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그러니까…… 너도 따라간다고?”
“그렇다니까.”
“너는…… 진짜 되게 한가한가 보다.”
“네 몸 상태 때문이잖아!”
“글쎄 난 괜찮다니까 자꾸 그러네.”
청하는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갈서윤은 청하의 앞에서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재미있다는 듯 싱글거리는 웃음만을 짓고 있었다.
청하는 결국 그 뻔뻔한 얼굴에 대고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이쪽의 상황은 더욱 좋지 못했다. 백진과 청연이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청하가 한숨을 쉬며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행 준비는 잘하셨습니까.”
일단 아무것이나 생각나는 대로 말을 던지자, 청연이 언제나처럼 감탄이 나올 정도의 표정 변화를 보여 주며 청하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각주님께서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쳐 놓았습니다.”
“아, 하하…… 그,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님. 혹시 필요하신 물건이 있다면 지체 없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질세라 백진이 단정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진과 청연의 불꽃 튀는 시선이 다시 한번 더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격돌했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괜찮다고…… 너네들 여행 준비 잘했냐고 물어보는데 대체 왜 내 얘기를 자꾸 하는 거야……. 청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무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태선각 앞의 넓은 앞마당은 청하를 비롯한 그 일행들의 출발을 배웅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모여든 각원들로 꽉 차 있었다. 출발할 인원은 총 네 명. 청하와 사백진, 그리고 진청연과 제갈서윤이었다.
이번 비무대회에는 각주가 직접 참가하므로, 청루각에서는 그 외의 참가자들은 그렇게 많이 보낼 생각이 없었다. 청하를 제외하고는 그의 수석 제자인 백진만이 청루각 출신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이 이 일행에 끼어들게 된 사정은 이렇다.
청하가 비무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청연은 제가 그의 호위로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대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청루각주가 이 강호에서 무슨 호위가 필요하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청연은 마교의 무리들이 또 청하를 노릴까 걱정된다며 끝까지 자신이 청하를 호위하겠다고 주장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제갈서윤 역시 청하의 몸 상태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자신도 비무대회가 열리는 양주의 화양성까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파티가 결성된 것이다. 청하는 벌써부터 비무대회까지의 여정이 꽤나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진과 청연은 출발을 하기도 전부터 벌써 서로를 향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고, 서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청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청하와 청연이 모두 청루각을 비울 동안 문파를 책임질 청루각의 3인자, 날카로운 인상의 연청단이 앞으로 나서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각주님, 소각주님. 저희들은 걱정 마시고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십시오.”
다른 제자들도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청하 일행의 건승을 빌었다. 청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꼭 우승하십시오!”
“도원맹의 기를 팍 꺾어 주십시오!”
“오실 때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오세요!”
마지막에 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청하와 그 일행들은 제자들의 뜨거운 배웅을 받으며 어검에 올라탔다. 넷은 비무대회가 열리는 양주 방향으로 열을 맞춰 날아갔다.
사실 청하가 어검을 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검을 타기 위해서는 당연히 영기가 필요했으므로, 출발하기 전에 이미 백진을 통해 영기를 주입받은 후였다.
지난번 입맞춤 이후로 백진과는 아직 한 번도 그 정도 수준의 영기 교환을 한 적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무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저를 빤히 바라보는 백진의 시선을 간신히 외면하며, 청하는 우선 간단한 접촉을 통한 약간의 영기만을 전달받았다. 어검을 운용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영기가 소모될지는 가면서 직접 살펴볼 생각이었다.
‘아니, 생각보다 영기가 꽤 많이 필요하잖아?’
혹시나 떨어지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하는 마음으로 어검에 올라타 있던 청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검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검을 허공에 띄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공중에서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보호막도 만들어야 했고, 필요하다면 같이 움직이는 일행들과 전음도 나누어야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소모되는 영기에, 청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어딘가에서 잠시 쉬어가야 할 것 같았다.
유일하게 청하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있던 백진이 허공 너머로 염려스러운 시선을 보내었다. 약간의 멀미 기운까지 더하여 얼굴이 조금 하얗게 질려 있던 청하는, 출발한 지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무렵 백진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잠시 쉬어 가자꾸나.>
지난번 마교의 무리들이 청루각에 불쑥 들이닥친 이후로, 청하는 청연과 백진의 도움을 받아 전음을 보내는 법을 막 익힌 참이었다. 아직 전음에 익숙지 않아 꽤 정신을 집중해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음은 별 무리 없이 매끄럽게 백진에게 전달되었다.
청하의 전음을 들은 백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침 아래에 보이는 자그마한 성 쪽으로 어검의 방향을 돌렸다.
“음? 벌써 쉬는 거야?”
서윤이 백진을 돌아보며 의아하다는 듯 외쳤다. 청하가 잽싸게 대답했다.
<출발하기 전에 식사를 하지 않았더니 약간 시장하군. 잠깐 쉬었다 가지.>
서윤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청하처럼 절정에 이른 고수가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이미 문하생 시절에 벽곡 수련을 끝내고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아도 되는 신체를 가지게 된 청하였기에, 서윤은 그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청하는 그런 서윤을 모른 척 외면하며 백진의 뒤를 따라 빠르게 마을 쪽으로 향했다.
지상에 가까이 내려와서 보니, 이곳은 그래도 나름대로 있을 것은 다 갖춘 소규모 도시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곳의 지리를 전혀 모르는 청하가 자연스럽게 무리 중에 가장 똑똑해 보이는 청연을 돌아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학자 같은 분위기가 있는 청연은, 과연 청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즉각 입을 열었다.
“의주 근처에 있는 양현이라는 곳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게 말해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청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성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아닌 강호인들의 등장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객잔으로 가는 거야?”
서윤이 배가 고프다고 했던 청하의 말을 떠올리는 듯 그렇게 물었다. 흠, 영기를 보충하려면 아무래도 좀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좋겠지? 객잔이면 방도 있을 것이다. 아직 점심도 되지 않은 시간에 방을 잡는 것이 조금 부자연스럽긴 했지만, 잠깐 조용히 쉬다 가고 싶다고 하면 되겠지. 청하가 서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객잔이 있을까?”
“지난번에 지나가다가 이곳 객잔에 들렀던 적 있어. 따라와.”
서윤이 앞장서서 아는 객잔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청하는 군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청하 일행이 작지만 깔끔한 객잔의 입구로 들어서자, 점소이가 구르듯이 뛰쳐나와 그들의 앞에 허리를 조아렸다.
“어, 어서 오십쇼, 나으리들. 하이구, 귀하신 분들이 이런 곳엘 다 오시고…….”
“방 있나?”
청하가 끝도 없이 이어지려는 점소이의 아부를 자르며 용건을 말했다. 순간, 나머지 세 명의 시선이 일제히 청하를 향했다.
“방을 잡으려 하십니까?”
청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청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아무래도 식당 쪽은 시끄러울 듯하여…… 아, 간단한 식사도 방으로 올려 주게.”
청하에게서 동전을 받아 든 점소이는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며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방이 좀 작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2인실뿐이라……. 네 분이 모두 쓰실 거라면 두 개 드릴까요?”
“흠, 나는 굳이 방에서 쉬지 않아도 되니 밖에서 기다릴게. 주변도 좀 둘러보고.”
서윤이 쿨하게 말하며 밖으로 향했다. 청하는 청연을 돌아보았으나 그는 별로 자리를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같이 올라가시죠.”
그러면서 청연은 도리어 백진을 향해 눈치를 주는 것이다. 마치 네가 알아서 자리를 피하라는 듯한 눈짓이었다. 그러나 청하가 무엇 때문에 쉬는지 알고 있는 백진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백진은 청연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단정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꿋꿋이 청하의 뒤를 따라 기어이 방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눈치 빠른 점소이가 하하, 편히 쉬십시오, 하는 비즈니스적인 멘트만을 남기고 재빨리 자리를 피하자, 방 안에는 멀뚱하게 선 세 남자만이 남았다. 방은 과연 점소이가 말했던 대로 그리 넓지 않았다. 좁은 침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사이에 작은 탁자 하나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체격이 별로 작지도 않은 남정네 셋이 들어서자, 그것만으로도 이미 방이 꽉 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하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침상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남은 것은 반대편에 있는 침상 하나와 서로를 향해 불편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남자 둘이었다. 청하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소각주도 어디 좀 앉으시지요. 백진, 너도.”
청연이 냉큼 청하의 옆에 앉기 위해 얼른 발걸음을 떼어 놓았으나, 그것은 백진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방향으로 황급히 움직이던 두 남자의 몸이 좁은 방 안에서 부딪쳤다. 단숨에 싸늘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한 청연이 짜증 난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라.”
“저도 이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백진도 담담하지만 물러서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연의 눈빛이 좀 더 험악해졌다. 부드럽고 지적인 얼굴과는 달리, 약간 억눌린 듯한 음산하고 살벌한 목소리가 청연의 꽉 다문 잇새 사이로 흘러나왔다.
“네 스승의 얼굴을 보아 예전부터 참고 있었다만, 네 녀석이 방자함이 도가 지나치지 않느냐.”
“그저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말씀드렸을 뿐인데, 무엇이 방자하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녕 이 사백(師伯)의 가르침을 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다면, 내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저로서야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청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벌써부터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둘을 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정말. 청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모두.”
청연과 백진의 얼굴이 동시에 이쪽으로 휙 향했다. 둘 다 똑같이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억울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것이 어쩜 그리도 비슷해 보이는지, 청하는 기가 막혔다.
“계속 그렇게 소란을 일으킬 것이라면, 둘 다 나가서 싸워.”
청하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청연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백진은 단숨에 불쌍한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백진이 속삭이듯 말하며 청하의 옆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청하의 소맷자락을 조심스럽게 붙잡은 백진이 약간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기 공급을 하셔야 하잖아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으나 진청연 정도 되는 고수가 그 말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가 청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청하는 약간 망설였다. 제 몸의 상태를 청연에게 알려 줘도 되는 것일까? 아직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비무대회가 열리는 화양성까지는 한참이나 남은 상황이었다. 며칠이나 더 이동해야 하는데,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는 청연의 눈을 끝까지 속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청연이 제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할 것 같지도 않고……. 결국 마음을 정한 청하가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을 잃은 이후로 영기를 운용하는 부분에서 약간 문제가 생겨, 다른 사람의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 지금은 타인의 영기를 전달받아 그것을 이용해서 제 내공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어검을 타고 계속 이동하려면 다른 사람의 영기를 지속적으로 보충해야 합니다.”
청하는 청연이 그 말을 듣고 꽤나 놀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청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군요.”
음……? 그게 끝이야? 청하는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청연은 그 이상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연은 태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영기가 필요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청연은 냉큼 백진이 붙어 앉은 반대편에 앉아 청하의 다른 쪽 소맷자락을 움켜쥐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소맷자락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청연의 행동에, 청하의 몸이 부지불식간에 그쪽으로 기울었다.
“아뇨,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마교의 독에서 깨어나신 이후로 줄곧 제가 도와드렸으니까요.”
청하의 몸이 저쪽으로 기울기가 무섭게 곧장 반대쪽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백진도 청하의 소맷자락을 꽉 붙들고 제 쪽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졸지에 청하는 두 사람에게 각각 양팔을 하나씩 붙잡힌 채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신세가 되었다.
아니, 젠장, 이게 뭐야! 무슨 개껌 하나를 두고 양쪽에서 물어뜯는 강아지들도 아니고……. 아닌 게 아니라, 이대로 가다가는 조금 있으면 제 몸이 개껌처럼 찢어지게 될 판이다. 청하는 어쩔 수 없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타협점을 제시했다.
“그, 그만! 그만! 그러면 번갈아 가면서 하자, 번갈아 가면서! 그러면 됐지?”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청하가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돌아보았다.
둘 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으나 현실적으로 청하의 제안이 유일한 타협점이라고 생각한 듯, 다행스럽게도 반박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청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누가 먼저…….”
“혹시 오늘 출발하기 전에 저 녀석이 영기를 넣어 주지 않았습니까?”
청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가 백진을 향해 턱을 치켜들며 당당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제 차례이지요.”
백진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청하는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청하가 백진을 돌아보았다.
“백진.”
“스승님.”
백진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청하의 소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청하는 단정한 눈썹을 늘어뜨리고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백진의 얼굴을 애써 외면한 채, 마음을 다잡으며 문을 향해 눈짓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백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덜터덜 문을 향해 걸어가는 백진의 축 처진 뒷모습을 보며, 청하는 정말 비합리적이기 짝이 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아니, 왜 내가 죄 없는 강아지를 문밖으로 쫓아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하냐고!
백진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마자, 청연은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청하를 제 쪽으로 휙 잡아당겼다. 휘청거리던 청하의 몸이 자연스럽게 청연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약간의 감정이 실린 듯한 손길에 청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청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내게 집중해 주렴, 청하야.”
청연의 손이 청하의 귓바퀴를 가볍게 스치며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청연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청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그, 저, 아, 사, 사형…….”
“입맞춤도 싫은 게냐? 지난번 저 녀석과는 한 것 같더니.”
청연의 엄지손가락이 청하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눌렀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청하의 입술을 가만히 응시하는 청연의 시선은 어딘가 약간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청연이 속삭이듯 말했다.
“어검을 계속 타고 가려면 상당한 영기가 필요할 텐데, 단순한 접촉만으로는 영기 보충이 너무 자주 필요할 것 같구나.”
그건 그렇긴 했다. 청하는 약간 망설이며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어차피 백진과도 입을 맞췄는데, 굳이 청연이라고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지난번 운기조식 이후로 알게 모르게 청연에게 마음을 많이 열게 된 청하는 결국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청연의 입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청하는 청연의 입술이 제게 닿을 때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입술에 와 닿는 청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청연의 혀가 부드럽게 입술을 쓸어오자, 청하는 머뭇머뭇 입을 벌렸다. 다음 순간, 순식간에 혀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읏…….”
청하가 순간적으로 숨 막히는 소리를 내었다. 청연이 부드럽게 안쪽으로 파고들며 청하의 입 안을 샅샅이 자극해 대었다. 백진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식의 키스도 아니었고, 결코 급하게 서두르거나 성급하게 재촉해 대지도 않았지만, 청하는 청연의 입맞춤이 벅찼다. 그는 너무 집요했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이 청하의 입천장을 문지르듯 훑어 내려갔다. 단단한 잇몸과 부드러운 점막이 청연의 혀 아래에서 뭉그러진다. 뒤로 물러나 움찔거리는 혀를 집요하게 휘감고, 그 아래에 고인 타액을 훔쳐 내었다. 청하의 입술 사이로 절로 숨 막힌 듯한 콧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흐으, 흡, 자, 잠깐…… 사형…….”
그러나 청연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침상 위에 나란히 앉아 시작되었던 입맞춤이었으나, 어느새 청하의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침상 위에 손을 짚어 완전히 뒤로 넘어가는 것은 막았지만, 청연의 입맞춤이 더욱 깊어지며 그의 혀가 저 안쪽 좁은 틈새로 집요하게 파고들자 부지불식간에 침상을 짚고 있던 청하의 팔이 풀썩 꺾였다.
“아읏……!”
그대로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청연의 팔이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침상을 짚고 있던 손목은 청연의 커다란 손아귀 안에 틀어쥐어졌다. 어느새 청하는 청연의 품에 무방비하게 갇힌 채 온몸으로 그의 입술을 받아 내고 있었다. 부드럽게 시작하여 점점 젖어 들듯 깊어지던 입맞춤이 언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청하가 자꾸만 입술 밖으로 흘러넘치려는 타액을 간신히 삼켜 내며 청연의 팔을 붙들었다.
“그, 이, 이제, 그, 그만…… 사형, 그만…….”
청하의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된 뒤에야, 청연은 집요하게 빨아들이던 청하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붉게 달아오른 입술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과 살짝 눈물이 고인 눈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청연은, 그때까지도 청하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제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목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떼어 내자, 하얗고 우아한 손목에 빨갛게 손자국이 남았다.
“아.”
힘이 들어갔던 팔을 풀고 청하를 놓아주는 청연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왠지 모를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청연은 손목에 발갛게 남은 손자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하가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간신히 말을 뱉어 내었다.
“이, 이 정도면 이제 충분할 듯합니다.”
약간의 미련이 남은 눈으로 청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연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
청연의 손이 아직도 붉게 달아오른 청하의 뺨을 쓸어내렸으나, 청하는 살짝 뒤로 몸을 물리며 청연의 손길을 피했다. 왠지 모르게 몸이 좀 달아오른 듯한 기분이 들어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다. 청연은 허공에서 갈 곳을 잃은 손을 잠시 멈칫거리다가 순순히 손을 거두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 쉬다 내려오거라.”
아직도 숨을 고르고 있는 청하를 뒤에 남겨 두고, 청연은 문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청연이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팔짱을 낀 채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인영이 있었다. 어두운 복도의 그늘에 상체를 반쯤 숨기고 있는 인영의 옅은 갈색 눈동자에서 차분하게 빛나는 안광만이 번쩍였다. 청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문밖으로 쫓겨난 강아지가 주인이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냐?”
백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범생같이 얌전한 이목구비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눈매와 꽉 다문 입술 아래로 도드라진 단단한 턱이 그의 심기를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청연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백진을 스쳐 지나갔다. 청연이 백진을 거의 지나치려는 순간, 백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을 자꾸 독점하려 하지 마십시오.”
청연의 걸음이 멈추었다. 눈동자만을 돌려 백진을 노려보는 청연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빙하보다도 더 싸늘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제 스승에게 흑심을 품는 파렴치한 개새끼만 할까.”
무인보다는 문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단정한 입매에서 흘러나온 거친 말에, 백진의 턱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청연이 멈추지 않고 말했다.
“네 스승이 어째서 너하고만은 관계를 가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저는 잊지 않았으나 스승님께선 그 이유를 잊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청하는 다를 거라 생각하는 거냐?”
청연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요즘 청하가 조금 다정하게 대해 준다고 해서 착각하지 마라. 청하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
청연이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겨 놓았다. 백진의 등 뒤로 점점 멀어져 가는 청연으로부터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감히 그의 마음을 탐하려 하지 마라.”
그것은 경고이자 동시에 다짐이었다. 백진은 청연의 말에 저를 향한 경고와 스스로를 향한 자책의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둔통이 다시금 백진의 가슴을 스쳤다.
백진은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듯 우뚝 선 채 언제나처럼 담담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윽고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간 백진은, 결국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방문에 손을 가져갔다.
“들어가겠습니다, 스승님.”
천천히 열리는 문 너머에는 이제 막 밖으로 나오려던 듯, 허공에 손을 들어 올린 채 어정쩡하게 멈춰 서 있던 청하의 모습이 있었다. 옅은 푸른색 장포로 감싸여 있는 버드나무처럼 늘씬한 몸이 백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방금 의복을 다시 단장한 듯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에는 흐트러짐 한 점 없었으나, 붉게 달아오른 채 부풀어 있는 입술은 누가 보아도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능히 짐작하게 했다. 백진의 눈동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아…… 그렇지 않아도 방금 나가려고 했단다.”
청하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백진을 향해 조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늘한 미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리자 좁은 방 안에 갇힌 공기마저 그 색을 달리하는 듯했다. 백진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청루각주 백청하는 절대 저런 얼굴로 웃지 않았다. 저런 미소를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허공에 어색하게 멈춰 있던 청하의 손목에 가 닿았다. 흰 피부에 남은 새빨간 자국이 그의 속을 알 수 없는 온도로 들끓게 했다.
저도 모르게 백진이 방 안으로 성큼, 다가들었다.
“스승님.”
백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청하의 턱으로 손을 올렸다. 백진의 손가락이 붉게 부어오른 청하의 입술 근처를 살며시 더듬었다. 청하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백진은 제 목소리가 너무 갈라지지 않도록 목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뱉었다.
“이리 나가시면…… 곤란해지실 수 있습니다.”
본디 백청하는 절대로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내들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가졌든, 남들의 앞에 나설 때는 그 무엇 하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하고 고고한 빙설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청하는 어딘가 모르게 둔한 듯 허술했고, 경계심 많은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토록 무방비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청하가 예전처럼 감히 손도 뻗지 못할 정도로 차갑고 높은 곳에 있는 얼음 같았더라면. 백진의 입술이 바싹 말라 왔다. 자꾸만 밖으로 넘쳐 흐르는 욕심이 백진의 발아래에 진득하게 고여 들었다.
백진의 손가락이 청하의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스쳤다.
“제가…… 치료를 도와드리겠습니다.”
백진의 입술이 타액으로 촉촉한 청하의 입술에 슬며시 내려앉았다. 백진의 등 뒤로 소리도 없이 문이 다시 스르륵 닫혔다.
청하가 다시 객잔의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점소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분주하게 온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자그마한 객잔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바삐 뛰어다니는 일꾼들을 피해 청연이 앉아 있는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백진의 ‘치료’ 이후, 청하의 입술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짱해져 있었다.
‘문제는 과연 그 ‘치료’라는 걸 그런 식으로 해야 하느냐, 이 말이지.’
청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제 뒤를 따르고 있는 백진을 슬쩍 곁눈질했다. 백진은 언제나처럼 순한 강아지 같은 눈매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한 뻔뻔스러운 얼굴에 청하는 그저 속으로 한숨만을 내뱉었다. 영기를 운용해서 외상을 치유하는 방법이라면 그냥 말로 알려 줬어도 되지 않나? 이미 좀 전에 청연이 한참 동안이나 입술을 물고 빨아서 몸 안에 내공이라면 넘쳐 나는데……. 말로만 설명했어도 내가 알아서 잘할 수 있었겠구먼.
하지만 백진은 굳이 다시 한번 더 그와 입술을 겹치며, 청하의 몸속에 불어넣은 제 영기로 그의 부어오른 입술과 손목을 치료해 주었다. 그 알 수 없는 고집에 청하는 그저 고개만을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몸 안에는 몇 시간 동안의 어검 여행도 끄떡없을 만한 영기가 가득했다.
청하가 청연이 미리 앉아 있던 탁자에 자리를 잡자, 백진 역시 묵묵히 그 옆에 앉았다. 잠시 소맷자락을 정리하던 청하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로 객잔이 이리 소란스럽습니까?”
청연이 약간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르겠군요. 하는 말을 얼핏 들어 보니, 무슨 대단한 세가의 자제들이 곧 방문할 것이라는 모양입니다.”
“흠, 세가의 자제들이라니.”
청하는 속으로 그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루각주와 소각주, 그리고 각주의 수석 제자만으로도 이런 소규모 도시의 아담한 객잔이 감당하기에는 굉장한 거물이었다. 비록 그들은 신분을 감추고 있긴 했지만, 그러한 거물 손님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같은 객잔에 머문다는 것도 꽤나 공교로웠다.
청하는 정신없이 제 곁을 지나가는 점소이를 붙잡고 말했다.
“시켰던 음식은 아직인가? 아까 내가 방으로 올려 달라고 했었는데.”
점소이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미안하다는 얼굴로 얼른 말했다.
“아이고, 나으리, 정말 죄송합니다. 곧 점심시간이라 시장하실 텐데 이것 참, 제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곧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요.”
“그렇게 서두를 것 없으니 천천히 하게. 그냥 맛이나 한번 보려는 것이니……. 손님이 많은가 보군.”
“어휴, 말도 마십시오. 이런 시기에 갑자기 왜 이렇게 손님이 몰리는지. 지금은 글쎄, 남궁 세가의 자제분들이 도착할 테니 준비하라는 전갈을 받았지 뭡니까요. 선사님께선 무림인이시니 저보다 더 잘 아시겠죠? 무려 그 남궁 세가 말입니다!”
“남궁 세가……?”
청하가 중얼거렸다. 하필 다른 곳도 아니고 남궁 세가라니, 이 소설의 주인수인 남궁휘의 가문이 아닌가. 물론 남궁 세가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이 직계와 방계를 통틀어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될 터이니, 강호에서 그들 중 누군가와 마주치지 말란 법도 없긴 하지만…… 하필 이런 우연이라니, 왜 이렇게 뒷골이 싸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그때,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며 점소이가 그리도 오매불망 기다리던 문제의 남궁 세가 청년들 몇 명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청하의 시선이 단번에 무리 중에서도 제일 앞에 서 있던 늘씬한 청년에게 가 닿았다.
백옥 같은 얼굴에 부드럽게 물결치며 흘러내리는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청년. 오뚝한 콧대 아래에 자리 잡은 붉은 입술과 마치 여자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가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요란하지 않은 짙은 남색의 단정한 무복을 입고 있었으나, 마치 화려한 비단옷을 차려입은 것처럼 잘 어울렸다. 순간적으로 객잔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못 박힌 듯 날아가 꽂혔다.
그 사이에서, 청하는 소리 없이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저건 남궁휘잖아……!’
뒷골을 오싹하게 했던 불길한 예감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원작의 주인수가 갑작스레 이 자그마한 객잔에 덜컥 등장한 것이다!
청하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원작의 백청하와 남궁휘가 이런 보잘것없는 객잔에서 마주치는 장면이 있었던가? 당연히 없었다. 백청하와 남궁휘는 비무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야 원작의 백청하는 어검을 타고 여행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테니,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이런 소도시에 멈추어 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남궁휘와 마주칠 일도 없었겠지.
청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필이면 일이 이렇게 될 것은 또 무어람. 남궁휘와의 때 이른 만남이 원작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가 없었다. 청하는 일단 최대한 존재감 없이 조용히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남궁휘와 그 일행들이 당당히 객잔 안으로 들어서자, 점소이가 거의 구르듯이 뛰쳐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몇 번씩이나 허리를 굽실거리는 점소이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들. 말씀하신 대로 미리 자리를 잡아 놓았습니다요. 어서 이쪽, 이쪽으로 드시지요.”
객잔 안에서도 가장 넓고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상다리가 부러질 듯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남궁휘를 포함하여 남자 셋과 여자 하나로 구성된 일행들은 별말 없이 점소이가 이끄는 대로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에 착석했다. 점소이가 재빨리 몇 가지 안주와 술병까지 착착 그들 앞에 대령했다.
청연이 그쪽을 바라보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대놓고 눈가를 찌푸렸다. 백진도 보지 않는 척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저희가 음식이 급한 것은 아니지만, 저리 노골적으로 저쪽만을 챙기는 것은 좀 그렇군요.”
순식간에 찬밥 신세가 된 객잔 안의 다른 손님들도 말은 하지 않지만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다만 남궁 세가의 위세가 워낙 대단하니 차마 무어라 불평은 하지 못하고 술잔 너머로 그쪽을 힐끗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청하가 남궁휘 쪽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작게 말했다.
“점소이라고 그러고 싶어 그러겠느냐. 네 말대로 우린 음식이 급한 것도 아니니 좀 기다리거라.”
“이게 어디 점소이 탓이겠습니까. 세가의 자제들이 오죽 위세를 떨었으면 점소이가 저리 눈치를 보겠습니까.”
백진이 단정한 얼굴을 굳힌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청연도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같은 생각인 듯했다. 혹시나 백진이나 청연이 참지 못하고 무어라 한마디 하였다가 남궁휘 일행과 얽힐까 싶어 청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청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시비는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남궁휘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날카로운 눈매의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점소이를 향해 불만을 터트린 것이다.
“이보게! 음식이 너무 짜지 않은가! 분명 간을 싱겁게 맞추라 하였거늘!”
순간, 객잔의 시선이 순식간에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 불평을 늘어놓은 사내는 남궁휘보다 대략 열 살은 연상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입은 옷이나 차고 있는 검의 장식으로 보아 제법 귀티가 흐르는 공자였다.
백진에게 가만히 있으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청하 역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지금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 때문에 먼저 주문한 음식을 받지도 못하고 있는데, 수십 가지는 되어 보이는 요리를 앞에 늘어놓고 어디서 반찬 투정을 부려?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냥 하나쯤 먹지 않으면 될 것을.
점소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 아,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공자님. 분명 싱겁게 맞춘다고 맞췄는데, 그, 죄,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다시 올리겠습니다.”
“지금 다시 만들어서 어느 세월에 갖다 준단 말이냐? 갈 길이 급하니 미리 음식을 준비하라고 일부러 앞서 전갈까지 넣은 것이 아니냐!”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서슬 퍼런 청년의 질책에 점소이는 거의 울상이 되어 두 손을 비볐다. 청년의 행패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다른 젊은 남자와 여자의 얼굴에도 미미하게 거북한 듯한 기색이 어렸으나, 아무래도 화를 내는 청년보다는 연배가 어린 듯 무어라 그를 제지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객잔 안의 공기가 아까보다도 더욱 싸늘해졌다. 청하는 백진과 청연의 얼굴빛이 한층 더 험악해졌음을 깨달았다. 아니, 진짜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는 거 아냐? 그럼 안 되는데…….
그때,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남궁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세요, 형님.”
얼굴만큼이나 단정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리 크지도 않은 나지막한 목소리였으나 듣는 순간 단숨에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청하는 지금까지의 상황도 잊고 순간적으로 그쪽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니…… 어떻게 저 얼굴에 목소리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지? 거의 성우급인데……. 역시 주인공이다 이건가?
“하지만 휘아야!”
“말씀하신 대로 갈 길이 급합니다. 음식이 마음에 차지 않으시더라도 우선은 어서 드시지요. 저희 때문에 객잔의 다른 분들도 불편하신 듯한데.”
그리고 남궁휘는 천천히 주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불만을 터트리던 사내는 무어라 반박을 하고 싶은 듯했으나 감히 남궁휘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남궁휘보다 훨씬 더 연상으로 보였음에도 그들 사이의 위계가 어떤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남궁 세가의 후계자이자 차기 가주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한 남궁휘가 이 무리의 리더임은 확실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던 남궁휘의 시선이 그쪽을 주시하고 있던 청하의 것과 마주쳤다. 순간, 남궁휘의 눈동자에 반짝 이채가 돌았다. 청하는 속으로 약간 뜨끔했으나 이제 와서 시선을 피한다면 더욱 수상해 보일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청하는 그를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쪽을 마주 쳐다보았다. 그것은 남궁휘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둘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날 쳐다보는 건데?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청하는 당황 속에서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해 보았으나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객잔 안의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시선을 눈치챈듯, 이쪽을 힐끗거리며 나지막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각주님?”
백진과 청연의 의아한 듯한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청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그러니까 대체 뭐냐고……!
다음 순간, 남궁휘의 눈이 둥글게 휘어지더니 청하를 향해 살풋 미소를 지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원작 공인 세계관 최고 미인의 얼굴에 눈웃음이 어리니, 순간적으로 주변이 다 환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내가 지금 대체 뭘 본 거지……? 지금 쟤가 나한테 눈웃음친 거 맞아……?
그때,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딜 갔다 왔는지 지금까지 그림자 하나 비추지 않던 제갈서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윤은 묘한 침묵이 내려앉은 객잔 안의 분위기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청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청하야.”
평소처럼 자유분방하게 머리를 풀어 헤친 서윤이 대뜸 청하 옆의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속삭였다. 언제나 장난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달고 결코 필요 이상으로 진지한 표정을 짓는 법이 없는 서윤이었으나, 지금 그는 보기 드물게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하는 방금 전까지 남궁휘와 눈싸움을 하던 것도 잊고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서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래도 이 근처에 변고가 있는 듯하다.”
“변고라니?”
청하가 덩달아 심각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심상치 않은 소식에 청연과 백진 모두 남궁휘 일행을 힐끗거리던 것도 잊고 서윤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서윤이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방금 전에 이 마을을 좀 돌아봤는데, 최근 들어 이 근처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갑자기 급증했다고 하더라고. 처음에는 짐승에게 물려 갔거나 도적을 만난 게 아닌가 했는데,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서 멀쩡히 지내던 사람들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없어졌다고 하더라. 관아에서 사람을 풀어 수색을 했는데, 그 흔적이 전부 마을 너머에 있는 뒷산에서 끊어졌다고 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산책하는 김에 방금 그 근처까지 가 봤는데…….”
서윤의 표정이 아까 전보다도 더욱 심각해졌다. 그가 힐끗 주변을 살피다 한층 더 낮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마기의 흔적이 느껴졌다.”
청하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청연과 백진 모두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백진이 마찬가지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 말씀은, 마교의 짓이란 말입니까?”
“현재로서는 확실치 않지. 하지만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지 않겠나?”
“우리끼리 그곳에 쳐들어가 보기라도 하자는 뜻인가?”
청연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윤이 그쪽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마교의 흔적인데, 무림인으로서 당연한 행동 아닙니까?”
“이곳엔 각주가 계신다. 청루각에 연락해 조사대를 보내라고 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각주께서도 같이 계시는 마당에 고작 우리 넷이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마교의 소굴로 쳐들어가는 것은 적절치 않은 듯하군.”
서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찡그렸다.
“각주가 있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오히려 강호에 대적할 자가 없다는 청루각주가 있으니, 더욱더 우리가 사건을 조사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간적으로 청연과 백진, 그리고 청하 사이에 시선이 오갔다. 서윤은 청하의 몸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하니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청하는 난감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비무대회까지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어. 이런 일로 지체했다간 시간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
“잠깐 조사만 해 보는 데 시간이 걸리면 얼마나 걸린다고 그래? 고작해야 하루 정도 늦어지는 건데.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정도만 간단히 알아보고, 심각한 일이면 청루각이나 다른 문파에 연락하면 되잖아.”
상식적인 생각이긴 했다. 무림인치고 마교가 개입된 사건을 앞에 두고서 발을 빼려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것도 그저 그런 문파도 아닌 강호 제일 문파라는 청루각의 일원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심지어 지금 이곳에는 온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청루각주와 소각주, 그리고 각주의 수석 제자까지 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서윤이 약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들이 네게 독을 먹였잖아. 난 네가 복수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이참에 가능하면 좀 손을 봐주고 싶군.”
그러면서 살짝 주먹을 매만지는 것이, 실제로 꽤나 마교에게 유감이 있는 듯 보였다. 청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제갈서윤을 바라보았다.
‘하긴, 지난번 마교에서 쳐들어왔을 때도 왜 자기를 부르지 않았냐며 나중에 꽤나 섭섭해하긴 했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친구긴 친구라는 건가?’
서윤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자 청연도 약간 솔깃한 것 같았다. 청하는 그가 저번에 마교에서 독을 쓴 줄 알았더라면 그놈들의 사지를 찢어 버릴걸 그랬다느니 어쨌다느니 운운했던 것을 기억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청연의 손아귀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지금쯤 그의 머릿속에서는 한창 신나게 마교 무리들의 사지가 찢겨 나가고 있는 듯했다.
청하가 약간 방어적인 목소리로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야 나도 마음은 굴뚝같긴 한데…….”
“그럼 잠시 들렀다가 출발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결국 청연까지 서윤의 편을 들고 나섰다. 청연이 결연한 눈빛을 한 채 말을 이었다.
“제가 각주님을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야 고맙긴 하다마는…… 지금 꼭 가야 되겠어? 지금 이 시점에? 아무리 생각해도 청하는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날 때부터 무림인으로 태어나고 자란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청하는 이제 무림인이 된 지 고작해야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정의감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은원 관계가 확실한 무림인들과는 달리 가능하면 평생 동안 다시는 마교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백청하는 과연 대단한 수준의 내공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자신은 그것을 정말로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평생 동안 검 한 번 잡아 본 적 없던 21세기 현대인인 청하는, 사람들을 마구마구 납치해 간다는 무시무시한 마교의 소굴에 고작 네 명이서 쳐들어간다는 상황 자체가 너무 무서웠다!
‘지난번엔 사자로 와서도 호시탐탐 시비를 걸려고 했던 놈들인데…….’
그때도 무섭긴 했지만, 그때 청하에게는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수백 명의 제자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화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가능한 한 피하고 싶다는 것이 청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게다가 그때 만났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마교의 사자는 또 어떻고?!
결국 청하는 최후의 보루인 백진을 돌아보았다. 너만은 내 상황을 이해하겠지? 제발 좀 말려 주라. 제발.
그러나 청하를 돌아본 백진의 얼굴에도 약간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 어렸다. 청하의 가슴속에 불길한 예감이 퍼졌다.
“잠깐 돌아보는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스승님. 정 걱정되시면 객잔에서 기다리십시오. 저희들이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너까지?! 그리고 그건 또 어떻게 그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가 그래도 명색이 청루각주인데! 청하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서윤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냐? 청하가 빠지긴 왜 빠져? 마교 놈들한테 유감이 있는 바로 그 당사자가 청하인데. 너도 같이 갈 거지? 그렇지?”
상황이 그렇게까지 되자 청하도 더 이상 뺄 수가 없었다. 청하는 어쩔 수 없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젠장…… 백진 뒤에 잘 붙어 있어야지. 그나마 좀 전에 영기 수급은 충분히 해 놔서 다행이다.
바로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목소리가 청하의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도 같이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청하를 비롯한 다른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했다. 청하는 제 바로 옆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을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남궁휘가 예의 그 싱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휘가 한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하나로 높이 묶어 올린 흑단같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눈꼬리가 사랑스럽게 휘어지고 붉은 입술이 단정하게 호선을 그리는 모습이, 마치 미인도에서 갓 튀어나온 양 묘하게 현실성이 없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멍청이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겁지겁 입을 다문 청하는 애써 위엄 있는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남궁휘가 그림처럼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교의 무리들을 해치우는 일이라면, 저도 함께하고 싶군요.”
아니, 그러니까 잠깐……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우리의 대화를 들었나?”
제갈서윤이 약간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아까부터 오직 청하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남궁휘의 시선이 그제서야 처음으로 서윤에게로 향했다. 남궁휘가 약간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선배님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은 죄송합니다. 하지만 알고 나니 도저히 무림인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궁휘는 마치 자석에라도 끌리는 것처럼 다시금 청하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청하는 부담스러운 심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살짝 난감한 시선이 청루각 사람들의 사이를 오갔다. 청하처럼 그가 바로 ‘그’ 원작의 주인수 남궁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로서도 갑작스레 난입한 남궁 세가의 도련님이 부담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당황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남궁휘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일행들도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는지, 식사를 중단하고 황급히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방금 전 반찬을 가지고 역정을 부렸던 사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궁휘가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분들과 볼일이 있습니다. 저는 잠시 이분들과 동행할 터이니, 형님께서는 먼저 출발하시지요.”
“뭐? 아니, 지금 갈 길이 얼마나 급한데 지금 이 상황에서 대체 어딜 간다는 것이야?”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펄쩍 뛰며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 그 사내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일행들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남궁휘를 만류했다.
“휘 오라버니, 가주님께서 이번 비무대회는 정말 중요하다 신신당부를 하셨잖습니까. 이런 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맞아요, 형님. 저도 유설이의 말에 동의합니다. 꼭 그러셔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까?”
그러나 남궁휘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가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우현 형님을 모시고 먼저 출발하거라. 나는 곧 따라가마. 절대 늦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남궁휘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그들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우현이라고 불린 아까의 성질 급한 사내가 갑자기 청하 쪽을 돌아보며 시비를 걸듯 말했다.
“그쪽은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오? 보아하니 무림인인 것 같은데, 당신들이 휘아를 꼬여 낸 것인가? 우리가 누군지 잘 모르시나 본데, 우리는 남궁 세가의…….”
“아, 그래. 그 대단하신 남궁 세가의 자제들이라고. 이미 익히 잘 알고 있으니 새삼스레 다시 알려 주지 않아도 된다.”
진청연이 더 이상 들어 주지 못하겠다는 듯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우리 소각주님, 검도 안 쓸 것 같은 문학청년처럼 생겨서는,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제일 무섭다니까.
청연의 차가운 말투에 스며 있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순간적으로 위축된 듯, 우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이 정체도 신분도 알 수 없는 무명의 사내에게 쫄았다는 것을 자각한 우현이 벌컥 성을 내었다.
“지금 어디서 별 볼 일도 없는 천한 것들이 건방지게……!”
그러나 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백진이 들고 있던 검 손잡이로 우현의 복부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우현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순간, 남궁휘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긴장된 표정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객잔의 다른 손님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빠르게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점소이는 주방 문간 뒤에 숨어서는 이쪽을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입조심하십시오.”
백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차가운 시선으로 우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궁휘의 일행들은 무어라 항의하고 싶은 듯했으나, 이쪽이 먼저 실언을 한 것은 사실이라 화를 내기도 여의치 않은 것 같았다. 싸늘한 분위기가 겉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기 직전, 청하가 손을 들어 올려 백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하거라. 그쪽도 함부로 말하는 것은 삼가 주셨으면 하네.”
잠시의 침묵 뒤, 우현을 대신하여 남궁휘가 청하를 향해 먼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선배님. 사과드립니다.”
남궁휘가 그렇게 나오자 다른 사람들도 할 말이 없어진 듯, 머뭇머뭇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는 아직도 컥컥거리고 있는 우현을 부축하여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남궁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일행들이 저에 대한 걱정이 많다 보니 실언을 하였습니다. 다 제가 아직 미숙하고 부족한 탓이지요. 선배님들께서 너그러이 보아 주십시오.”
청연이 흥, 하는 소리를 내며 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무언으로나마 그의 사과를 받아들인 것이기에 청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궁휘가 청하를 돌아보며 정중하게 두 손을 모아 공수를 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남궁휘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사촌 형님이신 남궁우현이고, 그 옆에 있는 둘은 역시 제 친척 동생들인 남궁유설과 남궁유환이라고 합니다. 선배님들의 존함과 문파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젠장, 어떡하지? 청하는 순간적으로 갈등을 느꼈다. 여기서 신분을 드러내야 하나? 그랬다가 원작 전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지면 어떡하지? 이미 지금도 상당히 망한 것 같은데…….
남궁휘는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이 원작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두 줄짜리 조연 청하로서는, 주인공 같은 대단한 사람과 절대 필요 이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비무대회가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정체가 드러나긴 하겠지만, 그 전까지는 최대한 남궁휘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청하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고 있던 서윤이 먼저 나서며 입을 열었다.
“나는 제갈서윤이다. 그쪽이 생각하는 그 제갈 세가의 일원이 맞으니 그리 수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그리고 이쪽은 바로 그 청루…… 으헉!”
그러나 서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뚝 끊어졌다. 청하가 탁자 밑으로 발끝에 내공을 실어서는 서윤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찬 것이다. 서윤은 순간적으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탁자 위에 허리를 구부린 채 끙끙거렸다. 남궁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예? 청…… 뭐라고 하셨습니까? 후배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청하가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나, 나는 청……라관의 배, 백민혁이라고 하네. 이쪽은 내 사형이고, 이쪽은 내 제자이지. 이름은…….”
청하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청연을 빤히 바라보자, 청하가 하는 양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진청연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진……창수라고 하네.”
“저는…… 사, 사벽진이라고 합니다.”
백진도 더듬거리며 가까스로 이름을 말하는 데에 성공했다. 청하는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청연과 백진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지금 당장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궁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청라관이라…… 처음 듣는 곳이로군요. 후배가 식견이 짧아 죄송합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다른…… 문파를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청하는 속으로 가슴이 뜨끔하였으나, 남궁휘는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실까요, 선배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