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20)

8장

대림현은 제갈 세가에서 관리하는 지역인 은주의 복주성에 속한 마을이었다.

제갈서윤은 대림현까지 가는 내내 제가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며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니, 저렇게 한도 끝도 없이 투덜거릴 거면 그냥 회의 때 그 자리에서 못 하겠다고 말하든가?

그러나 청하의 핀잔에 제갈서윤은 손가락을 흔들며 턱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네가 우리 아버지를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형에 비하면 나는 집안에서 거의 내놓은 자식인데도 아버지 명령은 절대 거역할 수가 없어. 얼마나 무서운 양반인데……. 솔직히 나랑은 진짜 여러모로 안 맞아.”

제갈서윤이 투덜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가끔은 차라리 아예 연을 끊고 싶다니까?! 청하는 영혼 없는 눈으로 친구의 신세 한탄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려 주었다. 그때 보니까 자기 아버지랑 꽤 비슷한 구석도 있더만, 그렇게까지 안 맞나. 하긴, 제갈서윤은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는 거의 집안과 연을 끊은 것처럼 행동하긴 했다. 청하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진이 약간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곳이 대림현입니까?”

그때까지도 무어라 불평을 쏟아 내고 있던 서윤이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서윤의 이마가 순식간에 찡그려졌다.

“맞는데……. 정말 난장판이로군.”

청하의 일행은 어검을 탄 채 허공에 멈춰 서서 아래에 펼쳐진 참상을 내려다보았다.

대림현은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산을 끼고 있는 마을이었는데, 나름 교통의 요지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꽤 큰 도시에 속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제갈서윤은 대림현이 은주에서 황주로 빠져나가는 상인들의 거점 도시 중 하나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그 마을이 온통 박살이 나 있었다. 청하는 할 말을 잃고 거의 허허벌판이 되어 있는 대림현의 모습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남궁휘가 눈썹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래도 보이는 것에 비해서 인명 피해는 많이 없을 겁니다. 건물만을 노려서 파괴했다고 했으니까요.”

“대체 왜 그랬을까…….”

백진이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청하도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청하가 입을 열었다.

“일단 내려가 보자꾸나.”

대림현에서는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생각보다 사상자가 많지는 않았기에, 마을은 전체적으로 정신없고 어수선하긴 해도 우울하거나 침통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청하 일행이 어검에서 뛰어내리자, 그들이 강호인들이라는 것을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청하 쪽을 향해 다가왔다. 몰려드는 사람들 중 흰옷을 입고 머리에는 유건을 쓴 사내가 서윤을 향해 반갑게 입을 열었다.

“작은 도련님!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제갈 세가의 가솔인 듯 보이는 사내를 향해, 서윤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명령이지 뭐. 복구 작업 총괄은 자네가 맡고 있는 겐가, 유장?”

유장이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 세가에서 관리하는 지역이다 보니 아예 가문에서 사람이 나와 복구를 도와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장이 청하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분들은……?”

“아, 나랑 같이 이번 일을 조사하러 와 주신 분들이네. 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되고…… 그래, 어떻게 된 일인가? 좀 알아보았나?”

유장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주변의 마을 주민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유장은, 일행들을 자연스럽게 사람이 적은 한적한 곳으로 안내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소식을 전해 듣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흑마부대가 한바탕하고 떠난 뒤여서……. 확실히 인명 피해는 그닥 많지 않은 모양입니다만.”

“그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남궁휘가 끼어들어 물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남궁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는 최근에 우연히 흑마부대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명백하게 사람을 향해 살의를 보였습니다. 문헌에 전해지는 대로 이성이나 분별력도 없어 보였고요. 건물이 이 정도로 무너졌는데 인명 피해가 적다는 것은, 분명 살상 외에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유장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글쎄,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뭐, 마교 놈들의 목적이란 다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 무언가 사특하고 부정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때, 청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혹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주변 사람들이 시선이 동시에 청하를 향했다. 이래 봬도 어렸을 때 추리 소설 좀 읽었던 경력이 있는 청하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말을 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사람을 놔두고 건물만을 부순 이유를 잘 모르겠군요. 혹시 이 마을에 무슨…… 남들이 탐낼 만한 물건이 있습니까?”

이번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장을 향했다. 유장은 황소처럼 눈을 끔뻑이며 멍하게 말했다.

“글쎄요……. 대림현이 부유한 마을이긴 하지만, 딱히…… 마교나 흑마부대 같은 곳에서 노릴 만한 물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유장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는 청하를 바라보는 대신, 이리저리 고개를 꺾으며 마을을 둘러싼 산 쪽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곳에 무슨…… 사당이 있지 않습니까?”

“사당이라고요?”

백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장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윤을 돌아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도련님? 저희 가문이 관리하던 무슨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히 무슨 사당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이곳 주민들은 오히려 잘 모르는 곳입니다. 제갈 세가에서 지은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그게 뭐지? 뭔지 알아?”

청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서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뒤, 서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남궁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어째서 제갈 세가의 가주님께서 저희에게 따로 언질을 주지 않으셨던 걸까요?”

“뭐,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지요. 저도 지금 방금 생각난 것이라서요.”

유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당? 사당이라…….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한번 조사해 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청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그곳으로 가 보지.”

문제의 사당이라는 곳은 꽤 산속 깊숙한 곳에 있었다. 청하 일행은 어검을 타고 산 주변을 몇 번이나 샅샅이 훑으며 날아다닌 끝에야 겨우 그 사당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금줄이 쳐진 사당은 별로 규모가 크지는 않았고, 나름 관리는 되고 있는 듯했으나 인적은 무척 드물어 보였다.

“여기는…… 사람들이 찾아오라고 만든 사당이 아닌 듯합니다.”

백진이 주변을 둘러보며 청하를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청하도 동의하는 바였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며 금줄 너머 사당 안쪽을 기웃거려 보았다.

“사당이라면, 이곳에 뭔가 모시는 신이 있는 거야?”

청하가 제갈서윤을 향해 물었다. 서윤이 입매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저기 뭔가 위패 같은 게 쓰여져 있는데…… 대림재천왕? 그냥 이 산의 산신 같군. 평범해 보이는데…….”

그 말대로였다. 사당은 지극히 평범해 보였고, 청하가 말했던 보물 같은 것을 숨기거나 할 곳도 딱히 없어 보였다.

청하는 붉은색이 칠해진 사당 기둥을 멀뚱히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별 상관 없는 곳인가? 다시 마을로 내려가 봐야 하나.

그때,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겠다며 사라졌던 남궁휘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이리 좀 와 보십시오.”

남궁휘가 심각한 얼굴로 사당 근처 풀숲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수풀이 마구잡이로 꺾여 있었으며, 바닥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발자국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남궁휘가 입을 열었다.

“흑마부대가 여기 왔었습니다.”

청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부대의 생김새를 봤던 청하와 남궁휘는 보자마자 그것이 흑마부대가 남긴 흔적임을 알아차렸다. 청하가 중얼거렸다.

“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갔지?”

“역시 이곳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남궁휘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진과 제갈서윤도 바닥의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그 이상 무언가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청하는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흑마부대를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와서 좀 알려 줬으면 좋겠군.”

“예를 들어, 나 같은 사람 말인가?”

청하는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르며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무작정 휘두른 검에서 청하 특유의 푸른 영기가 튀어 나갔다.

그러나 창천검만큼 청하의 영기와 파장이 잘 맞지 않는 도원맹의 검은, 영기의 힘을 증폭시키는 대신 오히려 흩어 놓았다. 위력이 약해진 푸른 영기를 가볍게 막아 낸 사내가 이쪽을 향해 삐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청하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서 의미심장한 빛이 번뜩였다. 청하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세민……!”

청하의 외침을 듣자마자 즉시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든 채 청하를 지키듯 그 주변을 둘러쌌다.

주세민은 그저 가소롭다는 듯 피식 미소 지었으나, 붉은 기운을 띤 눈동자는 방금 전보다도 더욱 싸늘한 빛을 뿜어내었다. 서늘하고 잘생긴 미간에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운이 어렸다.

세민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수십 명의 복면 사내들이 포진해 있었다. 청하 일행이 검을 뽑아 들자 그들도 역시 날카로운 기세를 일으키며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숲이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청하는 제 피부에 닿아 오는 찌릿거리는 마기와 그에 대응하여 꿈틀거리는 몸속의 영기를 제어하려 애쓰며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엔 무슨 일이지?”

주세민은 집요한 눈길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며 슬쩍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 텐데. 내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그러나 청하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남궁휘가 이를 갈며 외쳤다.

“역시 흑마부대의 배후는 네놈이었군?! 흑마부대가 완수하지 못한 임무를 다하러 온 것이냐?”

주세민은 순간적으로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붉은 눈동자가 위협적인 빛을 머금은 채 번뜩였다. 세민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는 빠져라.”

“뭐야?”

남궁휘가 발끈하여 비류검을 들어 올렸으나, 청하는 얼른 앞으로 한 발을 내딛어 남궁휘의 앞을 가로막았다. 약간의 침착함을 되찾은 청하가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흑마부대의 흔적을 조사하러 온 건가?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세민이 시선을 돌려 다시금 청하를 바라보았다. 세민의 눈동자에서 사나운 기운이 옅어지며 입술 끝이 다시금 슬쩍 풀어져 내렸다.

“역시 청루각주와는 말이 좀 통하는군. 몸의 대화를 나눠서 그런지…….”

“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당황한 청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그때 제갈서윤이 딱딱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흑마부대가 네놈 짓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냐? 우리가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세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다시금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주세민이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나같이 간악하고 비열한 마교 놈은 흑마부대 같은 것은 충분히 만들어 내고도 남으니, 고고하신 정파분들께선 내 말 따위는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그리고 거짓말쟁이이기도 하지.”

그때까지 묵묵히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백진이 서리가 내린 송곳같이 싸늘한 말을 내뱉었다. 백진을 바라보는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며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더욱 흉흉해졌다. 세민의 뒤에 진을 치고 있는 복면 사내들 역시 더욱 사납게 마기를 일으키며 검을 곧추세웠다.

당장이라도 무언가 사달이 날 것만 같은 순간, 세민이 문득 고개를 돌려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떻지?”

청하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무슨…….”

“너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세민의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가 뚫어질 듯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지목에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까지 덩달아 청하를 힐끔거렸다. 청하는 당혹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야 당연히 주세민의 말은 사실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청하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그걸 그렇게 물으면.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주세민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근거도 없이 그냥 그의 말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청하는 제 뺨과 뒤통수로 쏟아지는 따갑기 그지없는 시선들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대체 왜 나한테 이런 대답을 강요하는 거야?!

결국 청하는 소극적으로 말끝을 흐리며 대충 대답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 글쎄, 그게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한데…….”

“예?”

백진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청하는 이중 부정과 간접 화법으로 점철된 혼란스러운 문장을 대충 뱉어 내며 눈앞에 있는 세민을 노려보았다.

청하의 대답을 들은 세민이 의외라는 듯 슬쩍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가 묻기는 했어도, 청하가 정말 그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음 순간, 세민의 입꼬리가 스륵 올라가며 청하가 그를 본 이래 처음으로 어딘가 비틀렸거나 싸늘하지 않은, 온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시원하게 뻗은 수려한 눈매가 스르륵 휘어졌다. 과연, 주인공이라는 간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조금 주춤거렸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데다 위협적이고 사이코 같은 구석도 있는 녀석이었지만, 청하도 그 얼굴만큼은 도저히 흠잡을 수 없을 정도의 미남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깎아 놓은 조각같이 빼어난 이목구비와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은 구석이 없는 그 얼굴은, 차가운 빛이 감도는 붉은 눈동자와 몸에 두르고 있는 서늘한 분위기만 아니라면 마교의 교주라기보다는 마치 귀티 나는 어느 명문 세가의 도련님 같았다. 누구 하나 잘생기고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는 이 세계관 속에서도 그야말로 독보적인 미모다.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청하를 향해, 주세민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대단하신 청루각주님께서 이리도 나를 믿어 주시니 정말 황송스럽군. 그럼 이제 그만 피차 서로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 검은 내려놓는 것이 어떤가?”

그러나 백진과 남궁휘, 제갈서윤은 세민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한 치의 물러남도 없이 치켜든 검을 꼿꼿이 그에게 겨누고 있었다. 청하는 약간 망설이며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와 계속 적대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별로 도움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이 세계의 주인공인 데다, 어차피 흑마부대는 정말 그의 짓도 아니니…….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신이 주세민을 믿을 수 있을까? 청하의 머릿속에 자신을 침상 위로 찍어누르며 바짝 제 몸을 붙여 왔던 세민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아……. 청하의 단정한 미간이 부지불식간에 찌푸려졌다.

그때, 한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세민의 시선이 청하가 들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지며 뻔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그쪽이 믿을 구석은 영기밖에 없지 않나? 검이 바뀌어서 그런가, 아까 보니 영기도 예전만 못하던데. 서로 쓸데없이 기운을 뺄 필요는 없겠지.”

뭐? 아니, 지금 저게 할 소린가?! 누구 때문에 지금 이 검을 들고 있는데! 청하는 그만 분통이 터져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검을 위아래로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뻔뻔한 녀석이 내 검을 훔쳐 가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바뀐 검을 쓰면서 고생할 일도 없었겠지!”

주세민의 입꼬리가 재미있다는 듯 꿈틀거렸다. 반짝이는 붉은 눈으로 청하를 빤히 응시하던 세민이 소맷자락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대체 그곳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청하의 앞에서, 세민이 불쑥 푸른빛이 도는 영검을 꺼내어 들었다. 청하의 눈이 번쩍 커졌다.

“창천검!”

“훔쳐 갔다니 섭섭하군. 주인이 잊고 간 물건이 있는 것 같아 이렇게나 잘 보관해 놓고 있었는데.”

세민이 싱긋 웃으며 뻔뻔하게 말하자, 옆에서 백진이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건방진…… 당장 스승님의 검을 돌려줘!”

그러나 세민은 백진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청하만을 뚫어질 듯 바라보며 들고 있던 창천검을 장난치듯 이리저리 흔들어 대었다.

“돌려받고 싶나?”

세민이 빙글거리며 놀리듯 물었다. 청하는 기가 막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하지만 맨입으로 줄 수는 없지.”

“뭐?”

세민은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놀듯 청하의 눈앞에서 이리저리 휘둘러 대던 창천검을 순식간에 다시금 자신의 소매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아니, 지금 도대체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청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채 뭍에 나온 금붕어처럼 입술만을 뻐끔거렸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세민은 혼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소매를 펄럭였다. 검은 소맷자락이 휘날렸다 가라앉자, 그의 손에는 벌써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천마검이 들려 있었다. 세민이 여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싸우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그럼 소원대로 검을 맞대어 주는 수밖에. 네가 나를 이기면 창천을 돌려주도록 하지.”

세민의 시선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올곧게 청하만을 향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세민의 눈에서 일렁거리는 붉은 기운이 한층 더 집요한 기운을 띠고 번뜩이는 것 같았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뱀처럼 부드럽게 움직인 천마검이 여유롭게 청하를 가리켰다.

“그리고 만약 네가 진다면.”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사르륵 휘어졌다. 유려한 선을 그리는 잘생긴 입술이 부드럽게 달싹거렸다.

“내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거야.”

“뭐……?”

청하가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청하가 뭐라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사방에서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스승님, 저자의 말을 따르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선배님, 안 됩니다!”

그러나 세민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싫다면 강요하진 않겠다. 난 이대로 떠나 버리면 그만이니.”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청하에게 창천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지금 청하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남들보다 강력한 영기밖에 없는데, 창천이 아닌 다른 검을 사용해서는 확실히 영기의 위력이 떨어졌다. 어찌 되었든 청루각주 노릇을 하고 있는 청하에게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도 창천검이 필요했다.

할 수 없지. 결국 망설이던 청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 옆에서 백진이 초조한 목소리로 속삭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세민의 눈동자가 즐겁다는 듯 반짝였다.

세민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세민의 뒤에 도열해 있던 복면 사내들이 일제히 검을 거두고는 일정 거리 밖으로 물러났다. 청하도 뒤쪽을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물러나 있어.”

제갈서윤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남궁휘가 초조한 목소리로 다시금 선배님, 하고 말을 꺼냈으나 청하는 단호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진이 옆에서 불타는 듯한 눈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스승님.”

“백진아.”

무어라 입을 열려는 백진의 말을 가로막으며, 청하가 그의 말을 끊었다. 청하가 백진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날 믿는다면 물러나 있거라.”

잠시 침묵한 채 청하의 곁에 꼿꼿이 버티고 서 있던 백진이 결국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힐끗 주세민 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베일 듯 차가웠다. 청하가 재촉의 눈짓을 하자 남궁휘도 입술을 꽉 깨물며 어쩔 수 없이 백진의 뒤를 따랐다. 제갈서윤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매를 찡그리고 있었으나 청하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청하는 제 앞에 있는 세민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대신 너도 천마검을 쓸 생각은 하지 마. 나도 창천검이 없으니 서로 공평해야지.”

세민이 슬쩍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시 생각하던 세민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소매 속으로 천마검을 집어넣었다. 세민이 옆으로 손을 내밀자, 그의 뒤에 있던 복면 사내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제가 들고 있던 검을 내주었다. 그것을 몇 번 휘둘러 보던 세민이 청하를 향해 말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청하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무대는 마련되었고, 주연 두 명이 무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청하는 반쯤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다음 순간, 청하의 검이 예고도 없이 허공을 갈랐다. 푸른 영기가 일시에 세민을 향해 쏘아졌고, 세민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려 영기를 막았다. 검과 영기가 충돌하며 쾅, 하는 굉음이 터지고 삽시간에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 세민의 눈앞에 흐릿한 그림자가 비쳤다.

깡!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청하는 제 코앞에 있는 세민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영기로 강화된 청하의 몸은 거의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였으나, 세민의 허를 찌르는 데에는 실패했다. 세민의 붉은 눈이 설핏,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

무언가 싸한 것을 느낀 청하가 재빨리 맞대고 있던 검을 회수하고 크게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청하가 서 있던 자리에 검붉은 마기가 작렬했다. 허, 이것 봐라? 검붉은 마기가 흩어진 자리로 흐릿한 그림자가 스치더니 곧장 세민의 검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세민은 바로 제 눈앞에 내려꽂히는 새파란 영기의 벼락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날 따라 하려고?”

청하가 검을 길게 늘어뜨린 채 코웃음 쳤다. 영기 쓰는 건 내 전문이지.

그러나 세민은 움직임을 간파당했음에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다시금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청하는 뒤로 물러나며 어지럽게 움직이는 세민의 검을 간신히 받아 내었다. 검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검으로 막고, 검으로 막을 수 없는 빈틈으로 찔러 넣는 공격은 영기를 펼쳐 막아 내었다.

확실히 둘 다 본인의 검이 아닌 다른 검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런지, 청하의 영기와 세민의 마기 모두 본인들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위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공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갔다. 영기와 마기가 한 번 스칠 때마다 땅이 사정없이 파여 나가고, 수십 년은 된 나무들이 펑펑 터져 나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검을 휘두르는 세민을 향해, 청하는 소맷자락에서 부적을 꺼내 아낌없이 던져 대었다. 붉은 불꽃과 번쩍거리며 튀어 오르는 벼락이 세민을 향해 퍼부어졌다. 순간적으로 마기를 발산하여 제게 향한 공격을 버텨 낸 세민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 그대로 작렬하는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청하는 저를 향해 빛나는 뱀처럼 구불거리며 쏘아지는 검격을 받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손바닥 가득 영기를 모아 세민의 눈앞에서 폭발시켰다. 강력한 영기의 폭발로 세민이 비틀거리는 틈을 타, 청하는 재빨리 세민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세민이 몸을 비틀며 피해 냈으나, 뺨에 가늘게 검상이 남았다.

세민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에 묻어 나오는 핏방울을 내려다보는 세민의 눈은 무표정했다. 청하는 속으로 뜨끔했다.

‘내…… 내가 방금 주인공 얼굴에 상처를 냈어…….’

왠지 모르게 약간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에, 청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흠집 하나 없는 미술관의 명화에 몰래 낙서라도 한 파렴치한이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청하는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긴장감 어린 눈으로 세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피가 묻은 손가락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화난 건가? 화났겠지? 감히 내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뭐 이렇게 나오는 건 아니겠지? 청하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세민은 핏자국을 바라보던 시선을 힐끗 들어 올려 제 앞에 서 있는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루각주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싸늘하고 차가운 얼굴로, 비스듬히 검을 늘어뜨린 채 제가 만들어 낸 상처를 별다른 감흥도 없는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창천빙옥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고고하고 초연한 자태였다.

‘정말로 목을 노리고 들어오다니…… 진짜 죽일 생각인가.’

세민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천천히 검을 고쳐 잡으며, 세민은 부러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손속이 꽤 거칠군.”

“……그쪽도 봐주고 있는 건 아니잖아?”

“나는 죽일 생각은 없어서.”

세민은 그렇게 말하며 붉은 눈동자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는 잔뜩 긴장한 채 그 시선을 마주 받아 내었다. 대체 뭐야?!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역시 죽여야겠어.’ 뭐 이런 거야?

갑자기 주세민이 입매를 끌어 올리며 피식, 미소 지었다. 주세민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아까부터 계속 검보다는 영기 중심으로 공격하던데, 과연 언제까지 그 영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

끌어 올린 입꼬리와는 달리, 여전히 청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청하는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서늘한 감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 세민은 청하의 영기 공급이 무한정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검술에 별다른 자신이 없는 청하로서는 당연히 검술보다는 영기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지만, 이대로 시간을 끌기만 한다면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영기를 쓸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때가 되면 이 결투의 승자가 누가 될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청하는 이를 악문 채 검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그 전에 판가름 날 테니 걱정 마시지!”

곧이어 푸른 영기를 머금은 검이 세민을 향해 쇄도했다. 세민이 침착하게 검붉은 마기를 두른 검을 들어 올려 청하의 공격을 받아 내었다. 물 흐르듯 결투가 재개되었다.

영기와 마기가 충돌하고 검과 검이 불꽃을 일으키는 충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세민과 몇 번이나 합을 주고받으며, 청하는 세민이 과연 그가 말했던 대로 ‘손속이 거칠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마교의 수법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청하는 그가 일반적인 악역 마교주가 아니라 이 세계관의 주인공이라 그런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말대로 청하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어서 그런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청하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신사적이고 깔끔한 검격이었다. 오히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결판을 짓기 위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쪽은 청하였다.

푸른 영기가 시야를 가린 틈을 타, 청하의 검이 세민의 급소를 향해 날아들었다. 세민이 검을 비틀어 공격을 흘려 내자 청하가 다시금 빈틈을 향해 손을 뻗으며 영기를 날려 보냈다.

그러나 그 순간, 청하의 손끝에 모인 푸른 영기는 푸쉬쉭,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방금 전보다 훨씬 약한 위력으로 세민을 향해 날아갔다. 세민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청하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영기가 벌써 바닥을 보이는 것이 분명했다.

세민이 아까보다도 한결 더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리더니, 단숨에 청하와의 거리를 좁혔다. 청하는 이를 악문 채 한층 더 묵직해진 세민의 검격을 받아 내었다. 검과 검이 맞물린 채 두 사람의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세민이 검에 실은 마기를 더하자, 그렇지 않아도 부들부들 떨리던 청하의 검이 점점 더 이쪽으로 기울었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에 얼핏 웃음기가 어렸다. 청하는 이를 악물었다.

다음 순간, 청하는 검을 쥐고 있던 한쪽 손을 떼어내 세민을 향해 뻗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세민이 약간 휘청거리는 사이, 청하는 와락 세민의 멱살을 잡은 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청하와 세민이 대결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부터 약 오십 보 정도 떨어진 곳. 긴장한 눈으로 둘의 경합을 바라보고 있던 백진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었다. 백진의 옆에서 얼이 빠진 듯한 남궁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서, 선배님께서…… 지, 지금…….”

남궁휘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제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차마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움에 가득 차 있으나 상대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제갈서윤이 남궁휘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문장을 대신 말해 주었다.

“입을 맞추고 있군.”

백진은 불타오르는 것 같은 눈으로 청하와 세민의 모습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백진의 턱이 돌처럼 단단해지며 주먹을 쥐고 있는 손등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청하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들어 올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크게 뜨여진 붉은 눈동자였다. 설마 청하가 이렇게 나올 것은 예측하지 못했다는 듯, 주세민답지 않게 멍한 표정이었다. 청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승리감을 만끽하며 세민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영기를 빨아들였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버틸 수 있겠지……!

그러나 청하가 이제 그만 입술을 떼고 몸을 물리려는 순간, 불쑥 튀어나온 손이 단숨에 청하의 허리를 감쌌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무슨……!”

세민의 커다란 손이 청하의 허리를 감싸고, 반대쪽 손이 단단히 뒤통수를 붙잡아 왔다. 입술만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려던 청하의 얼굴을 단단히 고정한 채, 세민이 각도를 바꾸어 더욱 깊숙이 청하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밀려 들어오는 뜨거운 혀에, 청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뭐…… 미친놈 아냐, 이거?!’

청하는 황당함에 가득 찬 채 세민을 밀어내려 하였으나 강철 같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밀려나기는커녕 청하의 허리를 더욱더 단단히 감싼 채 와락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통에, 청하는 저도 모르게 세민의 입 속에서 숨 막히는 신음 소리를 흘렸다. 뜨겁고 단단한 혀가 입 안 구석구석을 핥고 문지르자 청하의 허리가 절로 떨려 왔다. 청하는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나야 영기를 흡수하려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얘는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세민이 반강제로 입맞춤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청하는 착실히 그의 마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세민의 단단한 혀가 청하의 혀를 휘어 감고 문지르다가 입천장 안쪽의 예민한 부분을 집요하게 핥아 올리자, 청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바닥에 영기를 모아 세민의 가슴팍을 퍽, 하고 밀쳐 내었다.

청하가 저를 공격할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세민은 순간적으로 마기를 일으켜 제 몸을 보호하며 여유롭게 청하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으로 청하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세민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이긴 것 아닌가?”

“뭐?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내 품에 안겨 있으니 내가 이긴 것이지.”

“웃기지 마라. 이대로 네 심장을 터트려 버릴 수도 있어.”

청하가 세민의 가슴 위에 얹은 손바닥에서 푸른 영기를 일으키며 으르렁거렸다. 세민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래서는 곤란하지.”

청하는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세민의 손바닥에서도 마찬가지로 검붉은 영기가 넘실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누가 이겼다고 판단하기 애매한 상황이었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영기와 마기를 동시에 머금은 공기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세민을 노려보고 있는 청하의 눈동자와 여유롭게 그를 내려다보는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일촉즉발의 순간, 무언가 불길한 공기가 순식간에 공터를 뒤덮었다.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청하와 세민의 시선이 동시에 높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어두운 숲 쪽을 향했다.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복면 사내들과 청하의 일행들도 무언가를 느낀 듯, 일제히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쪽을 바라보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숲에서 나뭇잎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분 나쁜 적막을 뚫고, 마른 나뭇잎을 헤치는 기묘하게 스산한 발자국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청하가 잽싸게 세민으로부터 떨어져 검을 고쳐 잡은 순간, 덤불을 헤치고 기괴하게 뒤틀린 백여 개의 검은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청하가 이를 악문 채 외쳤다.

“흑마부대!”

청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복면 사내들은 일제히 일사불란하게 진영을 갖추어 몰려오는 흑마부대를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백진과 남궁휘, 제갈서윤도 검을 치켜든 채 순식간에 청하 쪽으로 달려와 자리를 잡았다.

흑마부대는 지난번 동굴에서 보았던 것처럼 기괴하게 뒤틀린 모습을 한 채 이쪽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저것들을 또 보다니……! 대체 왜 또다시 나타난 거야? 청하는 그 징그러운 모습에 절로 몸을 부르르 떨며 긴장 속에서 검을 치켜들었다. 백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스승님, 저것들의 약점은 어디입니까?”

“그…….”

그것을 내가 알겠냐?! 지난번 양산에서는 자신이 흑마부대를 쓸어버리긴 했으나, 패닉 속에서 마구 비명을 지르며 아무렇게나 온 사방에 영기를 쏘아 댔던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청하가 더듬거리는 사이, 정파 최고의 모범생 남궁휘가 빠르게 대답했다.

“척심혈입니다. 문헌에는 분명 척심혈이 있는 척추를 끊어 놓아야 다시 움직이지 못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 척추란 말이지! 청하는 남궁휘의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검에 마구 영기를 주입했다. 타오를 듯이 새파란 영기가 검을 휘감았다. 저쪽에서 주세민이 복면 사내들을 향해 명령하는 것이 들렸다.

“쳐라!”

다음 순간, 백여 명에 달하는 흑마부대가 이쪽을 덮쳤다.

청하는 저를 향해 달려드는 흑마부대를 향해 영기를 내뿜으며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쏘아져 나간 푸른 영기가 흑마부대에 작렬하였으나, 잠시 비틀거리던 흑마부대는 곧 자세를 바로잡더니 다시금 이쪽을 향해 돌진했다. 아니, 젠장 이게 뭐야?! 청하는 당혹감에 멈칫거렸다. 지난번 동굴에서 보았던 흑마부대의 수준과는 차원이 달랐다.

청하의 옆에 바짝 붙어 선 백진이 검을 든 채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무 강한데요, 스승님?”

그 말대로였다. 남궁휘와 제갈서윤이 휘두르는 검도 흑마부대에게 제대로 먹혀 들지 않는 것이 보였다. 남궁휘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어떻게 된…… 지난번보다 훨씬 강합니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번에는 분명 당황한 청하가 마구잡이로 내뿜은 영기에 갈가리 찢겨 나가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흑마부대는 찢겨 나가기는커녕, 있는 힘을 다해 힘껏 휘두른 영기에 별달리 유의미한 타격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쪽에서 마찬가지로 흑마부대에 고군분투하고 있던 주세민이 이를 악문 채 말하는 것이 들렸다.

“완성된 흑마부대의 위력이 이 정도인가……. 결국 그 자식들이 흑마부대 연구를 끝냈나 보군.”

완성된 흑마부대라고? 이게? 그렇다면 지난번 동굴에서 보았던 것은 미완성 버전이었다는 건가.

청하는 낭패감에 신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지금의 흑마부대가 이토록 강한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이 그렇게 꼭꼭 숨겨진 동굴에서 흑마부대를 연구하다, 완성품이 만들어지자 비로소 이것들을 세상에 내보낸 것이다. 조금 징그럽긴 해도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어렵지 않은 상대일 것이라 생각했던 청하로서는 그야말로 낭패스러운 일이었다.

옆에서 제갈서윤이 이를 갈며 외쳤다.

“이 녀석들…… 사당 쪽으로 가고 있어!”

과연 흑마부대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인간들에게 대응하면서도, 꾸준히 사당 쪽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사실상 그들의 목표는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당 쪽을 향해 접근하는 것 같았다. 청하는 그들이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꽤나 사당 쪽으로 밀려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세민과 그를 호위하고 있는 복면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사당이 지척에 있었다.

“하앗!”

청하가 검을 휘둘러 다시금 영기를 쏘아 보냈으나, 그렇지 않아도 위력이 반감된 영기는 아무리 흑마부대와 정통으로 부딪혀도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쿠워어어어,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청하에게 달려드는 흑마부대를, 옆에 있던 백진이 간신히 영기를 가득 실은 검으로 밀어내었다.

타격도 주지 못하면서 괜히 영기만 낭비하는 꼴이 된 청하는 씩씩거리며 어느새 근처까지 밀려난 주세민을 향해 소리쳤다.

“빨리 창천검 이쪽으로 던져!”

이제 와서 결투니 뭐니 장난치지 마라! 지금 그럴 상황 아니니까! 청하 쪽을 힐끗 바라본 세민도 과연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별다른 대꾸 없이 소매 속에서 창천검을 꺼내어서는 이쪽을 향해 던졌다. 허공에서 푸른빛을 띠며 날아오는 창천검을 향해 청하가 손을 뻗었다.

창천검을 손에 쥐자마자, 청하는 그대로 사방에 푸른 영기의 벼락을 내리쳤다. 흑마부대를 맞고 튀어 나간 영기가 사당에 부딪히며 문짝이 날아가고 벽에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기는 흑마부대를 관통하며 몇 명의 흑마부대원이 움직임을 멈추고 크어어, 하는 비명을 내질렀다. 청하가 긴장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공격이 성공한 건가?!

그러나 흑마부대는 왠지 아까보다도 더욱더 흥분하여 이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청하의 영기에 맞은 흑마부대는 움직임이 좀 둔해지긴 했으나, 그래도 움직임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청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일단 사당으로 후퇴해!”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은 빠르게 청하를 호위하며 사당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청하 역시 금줄이 쳐진 사당을 박차고 들어가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저것들의 목적이 뭘까요?”

남궁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청하도 그것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인간들을 공격하고는 있었으나, 흑마부대는 명백히 사당이 목적인 듯 보였다.

“사당을…… 부수려는 건가?”

청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그들 누구도 답을 알지 못했다. 사당 밖에서는 주세민과 복면 사내들이 흑마부대를 상대하며 잠시 시간을 벌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당 안쪽으로 흑마부대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심해!”

청하가 소리치며 검을 들어 올렸으나 밀려 들어오는 흑마부대를 저지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흑마부대의 목적이 인간을 죽이려는 것이었다면 벌써 사상자가 몇 명이나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흑마부대는 그저 꾸역꾸역 사당 안으로 밀고 들어오며 그들의 진로에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어느새 그들은 사당의 제일 안쪽, 위패와 간단한 산신상이 모셔진 제단까지 밀려나 있었다. 청하는 뒤로 훌쩍 물러나며 흑마부대의 공격을 피했다. 방금 전 청하가 있던 자리에 날아든 검은 마기가 이쪽 편의 제단을 산산이 부숴 놓았다.

청하는 제갈서윤이 이쪽으로 달려드는 흑마부대를 피해 산신상과 위패가 올려진 제단 위쪽으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잠시 비틀거린 서윤이 제단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산신상을 붙잡고 중심을 잡았다. 그때, 갑자기 사당 안쪽의 공기가 뒤틀렸다.

우우우우웅!

제단 위에 놓여진 산신상이 빛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산신상의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눈을 감고 있던 대림현의 산신이 봉인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처럼 보였다. 제갈서윤은 당황한 얼굴로 제 옆에서 빛나고 있는 산신상을 돌아보았다. 흑마부대를 비롯하여 사당 안에 있던 모두가 순간적으로 몸을 굳힌 채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빛을 내는 산신상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사당 밖에서 흑마부대를 상대하고 있던 주세민이 사당 안쪽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세민의 시선도 빛나는 산신상에 가 닿았다. 붉은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산신상이 둘로 쪼개지며 산신상 안에 봉인되어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둥글게 빛나는 주먹만 한 붉은 돌 같은 것이 산신상 안에 놓여 있었다. 제갈서윤이 얼빠진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청하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대체 뭐야?

그때, 잠시 멈춰 서 있던 흑마부대가 갑자기 흥분한 채 붉은 돌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갈서윤은 제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드는 흑마부대를 피해 황급히 제단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흑마부대는 서윤 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제단 위의 붉은 돌을 낚아채서는 썰물이 빠지듯 물러나기 시작했다. 청하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흑마부대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주세민도 마찬가지였던 듯, 세민이 이를 악물며 복면 사내들을 향해 외쳤다.

“저것들을 제지하고 돌을 가져와라!”

복면 사내들이 일제히 흑마부대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역부족이었다. 붉은 돌을 획득한 흑마부대는 마치 방금 전까지의 전투는 장난이었다는 듯,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복면 사내들을 향해 살기 어린 마기를 휘둘러 대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명이나 되는 복면 사내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입술을 깨문 주세민이 붉은 돌을 들고 있는 흑마부대를 향해 친히 천마검을 휘둘러 대었다. 그러나 주인공의 검격에도 흑마부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하 역시 창천검을 단단히 잡아 쥔 채 세민의 옆에서 검을 휘둘렀고, 남궁휘와 백진도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제갈서윤도 달려와 합세했다.

“저게 대체 뭐지?”

“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어떻게든 잡아 봐!”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제갈서윤을 향해 소리치며 청하가 영기를 쏘아 보냈다.

주세민과 남궁휘가 동시에 검을 휘두르자, 각자의 검에서 검붉은 마기와 옅은 초록색의 영기가 동시에 튀어나와 붉은 돌을 들고 있던 흑마부대원에 작렬했다.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휘청거렸으나, 아슬아슬하게 척추가 부러지는 것을 모면하고는 다시금 뒤틀린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것을 보는 청하의 머릿속에 문득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는 분명 주세민의 마기와 남궁휘의 영기가 함께했을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마기와 영기의 조화가 어쩌고저쩌고해서 위력이 배가 된다는 설정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 주세민과 남궁휘의 힘이 동시에 흑마부대에 명중했음에도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그런 강력한 위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청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원작대로라면 그럴 리가 없었다. 이것은…… 이것은 원작의 내용이 비틀렸기 때문에 어긋나 버린 설정인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멍하게 서 있던 청하의 시야에 괴상하게 비틀거리며 마기를 휘두르는 흑마부대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것이 노리는 곳에는 다른 흑마부대를 향해 천마검을 찔러 넣고 있는 주세민의 등이 있었다. 상상외의 괴력을 보이고 있는 흑마부대를 상대하느라, 세민의 등 뒤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청하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안 돼!”

청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세민과 흑마부대 사이로 뛰어들었다. 세민은 주인공이었다. 절대로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자신이 죽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두 눈 멀쩡히 뜨고 그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청하는 창천검을 들어 올려 혼신의 힘을 다해 이쪽을 향해 후려치는 흑마부대의 마기를 막아 내었다. 악문 잇새로 핏물이 번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으나, 빈틈을 노린 기습은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무슨……!”

뒤에서 세민이 놀란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렸다. 하하…… 놀랐냐? 고맙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개수작 부리지 말고 나한테 잘해라. 청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창천검에 밀린 흑마부대원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검을 고쳐 잡으며 영기를 쏘아 보내려던 순간, 갑자기 아랫배가 뜨끈해졌다.

“스승님!”

저쪽에서 백진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청하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괴하게 뒤틀린 검은 팔이 청하의 배를 꿰뚫고 있었다.

방금 전의 흑마부대원은 공격이 막히자 뒤로 물러나는 대신, 자신의 팔을 기괴하게 뒤틀어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각도로 이쪽을 향해 찔러 넣은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의 공격이었기에 청하는 미처 대비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어떤 명령을 입력받은 로봇이나 인형처럼 단순하게만 행동하던 흑마부대가 이토록 무리를 하면서까지 공격을 감행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어쩔 새도 없이 청하의 입에서 왈칵 핏물이 터져 나왔다.

청하의 뱃가죽을 뚫어 버렸던 흑마부대원이 슥, 팔을 빼내는 순간, 검붉은 마기가 그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머리통이 날아간다고 흑마부대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순간적으로 방향을 잃고 주춤거렸다. 그 순간, 강력하게 폭발하는 검붉은 마기가 주춤거리는 흑마부대원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그 자리에서 스르륵 무너져 내리는 청하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은 주세민이 야차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후퇴해라!”

그리고 주세민은 물러나는 흑마부대를 버려두고 청하의 몸을 끌어안은 채 즉시 사당 쪽으로 후퇴했다. 복면 사내들도 세민과 청하를 호위하며 사당까지 물러났다.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도 흑마부대를 쫓는 대신 세민이 안고 있는 청하 쪽을 향해 달려왔다.

스승님! 선배님! 청하야! 각양각색의 호칭이 청하의 귓전을 쾅쾅 때렸다. 청하는 가물거리는 시야 속에서 귀신처럼 창백하게 질린 백진과 남궁휘, 그리고 제갈서윤의 얼굴을 간신히 알아보았다.

“스승님! 스승님, 안 됩니다!”

백진이 거의 오열하며 피로 흠뻑 젖은 청하의 앞섶을 와락 움켜쥐었다. 청하는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열린 입으로 다시금 뜨거운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백진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청하의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자꾸만 닦아 내었으나,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피를 막을 수는 없었다.

청하는 세민의 품에 안긴 채 사당 바닥에 누워 자꾸만 피를 토해 내었다. 뱃가죽이 뻥 뚫린 듯 시원하면서도 동시에 불에 타는 것처럼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실제 상처도 청하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가물거리는 청하의 눈앞에 불쑥 붉은 눈동자가 다가들었다. 세민이 처음 보는 표정으로 청하를 꽉 끌어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고 생소한 표정이었다. 원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뒤진다고 해도 천하의 주세민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묘사는 없었으리라. 청하는 그렇게 확신했다.

세민이 다시없이 초조한 표정으로 외쳤다.

“죽지 마라!”

‘죽지 말라고……? 내가 지금 죽어 가고 있나?’

그렇다. 청하는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청하는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코를 스치는 숨결이 잦아드는 것을. 자신의 안에서 타오르던 촛불이 빠르고 확실하게 꺼져 가고 있는 것을. 몸을 가득 채운 영기가 흩어지는 것을. 영혼의 빛이 잦아들어 가는 것을.

이렇게 죽는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버리는 건가?! 저깟 엑스트라도 뭣도 아닌 얼굴도 없는 몬스터 같은 것에게 당해서? 과연 이것이 조연의 운명인가? 애초에 원작에 고작 두 줄 등장하고 퇴장하는 조연 중의 조연에게 빙의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주세민이니 남궁휘니, 그런 대단하신 주인공들이랑은 애초에 엮이는 게 아니었다. 조연 따위가 분수를 모르고 나대니까 이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거라고.

그러나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 이미 때는 늦었다. 가물거리던 시야가 순간, 완전히 암흑으로 뒤덮였다.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고함 소리도 순식간에 볼륨을 끈 듯 잦아들었다. 삽시간에 온 주변이 완전한 암흑과 완전한 적막으로 뒤덮였다.

그렇게, 청하는 죽었다.

청하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완벽한 무(無)의 공간이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그 한복판에서, 청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청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동시에 더듬더듬 제 몸을 만져 보았다. 청하의 손이 저절로 제일 먼저 시원한 구멍이 뚫려 있던 아랫배로 향했다. 그러나 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끈하기만 했다. 피로 흠뻑 젖어 있던 옷도 말짱했다.

청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깨끗하기만 한 제 옷과 몸을 얼떨떨한 얼굴로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청하는 천천히 눈을 끔뻑거렸다.

난 죽었나? 지금은 사후 세계인 건가?

“그건 아니야. 적어도 아직은.”

무심한 듯 냉랭한 목소리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울려 퍼졌다. 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온통 새하얀 공간의 한복판에 이질적인 존재가 우뚝 서 있었다. 청하는 잠시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뭐지? 거울인가?

“거울이라니, 재밌는 말을 하네. 나를 보고도 그렇게 생각하다니.”

마치 영혼이 없는 듯한 무심한 목소리를 뱉어 내고 있는 것은 청하와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청하는 멍한 눈으로 저와 똑같은 ‘백청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백청하’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청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빙옥처럼 새하얀 얼굴빛과 수려한 이마, 그리고 그 아래에 단아하고 우아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시린 듯한 눈빛은 무심하면서도 어딘가 초연한 빛을 품고 있었다. 온통 그와 똑같이 생긴 얼굴에 단 하나, 그 눈동자만은 피처럼 이질적인 붉은색이었다.

그러나 눈동자 색뿐만이 아니라, 청하와 똑같이 생긴 그 얼굴에는 어딘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화감이 있었다. 단순히 눈빛이 무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무심함의 정도가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작의 백청하도 꽤나 냉랭한 성격이라고 하긴 했으나, 그런 그도 분명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청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저건 인간이 아니다.

“그래도 아주 눈치가 없는 건 아니구나.”

‘백청하’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그가 문득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덧붙였다.

“좀 앉을까.”

다음 순간, 아무것도 없던 새하얀 공간이 청루각에 있는 청하의 침실로 변해 있었다. 청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백청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침전의 한편에 마련되어 있던 탁상 옆의 의자에 우아하게 자리를 잡았다.

청하는 무언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엉거주춤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침전에 있는 것인데도 마치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백청하’는 마치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심지어 ‘백청하’가 한번 소매를 펄럭이자, 순식간에 탁자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이 생겨났다. ‘백청하’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들게.”

청하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어설프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향긋한 차 내음이 풍겨 왔으나 도저히 차에 입을 댈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결국 청하는 다시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채 매끄러운 도자기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물었다.

저…… 누구세요? 여기는 또 어디죠? 저는…… 죽은 건가요?

“그런 건 별로 중요한 질문이 아니군.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대해선, 분명 아직은 아니라고 말해 줬을 텐데.”

‘백청하’가 여전히 그 인간 같지 않은 무심한 얼굴로 담담히 대답했다. 문득, 그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보통 내가 인간의 앞에 나타날 때는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로 나타나는데…… 너는 그게 너 자신의 얼굴이라니, 꽤 특이하군. 스스로를 꽤나…… 아끼는 편인가 보지? 뭐, 자기애가 넘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청하는 멍한 얼굴로 ‘백청하’를 바라보았다. 워낙에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덤덤한 말투여서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아듣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이거…… 혹시 지금 나를 비꼬는 건가? 참나, 기가 막혀서…… 그러는 자기는 무슨 신이라도 돼? 아니, 신이라고 해도 그렇지! 청하는 어이가 없어 ‘백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백청하’는 태연하게 청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질문을 해야 하는 쪽은 이쪽이야.”

청하는 ‘백청하’를 향해 멀뚱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질문? 저렇게 인간 같지도 않은 신비로운 존재가 나한테 궁금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나 ‘백청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청하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대체 왜 운명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는 거지?”

……뭐?!

청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백청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백청하’의 고운 미간이 설핏 찡그려지며 그 무심한 얼굴 위에 미미한 짜증이 스쳤다.

“너 때문에 운명의 흐름이 너무 많이 뒤틀어졌어.”

자, 잠깐, 잠깐! 운명이라니……? 운명이라는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거예요?

“운명은 운명이지.”

‘백청하’가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는 듯한 얼굴로 덤덤히 대답했다. 그러나 청하는 멍하게 입을 벌린 채 ‘백청하’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운명이라고? 여기서? 갑자기요?

대뜸 밑도 끝도 없이 운명론을 주장하는 요상한 초월적 존재와 마주하게 된 청하는, 그의 싸늘한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더듬더듬 질문을 쏟아 내었다.

아니, 저기…… 그러니까 운명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요? 그리고 운명을 안다는 건…… 대체 당신 정체가 뭐죠? 이 세계의 신이기라도 한 건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닐 텐데.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너지.”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스산함에 청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원래부터도 인간 같지 않게 무심하고 서늘하던 ‘백청하’의 표정이 한층 더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백청하’의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제…… 제가 뭘요?

“너 때문에 운명이 너무 많이 어그러졌어.”

‘백청하’가 방금 전의 말을 다시금 반복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청하는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백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체 그래서 뭐…… 나보고 지금 사과라도 하라는 건가?

‘백청하’가 여전히 그 특유의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자꾸만 운명을 어그러뜨리는 불안 인자는 제거해 버리는 수밖에 없어. 그러기에 흑마부대는 편리한 도구지.”

제거한다고?! 청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제거한다는 것은 즉, 죽이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긴, 그가 정말 이 세계의 신적인 무언가라면,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는 그냥 깔끔하게 죽여 버리는 것이 간편한 해결책일 것이다.

문득 청하의 머릿속에서 기괴하게 팔을 뒤틀면서까지 무리하게 자신의 배를 꿰뚫어 버리던 흑마부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본디 단순한 인형처럼 움직이는 흑마부대가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눈앞의 이 ‘백청하’가 조종한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이자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청하의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수십 가지의 생각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청하’는 다시금 냉랭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계속 운명의 흐름을 망가뜨린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적으로 인세의 흐름에 개입하는 것은 가능한 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너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제거할 수밖에.”

자, 잠깐! 잠깐만요! 저를 제거하신다는 건…… 죽이신다는 거예요?

“그래. 너도 짐작했을 텐데. 지금 네 몸 상태를.”

헉, 미친, 이건 안 된다! 청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청하는 제 앞에 앉아 있는 ‘백청하’의 발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청루각주의 침전에 깔린 화려한 깔개 위에 털썩 무릎을 꿇은 청하는, 애절한 표정으로 저와 똑같은 얼굴을 한 ‘백청하’의 무릎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하, 한 번만…… 한 번만 봐주세요, 네?! 제가…… 제가 잘할게요!

뭘 어떻게 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청하는 일단 무작정 그렇게 외쳤다. ‘백청하’는 무표정한 붉은 눈동자로 제 무릎에 매달린 청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무심한 얼굴을 한쪽으로 약간 기울인 채 말을 이었다.

“지금 너를 살려 준다고 해도, 이렇게 계속 운명을 어그러뜨렸다간 어차피 나중에 너희들 전부 다 죽게 될 거야. 운명이라는 것이 그렇지.”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청하는 황당한 기분으로 ‘백청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다 죽게 된다고? 너희들이라는 건 또 정확히 어디까지를 말하는 거야? 원작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결말 부분의 이야기인가? 이거…… 이렇게 위험천만한 스토리였어?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근본도 없는 BL 소설에 빙의했지만 그냥 정절의 위협이나 조금 당하다가 다이아몬드 수저로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는데, 갑자기 무슨 몰살 엔딩 같은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운명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대체 그 운명이라는 게 뭔데?! 아니, 그럴 거면 애초에 내가 이런 이상한 BL 소설에 빙의한 것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아?

문득, 청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설마…… 이 운명이라는 게 혹시 원작을 말하는 건가?! 원작 스토리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그런……? 청하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청하의 머릿속에 원작과는 이미 백만 광년쯤 멀어져 버린 몇 개의 장면들이 겉잡을 새도 없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원작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청하도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팔자에도 없는 비무대회까지 참가해서 굳이 주세민과 남궁휘를 만나게 해 주려 했던 거지. 물론 어쩌다 보니 계획했던 것과는 꽤나 달라지긴 했지만……. 아니, 이게 정말이라면 벌써 이미 상당히 망해 버린 것 같은데……?

청하가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저기, 어떻게 하면 몰살 엔딩을 피할 수 있는데요? 지, 지금부터라도 잘하면 가능성이 있는 건가요? 운명대로 가려면 뭐가 제일 중요한가요? 저, 저를 살려 주시면 제가 지금부터 잘해서 꼭 그렇게 잘 진행되게 노력할게요, 진짜로요!

‘백청하’는 서늘한 눈으로 청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청하는 그가 머릿속에서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거 약간 희망이 있는 건가?

청하는 필사적으로 ‘백청하’의 무릎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어차피 그쪽이 직접적으로 이 세계에 개입하는 것도 좋지 않다면서요! 제가 잘해 볼 테니까……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네?

청하의 눈물 어린 호소가 먹힌 것인지, ‘백청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렇다면, 좋아. 딱 한 번이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도록 하지.”

허억, 감사합니…….

“하지만 이렇게 운명이 계속해서 어그러질 경우에는 그냥 너를 제거해 버리는 게 가장 낫겠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야말로 인간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얼음장같이 싸늘한 목소리였다. 청하는 애써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와…… 진짜…… 자기가 뭐, 신이면 다야? 진짜 재수 없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는 네 마음속 소리도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지.”

‘백청하’가 무심한 목소리로 툭 말을 내뱉었다. 어색하게 웃고 있던 청하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백청하’가 슥,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청하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청하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감쌌다. 거, 건방지다고 이대로 죽여 버리는 건 아니겠지? 살려 주세요!

그러나 ‘백청하’는 그저 청하의 머리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고는 말했다.

“이번 한 번은 보내 줄 테니, 어디 한번 네 말대로 잘해 보거라.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명심하도록.”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바닥에서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청하는 질끈 눈을 감았으나 눈꺼풀 안쪽에서도 똑같이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점점 아득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청하가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저기요, 그래서…… 그래서 운명의 흐름이라는 건 어떤 건데요? 운명대로 따라가려면 뭐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원작 결말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저는 이 소설 내용 끝까지 다 모른다고요! 저, 저기요? 잠깐만!

남궁휘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제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오래된 사당의 거친 나무 바닥 위에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져 있는 청하의 앞섶은 온통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흰 뺨에는 핏기라곤 하나도 없었으며, 온몸에도 생기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인형처럼 널브러져 있던 청하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순간, 남궁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커다란 손이 바닥으로 미끄러지려는 뺨을 받쳐 주었다. 세민의 모양 좋은 손가락이 천천히 청하의 입가에 흘러내린 핏자국을 닦아 내었다. 세민은 제 품 안에서 힘없이 늘어진 몸을 꽉 끌어안은 채 그저 끊임없이 핏자국만을 닦아 내고 또 닦아 내었다. 세민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져 갔다.

옆에서 백진이 가냘프게 떨리는 손으로 피에 젖은 청하의 옷깃을 조심스럽게 잡아 쥐었다.

“스승님……?”

백진이 옷깃을 잡고 흔들어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백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청하를 불러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숨 막히는 정적이 사당 안에 내려앉았다.

“젠장……!”

갑자기 제갈서윤이 입술을 깨물며 세민의 품에 안겨 있는 청하의 멱살을 잡고 와락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서윤을 향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나 서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청하의 뒤통수를 받친 채 그 입술에 깊게 자신의 입술을 묻었다.

“……!”

경악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갈서윤은 한참 동안이나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입맞춤을 이어 갔다. 질척거리는 젖은 소리가 적막한 사당 안에 울려 퍼졌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따뜻한 혀를 부드럽게 감아올리고 좁은 안쪽으로 깊숙이 제 혀를 밀어 넣으며, 서윤은 어떻게든 제 영기를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청루각 출신이 아닌 그로서는 자신이 과연 제대로 영기를 전달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반응 없는 입을 벌리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속살을 마음껏 휘저으며 서윤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 품 안에서 순종적으로 축 늘어져 있는 몸이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기꺼웠다. 청하에게 정신이 있었더라면 분명 서윤은 감히 천하의 청루각주에게 이런 짓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슨 짓이냐!”

강하게 어깨를 밀치는 손길에, 서윤의 입술이 반강제적으로 청하에게서 떨어졌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가를 대충 문지르며 앞을 바라보는 서윤을 향해 붉은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세민이 형형한 눈으로 서윤을 노려보았으나, 서윤은 제갈 세가 특유의 냉정한 표정을 지은 채 세민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서윤이 냉랭하게 말했다. 곧이어 차가운 시선이 옆에 있는 백진과 남궁휘 쪽을 향했다.

“뭐해?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어떻게든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 하는 상황 아냐?”

백진이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서윤의 말이 맞았다. 서윤의 팔에 안긴 채 축 늘어져 있는 청하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긴 백진은, 다음 순간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청하의 옷깃으로 손을 뻗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이 단단히 여며진 청하의 옷깃을 양옆으로 잡아 벌렸다. 훤히 드러난 흰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백진은 자연스럽게 청하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백진의 손이 부드럽게 청하의 가슴을 감싸 쥐며 주무르고는 단전 아래로 이어진 늘씬한 아랫배까지 천천히 문지르듯 쓸어내렸다.

흑마부대가 만들어 놓은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다 댄 백진이 청하의 목덜미에 가볍게 이를 세웠다. 부드러운 살결에 이를 박아 넣고 입술을 부비며, 백진은 목덜미로 대량의 영기를 불어넣었다. 상처 부위를 가볍게 감싸고 있는 손바닥을 통해서도 넘실거리는 영기가 흘러나왔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배의 상처가 눈에 보이는 속도로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곧 청하의 몸은 흉터 하나 남지 않은 채 깨끗하고 말끔히 치유되었다. 마치 잠깐 잠이라도 든 것 같은 평온하고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외상이 치유되어도 청하의 눈꺼풀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진은 아직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양껏 얼굴을 문지르며 깊게 숨을 토해 내었다.

“스승님…….”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애절하고 또 절박했다. 부서질 것 같은 소중하고 귀한 것을 만지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백진의 커다란 손바닥이 청하의 가슴과 배를 부드럽게 더듬듯 쓸어내려 갔다. 티 하나 없이 백옥처럼 새하얀 피부가 놀랄 만큼 부드럽게 백진의 손바닥에 감겨들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백진은 순간적으로 제 배 속에 확 치닫는 열기를 느꼈다. 백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어쩔 수 없이 저 깊은 안쪽에서 피어오르는 어두운 만족감이 백진의 가슴을 꽉 채웠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남궁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남궁휘의 눈동자 속이 어두운 불꽃으로 일렁거렸다. 성큼 백진의 옆으로 다가든 남궁휘는 대뜸 고개를 숙여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청하의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옅은 분홍빛의 유두를 입에 머금으며, 남궁휘는 청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백진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던 남궁휘의 얼굴에 생전 보지 못했던 초조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청하의 유두를 핥고 깨물며, 남궁휘는 제 안에 차오르는 질투 어린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젖어 있는 유두를 길게 핥아 올리며, 남궁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선배님…… 제발 눈 떠 주세요…… 저를 봐주기로 하셨잖아요, 선배님. 네?”

남궁휘의 손이 젖은 돌기를 집요하게 문지르며 민감한 끝을 괴롭히듯 자꾸만 파고들었다. 그러나 평소 같았으면 움찔하며 파드득 몸을 떨었을 청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남궁휘의 안타까운 손길이 청하의 허리와 옆구리를 애달프게 더듬다 움푹 들어간 등 쪽으로 파고들었다. 청하의 늘씬한 허리를 한 팔로 꽉 끌어안으며, 남궁휘가 청하의 가슴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안달이 나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만지고 만져도 부족했다. 어서 청하가 눈을 떴으면, 눈을 뜨고 저를 봐 주었으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남궁휘가 초조하게 청하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서윤은 청하에게 달라붙어 있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아직도 창백한 청하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두 사람분의 영기가 더해졌음에도 여전히 청하의 몸에는 별다른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의원으로서의 직감이 서윤에게 좋지 않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서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지금까지도 그들의 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세민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영기가 완전히 흩어지기 전에 서둘러야 해. 넌 거기서 구경만 하고 있을 건가?”

뚫어질 듯이 청하만을 바라보고 있던 세민의 시선이 서윤에게로 향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제자리에 굳어 있던 세민이 마침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하의 아래쪽에 자리 잡은 세민은, 서윤의 품에 기대듯 안긴 채 늘어져 있는 청하의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청하의 허리띠를 단단하게 움켜쥔 커다란 손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허리띠를 풀어 내렸다.

순식간에 옷이 느슨해지며 길쭉하게 뻗은 종아리와 아슬아슬한 흰 허벅지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이 무어라 말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세민은 단숨에 청하의 종아리에서부터 허벅지까지 거침없이 손을 쓸어 올렸다.

제갈서윤은 물론이고 백진과 남궁휘마저도 행동을 멈추고 세민을 돌아보았으나, 세민은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희고 부드러운 허벅지를 두 손 가득 움켜쥐었다. 백진의 목울대가 사납게 일렁거리고 남궁휘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세민은 저를 노려보는 시선들을 무표정한 눈빛으로 받아치며 차갑게 말했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세민의 손이 느슨한 속곳을 헤치고 더욱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 살이 세민의 손바닥에 감겨들었다. 뜨거운 손바닥에 약간은 서늘한 피부가 짓눌리는 것이 생소하면서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세민은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려 제갈서윤의 품에 안겨 있는 청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핏기 없는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는 청하의 모습은 날개 꺾인 새처럼 무력하고 또 무방비해 보였다. 옷은 이미 반쯤 벗겨지고 잔뜩 흐트러진 채 몇 명이나 되는 건장한 남자에게 둘러싸여 있는 난잡한 모습이었으나, 평온하게 잠에 빠져 있는 듯한 얼굴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고하고 무심하기만 했다. 세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던 세민의 손이 청하의 것에 닿았다. 세민은 주저하지 않고 손안에 들어차는 물건을 그대로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불에 덴 듯이 뜨거웠다. 천천히 눈을 내리깐 세민은 청하의 것을 잡아 쥔 손에 힘을 준 채 부드럽게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바닥이 기둥을 빈틈없이 감싸고 섬세하게 뿌리에서부터 끝까지 쓸어 올렸다. 둥근 귀두 끝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다 가장 끝의 첨단을 엄지손가락으로 집요하게 문질렀다. 귀두 아래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손가락을 휘감고 단단한 네 손가락으로 강하게 기둥을 부여잡으며, 세민은 정신을 잃고 있는 청하의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지난번 처음으로 그를 만졌을 때 느꼈던 이상한 감각이 또다시 세민의 심장을 간질였다. 이토록 무방비한 모습으로 제 몸에서 가장 연약한 부분을 제 손아귀에 내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세민의 아랫배를 뻐근하게 했다. 하지만 제 아래에서 발갛게 짓누른 눈을 한 채 반항적인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만큼 자극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자극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루 말할 수 없이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물기 없이 마른 그곳을 쓸어 올리며 성급하게 움직이던 세민의 손목을 누군가가 매의 발톱처럼 낚아챈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백진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세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백진의 잇새에서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할 테니 비켜라.”

그러나 세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저 바람 빠지는 듯한 코웃음을 흘렸다. 백진의 타오를 듯한 눈동자가 한층 더 강렬한 빛을 뿜었다. 백진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당장 손 떼.”

세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런 소릴 할 때라고 생각하나?”

“심법도 제대로 쓸 줄 모르면서…… 네 사심을 채우려고 감히 스승님께 이런 짓을 하는 걸 모를 줄 아나?”

가증스럽다는 듯한 백진의 말에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기로 가득 찼다. 세민이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심이라고?”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는 짙은 마기에 맞서, 백진의 몸에서도 영기가 맹렬한 기세로 치솟았다. 사당 안을 가득 메운 찌릿거리는 영기와 마기 속에서, 세민이 씹어뱉듯이 한 자 한 자 말을 내뱉었다.

“내가 지금 진정 사심을 품었다면, 청루각주를 너희들 따위와 공유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백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백진이 기어이 살기를 일으키기 직전, 남궁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 다 지금 선배님을 앞에 두고 무슨 짓거리들이지?”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남궁휘에게 가 닿았다. 남궁휘는 아름다운 얼굴을 차갑게 굳힌 채 베일 듯 싸늘한 시선으로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피에 젖은 청하의 옷자락을 절박하게 꽉 움켜쥔 남궁휘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남궁휘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선배님을 살려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대로 이분을 잃을 순 없어. 절대로. 그건 내가 용납하지 않아.”

남궁휘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으나 듣는 이를 숙연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세민과 백진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제갈서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어.”

세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서윤을 향했다. 서윤은 제 품에 안겨 있던 청하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서윤의 손가락이 청하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서윤은 밀랍으로 만들어진 인형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영기의 흐름이…… 완전히 끊어졌어. 이제…… 더 이상…….”

“……뭐?”

세민의 입술이 달싹였다. 세민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축 늘어져 있는 청하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남궁휘 역시 굳어 버린 채 뚫어질 듯 청하를 바라보았다.

“스승님!”

백진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청하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싹 갖다 대었다. 그러나 과연 청하의 코에서는 미약한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백진의 얼굴이 거의 청하만큼이나 창백하게 질렸다.

서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청하의 목덜미를 더듬어 보았으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서윤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서윤의 잇새로 끊어질 듯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세민은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더듬더듬 청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강호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의원이 잡아내지 못한 영맥을 그라고 잡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세민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져 갔다.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굳은 얼굴에서 눈빛만이 불타듯 어둡게 일렁거렸다.

옆에서 남궁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선배님, 일어나세요.”

남궁휘는 마치 청하가 잠시 낮잠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애교 있는 목소리로 재촉하듯 그를 불러 대었다. 선배님, 늦장 부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세요, 네? 제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멍하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백진이 천천히 청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주문을 외우는 듯한 절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승님. 스승님…… 제발…… 제가,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스승님…… 제발.

“정말 못 봐주겠군.”

세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세민의 붉은 눈동자도 시체처럼 축 늘어진 청하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어이 비릿한 피 맛이 감돌 때까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세민이,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듯 그때까지 청하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와락 힘을 주었다. 세민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거렸다. 아직 소원도 안 들어줬으면서 어딜 도망가려고?

그때, 마치 거짓말처럼 청하의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그때까지도 청하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제갈서윤이었다. 서윤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확장되었다. 막 태어난 나비의 투명한 날개처럼, 청하의 연약하고 섬세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다음 순간, 청하가 번쩍 눈을 떴다. 청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전부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공기 중에 내려앉았다. 청하는 망막을 때리는 눈부신 빛에 눈썹을 찡그리며 가물거리는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허공에서 부유하는 반짝이는 먼지 사이로, 숨이 멎을 듯한 표정을 한 채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네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눈을 끔뻑이며 멍하게 그들을 올려다보던 청하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살아났다. 다시 한번의 기회를 더 받은 것이다. 따뜻한 물속에 있는 것 같은 안도감이 비로소 전신을 타고 퍼져 나갔다.

겉잡을 수 없이 피어오르는 미소를 어쩌지 못하고 입가를 실룩거리던 청하의 시선이 문득 아래를 향했다. 환하게 피어오르던 청하의 미소가 약간 주춤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리던 청하의 입술이 멍하게 열렸다.

“나…… 옷이 왜 이래?”

* * *

유장은 얼빠진 얼굴로 대림현에 임시로 지어진 대피소에 줄줄이 들어앉은 이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분명 좀 전에 이곳을 출발할 때와는 사뭇 달라진 일행의 초췌한 행색에, 유장은 제 옆에 앉은 작은 도련님을 향해 조심스럽게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대체 이게…… 저 사당에서 무슨 흑마부대라도 마주치신 겁니까?”

“뭐, 그렇지.”

“예에?”

유장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갈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윤은 더 이상 설명해 줄 마음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남궁휘가 유장을 향해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대피소를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조금만 쉬고 떠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번거롭게 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뭐, 딱히 번거롭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어쨌든…… 어, 그럼 편히 쉬십시오.”

유장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듯했으나,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일행들에게서 풍기는 무언의 축객령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어물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대피소를 빠져나가던 유장은, 문득 그들의 중심에 앉아 있는 사내를 힐끗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유독 시선을 잡아끌던 사내는 빙옥처럼 흰 피부에 차가운 인상을 한 미인이었다. 방금 전 그에게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넨 남색 옷의 청년도 아름답기로 말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저 차가운 인상의 미인에게는 무언가 자꾸 타인의 시선을 잡아끄는 동시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범상치 않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미인이 피곤한 듯 머리를 짚고 있는 것도 신경 쓰였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유장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무언가 험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마구 잡아 뜯겨진 것 같은 그의 흐트러진 옷차림이었다. 옷깃 사이로 얼핏얼핏 드러나 보이는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가 자꾸만 자석처럼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괜히 유장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자꾸만 그쪽을 힐끔거리던 유장의 앞을 갑작스레 철벽처럼 탄탄한 몸이 가로막았다.

“무언가 더 볼일이라도?”

담담한 것 같으면서도 묘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부리나케 고개를 들어 보니,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릴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는 백진의 시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유,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장은 저를 향해 싸늘하게 번뜩이는 눈초리를 피해 얼른 고개를 꾸벅거리며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백진은 멀어져 가는 유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청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제게 향하는 노골적인 시선들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슬쩍 눈동자를 굴리던 청하는 저를 향해 가느다란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제갈서윤의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히고는 얼른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쪽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남궁휘의 시선도 느껴졌으나, 청하는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청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안쪽에서 좀 쉬시겠습니까, 스승님?”

백진이 단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을 때, 청하는 반가움에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를 뻔했다.

“그래, 좀 쉬어야겠구나. 약간 피곤해서…….”

청하가 말끝을 얼버무리자, 백진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청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얼른 대피소 안쪽에 마련된 내실로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겼다.

뒤통수에 따갑게 와서 부딪히는 무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마침내 내실에 들어선 청하는, 좁은 방 한편에서 휴우, 하고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됐군.’

청하는 속으로 앓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방금 전, 청하가 기적적으로 눈을 뜨자마자 오래된 사당 안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간신히 소란이 진정된 뒤, 주세민은 복면 사내들과 함께 물러나며 자신의 다음 행보를 명확히 했다.

“지금 당장은 잠시 자리를 비우지만, 곧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청루각주. 내게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말도록.”

세민은 그 붉은 눈동자를 청하에게서 한 치도 떼지 않은 채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뭘 또 도망가지 말라는 거야, 지금 나를 뭐 스토킹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너 그거 범죄야! 그러나 기가 막힌 청하가 무어라 대답을 꺼내기도 전, 세민은 경고인지 예고인지 모를 말만을 남긴 채 복면 사내들과 함께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우선은 대림현으로 돌아가 좀 재정비를 해야겠습니다. 스승님의 몸 상태도 살펴야 할 테고요.”

백진의 말에 따라 청하 일행은 일단 대림현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백진과 남궁휘는 마치 청하가 건드리면 깨지는 유리라도 된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의 몸 상태를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애써 그들을 진정시키려는 청하의 곁에서, 제갈서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청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청하로서는 어느 쪽이 더 부담스러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대피소 안쪽에 마련된 내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청하는, 간신히 한숨을 돌리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운명이라…….’

청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운명이라는 것이 대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청하는 일단 그것이 원작 스토리를 말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뭐…… 이곳이 소설 속 세계관인 이상 이미 정해져 있는 원작 스토리가 이 세계의 운명이라고 해도 크게 다를 건 없겠지.’

그러나 그렇다면 대체 그놈의 원작 스토리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남는다. 청하는 구석에 마련된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벌러덩 드러누워서는 본격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대피소의 조악한 천장을 바라보며, 청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일단…… 원작대로 가려면 주세민과 남궁휘가 이어져야겠지.’

청하의 머릿속에 깎아 놓은 조각처럼 잘생긴 붉은 눈의 마교주와, 전도유망한 정파의 후계자이자 세계관 최고 미인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분명 운명적인 천생연분임이 분명한 두 사람의 얼굴을 상상 속에서 나란히 붙여 놓는데, 왜 이리……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냐, 이건 내가 지금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래. 아직 둘이 붙어 있는 걸 몇 번 본 적이 없어서……. 어쨌든 이 둘이 이어져야 하는 건 확실하고, 그다음에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원작의 스토리라인은 비교적 간단하다.

원작에서 남궁휘는 비무대회가 끝난 뒤, 남궁 세가의 가주이자 어머니인 남궁서련의 명에 따라 남궁 세가의 후계자로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련을 떠난다. 강호를 주유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마물이나 강호인들과 관련된 이런저런 사건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무대회에서 남궁휘에게 한눈에 반한 주세민은 남궁휘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모습을 드러내며 끊임없이 그에게 구애를 이어 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주세민에게 점점 마음을 열게 된 남궁휘가 주세민과 어느 정도 이어지려고 하는 시점에, 바로 그 혈마교라고 하는 수상쩍은 집단이 등장하는 것이다.

청하가 알고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가 전부였다. 그 뒤의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청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청하는 다시금 푹푹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일단…… 비무대회 에피소드는 대충 망한 것 같지만, 그 이후의 전개라도 어떻게 최대한 원작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지금은 하필 내가 주세민에게 납치당하고 흑마부대까지 등장하는 바람에 남궁휘가 한가롭게 강호를 돌아다닐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청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남궁휘가 원작의 전개대로 움직여 줘야 그다음 행동이 가능해질 텐데, 그것부터가 벌써 난관이었다. 주세민은…… 주세민은 분명 아까 나보고 곧 다시 보게 될 거라고 했으니까, 내가 어딜 가든 쫓아오지 않을까.

문득, 청하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주세민이 끈질기게 누군가를 쫓아다닌다……. 이것이야말로 원작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바로 그 전개가 아닌가? 다만 주세민이 쫓아다니는 대상이 도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남궁휘에서 청하로 바뀌었을 뿐이다……. 청하는 다시금 잇새로 신음을 흘렸다.

이 말은 즉, 남궁휘를 원작의 전개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청하도 그와 행동을 같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야 주세민이 청하를 쫓아와서 결과적으로 남궁휘와 함께하게 될 테니까. 그리고 청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둘을 이어 줘야만 한다.

‘하아…… 이거 완전 코 꿰이게 생겼는데?’

갑자기 팔자에도 없는 중매쟁이 노릇을 하게 된 청하는 침상 위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마구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아, 진짜 미치겠다! 물론 그 ‘백청하’에게 앞으로 내가 진짜 잘해 보겠다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깊게 관여할 생각은 없었는데!

청하가 절망 속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을 때, 밖에서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들렸다.

“잠깐 좀 들어갈게.”

청하는 얼른 자세를 바로잡은 채 장지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문 안으로 슥 얼굴을 들이민 것은 뜻밖에도 제갈서윤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청하는 어색하게 침상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물었다. 그러나 서윤은 손을 내저어 청하를 도로 침상에 눕히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네 몸 상태가 걱정되어서. 어때? 몸은 좀 괜찮아?”

“아…… 음, 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일단 맥 좀 짚어 볼게.”

성큼 침상 곁으로 다가온 서윤이 곁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뜸 말했다. 청하는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어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는 서윤을 향해 손목을 내밀었다. 서윤은 신중한 표정으로 청하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쥔 채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가늘게 뜨고 청하의 맥을 짚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서윤은 천천히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청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영기의 흐름은 괜찮은 것 같네. 맥도 안정적이고…… 그런 상처를 입었던 것치고는 몸 상태가 엄청나게 안정적이야.”

“그래, 내가 말했잖아. 나 몸 괜찮다고. 그러니까…….”

“그런데 나는 그게 잘 이해가 안 돼.”

제갈서윤이 불쑥 청하의 말을 끊으며 뚫어질 듯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서윤의 얼굴을 멍하게 마주 바라보았다.

“그…… 뭐가……?”

청하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달싹거렸다. 서윤은 그런 청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천천히 한쪽으로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서윤이 가만히 말을 이었다.

“분명히 너는 한 번 완전히 맥이 끊겼었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맥을 짚었으니까, 적어도 나만은 그걸 확신할 수 있어. 그런데…… 그렇게 한 번 맥이 끊겼던 사람이 어떻게 다시 눈을 뜰 수가 있지?”

서윤의 강렬한 시선이 똑바로 청하의 얼굴에 가 부딪혔다.

“마치……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순간, 청하의 심장이 덜컹거렸다.

“그…… 그러니까 그게…….”

청하는 저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서윤의 시선을 간신히 받아 내며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꿀꺽 침을 삼키는 청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 젠장,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청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슬쩍 서윤의 눈치를 살폈으나, 서윤은 그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청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서윤은 청하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기까지 했다. 청하가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니까…… 어, 나, 나도 잘 모르겠네? 하하…… 왜 그랬을까? 내가…… 영맥이 끊겼었나? 허어, 나도 몰랐군. 엄청 위급한 상황이었나 보다.”

청하는 애써 모른 척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청하를 바라보고 있던 서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서윤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위급한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넌 한 번 죽었었어. 다른 사람들은 그저 별생각 없이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갈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이래 봬도 난 명색이 의원이니까. 그런 일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해.”

서윤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청하는 그의 목소리 아래에 깔린 석연치 않은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청하는 자꾸만 쿵쾅거리는 심장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쓰며 최선을 다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글쎄…… 나는 그때 정신을 잃고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잘 모르겠군. 뭔가 기적이라도 일어났던 걸까?”

“기적이라…….”

서윤이 그 말을 입 속으로 되뇌이는 것이 보였다.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서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진실에 가까운 말이 아닌가?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청하는 최대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윤은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으나 무어라 더 추궁할 만한 근거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서윤은 흠, 하고 숨을 내뱉으며 그때까지 꽉 움켜쥐고 있던 청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굳게 팔짱을 낀 서윤이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따로 좀 알아봐야겠군.”

“그, 그래…….”

청하는 우물거리듯 말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서윤이 침상에 누워 있는 청하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가 망설이듯 말했다.

“몸은…… 정말 괜찮아? 너네 문파의 그 심법이라도 써서 좀 몸을 회복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아, 괜찮아.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아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말짱했다. 외상은 물론이고 내상까지도 말끔하게 치유된 청하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태가 좋았다. 과연 기회를 주겠다더니, 어쨌든 ‘백청하’가 사기를 친 것은 아닌 셈이다.

청하의 말에 서윤은 왜인지 머뭇거리는 것 같은 얼굴로 청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서윤은 청하의 얼굴 양옆에 두 손을 짚은 채 천천히 몸을 숙였다. 탄탄한 몸이 기울어지며 단정하게 반으로 묶어 내렸던 서윤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너울처럼 청하의 얼굴 주변으로 쏟아져 내렸다.

의아한 눈으로 서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청하는, 서윤의 얼굴이 제게 닿을 듯 가까워졌을 때에야 흠칫 몸을 움츠리며 그의 얼굴을 머뭇머뭇 올려다보았다.

“왜…… 왜 그래?”

우물거리는 청하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서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거라면…….”

“응?”

“내가 알고 있는 의술로는 널 도와줄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서윤이 망설이듯 청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를 이용해도 좋아.”

청하는 말문이 막힌 채 그런 서윤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역시…… 나는 네가 죽는 건 보지 못하겠어.”

서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눈꺼풀 아래에서 알 수 없는 빛을 품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갑작스럽게 청하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청하는 그 눈빛에 사로잡힌 듯, 서윤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좁은 방 안을 스멀스멀 채워 갔다. 저도 모르는 사이 바짝 말라 오는 입술을 적시며 청하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나, 나는 정말로…… 괜찮…….”

지적으로 보이는 서윤의 깊은 눈매가 청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싱긋거리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한없이 가벼운 눈빛이, 지금은 묘한 무게감을 품은 채 청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진지한 눈빛에 잠식당한 듯, 더듬거리며 흘러나오던 청하의 목소리가 차마 더 이어지지 못하고 조각조각 끊어졌다. 청하는 당황 속에서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서윤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 이 분위기는 대체 뭐지?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그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밖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제가 밖에서 꿀물을 좀 얻어 왔는데, 맛 좀 보실래요?”

청하와 제갈서윤의 시선이 동시에 막 방 안으로 들어서던 남궁휘에게 가 닿았다. 요상한 자세로 침상에 누워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한 남궁휘의 발걸음이 순간 멈칫거렸다. 남궁휘가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지금…… 두 분 다 뭐하십니까?”

약간 날이 선 것 같은 남궁휘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청하는 허겁지겁 서윤을 밀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 아, 마, 맞다! 할 말이 있네!”

청하가 황급히 남궁휘를 향해 외쳤다.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지 않겠나, 남궁 공자?”

세민은 검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제 앞에 일제히 부복하고 있는 마교의 장로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몇백 년 동안이나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천마신궁 본궁의 습격 소식에, 임무를 받아 멀리까지 나가 있었던 장로들까지도 속속들이 천랑산맥으로 복귀하고 있었다. 세민은 별 감흥 없는 눈길로 그들을 슥 훑어보며 곧장 천마신궁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는 세민의 뒤로 그의 최측근인 류재겸이 바짝 따라붙었다.

“가셨던 일은 잘 처리되셨습니까. 흑마부대의 목적은 알아내셨는지요.”

재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도 세민은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세민과 함께 복귀한 부하들에게 보고를 받으면 알 수 있는 내용이었으므로 재겸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어찌 된 일인지 세민은 청루각주를 빼앗기고 잔뜩 심기가 상한 채 천마신궁을 출발하기 전보다도 더욱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대체 또 왜 저러시는 거람.’

재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세민의 눈치를 살폈다.

주세민은 마교의 역대 교주들 중에서도 몇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강력한 무공을 가진 자였다. 심지어 바짝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넋을 놓아 버릴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까지 갖추었으니,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남몰래 세민을 흠모하는 마교원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도 놀랍지 않았다.

감히 분수도 모르고 세민을 마음에 품는 건방진 녀석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예민해져 있는 재겸이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민은 그 누구에게도 똑같이 공평하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랬으니 지난번 세민이 친히 청루각주를 납치해 왔을 때는 재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흑마부대의 흔적을 찾아보러 간 곳에서 설마 또 청루각주와 마주치셨나?’

날카로운 직감이 재겸의 머리를 스쳤다. 까닭 없이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타인에게 그 어떤 흥미도 관심도 두지 않던 세민이 청루각주만 연관되면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이 마치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재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재겸이 가늘게 눈을 뜨고 있는 사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세민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강재헌이 황급히 세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세민은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거대한 책상 뒤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세민의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과 초조함, 그리고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불편한 심기가 어려 있었다. 강재헌이 세민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재겸을 향해 무슨 일이냐는 눈짓을 보내었다. 그러나 재겸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그저 대충 어깨를 으쓱이기만 할 뿐이었다.

세민이 내뱉듯이 입을 열었다.

“대림현에서 흑마부대와 잠깐의 충돌이 있었다. 생각보다 흑마부대를 빨리 완성했더군. 상당히 일방적인 전투였다.”

재겸이 놀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벌써……?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그래. 상당히 의외더군. 그리고…….”

세민의 미간이 좁혀졌다. 강재헌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세민이 무언가를 생각하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림현에 있는 제갈 세가의 사당에 모셔진 붉은 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강재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붉은 돌 말씀이십니까?”

“그래.”

강재헌은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든 세민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수했다. 강재헌이 뒷걸음질을 치며 방을 나가자, 세민의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재겸을 향했다.

“그리고 너는.”

천천히 움직이는 세민의 입술을 재겸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완전히 영맥이 끊어졌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경우가 있는지,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알아보아라.”

재겸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들은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맥이…… 완전히 끊어졌다가…… 다시 복구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무림인이라면 특히나 영맥이 끊겼다는 것은 곧 완전히 죽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것을 알아보라는 것이 아니냐.”

세민이 날카롭게 말했다. 재겸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두 손을 모았다.

“존명.”

급하게 방을 빠져나가는 재겸의 등 뒤로 어둡게 가라앉은 세민의 눈동자가 빛났다. 책상 위에 올려둔 세민의 손이 굳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재겸이 바람을 일으키며 빠르게 사라진 복도 너머, 그늘진 곳에서 한 인영이 뱀처럼 스르륵 몸을 움직였다.

‘영맥이 완전히 끊어졌다라…….’

* * *

산 너머로 붉게 물든 태양이 내려앉았다.

청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성곽과 성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옆에서 남궁휘가 중얼거렸다.

“정말 저곳에 흑마부대의 흔적이 있을까요.”

의문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말투에 청하는 가슴이 뜨끔하여 얼른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그럴지도 모르지! 왠지 모르겠지만 난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구나.”

남궁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지만 굳이 청하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청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진와 서윤, 그리고 남궁휘 모두 약간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청하의 인도에 따라 착실히 눈앞에 보이는 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말 잘 듣는 착한 애들이라 다행이야. 청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궁휘에게 주변 지역을 돌며 흑마부대에 관한 흔적을 좀 더 찾아보자는 제안을 한 것은 청하였다.

본래 남궁휘는 대림현에서 발생한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온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흑마부대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돌을 빼앗기기만 했을 뿐 무언가 의미 있는 단서를 찾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청하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주변 지역을 한번 돌아보며 다른 흔적이 있는지 좀 더 찾아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곳, 화룡성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청하의 고집 때문이었다.

‘분명 원작에서 남궁휘는 이곳에 왔었어.’

청하는 머릿속에서 필사적으로 원작의 내용을 떠올리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그땐 흑마부대 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단 여기로 오면 원작이랑 대충 비슷하게 흘러가긴 할 테니까.’

정말 흑마부대의 흔적이 있을지 없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흑마부대 운운한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어떻게든 화룡성에 도착하기만 하면 청하의 목표는 일단 어느 정도 달성되는 것이다.

청하는 일행들을 재촉하며 제갈서윤 쪽을 바라보았다.

“가문에는 연락했어?”

서윤이 간단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출발하기 전에 전서구를 보냈어. 사당에 있던 붉은 돌은 뭔지, 그 사당은 뭘 하는 곳이었는지 알려 달라고 했지.”

청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 사당에서 분명 서윤이 제단 위의 산신상에 손을 얹자마자 빛이 뿜어져 나오며 붉은 돌을 감추고 있던 봉인이 풀렸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봉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갈 세가 가문의 핏줄에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청하는 추측하고 있었다. 만일 그렇다면 분명 제갈 세가에서는 그 붉은 돌이 무엇이고, 왜 그곳에 봉인해 두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청하의 뒤에 서 있던 백진이 발걸음을 옮기는 청하를 부드럽게 부축하며 말을 거들었다.

“청루각에도 연락을 넣었습니다. 혹시 관련된 기록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요.”

“남궁 세가에서도 최선을 다해 알아볼 겁니다.”

남궁휘가 질세라 덧붙였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청하의 시야에, 남궁휘가 백진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들어왔다.

의아한 얼굴로 백진을 돌아보자, 백진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남궁휘를 향해 마주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청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뭐야, 둘이 사이가 안 좋았나? 왜지? 언제부터 저렇게 둘 사이가 냉랭해진 거야? 비무대회 때 결투 때문인가……. 애들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한 청하가 화룡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거의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서윤이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화룡성은 꽤 큰 성이니 객잔 수준도 나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여기 분위기가 왜 이러지?”

서윤이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윤의 말대로였다. 성문 근처에 좌판을 펼쳐 놓고 있던 노점상들이 해가 아직 완전히 지지도 않았는데도 부랴부랴 자리를 걷고 짐을 싸고 있었다.

길가의 장사꾼들뿐만 아니라, 번듯한 상점을 가진 상인들도 빠르게 내놓았던 물건들을 안으로 들여놓으며 너나 할 것 없이 문을 닫고 있었다. 번듯한 대로변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간혹 있는 사람들도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그때, 백진이 근처 수레에서 황급히 늘어놓은 채소들을 정리하고 있던 늙은 상인을 한 명 붙잡고 의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저, 무슨 일 있습니까? 방금 이 성에 도착한 여행자인데, 이곳에 무언가 큰일이라도 난 것 같군요.”

처음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상인은, 백진의 탄탄한 체격과 수려한 얼굴, 그리고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허리춤의 검 자루를 보자 화들짝 놀라며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혹시…… 무림인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백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상인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백진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아, 아이고 대협, 그러면 저희 마을을 좀 도와주십시오! 이러다가 진짜 다 죽게 생겼습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보다 못한 남궁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남궁휘의 화려한 외모를 본 상인은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으나, 곧 울상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유, 뭐긴 뭐랍니까, 저 간악한 마교 놈들 때문이지요!”

응……? 마교라고?! 또? 청하는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거 아무래도……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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