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제갈서윤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요즘 네 수석 제자랑 자주 붙어 다닌다며?”
청하는 모른 척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제 앞에 놓여 있는 부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청하는 붓을 쥐고 있는 손가락으로 신중하게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자신을 대놓고 개무시하고 있는 청루각주를 보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은 서윤이 재차 입을 열었다.
“둘이서 매일같이 저쪽 지선봉 구석에 있는 연무장에 박혀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냥 무공 재활 훈련 하는 중이야, 재활 훈련. 나 기억 잃었잖아. 기억 안 나?”
청하가 대충 대답하며 앞에 놓인 부적의 한 귀퉁이에 신중히 붉은 선을 몇 개 더 그려 넣었다.
며칠 동안 백진과 함께 여러 가지 실험을 거듭하며, 청하는 제 몸의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청하의 몸에 쌓여 있는 내공은 과연 대단한 수준이었으나, 그것을 운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라이터에 불을 붙이려면 부싯돌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지금 청하의 경우에는 온 숲을 다 태워 버릴 정도로 빵빵한 기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곳에 불을 붙일 부싯돌을 움직이는 데에는 남의 영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백진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시간제한이 정해진 일시적 미봉책에 불과했다. 진짜 남자를 붙잡고 닥치는 대로 교합이라도 해서 엄청나게 영기를 흡수하면 모를까, 이대로는 언제 어디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청하는 어느 정도의 내공을 담아 둘 수 있는 부적을 미리 만들어 두고 급한 순간에는 부적을 쓸 생각이었다.
화공(火攻)의 인이 그려진 부적에 조심스럽게 마지막 몇 개의 선을 더 채워 넣은 청하는, 완성된 부적에 신중히 영기를 주입했다. 아까 오전에 백진과 ‘재활 훈련’을 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다행히도 아직 영기를 쓸 수 있었다. 곧 부적이 푸른색으로 물들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청하는 내공을 주입한 부적을 잘 갈무리해서는 소중히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 꼴을 구경하고 있던 서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체 네가 부적 따위가 왜 필요한데?”
“그런 게 있어.”
“부적 같은 거 만들었으면 나나 줘. 나처럼 연약한 일반인이야말로 고명하신 청루각주님의 부적이 필요하지.”
청하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뻔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갈서윤을 노려보았다. 연약한 일반인이라니…… 제갈서윤의 본업이 의술이긴 해도, 강호에서 손꼽히는 명문 세가 중 하나인 제갈 세가의 둘째 도련님이었다. 무술과는 담쌓은 한량인 척, 사치스러운 옷을 입은 채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긴 하지만 연약한 일반인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청하는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약한 일반인이면 돈 주고 사 가.”
“진짜 너무하네, 가난한 의원한테.”
“가난한 의원이 그렇게 휘황찬란한 비단옷 입고 돌아다닐 돈은 있고?”
청하의 날카로운 지적에 제갈서윤은 못 들은 척하며 어물쩍 말을 돌렸다.
“어쨌든, 요즘 너 좀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무공 훈련도 그래. 그냥 무공 훈련을 하는 것뿐이라면 굳이 그렇게 둘만 구석에 틀어박혀서 비밀스럽게 훈련을 할 필요가 있나? 그럴 거면 차라리 폐관 수련에 들어가든가.”
“폐관 수련은 혼자 해야 하잖아. 나는…… 그, 같이 훈련할 사람이 필요해서.”
서윤의 눈이 수상쩍다는 듯한 기색을 띠며 가늘어졌다.
“네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그놈이 필요하다고? 영기 흡수 때문에 그래? 그건 어차피 누구든 상관없잖아.”
“그…… 그건 그렇긴 하지만, 나는 백진이 편해.”
집요하게 추궁하듯 물어오는 서윤의 질문을 받아넘기며 청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천하의 청루각주 백청하가 남의 도움이 없이는 제 내공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윤이 수상쩍다는 눈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원래 한 번도 특정한 누군가랑 그렇게 오랫동안 관계를 가졌던 적 없잖아. 너 설마…… 그 녀석한테 마음이라도 생긴 거냐?”
응……?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야? 청하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서윤을 노려보았다.
“지금 사백진을 두고 하는 말이야?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걔는 내 제자라고. 무슨 관계를 가지니 마니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나보다 나이도 한참 어린데…… 말조심해.”
그러나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서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럼 너 지금까지 걔랑…… 한 번도 안 한 거야? 그럼 대체 둘이서 뭘 하고 있는 건데? 그리고 제자인 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까지 청루각 제자들 중에서 너랑 관계 안 가진 녀석 찾는 게 더 빠르겠구먼.”
아…… 백청하 너 진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청하는 기가 막힌 심정이 되어 속으로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이 되어서는 제자들이랑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니다니, 아무리 문파 심법이 그런 내용이라고 해도 그렇지…… 21세기 상식인인 그의 도덕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충격 속에서 이마에 손을 짚고 있는 청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서윤이 보란 듯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네가 정말 그 녀석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 거라면, 걔 말고 다른 사람들이랑도 같이 수련할 수 있는 거잖아? 지금처럼 둘이서만 몰래 따로 수련하는 모습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군.”
“뭐? 왜?”
“다른 각원들이 불만을 가지니까.”
청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대체 다른 각원들이 왜 불만을 가지는데?”
“그야 너는 각주고 그들의 스승이니까? 아무리 사백진이 네 수석 제자라고는 해도, 그렇게 그 녀석만 끼고 돌면서 수련을 하면 다른 애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지.”
질투도 할 거고. 서윤이 뒷말을 덧붙였으나 청하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했다. 청하는 제가 청루각의 각주이면서 동시에 제자들의 스승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떠올렸다.
‘하긴, 스승이 되어서 제자들의 교육을 나 몰라라 내팽개쳐 둘 수는 없지. 하지만 사실 지금도 내가 백진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대체 어떻게 하지?’
청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 청하를 가만히 바라보며 서윤은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자식…… 그래도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나 보네. 청하가 기억을 잃어서 그런가. 대체 얼마나 내숭을 떨고 있는 거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하가 서윤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서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치미를 떼며 냉큼 대답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청하는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제자들이 수련하는 곳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청하는 실로 오랜만에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
이곳에 오자마자 겪었던 산책의 악몽 때문에 지금까지 청하는 의식적으로 백진을 제외한 다른 각원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갈서윤의 말대로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법. 청하는 마음을 굳게 다지며 비장한 표정으로 백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와라!”
“……스승님, 매번 그리 긴장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진이 약간 난처한 듯 단정한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러나 청하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백진을 향해 묵묵히 손을 내밀었다. 백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청하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청하와 백진은 어느 정도의 신체 접촉으로 어느 정도의 영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쓸 수 있게 되는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게 되었다. 청하는 첫날부터 필요 이상으로 제자들 곁에 오랫동안 붙어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대략 1, 2시간 동안 영기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접촉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백진은 귀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청하의 손목을 받쳐 들고는 손목 안쪽 부드러운 살갗에 천천히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말캉한 입술이 맥박이 두근거리는 손목 안쪽을 꾹 눌렀다. 청하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반쯤 눈을 내리깔았다.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었지만 할 때마다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백진의 기운이 제 팔을 타고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손목에서 평소와는 좀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응?’
무언가 부드럽고 축축한 것이 손목을 스쳤다. 뭐, 뭐야? 청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그거…… 왠지…….
그러나 청하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백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술을 떼고는 고개를 들었다. 눈꼬리를 휘며 청하를 바라보는 순진한 강아지 같은 얼굴은 언제나처럼 태연했다.
‘내 기분 탓인가?’
청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진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매만졌다. 평소보다 약간 더 축축한 것 같기도 하고…….
“창천검도 패검하시겠습니까?”
“음…… 그래, 아무래도 가져가는 게 낫겠지.”
창천검은 청루각주 백청하의 영검이었다. 영기를 다루는 것은 어떻게 흉내라도 내겠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에, 청하는 지금까지 검을 쥘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검도 가지고 가지 않을 수는 없는 일. 검술 실력은 도저히 어쩔 수 없겠지만 검에 영기를 실어서 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청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창천검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백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은 청하의 허리에 조심스럽게 검을 매어 주었다. 넓은 허리띠를 꽉 묶어 늘씬한 허리선을 드러내고 있는 청하의 허리춤에서 백진의 단단한 손가락이 신중하게 움직였다. 목깃을 매만지며 의관을 정제하고 있던 청하는 허리에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에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백진은 허리를 살짝 굽힌 채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청하의 허리띠에 검을 매다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방금 허리 근처를 좀 만진 것 같은데…… 아닌가?’
청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왠지 뺨이 살짝 상기된 백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 되었습니다.”
청하는 백진의 얼굴을 한 번 의아하게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하와 백진은 함께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청루각이 자리 잡은 청루산의 주봉은 태선봉이었다. 태선봉에는 청루각주 백청하의 거처인 태선각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제자들이 모여 수련을 하는 대연무장도 이곳에 있었다.
청하가 백진을 뒤에 달고 대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청루각의 각원들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대부분 백진과 같은 백(白)자 항렬인 각원들은, 백진처럼 흰색으로 된 도복을 입은 채 검을 휘두르거나 영기를 수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다 백진처럼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것은 아니었다. 청하는 웃통을 벗어젖힌 채 서로의 몸을 열렬히 더듬으며 입을 맞추고 있는 각원들을 최선을 다해 외면하며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각주님!”
“헉, 각주님께서 오셨다!”
청하를 발견한 각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이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의 열렬한 환대와 타오를 것 같은 부담스러운 눈빛을 받으며, 청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스승이 너희들 수련에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구나. 다들 열심히 정진하고 있나?”
예! 하는 우렁찬 소리가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청하는 하하, 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반짝반짝거리는 수백 개의 눈동자가 자신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몹시도 낯설었다.
‘이…… 이제 어떡하지?’
청하는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잠시 침묵하다 대충 아무나 앞줄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약간 날카로운 듯한 인상이 흠이었으나, 시원하게 뻗은 콧대가 인상적인 미남이었다.
“너는 이름이…….”
“소백영입니다.”
“아, 그래, 백영. 지금 수련 상황은 어때? 어디 어려운 부분이라도?”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지만, 청하의 질문을 들은 백영의 눈에서는 거의 레이저가 쏘아지는 듯한 열렬한 빛이 번뜩 빛났다. 왜, 왜 저래? 뭔지 모를 박력에 청하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백영이 성큼 청하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백진보다도 더 큰 키를 가진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청하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자 청하는 저도 모르게 살짝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여기 사람들은 무슨 이렇게 다들 키가 커? 나도 그렇게 작은 키는 아닌데.
그때, 백영이 살짝 흥분한 듯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제자가 요 며칠 동안 막혀 있던 것이 있는데, 스승님께서 가르침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어, 어떤……?”
긴장한 목소리로 청하가 되물었다. 하, 나도 아는 거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지? 정 모르겠으면 백진한테 슬쩍 떠넘겨야겠다. 아까부터 제 뒤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진을 힐끗거리며 청하는 백영을 향해 애써 자애로운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청하의 미소는 백영이 바짝 가까이 몸을 붙이며 은근슬쩍 제 허리에 손을 감아 오는 순간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뿐만 아니라, 백영은 분명 명백한 의도를 띤 채 청하를 향해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청하는 반사적으로 제 입술로 돌진하는 백영의 뺨을 반대쪽으로 홱, 밀어 버렸다.
“무, 무, 무슨……!”
그러나 백영은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백영의 품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청하는 당황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지, 지금 이게 네 막혔던 부분에 어떤 도움을 준다는 거야?!”
그러나 백영은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난번 스승님과 같이 밤을 보낸 뒤로 제자의 수련 수준이 일취월장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가르침을 주신다면 부족한 제자가 큰 도움을 받을 듯합니다.”
그러고는 다시금 청하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는 것이다. 뭐…… 뭐라고?! 같이 밤을 보내?! 청하는 난감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다른 제자들 역시 엄숙한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청하는 그제서야 그들이 전부 백영의 볼일이 끝난 뒤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젠장,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짐작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아무리 이런 미친 설정의 문파라고는 해도, 스승으로서의 가르침이라는 게 설마하니 이토록 ‘그런 식’의 가르침에 집중되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최소한 뭔가 영기를 쓰는 법이라든가, 보법이라든가, 검술이라든가, 뭐 그런 걸 가르칠 줄 알았지?! 물론 정말 그런 걸 물어봤어도 좀 곤란하긴 한데…….
이리저리 방황하던 청하의 시선이 묵묵히 그의 뒤에 서 있던 백진에게로 가 닿았다. 언제나 단정하고 차분하던 백진의 낯빛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청하는 애써 도움을 청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으나, 백진은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채 의아한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사이, 청하를 제 품에 바짝 끌어안은 백영은 청하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넓은 소맷자락 안으로 거침없이 미끄러뜨렸다. 겹쳐 입은 내의의 소맷자락 안으로 파고든 단단한 손가락이 청하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 올리며 단숨에 팔꿈치까지 다다랐다. 청하의 팔뚝에 단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청하의 뺨에 바짝 입술을 가져다 댄 백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어차피 계속하시려면 의복은 거추장스러우실 테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백영은 단단히 싸맨 청하의 옷깃을 붙잡고 단숨에 양옆으로 젖혀 버리는 것이다! 단정했던 옷자락이 흐트러지며 청하의 흰 목덜미와 어깨, 가슴팍까지 단번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청하는 속으로 들리지 않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더 경악스러운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옆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제자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
“스, 스승님. 제자 백기도 수련이 급하여 백영과 같이 가르침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그러더니 청하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새로운 제자는 청하의 뒤로 바짝 붙어 서서는 청하의 허리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순간, 청하의 머리 위에서 백영과 백기 사이에 불꽃 튀는 시선이 오갔으나 패닉에 빠져 있던 청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백영이 먼저 훤히 드러난 청하의 목덜미에 재빨리 제 얼굴을 묻었다. 그에 뒤질세라, 청하의 뒤에 바짝 붙어 선 백기도 젖혀진 청하의 옷깃을 더욱 벌리며 드러난 맨가슴에 손을 올렸다. 청하는 화들짝 놀라며 저도 모르게 몸을 뒤틀었으나, 건장한 두 청년의 철벽같은 단단한 가슴팍 사이에 끼인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 젠장, 살려 줘!’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제자에게 희롱을 당할 판이었다. 그뿐인가?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내며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제자들이 아직도 한가득이었다. 그 전에는 선망에 가득 찬 순수한 눈초리라고 생각되던 시선들이 지금은 제 정절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맹수들의 눈빛으로 보였다.
청하는 무어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당황한 입술을 뻐끔거리며 다시금 온 사방에 시선을 던졌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청하의 눈동자가 도움을 구하듯,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제자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때, 온통 흰옷을 입은 제자들 사이에서 그닥 눈에 익지 않은 제자 하나가 그를 향해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 뭐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이질감에 청하는 그쪽을 향해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낯선 제자를 쫓아 움직이던 청하의 눈동자가 백진의 것과 다시 한번 더 마주쳤다.
백진은 옅은 갈색 눈을 가늘게 뜬 채 청하와 그에게 달라붙은 제자들을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하던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린 청하는,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대놓고 백진을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도와줘!’
도저히 못 알아들을 수 없는 노골적인 구조 신호였다. 백진은 의외라는 듯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로서는 지금까지 제자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던 스승이 왜 갑자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의아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청하는 지금 그런 것을 일일이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백진은 더 이상 청하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불쑥 앞으로 나섰다.
“스승님께서 피곤하신 듯하니 이제 그만하십시오, 사형.”
백진이 청하의 몸을 앞뒤에서 압박하고 있던 두 제자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그렇게 말했다. 제자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백진을 돌아보았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막 시작했는데.”
“사백진, 아무리 네가 스승님의 수석 제자라고는 해도 이런 식의 참견은 도를 넘은 것 아닌가?”
백진의 사형인 듯한 두 제자가 불쾌한 목소리로 백진을 향해 불만을 표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청하가 눈을 뜨고 난 뒤 다른 제자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백진하고만 붙어 다니는 것에 대해 다들 말은 안 해도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였다. 백진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는 물러서는 대신 제자들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주어 청하에게서 둘을 떼어 놓았다.
“사백진!”
백영이 으르렁거리며 제 어깨를 짚은 백진의 손을 탁 쳐 냈다. 청하는 몸이 자유로워지자마자 재빨리 뒤로 물러나서는 은근슬쩍 백진의 뒤에 제 몸을 숨겼다.
“스승님!”
백진을 말려 보라는 듯 백영이 그를 바라보았으나, 청하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잔뜩 흐트러진 옷깃을 추스르느라 바삐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하하…… 백진의 말대로 아직까진 몸이 그리 좋지 않으니 이해해 주거라. 백진, 배려해 줘서 고맙구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말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청하의 말을 듣고서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백진을 노려보았다.
“스승님의 존체가 아직도 그리 미령하신데, 너는 어째서 자중하지 않고 스승님과 수련을 계속한 거지?”
“네가 며칠 동안이나 스승님을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를 줄 아나?”
백진보다 더 체구도 크고 건장한 데다 선배이기까지 한 제자 둘이 백진을 위협적으로 둘러싸고는 압박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다. 백영과 백기뿐 아니라 근처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제자들도 앞으로 나서며 백진을 둘러쌌다. 분명 훨씬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백진은 언제나 유순한 모범생 같던 얼굴을 싸늘하게 가라앉힌 채 그를 둘러싼 사형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표정으로 그들과 대치했다.
갑작스레 험악해지는 공기에 청하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거지? 청하는 당황한 채 외쳤다.
“그, 그만해! 지금 뭐 하는 거야?”
청하의 말에 움찔거리며 얌전히 눈을 내리까는 제자들도 있었지만, 백영과 백기를 비롯한 몇몇 나이 많은 제자들은 여전히 백진을 둘러싼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이것들이 지금 스승님이 말하는데……. 무시당한 기분에 갑자기 확 열이 뻗친 청하는, 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위엄 있는 말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만하거라! 어디 스승의 면전에서 지금 싸움질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청하가 언성을 높이자 그때까지도 백진을 노려보고 있던 대부분의 제자들도 멈칫거리며 청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백영은 여전히 백진을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백영.”
청하가 엄히 말했으나 백영은 억울하다는 듯 청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스승님! 백진 이 녀석이 건방지게…….”
청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청하가 크게 소매를 떨치자 소맷자락에서 갑작스레 큰 바람이 휘몰아쳤다. 거세게 몰아치는 광풍에, 대부분의 제자들이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백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태풍 같은 광풍이 연무장을 쓸고 지나간 뒤,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수백 명의 제자들 가운데 오직 백진만이 휘청이면서도 바닥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서 있었다.
‘헉,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힘 조절을 잘못했다.’
청하는 방금 자신이 저지른 짓의 결과에 깜짝 놀라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란 토끼처럼 가슴이 미친 듯이 쿵덕거렸다. 그러나 어쨌든 청하는 겉으로나마 싸늘한 눈초리로 제자들을 내려다보며 한껏 목소리를 내리깐 채 말했다.
“감히 스승의 말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그리 높지도 않은 목소리였으나, 연무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제자들은 다들 황급히 꿇어앉은 자세를 바로 하고 청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청하의 싸늘한 눈매가 백영을 향했고, 백영 역시 허둥지둥 청하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아, 아닙니다, 스승님. 제가 어찌 감히…….”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청하는 아무 말 없이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리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자, 싸늘하게 가라앉은 차갑고 아름다운 빙옥 같은 얼굴에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기운이 어렸다. 그를 힐끔거리며 올려다보는 제자들의 시선에 다시금 끝 간 데 없는 선망과 동경의 빛이 자리 잡았다.
하…… 진짜 스승 노릇 하는 것도 골치 아프구먼. 앞으로 대체 이 녀석들을 어떡하냐고! 그 싸늘한 표정 너머에서 청하는 속으로 말없이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때, 비슷비슷한 흰옷을 입고 있던 제자들 사이에서 아까 전에 청하와 눈을 마주쳤던 낯선 제자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미처 알지 못했으나, 청하와 비슷한 키에 호리호리하고 작은 체구를 가진 젊은 청년이었다. 아직 약간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틈을 타, 청년은 청하를 향해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뭐지?”
청하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청년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청하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청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인상적이군요. 이참에 제게도 좀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순간적인 위화감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은 청하는, 젊은 청년의 손이 제게 닿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요.”
순간, 청년에게서 풍기는 이질적인 기운에 청하의 등골이 쭈뼛 곤두섰다. 이곳에서 눈을 뜬 뒤 처음으로 느껴 보는 낯선 기운이었다.
언제나 정순하고 정결한 영기가 감도는 청루각.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이곳 태선봉의 한복판에 노골적으로 사특한 마기를 풀풀 풍기는 청년이 서 있었다.
청하는 충격과 당황 속에서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굳어 있었다.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제자들은 순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하여 청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각자의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검에 일제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누군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입술을 실룩이더니 저를 포위하려 드는 각원들 틈에서 훌쩍 몸을 날려 뒤쪽에 있던 공터에 내려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이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여유롭게 뒷짐을 지는 순간, 연무장 위의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모여들었다.
저, 저게 뭐야? 청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긴장한 눈빛으로 검은 구름을 바라보던 청하는, 옆에 있는 백진에게 빠르게 명을 내렸다.
“지금 빨리 원로들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하거라.”
백진은 두 번 묻지도 않고 그대로 검을 뽑아 들고서는 그 위에 올라탔다. 어검을 탄 백진이 원로들을 찾아 빠르게 사라지자마자, 연무장 상공에 어려 있던 검은 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그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복면 사내들이 어검을 탄 채 허공에서 연무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원작 스토리에 이런 일이 있었나?’
청하는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앞으로 나섰다.
“누, 누구냐? 감히 허락도 없이 청루각에 숨어들다니, 당장 정체와 목적을 밝혀라.”
그때까지도 빙긋거리며 청루각의 제자들이 허둥거리는 꼴을 구경하고 있던 청년이 재미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각주님. 천마신교의 장로, 류재겸이 인사드립니다.”
그러고는 마치 청하를 비꼬기라도 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크게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청하는 속으로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류재겸? 류재겸이 대체 여기서 왜 나와?’
류재겸으로 말하자면, 원작에서 단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조연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악역 조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제법 어린 나이에 마교의 실세가 된 인물로, 마교의 장로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뱀처럼 교활한 수완가이자 강호에서 손꼽히는 절정 고수였다. 또한 주세민의 가장 충성스러운 오른팔이기도 했다. 주인공인 마교주 주세민을 사모하고 있다는 설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주세민은 남궁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은커녕 별다른 감정조차 내비치지 않는 삭막하기 짝이 없는 감정 결핍 광공이었기에 제 수하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유독 자존심이 강한 류재겸은 바로 그 때문에 원작의 가장 큰 악역 조연이자 남궁휘의 앞날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류재겸이 지금 청하의 눈앞에서 청루각 제자로 변장한 채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하는 재겸을 실제로 마주하자, 그가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캐릭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작만 봐서는 꽤나 교활하고 찌질한 악역 같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 청하는 속으로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아직 소년에 가까운 눈앞의 젊은 청년을 빤히 관찰했다. 문득 청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류재겸은 주세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런 단독 행동을 하다니.’
그사이, 여유로운 표정을 한 재겸의 뒤로 수십 명의 복면을 쓴 무리들이 일제히 연무장에 내려섰다. 청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교의 무리들에게 청루산의 입산을 허락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게다가 각원으로 변장하고 제자들 틈에 끼어들다니, 실로 무례한 일이 아닌가. 대체 무슨 목적이지?”
최대한 예전에 읽었던 무협 소설을 떠올리며 애써 그럴듯하게 말을 뱉어 내었으나, 청하만큼의 예의도 차릴 생각이 없는 제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흥분한 모양새였다. 방금 전까지 청하에게 꾸중이 들어 풀이 죽어 있던 백영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발끈한 목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뻔뻔하기 짝이 없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오는 것이냐? 각주님께 독까지 보내 놓고 간자처럼 청루각에 잠입하다니, 지금 청루각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야?”
백영이 입에 올린 전쟁이라는 단어에 순식간에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며 바늘로 피부를 찌르는 듯한 긴장감이 주변을 감쌌다. 각원들은 청하를 지키기라도 하겠다는 듯, 청하의 주위를 겹겹이 둘러싸며 언제라도 발검할 수 있도록 검 자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과연 강호 제일 문파답게,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일사불란하게 진영을 갖추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청하는 그들의 뒤에서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원로들을 부르러 간 백진을 기다렸다.
‘젠장, 이런 일이 있을 줄 모르고 오늘 영기 주입은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큰일이네. 백진이 빨리 와야 하는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과연 청하의 몸 안에 주입했던 백진의 영기는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애초에 예정했던 한두 시간이 거의 다 지나 있었던 탓이다. 그나마 창천검을 가져온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청하도 허리춤에 걸려 있는 영검에 주춤거리며 긴장된 손을 올렸다. 그러나 이것을 뽑게 되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고 싶었다.
긴장감으로 가득 찬 청루각 사람들을 둘러보던 재겸은 살짝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재겸이 그리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태연히 입을 열었다.
“이런, 아무래도 제가 청루각의 여러분들을 놀라게 해 드린 모양이군요. 각원으로 변장한 것은 특별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청루각의 위명이 그리도 자자한 것이 궁금하여 호기심에 한번 직접 보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과연,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은 듯하군요.”
그리고 재겸은 슬쩍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띠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청하를 향해, 재겸은 다시금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청루각원들의 미모가 가히 월광 선인들의 것과 견줄 만하다기에 호들갑스러운 뭇사람들이 과장한 것이라 여겼는데, 오늘 제가 직접 그 모습을 뵈니 과연 소문이 실제만 못하다 하겠습니다.”
정중하기 그지없는 진지한 목소리는 언뜻 들으면 칭찬처럼 들렸지만, 실은 비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세간에 떠들썩한 청루각의 명성들 중에 봐줄 만한 것은 얼굴밖에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저거 저거 말하는 꼬락서니 좀 보게…… 네가 악역이 맞긴 맞았구나? 청하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렸으나, 제자들의 분노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모욕을 참지 못하고 발끈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얼굴이 분노로 하얗게 질린 백영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는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백영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당장이라도 재겸을 향해 달려들 듯 수축하는 것이 보였다.
‘아니, 저 녀석이 진짜……!’
깜짝 놀란 청하는 서둘러 백영과 재겸의 사이를 가로막으려 했으나, 그보다 더 빨리 움직인 자가 있었다.
재겸의 뒤에 서 있던 복면 사내 중 한 명이 순식간에 앞으로 나서며 백영을 향해 날카로운 마기를 피워 올렸다.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도 없는 위압적인 마기가 내려앉자, 기세등등하던 백영의 얼굴이 이제 다른 의미로 하얗게 질려 갔다. 사내는 검을 뽑지도 않은 채, 그저 자신의 기운만으로 백영을 간단히 압도하고 있었다.
“그만!”
결국 보다 못한 청하가 백영을 제 등 뒤로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순간적으로 복면 사내의 눈동자와 청하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처음에는 미처 알지 못했으나, 백진보다도 훨씬 더 훤칠한 키에 맹수처럼 늘씬한 근육으로 감싸인 탄탄한 체격의 사내였다. 코 아래는 검은 천에 감싸여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복면 위로 드러난 이마와 눈매만 보아도 깎아 놓은 조각같이 잘생긴 이목구비였다. 나른한 눈매에는 어딘지 모르게 인간 같지 않은 서늘하고 차가운 구석이 있었다.
청하의 시선과 사내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의 짙은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반짝였다. 순간적으로 그 눈동자 아래에서 붉은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청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방금 뭘 본거지?’
청하는 충격과 당황 속에서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순간, 방금 일어난 일이 마치 환상이기라도 하다는 듯, 붉은 기운은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춰 버렸다. 뭐, 뭐지 방금? 청하는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내가 잘못 본 건가? 그래, 그렇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청하의 눈동자는 사내에게 붙박인 듯 고정되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고 있던 류재겸이 마침내 앞으로 나섰다.
“실례했습니다. 제 수하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지요.”
류재겸이 입을 열자, 복면 사내는 다시금 묵묵히 재겸의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청하는 복면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류재겸이 청하의 주의를 끄려는 듯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오늘 이렇게 갑작스럽게 청루각을 방문한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천마신교의 사자로서, 교주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전언이라고?! 이게 무슨 소리지? 재겸이 던져 놓은 폭탄 같은 발언에 청하는 복면 사내를 바라보던 것도 잊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각원들 역시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한 듯 웅성거렸다. 청하는 동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애써 평정심을 가장하며, 청하는 최대한 태연한 척,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그는 지금 이 청루각의 수장이었다. 다른 원로들도 없이 오직 그만을 의지하고 있는 제자들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청하는 제 안에 잠들어 있는지도 몰랐던 연기력이란 연기력을 모두 다 닥닥 긁어모아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언이라? 재미있군. 독을 보낸 자가 죽지 않고 살아나니 이제 와서 할 말이 생겼나? 정말 본 각에 대해 선전 포고라도 할 셈인가?”
허세를 떨며 코웃음을 쳤지만 청하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진짜 선전 포고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분명 원작에는 그런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 하나만을 믿고 애써 허세를 떨어 보았으나 갓 태어난 기린 새끼처럼 심장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청하의 떨리는 마음을 알 리 없는 재겸은 뱀처럼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두 집단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아, 교주님께서 친히 저를 통해 전언을 보내신 것입니다.”
“오해라니, 어떤……?”
“지난달, 청루각주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것은 절대 교주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습니다.”
당당하게 울려 퍼진 충격적인 선언에 청루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것은 청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청루각주 백청하가 마교의 독에 당했던 것은 원작에서도 언급된 사건이었다. 청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마교의 개입을 부정하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대는 본 각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는 모양이로군. 우리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마교를 의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건가?”
청하의 목소리에 싸늘함이 깃들자, 재겸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청하는 저것조차 만들어 낸 표정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재겸이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저희도 내부적으로 복잡한 사정이 있는지라…… 지금 모든 것들을 전부 말해 드리긴 어렵지만, 어쨌든 ‘교주님’께서 의도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청하는 잠시 그 말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청하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믿기 어렵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는 것은…… 마교 내에 교주의 뜻에 따르지 않는 세력이 있다는……?”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도 전언을 전달하는 입장이라서요.”
재겸이 싱긋 웃으며 타이밍 좋게 청하의 말을 잘랐다. 청하는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이것은 또 예상치 못한 상황인데…… 정말인가? 이것은 원작에서도 들어 본 적 없던 새로운 정보였다. 다른 곳도 아닌 마교 내부에서 주세민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청하의 시선이 다시금 재겸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복면 사내에게로 가 닿았다. 왜 자꾸 그가 신경이 쓰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에 걸린 가시처럼 자꾸만 그의 존재가 청하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복면 사내 역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청하를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눈동자를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좀 전에 환상처럼 스쳐 지나갔던 붉은빛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그냥 착각이었던 거겠지.’
청하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원작에서 표현된 주인공 주세민에 대한 묘사는 그림을 그린 듯 명확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단연 피처럼 선명한 빛을 띤 붉은 눈동자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제쳐 두고라도 눈동자의 색을 바꿀 수는 없으니, 이것은 그저 빛이 만들어 낸 착각에 불과할 것이다. 청하는 고개를 내저으며 눈앞에 있는 재겸을 노려보았다.
청하가 재겸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제자들도 그의 말이 의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다른 제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말을 우리가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이냐? 어찌 되었든 마교 전체를 통솔하고 이끄는 것은 교주의 책임인 것이 아닌가? 이제 와서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발뺌하려는 자의 말을 어찌 믿지? 마교의 일원이 한 짓이라면 결국은 그 또한 교주의 책임인 것이 아니더냐!”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백영 또한 다시금 거칠게 입을 열었다.
“지금 시점에서 굳이 마교의 교주가 각주께 이런 해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자신에게 그만큼의 통솔력도 없고 장악력도 없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다른 각원들도 모두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재겸을 노려보았다. 재겸의 해명을 들었음에도 분위기가 진정되기는커녕 아까보다도 더욱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여전히 적대적인 각원들의 반응을 훑어보는 재겸의 입술이 불쾌한 듯 미묘하게 뒤틀렸다.
“교주님께서는 의도치 않은 사건으로 오해가 깊어질까 염려되어 화친을 위해 친히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정파의 제일 문파라는 곳이 이리도 포용력이 없고 속이 좁을 줄 미처 알지 못한 것이 실책이로군요.”
지금까지는 그래도 겉으로나마 정중하고 예의를 차리는 듯한 말투였으나, 모처럼 건넨 화친의 의사가 거부당하자 이제 재겸은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는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격분을 감추지 못한 성질 급한 몇몇 제자들이 영기를 운용하자, 기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한 수십 명의 복면 사내들도 그에 맞서 마기를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각 무리들의 수장인 류재겸과 백청하가 아직 검을 뽑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아직 발검한 자는 없었으나, 지금 당장이라도 흥분한 누군가가 검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아 젠장, 백진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나 혼자 저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무리인데.’
비록 제자들의 수는 수백 명이고 복면 사내들은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제자들 중 상당수는 아직 넘치는 혈기만큼 무공 수준이 그리 높지는 못했다. 반면에 류재겸이 데려온 수십 명의 복면 사내들은 보나 마나 마교 안에서도 고르고 골라 뽑은 최고의 정예들일 것이 분명했다. 류재겸 본인 역시 강호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정 고수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전, 엄청나게 위압적인 마기를 일으켰던 그 거슬리는 수하도 그렇고…….
청하의 시선이 다시금 힐끗 그쪽을 향했다. 재겸의 뒤에 당당히 버티고 선 그는, 아직도 청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왜…… 왜 자꾸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저렇게 쳐다보니까 내가 신경이 쓰이는 거잖아! 청하는 불편한 심경으로 애써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만일 백청하가 마음대로 영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야 마교의 고수들 몇 명을 제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아까 전에 주입한 백진의 영기는 이미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그런 청하의 뒤에서 나지막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스승님.>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지는 백진의 전음이었다. 청하는 순간적으로 발이 땅에서 펄쩍 튀어 오를 정도로 놀랐으나, 최대한 겉으로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뒤쪽을 힐끔거렸다. 원로들을 찾으러 갔던 백진이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간 떨어질 뻔했네.’
청하가 반색한 얼굴을 티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백진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전음은 또 어떻게 쓰는 거야……. 청하는 전음 대신 최대한 눈빛에 질문을 담아 백진을 바라보았다. 원로들은?! 다들 어딨어?
다행히도 백진은 청하의 눈빛을 알아들은 듯 곧장 이어서 전음을 보냈다.
<하필이면 오늘 천해관에서 정기 회의가 있어 원로님들을 포함한 근처 문파의 장로들이 모두 그쪽으로 가셨습니다.>
아, 맞다, 그랬지. 청하는 속으로 낭패의 신음을 삼켰다. 천해관의 회의는 이미 몇 주 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청하야 기억을 잃었으니 가 봤자 할 것도 없어 원로들을 대신 참석시켰던 것인데…… 혹시 마교 쪽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일부러 그 틈을 타 찾아온 것일까? 말로는 화친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지금처럼 격양된 분위기를 보아하니 당초의 의도도 의심이 갔다.
청하는 결국 지금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각주인 자신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한다. 청하는 입술을 깨물며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도박을 해 봐야 할까? 어차피 이제 곧 자신은 영기를 쓸 수 없게 된다. 사실 이미 지금도 거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혹시 정말로 이 상태에서 마교와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경우 자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차라리 그 전에 어떻게든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고 유혈 사태 없이 저들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장애가 있었다. 외부 영기가 거의 한계에 다다른 이 상태로는 마교 측 사람들을 단숨에 압도할 만한 무위를 보여 주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긴급 수혈이 필요한 것이다.
재빨리 결단을 내린 청하는 제 곁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백진을 휙 돌아보았다. 불타오르는 것 같은 청하의 눈동자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백진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백진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청하는 휙 손을 뻗어 백진의 목에 제 팔을 휘감았다.
“……!”
아까부터 청하를 주시하고 있던 재겸의 눈이 번쩍 커졌다.
강호에서도 절정 고수로 이름 높은 청루각주였다. 호기롭게 대응하긴 했으나 그가 정말 진심으로 나온다면 이쪽의 피해도 만만찮을 것임이 분명했다. 내심 신경 쓰이는 마음에 안 보는 척하면서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던 재겸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수백 명의 제자들과 수십 명의 마교 사람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청루각주 백청하는 제 수석 제자와 그 누구보다 열렬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 * *
‘지금? 여기서?!’
재겸은 경악스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야 물론 청루각의 그 유명한 심법이야 널리 알려진 것이고, 재겸도 당연히 이를 모르지 않았다. 재겸이 청루각의 일원으로 변장해 그들 틈에 끼어 있을 때만 해도 코앞에서 몇 번이나 저런 장면을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설마하니 한창 수련하던 중도 아니고 지금과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에, 심지어 외부인들도 다 보는 앞에서 각주라는 자가 자신의 제자와 저런 식으로 열렬히 입을 맞추리란 것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보통 저런 건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미리 알아서 다 끝내 놨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재겸은 짙은 공감성 수치심을 느끼며 슬쩍 그 장면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이쪽을 향해 시선을 못 박고 있는 수십 명이나 되는 제 수하들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진짜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귓가를 때리는 노골적인 젖은 물소리에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재겸의 뺨이 다 화끈거렸다.
하지만…… 왠지 다시금 눈동자가 슬그머니 그쪽으로 돌아가는 것은 왜일까.
‘이거 생각보다 제법…… 흥미로운데…….’
청루각주와 그 수석 제자의 입맞춤을 바라보는 재겸의 눈이 감출 수 없는 흥분으로 살짝 가늘어졌다. 강호에서도 미모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미남들의 진한 입맞춤이라니, 정말 자극적이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 사파들 중에서도 저렇게 남들 앞에서 대놓고 민망한 짓거리를 하는 자들은 거의 없는데, 하여간에 고결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는 정파 놈들이 더 하다니깐.
재겸은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면서도 그 자극적인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뚫어질 듯 그들의 짙은 입맞춤을 감상했다. 순간적으로 재겸의 시선이 아까부터 청하가 신경 쓰고 있던 복면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청하와 백진의 입맞춤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재겸의 눈이 순간적으로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한편, 청하는 청하대로 당황하고 있었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진심이야?’
이건 진짜 장난이 아니다. 청하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 제게 달라붙은 백진의 어깨를 밀어내려 해 보았으나, 강철같이 단단한 어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백진은 더욱더 청하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다른 손으로는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단단히 붙잡아 오는 것이 아닌가. 청하는 턱을 기울이며 제 안으로 더욱 깊게 파고드는 백진의 혀에 어쩔 줄을 몰랐다.
분명 시작은 청하가 리드하고 있었다. 과감하게 백진의 목에 팔을 휘어 감고 그 입술에 제 입술을 박치기했을 때만 해도, 청하는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언제 마교와 충돌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사고 회로가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일단 입술을 부딪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혀, 혀를…… 집어넣어야 하나?’
평생 동안 남자는커녕 여자와도 혀를 섞어 본 적이 없던 청하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충격에 굳어 있는 백진의 입술을 머뭇거리며 혀로 살짝 핥아 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뒤통수가 단단한 손아귀에 붙잡혔다.
‘……!’
청하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반쯤 열려 있던 입술 사이로 백진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거침없이 파고든 혀가 당황으로 굳어 있는 청하의 혀를 부드럽게 휘감더니, 민감한 입천장을 슬쩍 쓸어내렸다. 청하의 등허리가 움찔 떨렸다. 백진은 나머지 손으로 청하의 늘씬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서는 더욱더 깊숙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절로 청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읍…… 하윽, 아…… 읏……!”
적막이 흐르는 연무장에 타액이 섞이며 찔꺽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청하의 귓가가 더 이상 달아오를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떻게든 뒤로 도망치려는 혀를 집요하게 따라가서는 뿌리 끝까지 휘어 감고 예민한 점막을 긁어내린다. 집요한 살덩이가 입 안을 마음껏 헤집어 대는 통에 청하는 숨을 제대로 쉬기도 어려웠다.
‘처…… 첫 키스부터 너무 하드한 거 아니냐고!’
청하는 억울한 마음에 등 뒤에서 하나로 높이 묶어 올린 백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보았으나, 백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겨우 실눈을 뜬 청하의 시야에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눈을 감고 있는 백진의 얼굴이 보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무섭도록 집중한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청하는 점점 가빠지는 호흡을 간신히 추스르며 정신없이 넘어오는 타액을 삼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 입 안을 헤집는 혀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만도 벅찼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백진은 겨우 청하를 놓아주었다. 청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백진을 향해 눈을 치켜뜨려 하였으나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 때문에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들 땐 언제고, 백진은 새삼스럽게 당황한 표정을 한 채 붉어진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제 스승을 빤히 바라보았다. 강아지처럼 옅은 갈색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어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단정한 입가를 손등으로 가리고 있는 것이, 누가 보면 그쪽이 강제로 파렴치한 짓이라도 당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청하는 어이가 없어 절로 숨이 거칠어졌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청하가 백진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고는 마교의 무리들 쪽을 돌아보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다들 약간 멍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아직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새빨갛게 달아올라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하고 있긴 했으나, 청하의 몸 안에는 그 어느 때보다 운용할 수 있는 영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청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최대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계속 여기서 분쟁을 일으키겠다면 나도 이제 두고만 볼 수는 없겠군. 더 이상 그대들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가게.”
그리고 청하는 단숨에 허리춤에 있던 창천검을 뽑아 들었다. 왠지 약간 묘한 눈빛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재겸은, 갑작스러운 청하의 발검을 예상하지 못한 듯 그제서야 황급히 제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청하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뽑아 든 검을 치켜든 청하는 재겸을 포함한 마교의 무리들과 청루각 제자들 사이에 있던 빈 공간에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새파란 영기가 검신을 물들였고, 곧 그 영기는 화살처럼 빈 연무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콰콰콰콰쾅!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이 고요하던 청루산을 뒤흔들었다. 순식간에 자욱한 먼지가 태양을 가릴 듯 높다랗게 솟아올랐다.
‘어, 엄청나다…….’
청하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엄청난 영기의 규모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 이렇게까지 스킨십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청하는 슬쩍 재겸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을 정통으로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제자들보다는 그쪽에 가깝게 휘두른 검격이었다. 이 정도 규모의 폭발이라면 마교 측 사람들이 어느 정도 휘말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치명상만 아니면 됐지, 뭐.’
청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약간은 긴장된 눈빛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청하의 주변을 둘러쌌던 제자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서는 다시금 일사불란한 진영을 갖추었다.
잠시 뒤,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와 자욱한 먼지를 날려 보냈다. 청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앞을 주시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옆에서는 백진이 마치 청하를 호위하겠다는 듯 굳게 검을 들고 엄호하고 있었다.
먼지구름이 걷히고 보인 광경은 상당히 뜻밖의 것이었다. 어느 정도의 타격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과는 달리, 방금 전의 그 복면 사내가 재겸의 앞에 서서 검을 곧추세워 들고 있었다.
검은 마기가 남자의 검 주변을 꿈틀거리며 에워싸고 있었고, 검에서부터 뻗어 나온 일렁거리는 기운이 남자의 앞에서 넓게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마교의 무리들이 있었다.
“헉!”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청하의 내공을 실은 검격은 보통 수준의 무공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청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제자들 중 방금 전 청하의 공격을 이 정도로 완벽하게 막아 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백진조차도 이 수준은 아니었다. 검을 쥐고 있는 청하의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젠장, 저 녀석 아까부터 계속 거슬린다 했더니, 류재겸 본인도 아니고 그 수하 중에 저 정도의 고수가 있다고?! 아까도 마기가 보통이 아니라 생각하긴 했지만…… 망했다!’
청루각 사람들이 말없이 경악에 빠져 있는 사이, 재겸은 뒷짐을 진 채 느긋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방금 청하의 검격을 받아 낸 그 복면 사내는 한마디 말도 없이 다시 묵묵히 뒤로 물러나 재겸의 곁을 호위했다. 검은 천 위로 청하를 바라보는 나른한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재겸이 턱을 치켜들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과연, 이것이 청루각의 대답인 것입니까?”
청하는 낭패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방금은 그저 경고의 의미였을 뿐이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오늘의 무례는 잊기로 하지.”
“글쎄, 어느 쪽이 무례를 저질렀는지 모르겠군요. 화친을 위해 찾아온 저희들을 이리 박대하시다니, 청루각의 그릇을 알 만합니다.”
“진정 화친을 원했다면 좀 더 정중한 방법을 택했어야 하지 않나. 이리도 무례하게 찾아와 다짜고짜 자신들의 할 말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말이지. 게다가 화친의 뜻을 전하는 전령의 언행이 이토록 경솔한 것도 교주의 뜻인가.”
절대 얕보여선 안 돼……! 청하는 필사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정심을 가장하며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저쪽 편에 생각지도 못한 고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말이라도 그럴듯하게 하여 이쪽이 밀린다는 인상을 주지 않아야 했다.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과연 필사적으로 늘어놓은 청하의 말발이 어느 정도 먹혀든 것인지, 재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알을 굴리던 재겸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습니다. 전갈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것은 이쪽의 결례이니, 이만 축객령을 받아들이기로 하겠습니다. 부디 교주님의 뜻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러더니 아직도 긴장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청루각의 제자들을 휘둘러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청루각에는 각주님을 제외하고도 강호에 위명을 떨치는 절정 고수들이 그리 많다고 하던데, 오늘은 안타깝게도 그분들의 존안을 뵙지는 못할 모양입니다.”
제자들 사이로 침묵과 함께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도 현재 청하를 제외한 청루각의 원로들이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청하 역시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오늘 원로들이 청루각을 비운 것을 알고 찾아온 건가? 혹시 지금 이쪽을 떠보는 거?’
청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을 상대하는데 다른 이들까지 모두 나설 필요는 없겠지. 청루각주가 여기에 있는데, 나 말고 다른 이들의 무공이 궁금한가?”
재겸이 씩 웃었다.
“과연, 대단한 기개이십니다. 오늘 각주께서 보여 주신 무위에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비록…….”
재겸의 시선이 그때까지 제 옆을 지키고 있던 복면 사내에게 가 닿았다.
“제 수하의 무위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만.”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청하는 속으로 앓는 신음을 흘렸다. 뭐 어쩌라는 거야? 그래서 붙어 볼 만한 것 같으니 한 판 붙고 싶다고? 이만 꺼지라고 했잖아, 대체 왜 안 가고 얼쩡거리는 거야?
그때, 그런 청하의 심정을 대변한 듯한 청아하고 싸늘한 목소리가 연무장 위에 내려앉았다.
“이미 각주께서 축객령을 내리신 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대체 쓸데없는 혓바닥이 왜 이리 긴 것이냐?”
이건 또 누구지? 청하가 막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허공에서부터 한 인영이 벼락같이 청하의 앞쪽으로 뛰어내렸다.
푸릇한 대나무처럼 초록빛을 띤 도포를 몸에 두르고 등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반쯤 올려 묶은 사내였다. 청루각 원로들이 입고 있던 푸른 계열의 도포와 닮았으나, 활동성 있게 소매를 좁게 잡아맨 옷이 맵시 있게 사내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날렵한 눈썹 아래 자리 잡은 길게 늘어진 서늘한 눈매가 매력적인 미남이었다. 왠지 검보다는 책을 들고 있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어딘지 모르게 문학부 선배 같은 느낌을 주는 예민하고 지적인 인상이었다.
꼿꼿하고 훤칠한 키의 남자가 청하의 곁을 스치자, 그의 옷자락에서는 이 세상 사람의 것 같지 않은 청량한 대나무숲의 향기가 났다. 청하의 곁을 둘러싼 제자들 사이에서 놀라움과 함께 반가운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아…….’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느낌에, 청하는 제 앞에서 여유롭게 검을 뽑아 드는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저를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사내 쪽을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 청하를 마주 바라보았다.
청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날카롭게 벼려진 검 같았던 남자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바뀌었다. 학자 같은 느낌이 드는 지적인 눈꼬리를 휘어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남자가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각주님?”
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덧붙였다.
“청하야.”
아. 청하는 비로소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현재 이곳 청루각에서 청루각주 백청하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는 청루각의 2인자이자 청루각의 소각주, 그리고 청하의 사형인 ‘화무비검’ 진청연임이 분명했다.
‘저 사람이 왜 지금 여기에 있어? 강호를 돌아다니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청하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청하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마찬가지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예, 사형.”
진청연의 눈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재겸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린 청연이 언제 그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냐는 듯,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청루각의 원로를 찾았나? 여기 나, 진청연이 왔으니 용건을 말해 봐라.”
재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낭패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실 이미 청하도 짐작했다시피, 류재겸이 하필 오늘 청루각에 방문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청루각에 정말 싸움을 걸거나 선전 포고까지 할 생각인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원로들이 없는 틈을 타서 약간의 힘을 과시할 생각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편이 이쪽에서 내미는 ‘화친’의 뜻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진청연의 등장은 그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뭐지, 진청연이 오늘 돌아올 것이라는 정보는 없었는데. 강호에 나가 있었던 게 아니었나? 아쉽게 됐군.’
재겸은 어리석지 않았다. 청루각의 이름 높은 고수가 둘씩이나 있는 상황에서 만용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그 수하’가 있다고는 하나, 청하 하나만으로도 이미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재겸은 기민하게 사태를 파악하고는 얼른 정중한 미소를 지었다.
“별달리 용건이야 있겠습니까. 그저 그토록 유명하신 청루각 고수분들을 한번 만나 뵙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사자로서의 역할을 다했으니, 여러분들의 귀중한 시간을 더 이상 빼앗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그리고 재겸은 재빨리 어검에 올라타 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청하의 신경을 잡아끌던 그 사내도 유연한 맹수처럼 휙 어검에 올라타 재겸의 뒤를 따랐다. 다른 복면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마교의 무리들을 바라보며, 청하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드디어 갔다…….’
정말 기나긴 하루였다.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날이다.
청하가 그토록 길고 긴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어검에 올라탄 사내는 점점 멀어지는 청루각주의 얼굴을 서늘한 눈초리로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는 재겸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검은 천으로 가려진 그의 얼굴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그러나 그쪽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사내는 천천히 자신의 검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검은색의 반지를 잡아 빼내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일렁이며 선명한 붉은빛이 서서히 그의 짙은 동공을 채워 갔다. 중원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붉은 기운을 띤 눈동자가 이채를 띤 채 번쩍였다.
그의 머릿속으로 청하의 빙옥같이 아름다운 얼굴과 빙설처럼 싸늘한 목소리, 거침없이 강력한 푸른 영기를 발산하던 모습과, 모두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제자와 짙은 입맞춤을 나누던 장면이 차례차례 스쳐 지나갔다.
사내의 입술 사이로 마침내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청루각주 백청하라…….”
* * *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청하의 눈앞에 진청연이 불쑥 다가왔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각주님.”
청연이 다시금 깍듯한 존댓말로 안부를 물으며 청하의 이곳저곳을 뜯어보았다.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손을 뻗은 청연은, 청하의 얼굴 옆으로 흘러내린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귓바퀴를 스친 손가락이 그대로 떨어지는 대신, 청하의 부드러운 뺨을 살짝 건드리더니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청하의 입가를 쓸었다. 진한 입맞춤의 흔적으로 아직도 촉촉한 아랫입술을 슬며시 쓸어내리는 청연의 눈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꿈틀거렸다.
청하는 제 얼굴에 자연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는 청연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움에 눈만 깜빡였다. 너, 너무 거침없는 거 아냐? 원래 둘이 이렇게 스스럼없는 사이였나?
주변에 있는 제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청연은 꿀이 떨어지는 것 같은 눈빛을 한 채 두 손으로 청하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의 미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청하를 바라보는 청연의 시선은 부드러운 솜사탕처럼 애틋하고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늘하게 늘어진 긴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것을 보자 괜히 청하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순식간에 주변 배경을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희미하게 날려 버리며, 마치 이 세상에 단둘만 남은 듯 다정한 표정을 한 청연이 다시금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청하야, 너…….”
그때, 옆에서 정중하지만 다소 딱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소각주님, 강호로 나가셨던 일은 어찌하고 이곳에 계십니까.”
순식간에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진청연이 싸늘한 눈빛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백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담담한 빛을 띠고 날카로운 청연의 눈빛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청하를 바라볼 때는 그토록이나 다정하고 부드럽던 눈빛이, 백진을 바라볼 때는 그야말로 시베리아에 몰아치는 북극 한파처럼 싸늘하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거의 이중인격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표정 변화에, 청하는 그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청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감히 네 스승과 대화하는 자리에 끼어들다니 건방지구나.”
백진은 눈을 내리깔며 겉으로는 순종적인 척 고개를 숙였으나,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착한 학생같이 단정하고 유순한 표정에 비해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전혀 물러나는 기색이 없었다.
“송구합니다. 다만, 스승님의 명으로 강호에 내려가셨던 소각주님을 갑작스레 이곳에서 뵙게 되어 부족한 사질은 걱정이 되었을 뿐입니다.”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결과적으로 나 덕분에 저 간악한 마교 놈들을 쫓아내었으니 다행인 것이지.”
“소각주님이 아니더라도 저자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쫓겨났을 겁니다.”
“뭐라고……?”
“자, 잠깐!”
어째 점점 더 험악해지는 것 같은 대화의 흐름에 당황한 청하가 끼어들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제자들은 이미 숨도 쉬지 못하고 그저 두 사람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아니, 평소에는 그리도 착하고 순하던 녀석이 왜 진청연에게만 저러지? 하긴, 그러고 보면 소각주도 백진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한 두 사람의 태도에 청하는 약간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청하는 백진을 향해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청연의 앞을 허겁지겁 제 몸으로 가로막았다. 그러자 언제 그런 무시무시한 눈빛을 했냐는 듯, 청연이 다시금 부드럽기 짝이 없는 얼굴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뭔가 어떻게든 이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청하는 아무렇게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내뱉었다.
“그, 아, 그러고 보니 어찌 이리 빨리 돌아오신 것입니까?”
잠깐, 아까 백진이 물었던 거랑 똑같잖아?! 청연이 방금 전 얼마나 싸늘하게 백진의 질문을 튕겨 냈는지 직접 보았던 청하는 당황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청연은 백진에게 대꾸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마무리되어 마침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선봉 주변에 검은 구름이 모여들고 강한 마기의 준동이 느껴지기에 급히 어검을 타고 달려왔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러길 잘한 것 같군요.”
그러더니 청연은 청하의 곁에 가까이 붙어 서며 자연스럽게 그의 손목을 붙잡고는, 살짝 튀어나온 손목뼈를 친근하게 문지르는 것이 아닌가. 간질거리는 감각이 손목에서부터 팔을 타고 퍼져 나갔다. 청하의 입가에 작게 경련이 일었다.
청연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각주님을 뵈니 감회가 새롭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이 말뜻과 이 제스처는 아무래도…… 그, 그거인 거 같지? 아무래도 원작의 백청하는 진청연과 무척이나 친밀한 관계였던 것이 분명했다. 청하가 당황한 얼굴로 슬쩍 청연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토록 청연에게 한 소리를 들었음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백진이 불쑥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당분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소각주님께서도 부디 그 점을 유의해 주십시오.”
청연이 순간적으로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백진의 말이 그의 주의를 끈 것은 분명했다. 청연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청하를 돌아보았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각주님의 옥체에 무슨 변고라도 있으셨습니까?”
하긴, 청루각을 떠나 있던 진청연이 청하가 마교의 독에 당해 사경을 헤맸었다는 소식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청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소각주. 마교의 독 때문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지금은 거의 다 회복되었습니다. 무, 물론 아직 조금 요양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혹시 몰라 약간의 연막을 쳐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다고 하면 방금 전처럼 그런…… 의미심장한 스킨십을 자꾸 하려고 하진 않겠지. 그러나 청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청연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이며 부드러운 얼굴에 충격이 어렸다. 깜짝 놀란 듯 멍하게 입을 벌리던 청연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그런……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런 큰일이 있었습니까? 그런 줄 알았더라면 방금 전 마교 놈들을 그리 곱게 돌려보낼 것이 아니라 사지를 갈가리 찢어 버렸을 텐데…….”
학자같이 점잖고 지적인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말투였다. 그때, 백진이 다시금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뿐만 아니라 스승님께서는 기억도 잃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우실 스승님께서는 아직 안정이 필요합니다, 소각주님.”
청연의 눈이 다시금 휘둥그렇게 커졌다. 황급히 청하를 돌아보는 그의 목소리가 놀라움으로 떨렸다.
“기억을 잃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청연의 말에, 청하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도 잊어버리신 것입니까?”
청연이 충격받은 눈동자로 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애틋하고 애처로워 보이던지, 청하는 제 것도 아닌 죄책감을 느끼며 슬며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게……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약간은…… 기억을 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고는 약간 망설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였다.
“사형.”
걱정과 충격으로 잔뜩 흔들리던 청연의 눈동자가 사형이라는 말을 듣자 그제서야 약간 진정하는 듯 보였다. 잠깐 침묵에 잠겨 있던 청연이 다소 침착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그렇다면 언제나처럼 각주님의 회복은 제가 도와드려야 하겠군요.”
“예? 언제나처럼……이라고요?”
“그것도 기억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 청루각에서 각주님과 가장 관계를 많이 가졌던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어려서 같이 수련하던 시절부터 함께해 온 사이니까.”
그러면서 청연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백진 쪽을 향해 힐끗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뜻밖의 말을 듣고 충격에 빠져 있던 청하는 청연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 정말? 청하는 말문이 막힌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랑…… 진청연이? 하긴,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토록 친밀하게 행동했던 것을 보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청연은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그…… 하지만 제갈서윤의 말로는, 전 원래 누구하고도 그렇게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지진 않았다고 하던데요…….”
청하의 말에 청연이 약간 멈칫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그렇긴 했지요. 하지만 어쨌든 그중에서 저와 제일 많이 영기를 교환하고 가장 자주 같이 수련했던 건 사실입니다. 지금 각주님의 몸이 좋지 않다니, 예전처럼 제가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단숨에 청하의 손목을 붙잡은 채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아니, 잠깐만……! 말이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청하는 기겁하여 애써 발끝에 힘을 주어 버티면서 황급히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저, 사형, 아니, 소각주. 저는…… 저, 죄송하지만 저는, 아, 아무하고나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제 몸은 거의 다 회복되었으니 소각주께서도 무리하지 마세요. 소각주께서도 이제 막 강호에서 돌아오셨으니 당분간 참선과 운기조식에 힘쓰셔야 하지 않습니까.”
청연이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하고나 할 생각이 없다고……?”
“예에……. 아, 물론 소각주는 아무나가 아니시지만, 지금은 제 기억이 아직 온전치 않기도 하고, 또…… 아무튼, 지금은 아직 좀 그렇습니다.”
청하가 우물쭈물 말을 이으며 청연의 눈치를 살폈다. 어쨌거나 그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 몸을 섞으며 수련했던 자신이, 지금은 기억을 잃었다는 이유로 마치 남처럼 그의 도움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청연이 조금 속상할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는 옛날부터 백청하를 친동생처럼 무척 아꼈던 것 같은데…….
‘정말 다정한 사형이신가 보다.’
청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청연에게 약간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살짝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어설프게 그를 위로하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하를 향해, 청연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깜빡였다.
청연은 그렇게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서 저를 향해 미안한 듯 웃고 있는 청하를 생경한 것을 보듯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청연의 몸이 천천히 청하를 향해 기울어졌다. 청하에게 바짝 다가선 청연은, 청하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청하야.”
“예, 사형.”
“너 정말…… 성격이 많이 바뀌었구나.”
청연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 같아.”
청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 어째서 그,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가까스로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는 데는 성공했으나, 청하의 머릿속은 누군가가 두개골 속에 손을 집어넣어 마구 휘저어 놓기라도 한 듯 엉망이었다. 두서없는 생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청하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어쩌지? 들킨 건가? 어떻게? 어디서? 대체 내 성격이 뭐가 그렇게 이상한 거지? 원래 백청하의 성격은 또 어떻길래? 얼마나 성격이 다르면 기억을 잃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 거야?’
청하는 초조함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저도 모르게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제자들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백진은 바짝 붙어 서 있는 청하와 청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역시 아무하고나 잠자리를 갖지 않겠다는 말이 의심을 산 건가? 백청하는 원래 그런 것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누구하고든 관계를 가졌으니까……. 역시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나도 그런…… 그런 것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하지만 난 게이가 아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갑자기 마음에도 없는 남자랑 그런 걸 해!’
청하의 가슴이 갑자기 갈 곳 없는 억울함과 서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청하의 심란하고 혼란스러운 심정 같은 것은 전혀 모르는 청연은, 그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약간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글쎄, 따져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청하는 말꼬리를 늘이며 잠시 뜸을 들이는 진청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청연이 그런 청하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며 설풋 미소 지었다.
“너는 절대로 그렇게 다정한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응……? 뭐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청하는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내가…… 다정하다고? 굉장히 평범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청하가 말문이 막힌 채 우물거리며 입을 다물자, 청연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그리 내 마음을 신경 써 주는 것을 보니 좀 낯설긴 하구나. 사실 이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니지?”
그러면서 청하의 가슴께를 장난스럽게 톡톡 두드리는 것이다. 청하는 그야말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는 낯을 만들어 내었다.
“하하하…… 사형께선 참…… 농담도…….”
겉으로는 하하, 웃고 있었지만, 청하의 머릿속에서는 수십 가지의 생각이 마구잡이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떡하지? 정말 이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하, 설마 이런 소리를 들을 거라곤, 대체 원작 백청하는 어떤 성격이었던 거야?!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왠지 그다지 좋은 성격은 아니었을 것 같긴 한데…….’
청하는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슬쩍 시선을 들어 올리자 백진이 아직도 반항적인 눈빛을 한 채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바짝 붙어 서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는 그들 사이에 당장이라도 끼어들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쟤는 아직도 저러고 있네. 혹시라도 그가 또 무언가 청연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할까 걱정이 된 청하는, 백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만히 있으라는 눈빛을 보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만 어린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던 백진은 청하가 제게 보내는 눈짓을 보자마자 왠지 모르게 뺨을 살짝 붉히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저건 또 왜 저래?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그만하라는데도 계속 붙잡고 키스했던 거에 대해서 한마디 해야 하는데.’
하지만 백진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것은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청하는 아무래도 자신이 백진의 버릇을 영 잘못 들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네가 원래 어떤 성격이었냐고?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제갈서윤이 별 황당한 질문을 다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마교 무리들로 인한 소동이 대충 가라앉은 늦은 오후, 청하는 태선각 근처의 누각에 처박혀서 햇볕을 쬐고 있던 제갈서윤을 간신히 찾아내었다. 마교가 쳐들어왔는데 자신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고 잔뜩 심통이 나 있던 제갈서윤을 달래느라 한동안 진땀을 뺐던 청하는, 간신히 서윤을 달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마자 다짜고짜 그런 질문을 던져 댄 것이다.
제갈서윤의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청하는 애써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말 그대로야.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원래 어떤 성격이었냐고.”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해하는데?”
“그냥…… 소각주께서 내가 기억을 잃은 후에 성격이 좀 많이 바뀐 것 같다고 그러셔서.”
서윤이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야 그렇지.”
“정말이야?”
청하가 그의 앞에 바싹 다가앉으며 냉큼 되물었다.
“원래 내 성격이 어땠는데?”
“글쎄 뭐, 간단히 말하자면…….”
“말하자면?”
“아주 싸가지가 없었달까?”
서윤이 씩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맺었다. 청하는 눈을 치켜뜬 채 그를 노려보았으나 서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서윤이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손에 들고 있던 접선을 한가롭게 펼쳤다.
“굉장히 차갑고 싸늘한 성격이었지. 옛날부터 그랬어. 정확히 말하면 좀 감정이 없는 인형 같았달까. 그러니 나 정도 되는 녀석이 아니면 누가 너 같은 애랑 친구를 하려고 했겠어? 생각해 보면 네 문파의 수련 방식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넌 수련 과정에 감정이 개입하는 걸 엄청 싫어했거든.”
그러다 보니 더더욱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해. 평이하게 이어지는 제갈서윤의 말을 들으며 청하는 그저 당혹스러움에 눈만을 끔뻑거렸다. 그, 그래……? 내가…… 그런 성격이었단 말이지?
백청하가 그런 성격이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애초에 원작에서는 딱히 그의 성격에 대해 설명 한 줄 나온 적이 없었다. 청하는 입을 꾹 다문 채 이 몸에서 눈을 뜬 뒤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행적을 찬찬히 돌이켜보았다. 자신은 꽤나 평범하게 행동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원래부터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자신이 굉장히 달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생각될 만큼…….
‘아니…… 백청하라는 캐릭터가 이 정도로 사회성 없는 소시오패스 같았을 줄은 나도 몰랐지!’
청하는 억울한 심정으로 듣는 이 하나 없는 항변을 해 보았으나 이제 와서 어쩔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해 온 것이 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성격을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연기가 뛰어나다 해도 평생 동안 그렇게 감정도 없는 인형인 것처럼 연기하진 못한다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절대 남자들이랑 마음에도 없는 그렇고 그런 짓은 못 해!’
청하는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하며 서윤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러면…… 혹시 내가 기억을 잃고 성격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들어?”
서윤은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이 서윤의 화려한 비단옷 위로 내려앉았다. 그림으로 그려 놓은 이 시대의 태평한 한량 같은 모습으로, 서윤은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항상 하고 있어.”
“뭐……?”
“근데, 난 사실 이쪽이 좀 더 좋거든. 그래서 별 신경 안 쓰고 있어.”
“…….”
정말 천하태평한 말이다. 설마 정말로 이 껍데기 안의 인간이 바뀌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저런 말을 쉽게 하는 거겠지? 제갈서윤은 대체적으로 착하고, 약간 호구 같기도 하고, 이런저런 정보도 술술 불어 주는 참 편리한 NPC 같은 녀석이긴 한데, 결과적으로 별로 도움은 안 된다.
청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날 밤, 막 침상에 누울 준비를 하고 있던 청하에게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있었다.
가벼운 침의를 입고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내린 청연이, 이제 벌써 눈에 익은 듯한 다정한 미소를 띤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괜찮다고는 해도 아직 독의 후유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데, 운기조식을 해야 하지 않겠니? 마교의 독은 독하기로 워낙 유명해서…… 내가 도와주마.”
“그, 괜찮습니다. 운기조식 정도는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청하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사실 남의 영기가 없으면 스스로의 내공을 움직여서 하는 운기조식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 청하의 상태였다. 청연이 청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정말로?”
“예?”
청하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무언가를 관찰하는 듯한 청연의 시선이 청하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러나 청연은 곧 다시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단다. 그냥 네 혈을 짚어서 영기 순환을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음……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하긴, 백진도 저런 식으로 자신에게 영기를 넣어 주곤 했으니 청연도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까지 물러서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권유하는 청연을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도 어려웠다. 어쨌든 청연은 이 청루각의 소각주인 데다 청하의 사형이고, 또 원작 백청하와는 더욱 막역한 사이였을 것이 분명하니…….
망설이던 청하는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청연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의 빛이 어렸다.
방 안으로 들어와 청하를 침상에 앉힌 진청연이 청하의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얇은 침의 하나만을 걸치고 있는 청하의 등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청연이 약간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무엇 하느냐?”
“예?”
“옷 벗어야지.”
뭐어?! 청하는 제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청연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표정을 한 채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청하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청연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었다고 했지. 영기를 교환하려면 맥이 뛰는 곳에 직접 접촉하는 것이 그나마 효과적이란다. 옷으로 가로막히면 아무래도 영기 손실이 너무 많아져서.”
그것은 백진도 했던 말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옷을 벗으라니, 야심한 밤에 외간 남정네 단둘이 침상에 앉아서……? 청하의 눈동자가 마구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그냥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할까……?
청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잔뜩 굳어 있는 청하의 어깨를 살짝 쓸어 주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다. 정 불편하면 살짝 등 아래까지만 옷을 내리거라.”
그, 그래……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남자들끼리 수영장도 가고 했는데, 뭐. 청하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몇 번이나 속으로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이 정도야 별것도 아니니까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말자. 안 그래도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성격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 있는데…….
결국 청하는 마음을 굳게 먹은 채 다시금 앞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어깨에 걸쳐져 있던 침의 자락을 슬쩍 끌어 내리자 하얗고 모양 좋은 어깨가 흔들리는 등잔불 아래에 모습을 드러났다. 청하는 약간 긴장한 채 침을 삼키며 등 뒤로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서는 한쪽 어깨 앞으로 쓸어내렸다. 날개뼈 아래까지 끌어 내려진 옷자락 너머로 잔근육이 잡힌 늘씬하고 하얀 등이 청연의 눈앞에 드러났다.
잠시 그렇게 앉아 청하의 매끈한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청연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대로 영기를 불어넣어 주는 대신, 청연은 청하의 도드라진 날개뼈와 움푹 들어간 척추 부근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청하의 등줄기가 움찔 떨렸다. 뭐, 뭐지? 부드러운 손가락이 등줄기를 쓸어내릴 때마다 몸이 저도 모르게 조금씩 떨려 왔다. 배 속이 약간 간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청하의 살결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청하의 몸을 더듬던 청연이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필 이런 때에 내가 강호에 나가 있었다니 정말 후회가 되는구나. 나와 관계를 가졌더라면 좀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었을 텐데.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그 녀석이 나 대신 도움을 주었던 것이냐?”
잠시 청연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거리던 청하는,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간신히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무슨 이런 질문을 하는 거야? 여기는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없나?’
하긴,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사생활을 묻는 것이 아니라 몸의 치료와 회복 과정에 대한 질문이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노골적인 질문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상식적인 현대인인 청하는 조금 당황한 채 말을 더듬었다.
“그, 그, 그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 하긴, 너는 다른 제자들과는 모두 관계를 가지면서도 절대 백진 그 녀석과는 하지 않았으니.”
청연이 왠지 모르게 약간 안심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내가 그랬다고? 왜 그랬지? 청하는 뜻밖의 말에 얼떨떨한 심정으로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원작의 백청하는 누구든 가리지 않고 제 무공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침대에 끌어들였던 것이 아니었나? 왜 굳이 백진과는 관계를 가지지 않았던 거지?
그때, 청연이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기억을 잃은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잠시 침묵하며 청하의 등을 쓰다듬던 청연이 반쯤 한숨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네 수석 제자이니 가까이 두는 것은 어쩔 수 없긴 하다만…….”
“예?”
청하가 뒤쪽으로 반쯤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으나 청연은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청하의 등을 부드럽지만 약간은 집요하게 쓰다듬던 손이 비로소 그의 심장 바로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등에 밀착한 청연의 손바닥에서 곧 백진의 것과는 조금 다른 청량한 기운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맨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맡았던 청량한 대나무숲의 냄새처럼, 어딘지 모르게 눈 덮인 푸른 대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맑고 청아한 기운이었다.
청연의 영기에 따라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청하의 내공이 그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몸속을 구석구석 순환하기 시작했다. 청하는 제 몸이 점점 더 가벼워지며 흐름이 원활하지 않던 몸 안의 혈맥이 조금씩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이게 무협 소설에서 말하는 운기조식이라는 거구나. 보통 무협 소설 주인공들은 시작하자마자 운기조식하는 법부터 배우던데, 나는 이제서야 이걸 처음으로 해 보다니…….’
청하는 속으로 남몰래 감탄하며 제 몸속에 흐르고 있는 기운에 집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별문제 없이 잘 회복하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오긴 했으나, 청하는 이제서야 제 몸에 남아 있던 사특한 기운이 완전히 씻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진청연의 말대로 운기조식을 하기 잘한 것 같았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몸 안에 흐르는 영기와 내공에만 집중하고 있던 청하의 귓가에, 문득 나지막한 청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아까 내가 낮에 했던 말을 신경 쓰고 있느냐?”
……성격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혹시 이 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 있는 게 아니냐는 말? 그럼 당연히 신경이 쓰이지, 당신 같으면 신경이 안 쓰이겠냐?! 청하는 속으로 투덜거렸으나 운기조식 중에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청연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신경이 쓰였단다.”
뭐? 왜지? 청하는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청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어린 동생에게 책을 읽어 주듯 부드럽게 속삭이는 조용한 목소리가 어둑어둑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난 내 마음에 신경 써 주는 다정한 네가 조금 생소하지만 좋단다. 넌 언제나…… 그런 것에 조금 무심한 편이었으니까.”
청연이 빙그레 웃으며 청하의 벗은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기분이 어떨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어. 네가 기억을 잃은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만, 이렇게 다정한 너를 볼 수 있어서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그래서 사실 너에게 좀 미안하구나.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지?”
청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금 서서히 뱉어 내었다. 호흡을 거듭할 때마다 몸 안을 순환하는 영기는 점점 더 맑아지고 흐름도 뚜렷해졌다. 청하는 왠지 가슴께가 조금 저릿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따뜻한 것이 청하의 배 속을 서서히 채워 나갔다.
운기조식을 하기 전까지는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알 수 없는 따뜻함으로 배 속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이곳이 비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지막한 청연의 고백이 청하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위로가 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위로가 필요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지만.
청하는 은연중에 스스로를 이 세계의 불청객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보고 있는 것은 청루각주 백청하의 껍데기일 뿐이고, 자신은 그저 그 안에 들어 있는 불청객일 뿐이라고. 그 때문에 청하 역시도 언제나 한 걸음 떨어져, 마치 아직도 책 속의 캐릭터들을 보는 듯한 관망자 같은 기분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처음으로, 청하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비록 청연은 자신의 말이 청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알지 못했겠지만, 어찌 되었든 청하는 그 말에서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그 위안이야말로 지금의 청하에게 가장 필요하던 것이었다.
맨 등에 닿아 있는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따스했다. 사람과 사람의 살갗이 닿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청하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고개를 숙였다.
정말,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