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0)

9장

결국 청하 일행은 무어라 거절의 말을 내뱉을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채소 장수의 손에 이끌려 화룡성에서 제일 크고 부유한 저택으로 안내되었다.

자신을 곽영춘이라고 소개한 저택의 가주는, 나이가 족히 팔구십 대는 되었음 직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무척 선하고 심약해 보이는 인상에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 버릴 듯 노쇠한 몸이었으나, 그런대로 뚜렷한 이목구비와 굽어 있긴 해도 탄탄한 등을 보아하니 젊었을 적에는 당당한 체격의 미남이었을 듯했다.

거동이 불편한 듯 간신히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곽 가주는, 그림자처럼 묵묵히 그를 부축해 주는 건장한 시종의 팔에 의지한 채 청당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몇 대를 이어 화룡성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다는 곽 가주는 청하의 일행들을 무슨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극진히 대접했다.

자신들을 근처 중소 문파의 수련자들이라 소개한 청하는, 곽 가주와 몇 차례 예의를 차린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한 청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듣자 하니 마교와 관련된 일이라는데…….”

청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근심으로 가득 차 있던 곽 가주의 얼굴이 아까보다도 더욱 어둡게 흐려졌다. 곽 가주가 노인 특유의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하아,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벌써 일이 이렇게 된 지도 몇 개월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만, 그것도 몇 달이나 지속되다 보니…….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었더군요.”

곽 노인이 풀어놓은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몇 달 전, 마을 바깥에 있는 야산에서 놀던 아이들 몇 명이 실종되었다. 아이들의 부모들이 몇 주에 걸쳐 실종된 아이들을 찾았지만 도무지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안타까운 일임은 분명했으나 실종된 아이들은 귀족의 자제도 아니었고, 보호자 없이 자기들끼리 놀던 아이들이 산짐승에게 물려 가거나 절벽에서 실족사하는 일은 종종 발생하는 일이었으므로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실종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최초의 실종 이후로 한동안은 별일 없이 잠잠했지만, 그 평화는 얼마 지속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10대 중후반 정도의 소년 소녀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관청에서도 드디어 사안의 심각성을 느꼈던 것인지 사람들을 풀어 조직적으로 아이들을 수색했다. 그러나 역시 귀신이 잡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는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을의 아이들과 소년 소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을 집 안에 꼭꼭 숨기거나 성 밖으로 내보냈다. 실종은 언제나 해 질 녘 이후에 이루어졌기에, 해가 떨어지기만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밖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게 마교의 짓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곽 가주가 언성을 높이며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어떤 흔적도 단서도 없이 아이들을 감쪽같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사특한 것들이 마교 놈들 말고 또 있답니까?”

청하와 남궁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들이 흑마부대와 마주쳤던 양산 근처의 마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분명 그때도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다고 했었지. 이곳의 사람들이 그것을 마교의 짓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흑마부대와 관련이 없는 주세민으로서는 확실히 억울할 상황이긴 하지만.

“흑마부대로 만들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하는 걸까요?”

백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하는 찻잔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역시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구나.”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청하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원작의 흐름을 따라 화룡성에 온 것까진 좋았으나, 이곳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역시 원작에서는 없었던 사건이었다.

‘흑마부대가 출현한 게 스토리에 영향을 미친 건가……. 그러면 정말 이 아이들은 흑마부대를 만드는 자들이 납치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아이들이어야만 했을까? 지난번 양현에서 실종되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건장한 성인들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애초에 신체 건강한 성인을 재료로 했을 때 더 강한 흑마부대를 만들 수 있음은 자명했다.

“실종된 것은 아이들뿐입니까?”

청하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곽 가주에게 물었다. 곽 가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는 나이의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표적이 되었지요. 가장 많이 실종된 것은 10대 중후반 정도의 아이들입니다만…….”

청하 일행들을 곽가의 저택으로 안내해 준 채소 장수가 그때까지도 문간에서 쭈뼛거리며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선사님들. 제 딸자식도 며칠 전 실종되어서…… 아주 제가 속이 말이 아닙니다요. 애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불안하게 떨리던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청하는 그저 입술만을 깨물었다.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까지도 딱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제 눈가를 더듬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곽 가주가 혀를 쯧쯧 차며 온화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말게. 이렇게 고명하신 선사님들께서 몇 분이나 우리 마을에 방문을 해 주셨으니, 자네 딸도 이제 곧 돌아오지 않겠나.”

사내는 눈물을 훔치며 곽 가주를 향해 몇 번이나 머리를 숙였다.

“나으리 덕분에 그래도 마음이 놓입니다. 저희 가족도 이렇게 챙겨 주시고…… 정말 어찌 감사드려야 할지…….”

“나야 그저 할 도리를 하는 것이지.”

곽 가주가 겸손하게 손을 내저었다. 백진이 곽 가주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께서는 어떻게 이 일에 관여하시게 된 것입니까?”

곽 가주가 턱을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저야 자식도 없고 가족도 없어 제 대에서 가문이 끊기게 되겠지만, 보다시피 우리 곽가는 몇 대나 이 성에서 대를 이어 살아오며 딸린 비복들도 많았습니다. 이번에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이나 장원의 노비들도 벌써 자식들을 몇이나 잃어서…… 곽가장의 마지막 주인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지요. 관아에서는 이미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판단하고 손을 놓은 듯하더군요.”

청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런 지방에서는 관청의 힘보다는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지방 토호의 입김이나 영향력이 더욱 큰 법이었다. 제갈서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 근방을 관리하는 강호 세력은 어딥니까? 그곳에 도움은 요청해 보셨습니까?”

곽 노인은 소용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금가장의 관할이었는데……. 선사님들께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실 테니 더 이상 자세한 말씀은 안 드려도 되겠군요.”

제갈서윤의 눈썹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갔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금가장의 가주이자 무림맹주이기도 한 금양수의 무능함에 대해서는 온 강호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금가장의 영향력은 이미 퇴색된 지 오래여서, 이런 큰 사건을 감당할 능력도 여력도 없었다.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다니……. 어떻게 해결을 하긴 해야겠군요.”

팔짱을 낀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남궁휘의 목소리를 들으며, 청하는 이번 일을 계기로 남궁 세가가 이곳 화룡성 일대까지 세력을 넓히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 되었든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실종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했다.

청하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단정히 소매를 모으며 곽 가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강호인의 도리로 그냥 지나칠 수는 없겠군요. 최선을 다해 실종된 아이들에 대한 단서와 원흉의 흔적을 찾아보겠습니다.”

곽 가주는 몇 번이나 청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사님들. 일이 해결될 때까지만이라도 이곳에서 편하게 지내십시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전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현실적으로 강호인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일반인일 뿐인 그가 청하 일행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겠지만, 청하는 감사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곽가장은 화룡성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오래된 지주 가문답게 무척 넓은 장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것이 호화스럽기 짝이 없었다. 신분이나 재산이라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청하와 내로라하는 가문 출신인 남궁휘, 제갈서윤마저 곽가의 부유함에는 절로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였다.

곽 가주의 그림자처럼 서 있던 무뚝뚝한 얼굴의 시종이 청하의 일행들을 장원 한편에 마련된 별채로 안내해 주었다. 고풍스럽게 꾸며진 별채에 도착하자, 시종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제게 말씀해 주시면 된다는 말만 남기고는 허리를 꾸벅 숙인 채 사라졌다.

“대단한 규모네요. 저택 크기만 해도 상당하겠는데요.”

귀한 손님들에게 내어 준 별채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남궁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청하도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별채 앞에는 화려하게 꾸며진 거대한 내원이 있었고, 내원에는 섬세하게 가꿔진 연못과 정자까지 있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 내원 이곳저곳에 놓여진 석등에서 등불이 깜빡이는 것이 제법 운치가 있었다.

백진이 정자로 이어지는 작은 다리의 난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대로 이 지방을 다스려 온 귀족 가문이라고 하니까요. 조상 중에는 분명 중앙 관직에 진출한 자도 여럿 있었을 겁니다.”

“청루각도 작은 규모는 아니다만, 이런 식의 대저택은 또 신기하구나. 우리 상황만 아니라면 좀 느긋하게 구경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청하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자 남궁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서 남궁 세가에 방문하시면 제가 직접 저희 가문의 저택과 장원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언제 한번 강주로 놀러 오세요. 아니, 아예 이번 일만 마무리하면 이다음에는 강주로 행선지를 정하시는 건 어떨까요?”

하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청하는 애써 웃는 낯을 만들어 보였으나 입꼬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웬 흑마부대라는 것들은 중원을 휩쓸고 다니지, 신인지 뭔지 하는 놈은 운명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날 제거하겠다고 하지, 지금 내가 이 상황에서 한가하게 남궁 세가 장원이나 구경하고 있을 때냐고, 어? 나는 지금 너 때문에 속이 다 타는구먼. 너랑 주세민 때문에!

“스승님께서는 흑마부대의 흔적을 찾고 계시니, 안타깝지만 당분간 남궁 세가의 저택을 방문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청하의 심정을 대변하듯 백진이 약간 딱딱한 목소리로 대신 입을 열었다. 청하를 향해 생글생글 웃고 있던 남궁휘의 얼굴이 순간 미묘하게 굳어졌다. 언제나 주인공답게 다정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남궁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진을 힐끗 바라보았다. 백진 역시 물러서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남궁휘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 기시감은 뭐지? 아까도 본 것 같은 장면인데……. 둘 사이에 냉랭한 공기가 흐르고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이십 도는 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청하는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흑마부대의 흔적을 쫓다 보면 어쩌면 강주에도 들를 일이 생길지 모르지. 그때 기회가 된다면 방문해 보도록 하겠네.”

그제서야 남궁휘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조금 잦아들었고, 백진은 스승의 말에 반박하는 대신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청하는 속으로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애들도 아니고 왜 별것도 아닌 걸로 저렇게 기 싸움을 하지? 참나, 진짜 내가 피곤해서……. 둘 다 안 그럴 것 같이 생겨서는.

그때, 저택을 좀 둘러보겠다며 모습을 감췄던 제갈서윤이 저쪽에서부터 우렁찬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청하야!”

긴 소매를 휘저으며 신나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서윤의 얼굴은, 상황에 맞지 않게 왠지 약간 들뜬 듯한 표정이었다. 의아한 시선으로 그쪽을 바라보는 청하를 향해, 제갈서윤이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흥분해서 외쳤다.

“내가 뭘 발견했는지 알아? 이곳 곽가장 안에 글쎄, 온천이 있다는군!”

“……뭐?”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묻는 청하의 팔을 덥석 붙잡으며, 제갈서윤은 다짜고짜 청하를 끌고 어딘가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무척 신난 듯한 서윤이 막무가내로 청하의 등을 떠밀었다.

“온천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당연히 몸 좀 담궈 봐야 하지 않겠어? 그게 강호의 법도라고.”

아니…… 그런 법도가 대체 어딨는데?!

결국 서윤의 등쌀에 못 이겨 청하와 백진, 남궁휘까지 줄줄이 그의 뒤를 따라가자, 과연 후원 한편에 자그마한 온천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열로 덥혀진 근처의 지하수를 끌어 들여 만든 온천이었다. 서윤이 신이 나서 마구 말을 늘어놓았다.

“내가 곽 가주에게 물어봤더니, 여기 있는 온천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써도 상관없다 하더군. 어차피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일은 내일부터 하기로 하고, 지금은 온천에서 여독이나 풀자고.”

“아니, 뭐 여행을 얼마나 했다고 여독을 풀어.”

청하는 떨떠름하게 말했지만 서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드문드문 불이 밝혀진 석등을 제외하면 고즈넉한 어둠만이 내려앉은 후원에 온천에서 흘러나오는 졸졸거리는 물소리만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뭐, 나름대로 운치가 있긴 하네. 청하도 그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윤은 별 망설임도 없이 훌렁 겉옷을 벗어 내리더니, 신발과 족의를 풀어 내고 곧장 온천으로 걸어 내려갔다. 얇은 내의와 속바지만을 걸친 서윤이 온천에 몸을 담그며 멀뚱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세 명을 향해 외쳤다.

“뭐해? 다들 들어와!”

아니, 지금? 자리가 비좁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정네들끼리 살 부딪히면서 이 안에 옹기종기 들어가 있자는 거야? 청하가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옷자락이 스륵거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단단한 근육으로 꽉 짜인 등이 청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 아니 뭐야?! 청하는 당황한 채 다시금 황급히 앞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곧 시원하게 상체를 드러낸 백진이 성큼성큼 청하를 지나쳐 온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슴께까지 물에 잠긴 백진이 차분한 표정으로 청하를 올려다보았다.

“스승님께서도 들어오시지요. 물이 따뜻합니다.”

“아, 아니 나는…….”

청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황급히 고개를 모로 꼬며 말을 더듬거렸다. 물에 젖은 백진의 목덜미와 상체를 쳐다보는 것이 왠지 모르게 너무 파렴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청하는 어째서인지 경쟁심으로 활활 불타는 눈을 한 남궁휘가 질세라 훌렁 상의를 벗어 던지는 장면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아니 얘들이 갑자기 왜 이래!’

남궁휘는 혹독한 수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을 달빛 아래 당당히 드러내며 온천에 들어섰다. 손으로 물을 떠서 목과 가슴에 끼얹은 남궁휘는 백진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는 이것 보라는 듯 청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선배님,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밤바람이 찹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경쟁하듯 물속에 나란히 서서 청하를 빤히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 뒤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며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제갈서윤까지. 어느덧, 그 서윤조차 미간을 찌푸리며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달빛을 받아 고즈넉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온천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셋이나 반쯤 헐벗은 젖은 몸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아니 무슨 선녀와 나무꾼도 아니고…….’

왠지 주제도 모르고 선녀탕에 침범한 노루인지 사슴인지 모를 짐승이 된 기분이었으나,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혼자만 안 들어가겠다고 고집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청하는 머뭇거리며 천천히 어깨에 걸쳐진 겉옷을 끌어 내렸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달빛이 비치는 온천가에 서서 세 남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옷을 벗고 있으려니 갑자기 굉장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겉옷을 벗어 내리고 머뭇머뭇 허리띠에 손을 가져가던 청하는, 피부를 찌르는 듯한 따가운 시선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들어 보았다. 백진과 제갈서윤, 그리고 남궁휘가 옷을 벗고 있는 청하의 모습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찰박이는 물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허리띠를 풀어 내리던 청하의 손가락이 점점 느려졌다.

청하의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아니…… 쟤네들도 다 아무렇지도 않게 벗었는데 왜 나만 이렇게 어색한 기분이 들지? 청하는 살짝 붉어진 제 뺨을 의식하며 느릿느릿 억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침내 풀어진 허리띠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안에 받쳐 입고 있던 장포가 천천히 청하의 어깨에서 바닥으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내의까지 벗을 필요는 없겠지? 서윤도 옷을 걸치고 들어갔으니까……. 나도 이대로 들어가야겠다.’

온천으로 내려가는 청하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숨도 쉬지 않고 청하가 천천히 물에 몸을 담그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달빛이 청하의 긴 머리카락 위에서 부드럽게 빛났다. 흰 목덜미 아래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치렁하게 늘어진 내의가 청하의 몸을 야릇하게 가리고 있었다. 얇은 옷자락 하나만을 걸친 청하의 사슴처럼 늘씬한 몸이 흰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물에 들어오기 전에는 보일 듯 말 듯 비쳐 보이던 하늘거리는 흰 옷자락이, 물에 젖을수록 투명하게 변하며 청하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는 살짝 달아오른 뺨으로 가만히 미소 지은 채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물이 정말 따뜻하네. 들어오길 잘했다.”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청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왜 그래? 물이 그렇게 뜨거워? 다들 얼굴이 빨갛네.”

갑자기 서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하는 백진이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것을 발견했다. 왜 저러는 거야? 별생각 없이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백진이 요란하게 물을 튀기며 얼른 온천의 반대편 끝으로 물러났다.

대체 뭐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빤히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옆에서 약간의 열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청하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남궁휘가 왠지 평소보다도 더욱 촉촉한 눈으로 청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온천에서 올라오는 수증기 때문에 남궁휘의 긴 속눈썹에는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에 발그레하게 혈색이 돌자 정말 천하절색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남궁휘가 수줍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던데, 저리로 가실래요, 선배님?”

“음…… 그래, 그것도 좋겠지.”

얼굴에 홀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해 버린 청하는, 어느새 남궁휘의 손에 이끌려 온천 가장자리에 마련된 청석에 자리를 잡았다.

기분 좋은 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후원에서, 따뜻한 물에 반쯤 몸을 담근 채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흰 꽃이 가득 매달린 나무가 온천 위까지 가득히 가지를 뻗어, 사방에는 그윽한 꽃향기가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뭐, 제갈서윤이 막무가내로 끌고 온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정말 괜찮은데. 청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흰 꽃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때,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고개를 돌리자 남궁휘가 여전히 약간의 열기를 품은 눈으로 뚫어질 듯이 청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저렇게 쳐다봐. 청하는 눈을 끔뻑이며 남궁휘를 마주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 뭐 할 말 있나?”

남궁휘의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젖어 있는 아름다운 입술 사이로 약간 뜨거운 숨결이 하아, 하고 흘러나왔다. 왜 저러지? 더운가? 그때 남궁휘가 청하의 곁으로 조금 더 바짝 다가앉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으신 거예요? 부상이 무척 심해서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선배님.”

청하는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남궁휘가 묻는 것이 흑마부대와의 전투에서 다쳤던 일을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 청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괜찮다. 걱정을 많이 했나 보구나.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상처는 벌써 다 아물었던데, 뭐 내공도 괜찮고 몸은 멀쩡하단다.”

걱정을 많이 했나 보지? 하긴, 남궁휘는 아직 본격적으로 강호에 나와 본 적이 없으니, 주변 사람이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것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가만 보면 남궁휘도 귀엽다니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도련님 같으니라고. 청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 미소 지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남궁휘가 다시금 걱정스럽게 물었다. 청하는 웃으며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글쎄, 괜찮다니…….”

그때, 불쑥 뻗어 나온 남궁휘의 손이 물속에서 청하의 배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당황한 청하가 남궁휘를 돌아보자, 그는 여전히 약간 뜨거운 시선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이곳을 관통할 정도로 큰 상처였잖아요. 정말 걱정되어서…….”

말을 이으며 남궁휘는 천천히 청하의 배를 아래위로 쓰다듬었다.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얇은 내의 한 겹뿐이었고, 그마저도 물속에서는 쉽게 흐트러져 청하의 몸을 온전히 가려 주지 못했다. 남궁휘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내의가 흐트러지며 부드러운 맨살에 단단한 손바닥이 닿아 왔다. 청하는 당혹스러움에 가득 찬 채 제 배를 쓰다듬는 남궁휘의 손목을 황급히 움켜쥐었다.

“그…… 그만하거라.”

“왜 그러세요, 선배님? 저는 그냥 선배님의 몸이 걱정되어서…….”

남궁휘는 여전히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으나 청하는 왠지 남몰래 못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쪽에 있는 제갈서윤은 방금 전의 청하처럼 온천 위로 늘어진 흰 꽃들과 밤하늘을 감상하고 있었고, 반대편 온천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백진은 아직도 붉어진 얼굴로 바닥만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언제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수상쩍게 붙어 있는 그들을 바라본다면, 청하와 남궁휘가 이런 곳에서 무언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몰랐다.

청하는 다급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남궁휘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 나는 정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 그만…….”

“정말 괜찮으신가요? 제가 한번 확인해 볼게요. 네?”

그러나 남궁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청하의 배를 만지고 있는 손을 떼어 내지도 않았다. 순수한 완력으로는 도저히 남궁휘를 강제로 밀어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청하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걸 뭐 이렇게까지 확인해야 돼? 영기를 쓴다면 자꾸만 부담스럽게 달라붙는 어린 후배를 밀어낼 수야 있겠지만, 또 그렇게까지 소란을 일으킬 일은 아닌 것 같아 청하는 그저 입술만을 깨물었다.

청하의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마구 흔들리는 사이에도, 남궁휘는 여전히 큰 손바닥으로 청하의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듯 쓰다듬고 있었다. 남의 손이 닿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던 속살이 단단하고 뜨거운 손바닥 아래에서 문질러지자 왠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단전이 있는 명치 근처를 더듬거리던 남궁휘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 저, 그…….”

분명 피부 위를 쓸어내리고 있는데도 배 속 저 깊은 곳이 만져지는 것처럼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청하는 저쪽 편에 있는 제갈서윤과 백진의 눈치를 살피며 더듬거리는 말을 뱉어 내었다. 그러나 남궁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점점 더 아래쪽으로 손을 옮겼다.

“그래도 다치신 곳이 단전 쪽이 아니라 그 아래쪽이어서 다행이에요. 이 부근이었죠?”

남궁휘의 손이 자꾸만 아래로 움직이자, 청하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려 주고 있던 옷자락이 물속에서 하릴없이 흐트러지며 느슨하게 여민 내의가 벌어졌다. 단단하고 거침없는 손바닥이 민감한 곳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속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스쳤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파드득 떨며 몸을 움찔거렸으나 남궁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꾸만 더 깊고 은밀한 곳으로 내려가려는 남궁휘의 거침없는 손길에, 청하는 그야말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시원하다.”

때마침, 서윤이 앉아 있던 청석에 길게 몸을 기대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윤이 느긋하게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채 이리저리 목을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서윤이 묘한 자세로 붙어 있는 남궁휘와 청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네 둘 거기서 뭐 해?”

청하는 무언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라도 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잡고 있던 남궁휘의 손목을 뿌리치고는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남궁휘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마저 띤 채 서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선배님께서 다치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남궁휘는 청하의 아랫배를 짚은 손으로 다시금 부드럽게 청하의 배를 쓸어내렸다. 아니, 쟤는 진짜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뻔뻔스럽게 말도 잘하네. 이게 주인공의 덕목인가? 하긴, 따져 보면 거짓말은 아니긴 했다. 청하는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서윤의 시선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들 사이에는 거리도 꽤 있는 데다가 아른거리는 물안개가 이곳저곳에 어려 있어, 서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

서윤은 약간 미심쩍다는 얼굴로 청하와 남궁휘를 번갈아 바라보았으나, 결국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다시금 따뜻한 물과 온천 위로 늘어진 꽃가지들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아, 깜짝이야……. 들킨 건 아니겠지? 청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서윤 쪽을 힐끔거렸다. 남의 눈을 피해 무언가 위험한 장난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청하는, 자꾸만 제 아랫배를 더듬어 내려가는 남궁휘를 어떻게든 제지하기 위해 따뜻한 물 아래에서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었다. 온천 위로 어둠까지 내려앉자, 검은빛을 띤 수면 아래는 잘 보이지 않았다. 물 아래를 휘젓던 청하의 손이 무언가 단단한 것에 닿았고, 그것이 남궁휘의 손목이라 생각한 청하는 놓칠세라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어, 어디까지 내려가려는 거야! 그만하라고!

“그, 그 정도면 이제 확인은 충분하게 했겠지!”

청하가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 당황으로 달아오른 청하의 귓가에 하아아, 하는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심상치 않은 느낌에 청하가 멈칫거리는 사이, 누가 들어도 확연한 열기를 품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배님…….”

문득 시선을 들어 올린 청하의 눈동자에 저를 열렬히 내려다보고 있는 남궁휘의 예쁘장한 얼굴이 비쳤다. 온천의 열기와 수증기 때문인지, 아름다운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한층 더 짙어져 있었다. 눈꼬리가 살짝 풀려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굉장히 위험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선배님, 정말…… 정말 예뻐요.”

남궁휘의 몸이 청하 쪽으로 확 가까이 기울며, 비어 있던 남궁휘의 손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청하의 손목을 덥석 낚아채었다. 아니, 뭐야 진짜? 왜 이래? 청하가 약간 당황하는 사이, 남궁휘가 청하의 손목을 움켜잡은 제 손을 조금 위아래로 움직였다.

멍하게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청하는, 문득 제가 쥐고 있는 것이 남궁휘의 손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손목이라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사람의 손목이라기엔 너무 뜨겁고…… 너무 길쭉했으며…… 결정적으로, 손목 끝에는 응당 달려 있어야 하는 손도 달려 있지 않은…….

‘미, 미친……!’

청하는 불에 데이기라도 한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가 쥐고 있던 것을 당장에 털어 내듯 놓아 버렸다.

“하아…….”

남궁휘의 입에서 아쉬움에 가득 찬 앓는 듯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진짜 미쳤어?! 돌았냐고?! 이 미쳐 버린 상황은 대체 뭐야?!

청하는 두 번 볼 것도 없이 이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저쪽 편에 앉아 있는 제갈서윤과 백진이 지금 이 상황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하는 서윤과 백진이 있는 쪽을 맹렬히 힐끔거리며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궁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 미쳤어……?!”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리듯 말을 내뱉자, 남궁휘가 달아오른 예쁜 얼굴에 자못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먼저 제 걸 움켜쥔 건 선배님이시잖아요.”

야, 그건……! 그건…… 그렇지.

청하는 할 말이 없어 입술만을 파르르 떨었다. 진짜 미쳤어, 백청하! 손목이랑 그…… 그것도 구분을 못 하고! 근데 난 정말 손목인 줄 알았는데, 그 정도 굵기가 대체…….

뒤죽박죽 엉망으로 헝클어지기 시작하는 제 머리를 마구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식은땀이 다 났다. 청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너…… 너…… 너도 뭘 잘했다고 말대꾸야?”

그런 내 손목을 잡고서 그…… 그렇게 흔들어 댄 건 너잖아! 남궁휘가 예쁜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꽤나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청하는 속지 않았다. 얼굴만 예쁘면 다야?! 이 파렴치한……!

남궁휘가 청하의 눈치를 보며 다시금 은근슬쩍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 왔다. 아직도 서윤과 백진 쪽을 힐끔거리고 있는 청하를 향해 슬쩍 제 몸을 붙이며, 남궁휘가 끈질기게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저는 하던 걸 계속했으면 하는데요…….”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내가 너랑 뭘 하고 있었는데!”

“선배님도 아시면서…….”

남궁휘의 붉은 입술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미인도에서 갓 튀어나온 듯 그림같이 아름다운 미소였다. 청하의 입술이 초조함으로 바짝 말라 왔다.

남궁휘가 다시금 제 쪽으로 슬며시 손을 뻗는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청하는 지금 당장 무슨 말이든 해서 남궁휘를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뭐, 뭐라고 해야 하지? 일촉즉발의 순간, 당황 속에서 입술을 달싹이던 청하는 일단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뱉어 내었다.

“그…… 저기, 호, 혹시, 너는 주세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네?”

남궁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청하는 무턱대고 말을 뱉고 나자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주세민! 걔가 중요하지! 원작의 주인공! 남궁휘와 이어져야 하는!

지금 자신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청하는 제게 향하던 남궁휘의 손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어내며 조금 안정을 되찾은 눈빛으로 남궁휘를 올려다보았다. 남궁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제 실수로 몸이 달아올랐다면 이런 짓을 할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실수로 이상한 걸 만진 내 잘못이지. 다 내 잘못이다.’

청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남궁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 남궁휘에게 중요한 것은 주세민이었고, 청하에게 중요한 것 역시 그것이었다. 넌 지금 나랑 이런 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 실수 때문에 흥분한 건 알겠는데, 좀 진정하고 주세민에 대해 생각해 봐!

청하는 차라리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남궁휘가 이렇게 몸이 달아오른 순간에 주세민을 떠올린다면, 어쩌면 그에게 조금 동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청하는 남궁휘를 빤히 올려다보며 그의 얼굴에서 끌림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남궁휘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그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일 뿐이었다. 남궁휘는 지금 여기서 갑자기 주세민의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세민이라니…… 그자는 갑자기 왜요?”

남궁휘가 다시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청하는 얼른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궁금해서. 주세민 어때? 괜찮은 것 같지 않아?”

지금처럼 흥분했을 때 주세민 생각을 해 보라고! 어때, 좀 설렌다거나 끌린다거나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아?

남궁휘는 멍한 표정으로 입까지 조금 벌린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수증기에 젖은 남궁휘의 속눈썹이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남궁휘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저는 선배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말 그대로야. 주세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보기엔 뭐, 마교의 교주이긴 해도 나름 꽤 괜찮은 것 같아서. 어때? 잘생기기도 했고, 키도 크고…… 또 몸도 좋고.”

그…… 그리고 거기도…… 컸었지. 청하는 지난번 천마신궁에 납치되었을 때 옷 너머로 보았던 주세민의 물건을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말을 덧붙였다. 비록 절대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원작 주인공과 주인수의 그곳 크기를 전부 알게 된 청하였다. 남궁휘의 것 역시 손목으로 착각할 정도로 대단한 위용이긴 했지만, 주세민의 것은…… 정말이지 다른 차원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휘는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그걸 써 볼 기회도 없을 텐데, 거기는 왜 저렇게 큰 거야? 진짜 자원 낭비다, 자원 낭비!’

그러나 청하가 그런 하등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남궁휘의 표정은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굳어 갔다. 잠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청하의 귓가에 조금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선배님께서는…… 이런 순간에도 제게 다른 남자의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청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궁휘를 올려다보았다. 남궁휘가 살짝 입술을 깨문 채 왠지 상처받은 듯한 눈빛으로 청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왜 저러지? 무언가 자신이 대단히 못된 짓을 한 듯한 느낌에, 청하는 당황 속에서 입술만을 달싹거렸다. 남궁휘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정말…… 정말 너무하세요.”

“아니, 저기 나는…….”

청하는 쩔쩔매며 남궁휘의 표정을 살폈다. 어둡게 가라앉은 남궁휘의 얼굴이 순식간에 낯선 겨울 하늘처럼 흐려졌다. 서럽다는 듯 일그러지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보며, 청하는 어쩔 줄 몰라 초조하게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그때, 아프게 입술을 깨물고 있던 남궁휘가 갑작스레 시선을 들어 올려 청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궁휘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어두운 빛이 번쩍였다.

“주세민을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저는…… 저는…….”

남궁휘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저는 그자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그리고 남궁휘는 청하가 말릴 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을 뚝뚝 흘리며 온천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따뜻한 물과 밤바람을 즐기고 있던 서윤이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백진 역시 의아한 눈길로 점점 멀어져 가는 남궁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쟤 갑자기 왜 저래?”

서윤이 어리둥절하여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에서 힘이 탁 풀린 청하는, 저도 모르게 뜨거운 물속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따뜻하게 찰랑거리는 물이 부드럽게 청하의 몸을 받쳐 주었지만, 청하의 마음은 돌덩이를 매단 듯 무겁기 그지없었다.

‘아니…… 주세민을…… 그렇게까지 싫어한다고?!’

청하는 온몸을 덮쳐 오는 절망 속에서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짚었다.

‘망했다…….’

다음 날 아침, 청하와 백진, 서윤, 그리고 남궁휘는 마을을 조사하기 위해 일찌감치 곽가장을 출발했다. 

청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남궁휘의 눈치를 살폈으나, 남궁휘는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런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둘씩 짝을 지어 실종 사건의 단서를 찾아보자는 의견이 나오자, 남궁휘는 별다른 표정 없이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갈 선배님과 같이 가겠습니다. 해가 질 때쯤 곽가장에서 다시 뵙는 것으로 하지요.”

그 말을 하는 남궁휘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그린 듯 아름답고 차분하여, 딱히 특별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청하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청하는 백진과, 그리고 남궁휘는 제갈서윤과 짝을 지어, 곽가장의 대문 앞에서 헤어졌다.

침묵 속에서 발걸음을 옮겨 놓으며, 청하는 어떻게든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어젯밤 남궁휘가 던져 놓은 폭탄선언 덕분에 청하는 지난밤에 잠도 잘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그 남궁휘가 그렇게까지 주세민을 싫어하다니……. 정말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아니,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주세민이라는 이름만 꺼냈는데도 그렇게까지 나올 정도인가, 원작에서는 서로 그렇게들 죽고 못 살더니, 대체 이게…….’

청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발을 내딛었다. 지금 둘이 서로 물고 빨고 해도 모자랄 판에……. 청하는 그렇지 않아도 실낱같이 가느다란 제 목숨줄이 이 세계의 신인지 뭔지 하는 자의 손 위에서 위태롭게 간당간당거리는 장면을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문득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 공자와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스승님?”

눈을 깜빡이며 돌아본 곳에는 백진이 강아지같이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살짝 찌푸린 채 청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문을 돌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야…… 평소라면 분명 남궁 공자는 스승님과 함께 움직이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테니까요.”

백진이 약간 망설이며 덧붙였다.

“제게 스승님을 양보하다니, 조금 놀랐습니다.”

청하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이게 뭐…… 양보하고 어쩌고 할 문제인가? 청하는 애써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글쎄…… 딱히 별일은 아니다.”

백진은 그다지 납득한 것 같지 않았으나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하아…… 남궁휘는 역시 화난 걸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청하는 복잡해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렇게 고민한다고 해서 당장 별다른 뾰족한 수가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청하는 심란한 마음을 억누르며 일단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적거리며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아직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무척 이른 아침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옅은 새벽 안개의 흔적이 그들의 발목에 감겨들었다. 청하와 백진은 침묵 속에서 화룡성 시내 서민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좋게 말해서 주거지인 것이지, 실제로는 귀족들의 널찍한 대저택 혹은 대장원의 확장에 쫓겨나듯 밀려난 평민들이 얼마 되지 않는 좁은 구역에 밀집해서 다닥다닥 붙어 살고 있는 것이다.

청하와 백진은 지저분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어제 미리 들어 두었던 채소 장수의 집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집을 나서지 않은 사내가 좁디좁은 마당에서 바구니에 채소들을 담고 있었다. 청하와 백진의 모습을 발견한 사내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들이 다 오시고…….”

“사건을 조사하려고 보니 아무래도 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아이고,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내는 허둥지둥거리다 좁은 툇마루에 청하를 앉혔다. 백진이 청하의 옆에 시립하자, 사내는 약간 주눅이 든 얼굴로 청하와 백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 제가 어떻게 도움을 드리면 될지…….”

청하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보잘것없는 집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살림살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으나, 곱게 빨린 채 빨랫줄에 걸려 있는 낡은 치마가 유독 청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실종되었다던 딸의 물건인 듯했다. 청하가 살짝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어제 듣기로는 부인이 있다고 하던데.”

사내의 얼굴이 흐려졌다. 예에……. 사내가 우물쭈물거리며 문이 닫혀 있는 집 안쪽을 힐끗거렸다.

“집사람은 안에 있습니다요. 애가 사라진 뒤로 그만 앓아누웠는지라…….”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청하는 입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끄덕인 청하가 사내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되었네. 자네에게만 묻지. 딸이 실종된 게 정확히 언제인가?”

사내가 코를 훌쩍거리며 우울하게 대답했다.

“3일…… 아니, 이제 4일 되었습니다. 해 질 녘 무렵에 삮바느질거리들을 가져다준다고 나갔습죠. 곽가장에서 일하는 용 씨가 바느질거리들을 받고 삯을 치러 줬다는데, 그걸 받고 곧장 돌아갔다고 합니다요. 그런데…….”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문 끝에 사내가 간신히 마지막 말을 맺었다.

“그 길로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청하가 시선을 힐끗 들어 올려 백진을 바라보자, 백진도 심각한 표정으로 이쪽을 마주 바라보았다.

곽가장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이라면, 바로 방금 그들이 지나온 그 길이다. 인적이 드물긴 해도 화룡성 내부인 데다, 그렇게 외진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청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해 질 녘이라…….”

그것도 이상했다. 대체 흑마부대가 왜 밤낮을 가려 움직인단 말인가? 양산에서 사람들이 실종되었을 때는 이런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백진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실종 사건 외에 근래에 이 마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진 않았습니까? 누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로부터 공격을 받는다거나, 무엇이 파괴된다거나…… 아니면, 혹시 무언가 이상한 괴생물체를 목격한 자는 없는지요?”

그러나 채소 장수는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해괴한 일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냥 애들이 자꾸 없어질 뿐이지요.”

“참 이상하군요. 대체 왜 어린아이들만을 노리는 걸까요?”

백진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것은 청하도 내도록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사내는 붉어진 눈가를 한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교 놈들의 속셈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 자식들도 어리고 예쁘장한 애들을 탐내는 것이겠지요. 대체 그 많은 애들을 데려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우리 딸도 얼마나 예뻤는데……. 아직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단 말입니다.”

사내가 거친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청하는 백진에게 눈짓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이만 가 보겠네. 또 확인할 것이 있으면 찾아올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말고 기다리게나.”

청하와 백진이 밖으로 나설 때까지도 사내는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백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이상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청하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말이 사실일까?”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리고 예쁘장한 아이들을 탐냈다는 말.”

백진이 눈을 깜빡이며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백진이 약간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흑마부대가 사람 얼굴을 보고 납치를 하진 않을 테지요. 아비의 눈에야 자기 자식이 가장 예뻐 보이는 법이니…….”

“그야 그렇지. 하지만 분명 어린아이들만 없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청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쨌든 납치범이 나이를 가리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정말 얼굴도 가려 가며 납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문득 고개를 돌리자, 이른 아침에 시내에서 물을 긷기 위해 물항아리를 들고 걸어가는 아낙네들 몇 명이 보였다. 그들은 이런 허름하고 지저분한 곳에서 청아하고 단정한 옷을 차려입은 아름다운 선인들이 둘씩이나 서성이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자꾸만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청하는 재빨리 그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약간 차가운 인상이긴 하지만 누가 보아도 고귀하고 지체 높아 보이는 수려한 청년이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으며 말을 걸자, 아낙네들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한 표정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는 여전히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 이곳에서 며칠 전에 실종되었던 채소 장수의 딸이 꽤나 예뻤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청하의 질문이 끝나자 아낙네들은 눈을 깜빡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낙네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청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쏟아 내었다.

“그, 그야 그렇지요, 선사님. 채소 파는 소 씨네 딸자식은 이 근방에서 제일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했으니…….”

“부부가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아유 참, 그런데 하필 그 딸이 없어졌으니 애 엄마가 억장이 무너질 만도 하다니깐.”

“진짜 얼마나 안됐는지…….”

“하필 또 그렇게 예쁜 애들만 골라서 없어질 건 뭐랍니까.”

청하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다른 실종된 아이들도 모두 외모가 출중했나요?”

아낙네들 몇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 뒷산에 사는 산신이 샘이 나서 애들을 데려가는 거라고들 했답니다. 제일 예쁘고 귀하게 키운 애들만 없어지니까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청하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아낙네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여자들 몇 명은 가다가 먹으라며 가지고 있던 과일이나 나무 열매 같은 것들을 쥐여 주기도 했다. 청하는 어떻게든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그것들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

한 차례 실랑이가 지나가고 나서야, 청하와 백진은 간신히 다시금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가 있었다. 청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큰일이구나, 이 마을은.”

아이들이 그렇게 없어지다니, 부모들이 애태우며 조심할 만하겠어. 그런 말을 하며 백진을 돌아보는데, 왠지 미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청하를 향해, 백진이 살짝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스승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그러고는 불쑥 손을 뻗어 약간 흐트러진 청하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아낙네들에게 이리저리 둘러싸여 실랑이를 할 때 흐트러진 것임이 분명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있었으나, 분명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하아……. 청하는 절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일부러 가볍게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심이라니…… 저 여인들을 말하는 것이냐? 참, 별것을 다 신경 쓰는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백진은 고집스럽게 말을 반복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청하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끈질겼다. 허, 참나, 뭐가 혹시 모른다는 거야? 청하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구나. 가장 예쁜 아이들만 데려간다니, 이건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흑마부대를 만들어 내는 자들에게 무언가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걸까요.”

백진이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청하의 얼굴을 슬쩍 살피던 백진이, 약간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혹시……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정말 마교의 짓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청하의 수려한 미간이 찡그려졌다. 청하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세민은 그런 짓을 할 자는 아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잠시 침묵하던 백진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청하는 할 말이 없어 다시금 입을 꾹 다물었다. 글쎄, 그렇게 물으면 또 할 말은 없는데……. 주세민은 원래 그런 캐릭터가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으니.

청하가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백진이 묘한 표정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께서는 주세민이라는 자를 무척 믿으시나 봅니다.”

백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가 느껴졌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을 달싹거리던 청하는, 끝내 대답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청하는 결국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겠구나.”

백진은 별다른 말 없이 청하의 뒤를 따랐다. 자꾸만 뒤꿈치를 따끔거리게 하는 불편함 속에서, 청하는 모른 척 발을 옮겼다.

날이 저물 때까지, 청하와 백진은 아이를 잃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늘어놓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 크게 다를 것 없는 내용들이었다. 낮에는 멀쩡히 뛰어놀거나 일하러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해 질 녘이나 밤이 되어 찾아보면 도저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어린데도 예쁘장하고 잘생겨서 주변에서 사랑을 많이 받던 아이들이었다…….

이윽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자 전날처럼 순식간에 거리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주변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휑한 모습이었다. 청하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성 하나가 텅 비어 버리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다들 집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탓이지요.”

백진이 차분하게 말했으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는 약간 걱정스럽게 청하를 향했다.

“저희도 어서 돌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청하는 별다른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곽가장에 도착해 보니, 제갈서윤과 남궁휘는 벌써 한참 전에 돌아와 있었다.

“늦었네. 조사할 게 많았나 보지?”

제갈서윤이 별채로 걸어 들어오는 청하와 백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청하는 피곤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이 청하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실종된 아이들의 숫자가 꽤 되다 보니, 관련자들을 만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그쪽 조사는 잘 끝내셨습니까?”

“음, 뭐.”

서윤이 어깨를 으쓱이며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조용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남궁휘가 시선을 들어 올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청하와 시선이 부딪히자, 남궁휘는 슬쩍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굴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이 사건을 조사했던 관리들과 실종자들의 수색에 참여했던 자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어때, 무언가 쓸 만한 내용이라도 있나?”

청하의 질문에도 남궁휘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글쎄요, 딱히 잘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을 중심으로 수색했지만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전부니까요. 살해당했다면 분명 시체가 발견되었어야 했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성 밖으로 납치된 것이 아닌가 했다는데, 또 그렇다기엔 운송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군. 이곳은 내륙이라 아이들을 빼돌리려면 수레나 마차를 써야 했을 텐데, 그런 것은 눈에 띄기 마련이니까.”

서윤이 말을 덧붙였다. 청하가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아직 이 성안에 있다는 말일 텐데…….”

“하지만 그 많은 아이들을 대체 어디에 숨겨 뒀단 말이야?”

서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청하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 조사하면 할수록 사건이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너는 어때? 뭐 알아낸 거 있어?”

서윤이 물었다. 청하가 백진을 바라보았고, 백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오늘 그들이 들은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주의 깊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서윤과 남궁휘는 혼란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예쁘장한 아이들이라니……. 나이에 이어 얼굴까지 보겠다는 건가.”

“대체 흑마부대를 만드는 데에 그런 것이 왜 중요한 겁니까?”

서윤과 남궁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청하도 이해할 수가 없어 약간 신경질적인 손길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조사를 시작한 지 고작 하루 만에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청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내일 조사를 계속해 보도록 하지.”

내일이라고 별다른 수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청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피곤에 전 듯 무겁기 짝이 없었다.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을 향해 밤 인사를 남긴 청하는 제게 주어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이들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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