지.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우리가 이걸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청하는 저도 모르게 약간 멍한 얼굴로 입을 살짝 벌린 채 물었다.
“이용하다니, 어떻게?”
서윤이 씩 미소 지었다. 서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미끼를 쓰는 거지?”
“미끼……?”
남궁휘가 중얼거렸다. 서윤이 그쪽을 휙 돌아보며 힘주어 말했다.
“그래, 미끼.”
서윤의 눈동자가 누가 보아도 의미심장한 빛을 띤 채 남궁휘를 향했다. 청하의 머릿속에 얼핏 어떤 생각이 스쳤다.
“설마, 너…….”
말꼬리를 흐리는 청하를 향해, 서윤이 싱긋 미소 지었다. 남궁휘와 백진은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멀뚱히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윤을 흘겨보았으나, 서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청하의 손을 잡아끌었다. 친근하게 청하의 어깨에 팔을 두른 서윤이 청하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어때, 괜찮은 생각 같지 않아?”
서윤과 청하의 시선이 동시에 남궁휘를 향했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볼수록, 제법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했다. 청하는 남궁휘를 빤히 응시한 채 생각했다. 좀 실없는 한량 같은 면이 있긴 해도, 가끔 보면 서윤이 진짜 똑똑하긴 하단 말이야.
남궁휘의 순진한 눈동자가 어리둥절한 듯 천천히 깜빡였다.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얼굴에는 영문을 모르는 듯한 의문만이 떠올라 있었다. 청하는 남궁휘를 향해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주인공 덕을 보겠어,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