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그로부터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청하를 비롯한 그의 일행들과 남궁휘는 마을의 뒷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편하게 뒷산이라고는 하지만, 양현의 동쪽에 자리 잡은 양산은 꽤 고도가 높고 산세도 험한 깊은 산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편안한 발걸음으로 희미하게 이어지는 마기를 쫓아 험악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청하가 왜 갑자기 정체를 숨겼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청연과 백진은 마기를 추적하는 내내 의문 섞인 눈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정강이를 걷어차인 서윤의 원망 어린 시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 어쩌고 하는 서윤의 노골적인 투덜거림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청하는, 아직도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기는커녕 말도 한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가기로 결정하자마자 남궁휘는 마치 금붕어 뒤에 붙어 있는 금붕어 똥처럼, 아니…… 조금 더 좋게 표현하자면 어미 오리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새끼 오리처럼, 청하의 뒤에 찰싹 붙어서는 끊임없이 재잘재잘 말을 걸어 대었다.
청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제게 친근하게 말을 붙여 오는 남궁휘의 질문 공세에 이미 한참 전에 넋이 나가 있었다. 그러나 영혼 없는 표정으로 단답형의 대답만을 반복하는 청하를 앞에 두고도 남궁휘는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선배님. 청라관은 이곳에서 얼마나 멀리 있습니까?”
“글쎄, 잘 모르겠군. 내가 지리에 약해서…….”
“어느 지역에 있나요? 의주? 목주? 혹시 양주는 아닌가요?”
“아…… 청주에 있네.”
“청주라…… 그 유명한 청루각과 같은 지역에 있는 문파군요! 선배님께서는 이번 비무대회에는 참가 안 하십니까?”
“그…… 그렇게 됐어.”
“아쉽네요. 저는 이번에 양주에서 열리는 비무대회에 참가하러 갑니다. 선배님께서도 비무대회에 참가하신다면 이번 일이 끝나고 저와 함께 가시면 될 텐데요.”
바로 그것이야말로 청하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결말이었다. 청하는 가까스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미소를 만들어 보였으나, 남궁휘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청하를 마주 바라보며 마치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마치 마법처럼 주변에 샤랄라 하는 무지갯빛 배경 효과가 피어나는 듯했다.
으윽…… 갑작스러운 시각 공격에 청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그저 황망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진짜 심장에 너무 좋지 않다……. 청하가 떨리는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리자, 남궁휘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남궁휘가 친근하게 미소 지으며 청하의 곁으로 조금 더 바짝 다가섰다.
“선배님, 발 조심하세요.”
남궁휘가 달콤하게 웃으며 청하의 팔을 살짝 붙잡고 부축해 주었다. 아니…… 난 잘 걷고 있었는데? 어쨌든 그렇게까지 해 주니 청하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아, 고마워…… 아니, 고맙네.”
저쪽에서 백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긴, 평소에 이렇게 청하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이것저것을 챙겨 주는 것은 보통 백진의 역할이었다. 서리가 내릴 것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자꾸만 이쪽을 주시하는 청연의 시선도 과히 곱지만은 않았다.
청하는 왠지 모르게 슬쩍 백진과 청연의 눈치를 보며 남궁휘의 곁에서 조금 뒤로 물러섰으나, 남궁휘는 청하가 물러난 만큼 다시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아니…… 왜 이렇게 자꾸 달라붙는 거야?! 난 너랑 별로 엮이고 싶지 않다고! 청하는 울상을 지었다.
당황한 청하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와 동행하겠다고 한 건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조금 궁금하긴 했다. 남궁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교의 무리를 소탕하는 데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무림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하지만 갈 길이 급하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 사촌 형제들까지 먼저 보내고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당연한 의문이었다. 혹시 남궁휘가 마교 쪽이랑 무슨 관계가 있었던가? 하지만 청하가 기억하기로, 마교주 주세민을 만나기 전까지 남궁휘와 마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의문스러운 마음에 남궁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을 때, 청하는 뜻밖에도 남궁휘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을 보았다.
남궁휘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선배님께서 너무 예쁘셔서지요.”
뭐라고……? 청하는 순간적으로 제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빡였다. 백진과 청연은 물론, 제일 앞서가던 제갈서윤까지 남궁휘를 돌아보았다. 남궁휘는 제게 향하는 따가운 시선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만큼이나 아름다우신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선배님과 친분을 쌓고 싶어서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끼어들게 되었어요.”
청하는 말문이 다 막혔다. 남궁휘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이건…… 약간…… 또라이 같은데……?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도 알 수 없어진 청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만큼이나 아름다운……?”
남궁휘가 생긋 미소 지었다.
“네. 선배님께서는 제가 본 사람 중에 저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세요. 지금까지는 누굴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제 얼굴에 익숙해서 그런가.”
좌중의 경악 어린 시선이 남궁휘를 향했다. 그러나 청하는 홀린 듯이 남궁휘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럴 만해.”
남궁휘가 진짜…… 예쁘긴 예쁘다. 저런 얼굴이니까 주인공을 하는 거겠지? 남궁휘가 다시금 청하를 향해 눈가를 접으며 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그는 제 외모가 남들에게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익히 잘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청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스승님…… 저런 얼굴이 좋으십니까?”
“각…… 아니, 백 사제, 방금 한 말 진심인가?”
“너 취향이 저런 쪽이었냐?”
그러나 청하가 미처 무어라 변명의 말을 꺼내기도 전, 갑작스레 주변에서 희끄무레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희미하게 이어지던 주변 공기 속 마기의 농도가 갑자기 확 치솟았다. 투덜거리며 불만 섞인 말을 뱉어 내던 일행들 사이에 순식간에 날 선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청연이 날카롭게 말했다.
“진(陣)이 쳐져 있는 듯하다! 백 사제, 조심하거라.”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예민하게 날을 세운 청하의 감각에 섬뜩하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갑작스레 주변에서 강력한 마기가 급격하게 휘몰아쳤다.
“스승님!”
청하가 허리춤에 매달린 창천검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과 동시에, 백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이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주변이 온통 희끄무레한 안개로 뒤덮이고 말았다.
“배…… 벽진아! 사형! 제갈서윤!”
청하가 당황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주변을 온통 휘감았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나자, 백진과 청연, 그리고 서윤의 모습은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말았다. 청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텅 빈 산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옆에서 살짝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환영진에 갇힌 모양이에요, 선배님.”
청하는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남궁휘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던 남궁휘가 청하를 돌아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만 따로 찢어진 듯한데, 우선은 앞으로 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청하는 절망에 찬 신음을 흘렸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하필이면 청하는 가장 엮이고 싶지 않은 남궁휘와 단둘이 마교의 진법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 * *
청하는 침묵 속에서 옅은 안개가 낀 산길을 걷고 있었다.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청하의 옆에서는 남궁휘가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입을 꾹 다문 채 사방을 경계하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청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어쩔 수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교의 진법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해를 끼치는 종류는 아닌 듯했다. 청하는 안개 속에 독무가 살포되어 있다거나 시야가 가려진 사방에서 병장기가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상황도 상상해 보았으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방향을 헷갈리게 하는 짙은 안개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묘하게 꼬불거리는 산길만이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었다.
‘이러다가 영원히 이 안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청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남몰래 심란한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쨌든 자신보다 연배도 한참 어린 후배 앞에서 이렇게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청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계속 같은 곳을 돌고 있는 것 같지 않나?”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안개 너머로 어떤 기운이 느껴지긴 하는 것 같은데…….”
남궁휘가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앞으로 이어진 산길 너머에서 어렴풋하게 마기의 기운이 느껴졌다. 청하가 긴장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마교 녀석들이……?”
“하지만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생물체는 아닌 듯합니다.”
남궁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눈앞에 불쑥 검은 문 같은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하와 남궁휘는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고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그것은 커다란 동굴의 입구였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생긴 입구는 분명 아니었다. 투박하지만 분명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검은 돌문이 동굴 입구를 막고 있었다. 남궁휘가 돌문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강한 마기가 느껴집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환영진이 펼쳐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청하는 신음을 흘렸다. 어쩌다 보니 마교의 소굴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백진과 청연, 그리고 제갈서윤까지 전부 환영진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그들은 진을 뚫고 기어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환영진이 어째서 그들에게는 작동하지 않았던 거지? 분명 환영진은 이 입구를 가리기 위해 펼쳐져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 문득 청하는 무언가를 깨닫고는 퍼뜩 제 옆에 있는 남궁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남궁휘는 마교의 사술이 통하지 않는 특이 체질을 갖고 있었지!’
원작의 남궁휘는 주인공답게 그러한 특수 설정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마교의 교주인 주세민은 남궁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남궁휘와의 결투 도중 그를 겨냥한 회심의 술법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하는 이제서야 그것을 떠올린 제 머리를 자책하며 약간 원망스러운 눈으로 남궁휘를 흘겨보았다. 결국 쟤 옆에 붙어 있다가 괜히 얼떨결에 나까지 여기에 휩쓸리게 된 거잖아! 이래서 주인공 같은 녀석들이랑은 엮이면 안 된다니까! 무슨 시련이 닥칠 줄 알고!
남궁휘나 주세민 같은 사람들이야 날 때부터 주인공의 운명을 타고났으니, 이런저런 골치 아픈 사건에 휘말리더라도 아무런 문제 없이 척척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 같은 조연이 괜히 주인공 옆에서 얼쩡거리다간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목숨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안위를 가장 최우선으로 걱정하는 소시민답게, 청하는 내키지 않는 걸음걸이로 동굴 입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 남궁휘의 곁으로 다가갔다. 남궁휘가 굳은 표정으로 청하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선배님?”
“뭐어? 아, 아니…… 뭐라고? 왜 굳이 그래야 해?”
청하가 펄쩍 튀어 올랐다. 남궁휘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환영진에 갇힌 다른 분들을 구해 내려면 이곳으로 들어가 진법을 파훼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는 듯해서요.”
남궁휘의 말인즉, 이 밖에서 진법을 무력화시킬 방법은 없다, 그러니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진법을 유지시키는 장치, 부적, 혹은 인간, 그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없애야 환영진에 갇혀 있는 다른 일행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청하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남궁휘는 믿음직스럽기 짝이 없게도 그런 말을 하며 검은 돌문에 신중하게 손을 갖다 대었다. 짙은 남색의 옷자락 위로 갈색 손목 보호대를 한 남궁휘의 두 손이 검은 돌문을 힘껏 밀었다. 청하는 그대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남궁휘의 등 뒤에서 얼굴만을 빼꼼 내밀었다.
환영진을 믿고 그 밖에는 아무런 보안 장치를 하지 않은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문에 걸려 있는 사술이 남궁휘에게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인지, 문은 별다른 저항 없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길게 이어진 통로가 새까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둘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동굴 안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출구에서 흘러들어 오던 옅은 빛도 사라졌다. 주변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이자, 남궁휘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옅은 푸른색의 빛 무리를 불러내었다. 주변을 희미하게 밝히는 빛 아래에서 사방을 둘러보던 남궁휘의 시선이 하얗게 질려 있는 청하의 얼굴에 가 닿았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무, 뭐? 아, 그, 나, 나, 나는 괜찮다.”
청하가 더듬거리며 간신히 말을 맺었다. 그를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남궁휘가 문득 청하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남궁휘가 불쑥 손을 들어 올려 청하의 뺨에 갖다 대자 청하는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남궁휘가 중얼거렸다.
“식은땀이 납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그, 아니, 나는 괘, 괜찮대도!”
청하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거짓말이다. 청하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청하의 발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청하는 품위라곤 하나도 없이 꽥, 소리를 지르며 제 앞에 있는 남궁휘의 팔을 와락 붙잡았다.
“으으아허억!”
남궁휘가 놀란 눈으로 청하를 바라보며 진정시키듯 청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그냥 쥐예요.”
그러나 청하는 남궁휘의 팔을 움켜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잘 들리지 않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청하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어두운 곳, 그중에서도 이렇게 폐쇄된 장소를 무척 무서워했다. 공포 영화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하더라도 낄낄거리는 누나의 옆에 딱 붙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얼른 영화가 끝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남들은 다들 재미없고 시시하다는 놀이공원 귀신의 집에서도 직원들이 뿌듯해할 만한 비명을 고래고래 질러 대며 친구들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청하는 제 심약한 체질을 향해 속으로 욕을 마구 퍼부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 소, 손 좀 잡아 주면 안 돼?”
“예?”
남궁휘가 눈을 깜빡거렸다. 하, 젠장 또 무의식적으로 원래 말투 써 버렸어. 청하는 입술 안쪽을 깨물며 아까보다는 조금 더 위엄을 챙긴 말투로 말했다.
“그, 호, 혹시 넘어질 수도 있으니 손을 좀 잡고 가면 안 되겠느냐?”
잠시 동안 가만히 청하를 바라보고 있던 남궁휘가 마치 귀여운 무언가를 보듯 사르르 눈꼬리를 휘며 미소 지었다. 아니, 얘는 이 와중에 또 예쁘고 난리야……. 청하는 속으로 한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휘는 귀여운 동생을 챙기듯 자연스럽게 청하의 손을 붙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넘어질 것 같으면 제게 기대세요.”
저보다 한참 후배의 말이었지만 청하에게는 그만큼 든든한 것이 없었다. 청하는 청루각주이자 무림 선배로서의 자존심은 잠시 저 멀리 던져둔 채, 제 손을 잡고 있는 남궁휘의 팔을 마치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냉큼 붙들었다. 남궁휘의 입가가 웃음기를 참듯이 씰룩거렸다.
한동안 그렇게 엉거주춤하게 동굴 안을 걷던 청하는 긴장을 떨쳐 내기 위해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던져 보았다.
“그, 아, 아까 전에 나 때문에 여기 따라왔다는 건 정말 진심이야?”
“네, 그럼요, 진심입니다. 그리고 선배님께서도 제 외모가 마음에 든다고 해 주셔서 정말 기뻤어요. 제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또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깐요.”
남궁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청하는 다시금 새삼스레 남궁휘라는 캐릭터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보았다. 얘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단 말이야? 정의감에 불타는 정파의 화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교주 주세민과 세기의 사랑에 빠져 온 강호를 뒤흔들게 되는 세상 가련한 미인수가 아니던가……. 청하는 누나의 설정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설정을 좀 잘못 짠 것 같아, 누나…….
그러나 청하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무언가 섬뜩한 기운이 칠흑 같은 어둠 너머에서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남궁휘도 그것을 느꼈는지, 그는 재빨리 청하를 제 뒤로 숨기며 민첩한 동작으로 자신의 영검인 비류검을 뽑아 들었다.
청하 역시 창천검을 뽑아 들었으나 그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불빛 하나만을 의지한 채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적들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청루각으로 쳐들어왔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마교의 사자와 복면 사내 수십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백 배는 더 나을 것이다.
다음 순간, 남궁휘가 불러냈던 희미한 불빛 아래로 드디어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알 수 없는 생명체로, 검은 마기로 온몸이 감싸인 채 사지가 온통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비틀거리는 움직임이나 기괴한 신음 소리는 굳이 따지자면 좀비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와 비슷해 보였다. 남궁휘가 깜짝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것은 마교의 흑마부대(黑魔部隊)? 하지만 이미 예전에 멸절시켰다고 들었는데…….”
마교의 사술로 만들어 낸 흑마부대는 부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이성이나 이지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마물에 가까운 인간병기였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 마기를 주입하여 강제로 만들어 낸 그것은, 사술자의 명령에만 절대복종하는 인형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정파 연합에서 멸절시킨 그것이 지금 다시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남궁휘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그러나 분노에 찬 남궁휘가 비류검을 미처 휘두르기도 전, 바로 옆에서 귀청이 떨어질 듯한 어마어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악!”
청하가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나 내뱉을 법한 무시무시한 비명을 내지르며 소맷자락에서 닥치는 대로 부적을 꺼내서는 사방을 향해 마구 날려 버렸다. 콰쾅, 하는 소리와 함께 온 사방에서 불꽃이 일었다.
강력한 화염이 동굴 이곳저곳에서 불꽃을 일으켰고, 그렇지 않아도 이쪽으로 향하던 흑마부대는 일제히 청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주춤하던 흑마부대는 더욱 이상한 괴성을 내지르며 청하를 향해 돌진했다. 거의 수백은 되는 듯한 흑마부대가 개미 떼처럼 청하를 향해 쇄도했다. 남궁휘의 얼굴에 낭패한 표정이 어렸다.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서 하나씩 하나씩 상대한다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지 몰라도, 이렇게 많은 수의 흑마부대가 한꺼번에 몰려온다면 아무리 후기지수 중 첫손가락에 꼽힌다고 하는 자신의 무공이라 해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남궁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저들은 본능적으로 강력한 영기에 이끌리니 그렇게 자극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구해 드릴 테니 잠시만…….”
“으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 가까이 오지 마!”
그러나, 남궁휘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기괴한 몰골의 흑마부대가 제게 돌진하는 것을 본 청하는 기절초풍할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손에 들고 있던 창천검을 사방을 향해 마구 휘둘러 대었다. 창천검에서 튀어나온 새파랗게 타오르는 강력한 영기가 폭풍처럼 좁은 동굴 안에 휘몰아쳤다.
남궁휘는 세상이 뒤흔들리는 듯한 영기의 폭풍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류검에 의지한 채 간신히 동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흑마부대는 청하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고 강력한 영기의 소용돌이에 넝마처럼 찢겨 나가 버렸다.
콰콰콰콰쾅!
단단한 동굴 벽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남궁휘와 청하가 있는 쪽은 강력한 영기의 보호 덕분에 멀쩡했으나, 반대편 쪽의 동굴은 무너져 내리는 돌에 뒤덮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안에서 멀쩡히 움직이는 것은 남궁휘와 청하밖에 남지 않았다. 남궁휘는 얼이 빠진 얼굴로 갈가리 찢겨진 채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는 흑마부대의 잔재를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남궁휘의 시선이 천천히 그 전투, 아니, 일방적인 학살의 중심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청하는 창천검을 들고 있는 손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나 청하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것은 힘들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남아 있는 공포감의 잔재 때문이었다. 이, 이제 더 없겠지? 그 시꺼먼 괴물 같은 거…… 이제 더는 안 나오겠지? 사방을 불안하게 두리번거리던 청하의 시선이 저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남궁휘의 것과 부딪쳤다.
남궁휘의 입술이 멍하게 벌어졌다. 남궁휘의 시선이 청하의 백옥 같은 흰 이마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에 가 닿았다. 약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남자의 늘씬한 몸을 휘감고 있는 옅은 푸른색 장포에는 주름 한 점 잡혀 있지 않았다. 느슨하게 한 손에 쥔 장검을 늘어뜨리고 있는 자태가 한 그루의 버드나무처럼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막 엄청난 영기를 방출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또 다른 적의 습격을 대비해 사방을 둘러보는 눈매가 서늘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이런 사람이 강호에 흔할 리가 없다. 아무리 이 무림에 실력을 숨긴 은둔 고수가 별처럼 많다지만, 이토록 강력한 영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절정 고수가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할 리는 없는 것이다. 온 사방을 가득 메우던 강력한 푸른 영기. 백옥같이 아름다운 얼굴과 서늘하게 내리깐 눈매. 버드나무처럼 늘씬한 몸과 우아하게 휘날리던 소맷자락.
남궁휘의 시선이 천천히 청하가 들고 있던 검에게로 향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저 푸르게 시린 검날과 그 주인만큼이나 우아한 검신의 자태는 분명 그 이름 높은 ‘창천’이다.
적막한 동굴 속에 남궁휘의 떨리는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청루각주 백청하…….”
* * *
청하와 남궁휘가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동굴 입구 앞에서는 벌써 백진과 청연, 그리고 제갈서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굴 일부가 무너지면서 입구를 가리고 있던 환영진법도 깨진 듯했다. 제갈서윤이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안에 뭐가 있었어?”
청하가 막 입을 열기도 전에 남궁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동굴 안에는 마교의 흑마부대가 있었습니다. 수백은 되는 숫자더군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일행들의 표정을 훑어보며, 남궁휘가 청하 쪽을 돌아보았다. 남궁휘의 눈이 아까 전보다도 더욱 뜨겁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청루각주님의 고강한 무공이 아니었다면,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일행의 시선이 동시에 청하에게로 향했다. 청하는 그저 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정말 할 말이 없구먼그래. 청하는 저를 향해 뜨거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남궁휘와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애꿎은 눈동자만을 이리저리 굴렸다.
방금 전, 청하의 정체를 눈치채자마자, 남궁휘는 즉시 청하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청루각주님이셨군요. 미처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결례가 많았습니다.”
뜻밖의 정중한 사과에 청하는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어색하게 남궁휘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내, 내가 일부러 밝히지 않았던 것이니 이렇게 사과할 필요 없다.”
청하는 남궁휘가 제게 필요 이상으로 친근하게 굴었던 것을 사과하는 줄 알았으나, 번쩍 고개를 치켜든 남궁휘의 눈은 아까 전보다도 더욱 기묘한 열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주춤거리는 청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남궁휘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청루각주님을 언젠가는 한번 꼭 만나 뵙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하긴,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세상에 흔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명성만큼이나 대단한 무공을 볼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선배님. 아…….”
남궁휘가 살짝 머뭇거리더니 슬쩍 청하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고는 다분히 의식적인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저…… 지금까지처럼 계속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러면서 청하를 향해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것이다. 남궁휘의 어깨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청하는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그럼, 되고말고.”
“감사합니다, 선배님.”
남궁휘가 생긋 미소 지었다. 청하는 자신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에 청하의 몸이 약간 휘청거렸다.
“선배님? 괜찮으신가요?”
남궁휘가 재빨리 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놀란 듯 걱정스럽게 물었다.
“괘, 괜찮다.”
청하는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갑작스레 폭발하듯 영기를 방출한 탓에 기가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공포에 질려 힘 조절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영기 없는 영기 다 끌어다가 마구 휘둘러 버렸으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청하는 운기조식을 할 때처럼 내공을 운용하여 흐트러진 기를 바로잡으려 해 보았으나, 갑작스러운 대량의 영기 방출로 인해 이미 한참 전에 전달받았던 청연과 백진의 영기는 매우 옅어져 있었다.
생각하는 것만큼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내공에 당황하는 청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남궁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선배님.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뭐? 아, 아니, 괜찮네.”
“정말 괜찮으세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신 거라면…….”
남궁휘가 말끝을 흐리며 갑자기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청하의 시선도 그를 향하자, 남궁휘는 눈꼬리를 접어 예쁘게 미소 지으며 청하의 손을 슬쩍 잡아 왔다.
“저를 마음껏 이용해 주세요.”
……이거는…… 좀 위험한 발언 아닌가.
저런 얼굴로 저런 대사를 치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희미한 청소년 관람 불가 딱지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은 착시마저 드는데……. 청하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으나, 어쨌든 남궁휘는 정말로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통 기의 흐름이 안정되지 않자 청하도 약간 초조해졌다. 자연스럽게 영기를 순환시키면 별 탈 없이 해결될 일이었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괜히 일을 키우게 될 수도 있었다. 청하가 망설이며 슬쩍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그…… 정말 괜찮은가? 자네는 청루각원도 아닌데…….”
그러나 남궁휘는 생긋 미소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예, 정말 괜찮습니다. 선배님처럼 아름답고 강하신 분이라면 괜찮아요.”
그래…… 정말 캐릭터성 확고하구나.
청하는 대체 남궁휘가 언제부터 저런 외모 지상주의자가 되었는지 생각하며 영혼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설…… 아니, 이제 내게는 소설이 아니지만, 어쨌든 이 세계관,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원작에서 남궁휘가 주세민이랑 이어졌던 것도 주세민이 그렇게나 잘생긴 미남이라는 설정이 붙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예쁜 것에 상당히 집착하는 성격인 것 같은데…….
어쨌든, 청하는 별말 없이 아직도 제 손을 붙잡고 있는 남궁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뭐,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까 괜찮겠지. 남궁휘가 이쪽으로 몇 걸음 더 가까이 내딛었을 때, 청하는 다른 쪽 손으로 남궁휘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남궁휘는 상당히 키가 컸기 때문에 청하는 약간 고개를 치켜들어야만 했다. 마음껏 저를 이용하셔도 좋다느니 어쨌다느니, 그런 위험한 발언을 내뱉은 것치고 남궁휘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제자리에 굳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긴장한 건가? 청하도 고작해야 키스 몇 번 해 봤을 뿐이었지만, 그것도 경험이랍시고 잔뜩 굳어 있는 남궁휘의 반응을 보며 왠지 좀 귀여운 기분이 들었다.
어지럼증이 가실 정도만 살짝 입술을 붙였다가 뗄 예정이었던 청하는,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 고개를 꺾으며 남궁휘의 입술에 제 입술을 깊게 묻었다. 나중에 가면 주세민이랑 더한 짓도 할 테니까 지금 뭐 이 정도 키스하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이참에 조금만 더 영기 보충을 해야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청하는 제 목이 뒤로 확 꺾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순식간에 단단한 혀가 입 안으로 마구 밀고 들어오며 숨이 턱 막혀 왔다.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지 못하는 몸이 남궁휘의 팔 안에 단단히 갇히더니, 등이 딱딱한 동굴 벽에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등을 감싸고 있던 팔 덕분에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숨이 막혀 어지럽던 차에 충격까지 더해지자 청하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청하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남궁휘는 청하를 동굴 벽에 밀어붙이며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무…… 뭐, 잠깐…….”
“선배님…… 선배님, 너무 예뻐요…….”
“아, 잠, 흡, 그, 그만…….”
“선배님…… 대체 어떻게 그렇게 예쁘신데 강하기까지 하신 거죠?”
남궁휘가 홀린 듯이 중얼거리며 청하의 입 안 좁은 틈으로 자꾸만 혀를 밀어 넣었다. 자꾸만 짓쳐들어오는 혀를 피하고 싶었으나 뒤통수를 단단히 받친 손에 막혀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고개가 뒤로 꺾여 버릴 정도로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행위에 청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야, 이 녀석…… 숙맥인 줄 알았는데, 하윽, 젠장…….’
이거 혹시 좀 잘못 건드린 거 아냐? 청하가 가슴속에 차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후회막심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을 무렵 마침 두 사람의 입술이 슬쩍 떨어지며 틈이 벌어졌다. 청하는 정신없이 헐떡거리며 부족한 산소를 빨아들이느라 바빴으나, 남궁휘는 그 틈을 타 어딘가 모르게 들뜬 듯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선배님…… 제가 듣기로 청루각의 무공 수련법은 남자와 남자 간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들었는데요. 저는 옛날부터 그 원리가 무척 궁금했었습니다.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남궁휘의 손이 마치 간질이듯 청하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단정하게 여며진 옷깃 안쪽의 여린 살을 슬쩍슬쩍 파고드는 손가락이 엉큼한 듯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 이 녀석이…… 청하는 헐떡거리는 와중에도 매섭게 남궁휘를 노려보았으나 남궁휘는 그저 꿀이 떨어지는 것같이 아름다운 눈웃음을 사르르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남궁휘의 입술이 청하의 입가에 어리광 부리듯 문질러졌다.
“네? 저에게도 알려 주세요, 선배님. 너무 궁금해요…….”
입가를 지분거리던 남궁휘의 입술이 그대로 청하의 단정한 턱을 타고 부드러운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옷깃을 젖혔고, 살짝 드러난 흰 쇄골에 이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우아한 목선에 입맞춤이 잇따라 내려앉았다.
“아, 자, 잠깐…….”
청하는 당황한 듯 간지러운 느낌에 목을 움츠리며 제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오는 남궁휘를 밀어내려 하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궁휘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외부인이라 알려 주시지 않는 건가요? 네? 대답도 하시지 않다니 너무하세요.”
“아, 아니, 그게…….”
아니, 내가 뭘 알아야 알려 주든가 말든가 하지! 청하는 억울함에 가슴을 쳤다. 나도 모른다고! 청루각 심법의 원리 따위 알게 뭐냐, 어차피 남자들끼리 그 짓 하려고 만들어 낸 설정인데.
하지만 서운하다는 듯 애교를 부리며 제 목덜미에 입술을 비벼 대는 남궁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정말 무언가 굉장히 매정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청하는 왠지 가슴 한편이 불편해졌다.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고 있던 청하는 문득 무언가 허리, 아니, 그보다도 훨씬 아래쪽에서 약간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이게 뭐지?’
남궁휘의 애처로운 얼굴에 정신이 팔려 있는 와중에도 청하는 이상함을 느끼고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남궁휘의 팔에 갇혀 동굴 벽에 밀어붙여진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다시 한번 더 아래쪽에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청하의 엉덩이에서. 그와 동시에, 청하는 무언가 단단한 것이 제 허벅지에 닿아 오는 것을 느꼈다.
옷을 거의 벗겨 낼 듯한 기세로 제 목덜미에 자꾸만 입술을 쪽쪽거리고 있는 남궁휘의 얼굴을 간신히 밀어내며, 청하가 기함을 한 채 소리쳤다.
“야, 너, 너…… 손 안 치워?”
“선배님…….”
“선배는 무슨 얼어 죽을, 야! 엉덩이에서 손 떼! 그, 그리고 너, 허, 허벅지에 이건 뭐야! 검이야? 어?”
그 순간, 청하의 머릿속에는 청루각주로서의 위엄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청하는 그야말로 기가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얘는 원작의 주인수 아니었어? 대체 남의 엉덩이는 왜 주물럭거리는 거야?! 니 엉덩이 만질 사람은 따로 있다고! 그, 그리고 자꾸 내 허벅지에 문지르고 있는 이, 이건 뭔데!’
그러나 남궁휘는 태연히 청하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놓지도 않은 채 또다시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청루각의 심법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남자와 교합해야 한다 들었습니다만…… 아닙니까?”
동시에 남궁휘의 두 손이 청하의 동그란 엉덩이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청하의 가랑이 사이로 남궁휘의 단단한 허벅지가 밀고 들어오자, 순식간에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두 사람의 하체가 딱 밀착되었다. 제 민감한 곳을 아무렇게나 문질러 대는 단단한 허벅지의 감촉에, 청하는 저도 모르게 파드득 진저리치며 몸을 떨었다.
오싹한 감각이 저 아래에서부터 날카롭게 척추를 따라 달렸다. 잇새로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황급히 입술을 깨물어 간신히 참아 낸 청하가 기겁하여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잠깐, 그, 그러니까 난 너랑 안 해! 안 할 거라고! 좀 저리 떨어져!”
청하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궁휘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왜죠?”
청하는 말문이 막혀 입술만을 뻥긋거렸다.
왜냐니?! 왜냐니?! 아니, 일단 여긴 야외고, 마교 놈들의 소굴이고, 다 쓸어 버린 것 같기는 해도 뭐가 더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너랑 나는 좀 전에 오늘 처음 만났고, 너는 원래 공이 아니라 수고, 그것도 원작의 주인수고, 마교주 주세민이랑 이어져야 하고, 젠장, 이유가 너무 많아서 뭐부터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청하는 결국 입술을 달싹거리다 겨우 그 말만을 뱉어 내었다.
“나는…… 아무하고나 그런 걸 하지 않아!”
“네……? 그런…….”
남궁휘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노골적으로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네가 왜?! 남궁휘가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으로 청하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아쉽네요…… 선배님은 정말 제 이상형이신데…… 저는 예쁘고 강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선배님께서는 제가 만나 본 사람 중에 제일 예쁘고 제일 강한 분이세요.”
남궁휘가 들뜬 목소리로 속삭이며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살풋 미소 지었다. 청하는 갑작스레 쏟아지는 폭탄 고백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아니…… 주세민이랑 이어져야 할 애가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 아무것도 못 들었다……. 청하는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어…… 어찌 되었든, 그러니까 좀 떨어져…… 떨어지거라!”
남궁휘가 무척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적거리며 청하에게서 제 몸을 떼어 놓았다. 청하는 얼른 흐트러진 옷자락을 탁탁 털어 내며 경계의 눈초리로 남궁휘를 힐끗 노려보았다. 그가 움켜잡았던 엉덩이 쪽은 특히 신경 써서 털어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궁휘가 청하의 눈치를 살피며 헤헤, 귀엽게 눈꼬리를 접어 미소 지었다.
옷 정리가 끝나자, 청하는 남궁휘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그들이 들어왔던 출구 방향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선배님, 같이 가요.”
남궁휘가 애교 있는 목소리로 붙임성 있게 말하며 청하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지만, 청하는 그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내가 저 얼굴에 다시는 속나 봐라. 청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청하와 남궁휘가 동굴을 빠져나가 다른 이들과 함께 양산을 내려가고도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났을 무렵, 반쯤 무너진 동굴에 검은 옷을 입은 몇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전신을 검은 옷으로 가린 것도 모자라, 얼굴까지 검은 복면으로 가린 사내 몇 명이 처참하게 무너진 동굴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중 한 명이 무너진 동굴 벽 앞에 우뚝 서 있던 키가 큰 남자를 향해 말했다.
“흑마부대의 흔적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키가 큰 사내는 말없이 남자가 가리킨 바닥의 넝마 조각 같은 흑마부대의 흔적을 힐끗 바라보았다. 붉은 기운이 서린 눈동자가 다시금 말없이 그가 바라보고 있던 무너진 동굴 벽에 가 닿았다.
마치 거대한 맹수의 발톱에 사정없이 찢겨진 것처럼, 수없이 많은 날카로운 검상이 동굴 벽에 새겨져 있었다. 강력한 영기를 실어 내려친 영검의 흔적이다. 동굴 한쪽을 막고 있는 커다란 돌들은 모두 종잇장처럼 날카롭게 찢겨 나가 있었다. 그 엄청난 영기의 흔적에 동굴 안을 조사하고 있던 복면 사내들의 얼굴에도 사뭇 긴장감이 어렸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쪽 동굴은 완전히 무너져 더 이상의 정보는 찾기 어렵습니다. 흑마부대 실험의 흔적들도 전부 저 안에 같이 매몰되어 버린 듯합니다.”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붉은 눈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한발 늦었군.”
그리 높지는 않았으나 서릿발 같은 위압감이 어린 목소리였다. 남자의 앞에서 상황을 보고하던 복면 사내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가 즉시 남자의 앞에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교주님.”
그러나 교주라 불린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굴 벽에 깊게 패인 영기의 흔적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다. 이미 시간이 꽤 흘러 기운은 상당히 옅어져 있었으나, 남자는 집요하게 청아한 냉기가 느껴지는 영기의 흔적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겨울 하늘처럼 푸르고 빙하처럼 서늘한 영기를 내뿜던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자의 손가락이 동굴 벽에 남아 있는 푸른 영기의 잔재를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남자의 눈동자에 어린 붉은빛이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