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20)

1장

그 소설을 보는 게 아니었다.

민혁은 그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다. 빌어먹게도 머리털 나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이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오직 시간만은 돌릴 수가 없었다. 민혁은 제 앞에 늘어선 인간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꿈인가……?”

정말 간편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달콤한 생각에 좀 더 매달리기도 전에, 별로 좁지도 않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오열을 시작했다.

“각주님!”

“각주님께서 깨어나셨다!”

“드디어, 드디어…… 하늘의 보살핌입니다.”

“각주님, 아이고 각주님!”

온 사방에서 감격에 겨운 남정네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민혁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커다랗고 화려한 침상에 누워 그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옷자락. 길게 늘어뜨리거나 하나로 질끈 동여맨 장발의 머리카락. 다들 어디 영화나 드라마에서라도 튀어나온 듯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생긴 얼굴들에, 허리에는 분명 검으로 보이는 것까지 매달고 있었다.

민혁은 눈을 끔뻑이며 천천히 제 팔을 들어 보았다. 자신의 몸에도 남자들이 입은 것과 비슷하게 치렁치렁한 흰 옷자락이 감겨 있었다. 눈앞으로 들어 올린 손가락은 익숙한 듯 낯설었다.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자신의 손가락인 것 같기는 한데, 제 것이라기엔 너무 희고, 곱고, 매끈하면서도 길쭉하게 쭉 뻗은 아름다운 손가락이었다.

단언컨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손가락이다.

“저기…….”

민혁이 어눌하게 입을 열자, 그 누구보다 민혁이 누워 있는 침상에 가까이 서 있었던 남자 하나가 그를 향해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헐 미친, 진짜 잘생겼다. 민혁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는 민혁의 앞에 엎드린 채 오열하고 있는 남자들처럼 호들갑스럽게 울고 있진 않았으나, 그에 못지않게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민혁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저,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 저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그 순간, 민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민혁이 입을 여는 것을 주시하고 있던 근처 몇몇의 얼굴에도 경악이 어렸다. 얼굴이 새하얘진 남자가 즉시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각주님께서 기억을 잃으신 듯하다! 어서 의원을 불러오거라!”

아니, 그러니까 그 각주가 대체 누구냐고?!

민혁은 답답함과 억울함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민혁이 그들이 말하는 ‘각주’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때는 차라리 그게 누군지 모르던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 머리를 어디에 들이받기라도 해서 가능하다면 다시 기절하고 싶었다. 그러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못하더라도 영원히 깨어나지 않게 된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을지도…….

민혁이 이런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민혁이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침상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흰 옷자락에 화려한 구름무늬 수를 놓은 사치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사내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내리고, 반듯한 이마 아래 남자답게 잘생긴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자유분방한 걸음걸이로 민혁이 누워 있는 침상 곁까지 걸어 들어온 사내는,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채 가타부타 말도 없이 민혁의 손목부터 덥석 붙잡았다.

놀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민혁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심각한 얼굴로 민혁의 맥을 짚기 시작했다. 의원인가? 민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끔힐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보통 의원이라고 하면 마음씨 좋게 생겨서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할아버지라든가, 뭐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나 의원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긴 했으나 백발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시원스레 뻗은 콧날이 절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배우 했으면 대박이었을 텐데 아쉽군…….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멍하게 올려다보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의원이 눈을 뜨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습니까, 대협. 스승님께선 괜찮으신 것인지요.”

아까 전부터 민혁의 침상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잘생긴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민혁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옆에 앉아 있는 의원의 자유분방하게 풀어 헤친 머리와는 전혀 달리, 단정하게 하나로 올려 묶은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밝은색을 띤 갈색 머리카락이었다.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간편한 흰 도복을 걸치고 있는 젊은 청년의 모범생처럼 단정한 얼굴이 수심으로 흐려져 있었다. 강아지같이 선하게 내려간 눈매와 그의 머리카락처럼 밝은 갈색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다정하고 순한 인상을 주었다. 진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가 무척 어른스러웠으나, 의원보다는 확실히 좀 더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청년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의원이 남자답게 쭉 뻗은 날카로운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이는군. 기의 흐름도 안정적이고, 특별히 다른 외상도 보이지 않아. 기억이 없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런…… 어떻게 치료 방법은 없는 겁니까?”

“글쎄,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하면서 요양한다면 서서히 기억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싶군. 확실하게 단정할 순 없겠지만 말이지.”

의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민혁이 그 모습을 멀뚱하게 보고 있으려니 의원이 무언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민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 정말 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건가?”

“저…… 정말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진짜 황당하군. 마교 놈들의 독에 당했다고 하길래 사흘 밤낮을 잠도 못 자고 달려와서 기껏 살려 놨더니만, 이젠 나까지 새까맣게 잊어버리셨다?”

“그…… 어, 죄, 죄송합니다…….”

사실 이것은 민혁의 잘못이 아니었으므로 그로서도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배신감에 찬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절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민혁이 그렇게 고분고분 잘못을 시인하는 것을 보자 남자의 얼굴은 더더욱 구겨졌다.

그러나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그 아래의 짙은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하……! 천하의 청루각주 백청하가 이 제갈서윤에게 순순히 사과하는 꼴을 보다니, 그것도 존댓말까지 써 가면서……! 얼굴 보고 산 지 30년도 넘었지만 이런 황당한 꼴은 또 처음이로군.”

뭐…… 뭐라고……? 민혁은 충격 속에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어떻게든 관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새하얗게 질렸던 민혁의 얼굴이 점점 파래졌다 붉어졌다 다시 하얘지며 다채로운 색깔을 띠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주변 사람들은 민혁이 피곤하고 혼란스러워 그러는 것으로 알아서 잘 이해해 주고는, 쉬라는 말만을 남긴 채 우르르 방에서 물러갔다. 민혁은 홀로 텅 빈 방에 놓인 호사스러운 침상에 누워 이 빌어먹을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니까…… 설마 이 ‘청루각주 백청하’가…… 내가 아는 그 ‘청루각주 백청하’인 것인가…….’

어떻게든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민혁의 귓가에,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들렸다.

“저, 스승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며 굳게 닫혔던 장지문이 스르륵, 소리도 없이 열렸다.

민혁은 눈동자만을 굴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의 곁에 서 있었던 그 모범생처럼 생긴 의젓한 청년이었다. 의원이라는 자를 배웅해 주고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속으로 침상 곁에 서 있던 잘생긴 남자, 라고 불렀지만 이 몸이 정말로 청루각주 백청하라면, 이 남자의 이름을 유추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내가 백청하라면, 너는 분명 이 ‘청루각주 백청하’의 수석 제자 사백진이겠지.

백진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민혁이 누워 있는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미처 민혁이 무어라 말을 꺼낼 틈도 주지 않고 제 허리끈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간단하게 허리끈을 풀어 버렸다.

경악에 물든 민혁의 눈빛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백진은 제 어깨에 걸쳐진 겉옷을 가볍게 어깨 너머로 젖혔다. 무거운 옷자락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느슨한 흰 내의만을 걸친 백진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민혁이 누워 있는 침상으로 올라왔다.

“자, 잠깐…….”

민혁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백진이 민혁의 몸을 덮듯이 그의 위에 엎드렸다.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같이 충성스러운 얼굴 아래로, 하나로 길게 늘어뜨린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민혁의 목덜미로 쏟아져 내렸다.

느슨한 흰 내의의 옷깃이 벌어지며 그 사이로 헬스장 광고 모델을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나이스 핫바디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였다. 아니, 저 얼굴에 이 몸은 진짜 사기 아니냐?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민혁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파괴적인 몸이었다.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백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의원님이 말씀하신 대로, 스승님께선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하며 요양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저로 참아 주세요. 스승님께서 만족하실 만큼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비장하게까지 들리는 말이 끝나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점점 더 민혁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다짜고짜 제 위에 올라탄 미남의 얼굴과 몸의 협동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민혁은, 그의 입술이 제 입술에 맞닿기 직전 가까스로 그 틈새에 제 손바닥을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자, 자, 자, 잠깐!”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백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민혁은 필사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은 채 소리 질렀다.

“플으 읍으느끄 등증 느그!”

“예?”

백진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이 터질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민혁은 그제야 아직도 제가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른 손을 치운 민혁이 온 방 안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필요 없으니까 당장 나가!”

이제 더 이상 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었다. 민혁은 마침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소설 속 세계이다. 그것도 바로 그의 누나가 모 연재 사이트에서 연재하던 《검 끝에 걸린 달》이라는 BL 소설 세계관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청루각이라는 미친 문파의 미친 설정이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청루각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심법, 즉 무공을 수련하거나, 기를 순환시켜 내공을 쌓거나, 경지 높은 술법의 기본이 되는 심법은, 바로 남자와 남자 간의 교합을 통한 영기의 교환이었던 것이다!

* * *

민혁이 이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에는 사연이 있다. 애초에 민혁이 ‘BL’이라는 장르를 알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누나 덕분이었다.

민혁은 그저 유명 웹소설이나 몇 개 훑어보았을 뿐인 BL에 대해 무지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BL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민혁의 고통도 함께 시작되었다.

누나가 민혁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 소설의 무보수 감수자이자 편집자로 민혁을 발탁하였던 것이다. 민혁은 누나의 강압에 이기지 못하고 팔자에도 없는 BL 소설을 읽으며 오타와 비문과 설정충돌과 기타 등등, 하여간 그런 것들을 잡아내야만 했다.

어쨌든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째서 눈을 떴더니 책 속의 인물에 빙의하고 말았다는 그런 흔하디흔한 웹소설 설정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됐느냐는 것이다!

민혁은, 아니 이제 청루각주 백청하가 된 그는,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푸른 안개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아름다운 산책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하고 많은 소설 중에 하필 BL 소설일 건 또 뭐야? 기왕에 책에 빙의할 거라면 《절대 고수 무림 제패》라든가, 뭐 이런 좋은 무협 소설 많지 않나? 그러나 분명 민혁이 읽어 본 바에 따르면 이 소설에는 여캐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반면에 남캐는 질릴 정도로 많이 등장하는데, 대체 어떻게 된 세계관인지 여기서는 지나가는 엑스트라 조연 한 명까지 전부 다 미남이다.

그리고 이 청루각주 백청하라는 인물로 말할 것 같으면…….

“아 미친, 뭐 이딴 게 다 있어? 그러니까 내가 그딴 설정은 넣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을 했잖아!”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모를 울분에 찬 목소리가 아름다운 누각 사이로 절절하게 울려 퍼졌다.

솔직히 말해서 객관적으로 청루각주 백청하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가 민혁에게 백청하로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그야 금수저 중의 금수저, 아니, 황금 식탁도 때려 부수는 다이아 수저라고 대답할 것이다.

신비로운 안개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청루산에 자리 잡은 거대 문파 청루각. 온 강호를 통틀어 가장 부유하다는 문파답게, 청루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이 세상 것이 아닌 양 고급스럽고 우아하기 짝이 없다.

그 청루각의 주인인 백청하는 빙설 같은 싸늘함과 빙옥 같은 아름다움으로 이름 높은 사내였다. 그 자신도 강호 최고의 절정 고수인 데다, 그의 말 한마디면 달려와 언제든 목숨이라도 내놓을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각원들도 있었다.

‘이 청루각이라는 곳의 미쳐 버린 설정만 아니었으면 아주 만족스러웠을 텐데…….’

청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청루각의 아름다운 내원을 지나 화려한 누각들을 이어 주는 다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흰 수련이 피어 있는 아름다운 연못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수면 위에 눈처럼 희고 얼음처럼 서늘한 미인이 비쳤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면 감히 말도 제대로 붙이기 힘들 정도로 싸늘한 인상이었으나, 길게 늘어진 청초한 눈매와 그 결벽하게 보이는 단정하고 깨끗한 느낌이 왠지 눈을 떼기 힘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청하는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흑단처럼 길게 늘어뜨린 새까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반은 올려 묶고 반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 위로 정교하게 세공된 은으로 만든 작은 관이 올려져 있었다.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몸 위에는 치렁치렁하게 길게 늘어진 푸른색 도포를 걸치고, 폭이 넓은 붉은색 허리띠로 허리를 꽉 조여 매어 체구에 비해 얇은 허리가 도드라졌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미남밖에 없는 세계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도저히 잘 적응이 되지 않는 인상적인 외모였다.

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미적미적 다리를 움직였다. 이 상황에 한가롭게 산책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분명히 말해 두자면, 이것은 절대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30년도 넘게 그를 알아 왔다는 청하의 ‘절친한 지기’ 제갈서윤이 의원의 권위로써 그에게 하루 두 번의 산책을 명령했던 것이다.

말로는 회복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청하의 입장에서는 산책을 할 때마다 회복은커녕 얼마 남지도 않은 것 같은 수명이 더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자꾸만 다리에 감겨드는 길고 치렁치렁한 옷자락을 붙잡으며 한 걸음씩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온 사방에서 뜨겁기 짝이 없는 선망 어린 눈초리들이 달라붙었다.

그래, 바로 저것이 문제이다! 청하는 끈질기게 저를 따라오는 그 열망 어린 시선들을 어떻게든 무시하려 애쓰며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다. 진짜 너무 부담스러워 죽겠네!

청루각은 《검 끝에 걸린 달》이라는 무협 BL 소설 세계관 속에서도 남자들로만 구성된 걸출한 문파였다. BL 소설이라는 것이 원래 남자들끼리 붙어서 그렇고 그런…… 이런저런 것들을 하기 위한 장르인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청루각이라는 곳은 그런 것을 하기에 너무 지나칠 정도로 특화된 설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청루각은 남자들끼리의 교합을 통해 내공을 쌓고 기를 운용하는 문파인 만큼, 각원들끼리의 신체 접촉에도 서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청하는 요 며칠 산책을 하며 훤히 트인 장소에서 그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서로 입술을 맞대고 있는 문파원들을 벌써 몇 번이나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은 이 청루각의 주인을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존경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청하는 제게 따라붙는 뜨겁기 짝이 없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청루각의 각원들은 마교 놈들의 독에 당해 며칠씩이나 사경을 헤맸던 각주의 건강이 너무나도 걱정스러운 나머지, 청하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무엇이든’이란 당연히 청하를 위해 그들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을 포함한 말이다.

“각주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청하가 몇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얼굴 가득 근심 걱정이 가득한 각원 하나가 청하의 앞에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물어 왔다. 청하는 반사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가까스로 태연을 가장한 미소를 지었다.

“괘, 괜찮다.”

“제갈 의원님께서 각주님 회복이 더디다고 걱정이 대단하십니다.”

“하하, 그놈이…… 아니, 그 친구가 참 과장이 심해.”

“저, 각주님께서 필요하시다면 부족하나마 제가…….”

그러고는 청하보다 두 뼘은 더 큰 종마처럼 탄탄한 체구의 남자가 경악스럽게도 살짝 얼굴까지 붉히며 옷깃을 벌리는 것이다. 심지어 그와 동시에 청하를 향해 두세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기까지 했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정절을 위협당하는 가련한 처자처럼 양팔로 제 몸을 끌어안고는 잽싸게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괘, 괜찮대도! 나는 괜찮으니, 시,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러고는 지나치게 충성스러운 제자가 두 번 다시 말이라도 붙일세라 황급히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그것이 벌써 며칠째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이 정도에서 순순히 물러나면 그나마 양반이고, 어떤 각원들은 아예 산책을 하는 청하의 품으로 제 몸을 날리기도 했다. 청하는 때아닌 건장한 청년들의 육탄 공세에 그야말로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그냥 아무하고나 몇 번 하고 하루라도 빨리 몸을 회복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심지어 청하의 절친이라는 저 의원마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물어 왔다.

청하는 제 방 안에 놓인 옥으로 만든 탁자 위에 진이 다 빠진 채 엎드려 있었다. 이 드넓은 청루각에서 그가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산책만 한 번 나갔다 오면 이 꼴이 되는데, 이것을 보고도 의원이란 놈은 산책을 그만하라는 아주 정상적인 처방을 내리는 대신 저딴 헛소리나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청하는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아니, 대체 남자랑 그…… 그…… 그 짓을 하는 거랑 회복하는 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나 아주 이성적이기 짝이 없는 청하의 질문을 들은 제갈서윤은 그야말로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네 문파의 심법 원리를 내게 묻는 거야?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해도 이런 기본적인 것까지 잊어버렸다니……. 청루각의 청해심법(淸海心法)은 남자의 신체와 접촉해 영기를 흡수하면서 내공을 증폭시키는 심법이잖아? 당연히 흐트러진 기의 흐름도 바로잡고 내상도 외상도 쉽게 치유할 수 있지.”

그…… 심법에 그런 기능도 있었나. 하긴, 무협 세계관의 운기조식이라는 것은 결국 기를 순환시켜 몸을 치유하고 내공을 쌓는 수단이다. 당연히 청루각의 대표 심법에도 그런 기능쯤은 있을 것이다. 청하는 약간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하고나 그, 그런 걸 어떻게 해?”

그러나 서윤은 그저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지난번에는 갑자기 다짜고짜 영기가 필요하다며 네 문파원도 아닌 나까지 덮쳤었잖아?”

뭐?! 미쳤구나, 백청하. 아주 그냥 남자에 미쳐 가지고서는, 불알친구한테까지 그 짓을 해? 그러나 경악에 잠겨 있는 청하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네가 무공에 미쳐 있는 놈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으니 그리 놀랍지도 않았지만…… 네가 진짜 기억을 잃긴 잃었나 보군. 정말 하나도 기억을 못 하는 것을 보니.”

남자에 미쳐 있는 게 아니라 무공에 미쳐 있는 놈이었나. 아니 잠깐, 그게 그거 아냐? 청하는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졌다. 도대체…… 백청하란 놈은 어떤 캐릭터였던 거야? 원작에서 청루각주 백청하는 워낙 잠깐 등장하는 조연이었기에 이런 세세한 설정 따위는 알지도 못했다. 사실 나 희대의 옴므파탈이라거나, 뭐 그런 거 아냐? 설마 말로만 들었던 그 마성의 게이?!

청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서윤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모로 꼬았다. 그러니까 내가…… 아니, 이 몸이 쟤랑도 그렇고 그런 짓을…… 아니, 잘생겼어, 잘생기긴 했는데……. 청하는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표정이 깃든 제갈서윤의 갸름한 얼굴과 짙은 눈썹, 그 아래 자리 잡은 날카로운 콧대가 갑작스레 신경이 쓰였다.

“너 뭐 하냐?”

황당한 듯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청하는 얼른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한숨만을 푹푹 내쉬었다. 이 문란하기 짝이 없는 몸이 도대체 평소에 얼마나 많은 남정네들과 그렇고 그런 관계를 가져 왔는지 알 수가 없어 약간 두려워졌다.

그때, 갑작스레 문밖에서 인기척이 나며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등장한 것은 나이에 비해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청하의 수석 제자인 사백진이었다. 오늘도 갈색의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단정히 묶어 올린 그는, 탁자 위에 늘어져 있는 청하를 보고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백진이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 웃음기를 띠고 말했다.

“곧 원로 회의가 시작됩니다. 스승님께서도 참석하셔야지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청하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끙, 하는 소리를 내었다. 백진이 얼른 다가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청하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청하가 몸을 일으킨 의자를 치워 주고 그의 몸에 감겨드는 치렁한 옷자락을 잡아 주기도 했다.

충성스럽기 짝이 없는 백진의 극진한 보살핌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청하는 약간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하하, 웃으며 슬쩍 백진의 손에서 제 팔을 빼내었다.

“그럼, 출발하지.”

약간 시무룩한 강아지 같은 표정이 된 백진의 뒤를 따르며, 청하는 피곤함에 절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각주님께서 오셨다.”

“각주님, 옥체는 어떠십니까.”

“회복은 잘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저희 모두 걱정이 큽니다.”

“각주님!”

청하가 원로 회의가 열리는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일제히 그런 말들이 날아들었다. 청하는 그럭저럭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눈치껏 제일 상석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백진이 청하의 뒤에 단정히 시립하자, 나머지 원로들도 청하를 중심으로 각자 자리를 잡았다. 청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로 회의라고는 하지만 다들 기껏해야 30대나 되었을까 싶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대부분 청하와 같은 배분의 청(靑)자 돌림을 쓰는 사형 사제들인 그들은, 청하가 입은 것과 거의 비슷한 푸른색 계열의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청하가 입은 옷이 가장 짙고 선명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고, 다른 원로들이 입고 있는 것은 그보다는 옅은 푸른색 계열의 옷이었다. 반짝이는 은사로 놓인 아름다운 자수가 그들의 어깨와 소맷자락에 새겨져 있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자들이 으레 그렇듯, 절정 고수인 청루각 원로들의 얼굴에서도 노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전부 영화배우 뺨치는 훌륭한 미남들뿐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참 편리한 설정이란 말이야. 청하는 속으로 감탄을 내뱉으며 이 청루각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의 면면을 느긋이 감상했다.

시냇물처럼 옅은 푸른 도포를 걸친 날카롭게 생긴 미남이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각주님께서 생각보다 회복이 느리셔서 걱정입니다. 기억도 아직 온전히 돌아오시진 않은 것이지요?”

청루각의 3인자이자 청하의 사제인 연청단이었다. 청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약간의 거짓을 섞어 간단하게 대답했다.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중이야.”

“다행한 일이긴 합니다만…… 다른 형제들도 모두들 걱정이 많습니다, 각주님.”

“하하…… 그, 글쎄 나는 괜찮으니까…… 아무튼 다들 고마워.”

청하가 애매하게 웃으며 뺨을 살짝 긁적이는데, 넓은 탁자를 둘러싸고 앉아 있는 원로들의 시선이 새삼스럽게 청하에게 날아가 꽂혔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회의장 안에서, 연청단이 생경한 눈으로 청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각주님께서 기억을 잃으시더니 성격이 많이 바뀌신 것 같습니다.”

청하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 하, 하, 그, 그래? 나는 잘 모르겠는데…….”

청하가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연청단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말투도 조금…… 뭐랄까, 귀여워지신 것 같고…….”

청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아, 젠장, 말투 조심해야 하는데, 말투! 사극체 써야지!

그때, 옅은 청록색의 도포를 입은 남자 하나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각주님의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니 다행입니다만…… 이런 속도라면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급하게 원로 회의를 소집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대책이라니?”

청하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한 문파의 수장이라는 자가 습격을 당해 빌빌거리고 있다면 좀 문제이긴 하지만, 당장 청루각이 어딘가와 분쟁 중인 것도 아니었고 마교 쪽도 독 사건 이후로는 찍소리 하나 없이 잠잠한 상태였다. 내 회복이 좀 느리다고는 해도, 갑자기 이렇게 우르르 몰려서 무슨 대책까지 세워야 할 정도로 큰일은 아니지 않나?

그러나 그 순간, 청하의 태평한 생각을 정면으로 부숴 버리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귓가를 때렸다.

“당연히 대책을 세워야지요. 특히 비무대회가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서는 말입니다.”

“비무대회……?”

그렇다, 비무대회! 당연히 비무대회가 있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모든 무협물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바로 그 필수 코스 비무대회. 청하는 당연히 비무대회를 알고 있다. 원작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다뤄진 사건이었으니 도저히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청하는 그제서야 자신이 원작의 어느 시점 즈음에 빙의한 것인지 깨달았다. 비무대회, 그것은 원작의 주인수와 주인공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원작 초반부의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였다.

그리고 청루각주 백청하는 이 비무대회에서 주인수와 주인공을 만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퇴장한다. 백청하의 처음이자 마지막 등장 씬이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원작대로라면 청하는 무조건 이 비무대회에 참가해야만 했다. 무공이라고는 1도 쓸 줄 모르고, 내공이 뭔지, 영기를 어떻게 운용하는 것인지도 전혀 모르는 야매 청루각주 백청하가, 내로라하는 무림인들로 가득한 비무대회에서 300등도, 30등도 아닌, 무려 3등의 성적을 내야만 하는 것이다!

‘아, 난 못 해. 안 해!’

청하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이었다.

‘미쳤어?! 비무대회에서 갑자기 3등을 어떻게 해? 영기를 쓰기는커녕 검을 잡을 줄도 모르는데…… 이거는 진짜 정말 아니다. 괜히 오버해서 나대지 말자.’

머릿속으로 재빨리 계산을 마친 청하가 시치미를 뚝 떼고는 입을 열었다.

“그, 그래 비무대회…… 참, 그게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몸이 좋지 못하니까, 이번 비무대회에는 문파의 다른 분께서 참가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어? 아, 아니…… 좋지 않겠나? 우리 청루각에는 나 말고도 워낙 무공이 출중하신 분들이 많으니…….”

청하는 말끝을 흐리며 좌중을 휙 둘러보았으나, 다들 청하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그때, 연한 녹색의 옷을 걸치고 있던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희 중 그 누가 참가한다 한들, ‘창천빙옥’ 백청하의 명성에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갈 자가 있겠습니까? 각주님의 경지에 비한다면야 청루각의 그 어떤 고수도 그저 걸음마를 겨우 뗀 어린아이일 뿐이지요.”

이 사람이 과장을 해도 너무 심하게 하는 것 아냐? 사회생활하면 진짜 잘하겠다……. 아, 지금 사회생활하는 중이지.

청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자신을 한도 끝도 없이 추켜세우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싼 다른 원로들도 모두 하나같이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청하는 눈을 깜빡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고수인가?”

어떻게 들으면 약간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을 만한 발언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즉시 눈을 부릅뜨고는 청하가 주춤할 정도의 열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 도원맹주 하유신을 제외하면 강호의 그 누가 감히 각주님과 자웅을 겨룰 수 있겠습니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마교의 교주도 제법 무공이 대단하다 합니다만…… 전면에 나서기도 두려워서 기껏해야 독이나 쓰는 작자들과 각주님을 비교할 수는 없지요. 오늘날 온 강호에 청루의 위세가 이토록 위명을 떨치는 것도 전부 다 각주님의 고강한 무공 덕분 아니겠습니까.”

뭐? 진짜? 내가…… 내가 그렇게 능력자라고?! 청하는 얼이 빠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나 생각보다…… 진짜 대단한 놈이었잖아?!

청하의 무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나서서는 입에서 침을 튀겨 가며 청하를 칭송하느라 바빴다. 청하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멀뚱히 앉아 있었다.

혹시 제자들한테 그렇게 선망 어린 아이돌 취급을 받았던 것도 이래서인가……? 아니…… 기껏해야 몇 줄 나오고 퇴장할 뿐인 조연에게 이런 과분한 설정이 주어져 있었을 줄이야…… 전혀 몰랐다…….

청하는 약간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것참…… 다들 고마워…… 고맙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굳이 내가 직접 비무대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지 않겠어? 다른 각원들의 무공 수준이 그리 낮은 것도 아니고.”

그러나 연청단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사형께서 마교 놈들의 독에 당하셨다는 소문이 벌써 강호에 은밀히 퍼지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입단속을 시키긴 했지만 워낙 알고 있는 자가 많다 보니…… 이런 상황에서 사형께서 건재하심을 널리 보여 주시지 않는다면 청루각의 입지에 타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청하는 난감한 신음을 흘렸다.

다른 때도 아니고 청루각주 백청하가 마교의 독에 당해 쓰러진 직후였다.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이번 비무대회에서 어떻게든 백청하의 청루각이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여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제야 청하는 어째서 청루각의 사람들이 그리도 오매불망 자신의 빠른 회복을 바라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진짜 골치 아프구먼.

그때, 연청단이 슬쩍 청하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도원맹에서도 맹주가 직접 비무대회에 참가한다고 하니…….”

슬며시 말끝을 흐리며 청하를 힐끔거리는 낌새가 심상찮았다. 아, 그러고 보니 참, 비무대회에 그 캐릭터도 나오지. 기대되네. 청하는 저도 모르게 약간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으나, 겉으로는 그저 별말 없이 눈썹만 약간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순간적으로 주변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청하의 옆에 앉아 있던 차분한 인상의 사내가 소매를 떨치며 헛기침을 했다.

“각주께서 도원맹주와 사이가 좋지 않으신 것은 온 강호에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이번 비무대회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도원맹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합니다.”

경쟁심으로 불타오르는 목소리였다. 아니 뭐, 딱히……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는데. 청하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그저 약간 애매한 미소만을 지었으나, 그것은 언뜻 보기에 상당히 삐딱하고 싸늘한 비웃음처럼 보였다. 순간, 좌중에서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상당히 긴장된 공기가 회의장을 뒤덮었다. 청하는 뒤늦게 싸늘해진 분위기를 깨닫고는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아무튼 여러분들의 생각은 잘 알겠……네. 어쨌든 이번엔 내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로군. 일단은……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지. 최대한 빨리 회복하도록 노력하겠네.”

“진청연님께 연락해야 하지 않을까요?”

원로들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건 또 누구야? 청하는 멀뚱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이 사람들은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좀 배려해서 말해 주면 안 되나? 그때 청하의 곤란함을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그때까지 미동도 없이 청하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백진이 예의 바르게 말을 받았다.

“소각주님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소각주께서는 강호를 주유하시느라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연락은 조금 어렵지 않을지요.”

소각주? 아, 청루각의 2인자인 그 ‘화무비검’ 진청연 말인가. 청하는 간신히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는 원작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청루각 출신의 조연이었는데, 지금 시점에서는 강호를 여행하며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라는 설정이었다. 나중에 마찬가지로 강호를 여행 중이던 원작의 주인수 남궁휘와 우연히 마주쳐 그를 도와주게 된다.

‘그 사람은 어차피 지금은 등장도 하지 않아서 비무대회에 참가도 안 하는데.’

청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을 듯하군. 백진의 말대로 그쪽의 위치도 정확히 모르니 연락은 힘들 것 같아.”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청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아무래도 진짜 꼼짝 못 하고 끌려가게 생겼는데? 큰일 났다.’

청하의 근심은 원로 회의가 파한 뒤에도 이어졌다. 청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말해서 원로들에겐 미안하지만 청루각의 명성 따위야 뭐 내가 알 바도 아니고…… 다만 내가 비무대회에 나가지 않으면 원작의 흐름이 틀어진다는 게 문제인데. 사실 주인수랑 주인공이 만나든 말든 나랑 별 상관도 없지만, 근데 또 생각해 보면 주인공이 주인수를 만나서 잘 감화되지 않으면 강호에 피바람이 몰아칠 수가 있단 말이지.’

원작의 공 캐릭터는 다름 아닌 현 마교의 교주 주세민이었다. 그는 비무대회에 참가했던 남궁 세가의 후계자 남궁휘를 만나 그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

정파의 후기지수 중 최고 기대주와 마교의 지배자가 만나면서 펼쳐지는 세기의 사랑이 그 이후에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원작의 내용인 것인데, 솔직히 청하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는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청하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안위와 안녕이었다. 자고로 다이아 수저로 태어난 조연의 인생 목표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번 비무대회에서 만나지 못해 사랑에 빠지지도 않는다면, 마교와의 갈등이 슬슬 격화되고 있는 현재 무림의 정세를 보아 큰 사달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주인공인 마교주 주세민은 원작의 주인수 남궁휘를 만나기 전까지는 원래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하며 잔인하다는 평을 듣는 자였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청하는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큰 그림을 그려서 무림을 지켜야 한단 말인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이……. 지금 설마 무림의 미래가 내 손에 달려 있다거나, 뭐 그런 상황인 거?’

어쨌든 이 청루각의 명예를 위해서든 무림의 미래를 위해서든, 청하가 비무대회에 참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인 듯했다. 청하가 어찌나 죽을상을 하고 있었던지, 그때까지 참을성 있게 청하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백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스승님, 비무대회가 그리 걱정되십니까? 회복이 좀 늦어지시긴 했지만 너무 조바심 내진 마세요. 스승님이시라면 분명 비무대회쯤이야 간단히 제패하실 겁니다.”

그 철벽같은 확고한 믿음과 순진한 신뢰가 고맙긴 했지만, 지금 청하는 정말 심각했다. 청하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백진아.”

“예, 스승님.”

“나…… 진짜 정말로 영기를 어떻게 쓰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 일단 내공을 운용하셔서 기를 움직여 보십시오.”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백진은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거 자체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청하가 해탈한 표정으로 하하, 영혼 없는 웃음을 흘렸다. 난감한 표정의 백진을 바라보던 청하가 갑자기 와락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네가 한번 해 봐…… 아니, 해 보거라.”

“예?”

“영기를 한번 써 보란 말이다. 한번 시범을 보여 줘.”

청하는 막무가내로 당황한 백진을 붙잡고는 단숨에 누각 밖의 으슥한 숲길로 그를 끌고 왔다. 뚫어질 듯한 눈으로 백진을 바라보며, 청하는 어서 영기를 써 보라는 듯 백진을 향해 조급하게 턱짓을 했다. 잠시 망설이던 백진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더니 두 손가락을 펴서 가볍게 앞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펑!

순간 백진의 손끝에 흰빛이 어리더니 그가 가리켰던 나무가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청하는 입이 떡 벌어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 버린 나무의 잔해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분명 못해도 수령이 30년은 됐음 직한 번듯한 나무였다.

“미친…….”

그러나 청하가 마음의 소리를 미처 모두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백진이 뺨을 살짝 붉게 물들이고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히 스승님의 면전에서 이런 잔재주를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부디 너무 건방지다 생각하진 말아 주세요…….”

그러나 청하는 백진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시금 그의 치렁한 소매를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와락 붙들었다. 말투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네?”

“그…… 그거, 펑, 하는 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손가락을 이렇게…… 이렇게 하면 돼?”

그러나 백진이 했던 것처럼 두 손가락을 펴서 아무리 앞에 있는 나무를 향해 뻗어 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청하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제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갑자기 책 속 캐릭터에 빙의했다고 해도 막 저런 말도 안 되는 무공을 펑펑 쓴다는 게 말이 돼? 여기 사람들 다 기본적으로 저 정도는 하는 건가? 나 이제 진짜 어떡하지, 큰일 났다…….

그런 청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백진이 문득 그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스승님.”

“응?”

심각한 표정의 청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백진이 다시금 그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스승님.”

“그…… 왜?”

청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백진을 바라보았다. 백진이 진지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청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망설이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잠깐 스승님의 손을 잡아도 될까요?”

손을? 청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백진을 올려다보았으나 그를 뿌리치기엔 상황이 너무 여의치 않았다. 지금 청하는 지나가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망설이던 청하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백진은 조심스럽게 청하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는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자신의 왼손으로 청하의 왼손을 붙잡았다. 백진이 탄탄한 몸이 청하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왔다.

청하는 약간 불편한 심정으로 무슨 벽처럼 단단하고 위압적인 몸이 제 뒤에 바짝 붙어 서는 것을 바라보았다. 얘는 생긴 건 무슨 얌전한 강아지같이 생겨서는. 순진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몸매라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청하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비어 있던 백진의 오른손이 뒤에서 자연스럽게 청하의 어깨를 살짝 붙들었다. 길게 늘어뜨린 우아한 푸른 소맷자락으로 손목을 가리고 있는 청하와는 달리, 백진은 활동하기 편하도록 소매를 단정하게 동여맨 흰 도복을 입고 있었다.

약간 너무 지나치게 친밀한 자세이긴 했지만, 청하는 우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백진이 청하의 손을 잡고 있던 손가락으로 슬쩍 청하의 손목 안쪽, 맥박이 두근거리는 부드러운 살결을 문질거리자 그 생경한 느낌에 청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니, 이놈이 진짜…….

그러나 청하는 곧 백진과 맞닿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시원한 기운이 제 손을 타고 팔로, 팔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도 심장을 지나 명치께에 있는 단전으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약간 서늘한 듯한 느낌에 집중하고 있으려니, 청하의 단전 근처에 고여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그러나 미처 생각을 이어 가기도 전에, 귓가에 백진의 숨결이 닿아 왔다.

“이대로 손가락을 뻗어 보십시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바퀴 바로 옆에서 울려 퍼지자 청하는 목덜미를 따라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그 묘한 기분을 떨쳐 내려 애쓰며, 청하는 백진에게 붙잡혀 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방금 전 했던 것처럼 앞에 있는 나무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아까와는 달리, 청하의 손끝에 단숨에 새파란 푸른빛이 맺혔다.

쿠콰콰콰쾅!

청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청하의 앞에 있던 나무는 터지지 않았다. 터지는 대신 가루가 되었다. 그리고 가루가 된 것은 비단 나무 한 그루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나무로 빽빽하던 숲에 넓은 공터가 하나 생겨나 있었다. 청하는 제 앞에 펼쳐진 황량한 공터와 공터에 깊게 패인 구덩이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귓가에 미처 감추지 못한 웃음기 어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본 청하의 눈앞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밝은 갈색 눈동자가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것 같은 말투였으나,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과 자부심, 그리고 애정 어린 존경심이 묻어 있었다. 청하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은 정말 강호 최고라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초절정 고수였다. 그를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각원들의 시선과, 입에서 침을 튀겨 가며 그를 찬양하던 원로들의 모습 모두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간단한 한 번의 손짓만으로도, 청루각주 백청하는 문자 그대로 땅을 뒤집고 하늘을 갈라 버릴 수도 있었다.

제대로 영기를 쓰는 법을 터득하기만 한다면.

“이거……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청하는 당황 속에서 흔들리는 눈동자로 백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진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간단하게 말했다.

“지금 하셨던 느낌대로 하시면 됩니다.”

아니, 장난하냐……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하는 거냐고.

청하는 백진의 기가 제 몸속에서 움직였던 것을 생각하며 단전에 있는 무언가를 움직이려 애써 보았다. 그러나 그의 안에서 기운을 이끌어 주었던 백진의 기가 사라지자, 다시금 청하의 단전에 고여 있는 내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백진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순간이 지나가고 다시 조금 위엄 있는 말투를 장착한 청하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기억을 잃으면서 기를 운용하는 법도 잊은 듯하구나. 방금 전처럼 네 기운이 이끌어 주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한 번 영기를 쓰고 나면 몸 안에 있던 네 기운도 사라져 버리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난감한 듯이 중얼거리는 청하의 말을 들으며 백진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청하를 빤히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백진의 입술이 망설이듯 천천히 움직였다.

“허면, 제 기운을 조금 더 많이 불어넣어 드리면 더 오랫동안 영기를 운용할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어, 어떻게?”

청하가 눈을 깜빡거렸다. 백진이 약간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진이 살짝 아래로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조금 더…… 저와 깊게 접촉을 하시면 제가 기운을 더 많이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진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스승님께선…… 저와 닿는 것조차 싫어하시니…….”

그러고는 힐끔 청하의 눈치를 보는 것이 버림받은 불쌍한 강아지 같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잘생긴 미남의 얼굴에 순간 처연함까지 깃들자, 순식간에 주변이 무슨 드라마 촬영 현장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자신이 엄청난 개새끼가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에 청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긴…… 생각해 보면 눈을 뜬 첫날부터 침대로 기어오르는 것을 호통을 쳐서 쫓아 버렸고…… 좀 전에 원로 회의 가기 전에도 하도 달라붙길래 부담스러워서 내가 좀 몸을 피하긴 했지. 쟤가 저런 생각을 할 법도 하긴 한데…….’

청하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자 백진의 표정이 더더욱 시무룩해졌다. 백진이 애써 괜찮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싫으시면 다른 분께 부탁드려서라도 그리하시면 될 겁니다. 보아하니…… 스승님께서는 기를 운용하는 부분에서 막혀 계시는 듯하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시면 예전과 다름없이 무공을 쓰실 수 있을 듯합니다. 참 다행한 일이지요.”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얌전히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나 청하는 저도 모르게 물러나는 백진의 좁은 소맷자락을 다시금 움켜쥐었다. 백진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청하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아, 그러니까…… 나, 나는 네가 계속 나를 도와줬으면 한다.”

“예?”

백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하는 마치 다른 이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처럼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생경한 기분으로 듣고 있었다.

“내, 내가 이제 와서 어느 누구에게 이런 부탁을 한단 말이야. 각주씩이나 되어서 제대로 내공을 운용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필요는 없지. 그, 그러니 앞으로도 네가 좀 도와줘…… 아니, 도와주면 좋겠군.”

청하는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진짜로? 괜찮겠어?

하지만 생각해 보면 또 괜찮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 어차피 청하에게 당장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수위 조절이 약간 문제이긴 하지만, 무공을 쓰기 위해 남자와 정말 꼭 교합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손을 조금 맞잡은 것만으로도 이 정도 수준의 무공을 쓸 수 있다면, 조금 더 진한 스킨십을 하는 정도로도 단시간 영기를 운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남자와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이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뭐 손 좀 잡고 몸을 좀 부빈다고 어디가 닳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쯤이야.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청하는 번쩍 고개를 들고 백진을 바라보았다.

“우선 나도 기운을 조정하는 법을 좀 익혀야 하니,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진한 스킨십을…… 아니, 그러니까 조금 더 강하게…… 아, 아무튼 조금 더 해 보거라.”

백진을 바라보는 청하의 눈빛에 비장함이 넘쳐 흘렀다. 그것을 멍하게 보고 있던 백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정말…….”

“응?”

“정말……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제가…… 제가 감히.”

백진이 말꼬리를 흐리며 청하의 안색을 살폈다. 얘는 또 뭘 그렇게 답답하게 굴고 있어?! 청하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강아지 같은 백진의 모습에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이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음?”

다음 순간, 백진이 청하의 앞으로 훅 다가들었다. 방금 전까지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렸던 것이 무색하게도,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공간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언제나 순종적이고 얌전했던 백진의 얼굴에 순식간에 진지하고 어른스러운 빛이 어렸다. 아무런 대비도 하고 있지 않았던 청하의 몸이 순간적인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헉, 설마 키스를? 이렇게 바로?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동공 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청하의 얼굴을 내려다본 백진이 살포시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얼굴 아래로 흘러내린 백진의 기다란 앞머리가 청하의 뺨을 간질였다. 눈꺼풀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속눈썹을 셀 수도 있을 정도로, 청하의 눈앞에 단정하고 수려한 백진의 얼굴이 바짝 가까이 다가들었다. 청하의 뺨 근처에서 잠시 멈춰 섰던 백진이 조금 더 아래로 얼굴을 내렸다. 청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으나, 예상했던 것처럼 입술에서 어떤 감촉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언가가 느껴진 것은 그보다 더 아래쪽이었다.

청하의 눈이 번쩍 떠졌다. 목덜미가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백진의 따뜻한 숨결이 곧장 민감한 목덜미에 부딪쳐 왔다. 당황 속에서 청하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백진의 입술이 청하의 맥박이 뛰는 목덜미에 가볍게 와 닿았다.

‘아……!’

청하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이건…… 차라리 키스가 더 낫겠는데. 백진의 부드러운 입술이 맥박이 쿵쿵 울리는 청하의 목덜미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으나, 백진은 청하가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청하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청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백진이 가만히 속삭였다.

“입은 영기가 지나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입니다. 입술과 입술을 맞대는 것은 가장 효율적인 영기 교환의 방법이긴 하지만…… 스승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합니다. 영기는 몸속에서 맥을 따라 움직이니, 맥이 뛰는 곳에 직접 닿으면 영기 손실을 그나마 줄일 수 있습니다.”

입술을 목덜미에서 떼지 않은 채로 달싹거리자 무척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백진의 입술이 닿아 있는 목덜미에서부터 아까처럼 시원한 기운이 마치 녹아내리듯 청하의 온몸으로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청하는 백진의 팔 안에서 살짝 몸을 떨었다. 타인의 영기가 섞이는 것은 정말 이상하고도 묘한 느낌이었다.

그때, 한참 동안이나 청하의 목덜미에 제 입술을 문지르고 있던 백진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백진이 청하의 목덜미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들은 전부 다 언젠가 스승님께서 제게 말씀해 주셨던 것들입니다.”

백진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언제나처럼 조심스럽게 청하의 기분을 살피는 듯한 시선이 뒤따랐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청하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백진은 왜 이렇게 내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지?’

그러나 그 생각이 미처 이어지기도 전에, 백진은 청하의 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한번 해 보십시오.”

금세 그쪽으로 신경을 빼앗긴 청하는 백진의 눈짓에 따라 다시 손가락을 세워 보았다. 그 끝에 아까처럼 맑은 푸른빛이 맺히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청하가 중얼거렸다.

“이건 얼마나 갈까?”

백진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것을 알아보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지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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