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또 비 오네.”
최근에 들어 비 오는 일이 잦아졌다. 홍희는 잠시 밖에서 커피를 사 가지고 들어온 참이라 젖은 머리와 어깨를 털었다. 부스스하게 날리는 단발머리가 흔들렸다. 일부러 더 밝게 총총 걷는 걸음에 길드 로비에 있던 모르젠트 길드원들이 저마다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부길드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날이 궂었지만, 인사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꽤나 밝았다. 홍희는 따뜻한 커피를 품에 끌어안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도착한 곳은 길드장 사무실이 있는 층이었다.
복도는 개미 하나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최근 들어 길드장의 심기가 더욱 예민해진 탓에 길드원들은 되도록 이곳에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홍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 또 이러다가 길드장이 강압적으로 군다고 기사 나지. 쯧.”
홍희는 혀를 차며 복도를 지나 길드장 사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복도와 같이 조명 하나 켜지 않은 사무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앞에 있는 백루찬을 확인한 홍희는 큼 목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또 안 먹었어?! 우리 루차니, 누나가 사다 준 건 안 처먹고 또 돈 날렸네?”
빡침이 가득 담긴 어투로 백루찬을 힐긋 흘겨보면서 홍희는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따뜻한 라테의 향이 고소하게 퍼졌다. 홍희가 사무실의 조명을 밝히자 그제야 백루찬이 그녀를 향해 돌아봤다.
홍희는 어지럽혀져 있는 테이블과 책상 위의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잔소리를 일삼았다.
“내가 말했지요, 오늘 무슨 날이라고? 연합 지구랑 국제 교류 기념행사니까 오전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잖아!”
“…깨어 있잖아. 그래서.”
백루찬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홍희를 쳐다봤다. 홍희가 샐쭉하니 입을 삐죽 내밀곤 소파에 털썩 앉아 깊숙이 기댔다.
“그래.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잘했다! 우리 차니차니!”
“…오늘은 뭐 들어온 얘기 없어?”
그 말에 홍희는 고개를 젖히고 늘어져 있다가 백루찬을 쳐다봤다. 아무렇지 않은 것을 물어본다는 것처럼 평온한 어조였지만, 그 말에 담긴 기대감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홍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려 제로급 게이트였다. 실종이라고 박아 두며 수색에 나섰지만, 이미 사라진 게이트를 가지고 어떤 조사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백루찬도 그 사실을 알면서 조사를 명령했다. 매번 보고서가 올라갔지만, 거기에 적힌 내용은 없었다. 당연했다. 빛무리처럼 사라진 사람을, 어떻게 찾겠는가.
홍희가 말이 없자, 백루찬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돌렸다.
“행사가 몇 시부터 한다고 했지?”
“1시.”
“그 전에 비가 그쳐야 편하겠네.”
“알면서-”
무의식적으로 쏘아붙이려던 홍희는 입을 다시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백루찬이 웃었기 때문이다. 저 자식 저렇게 보면 화도 못 내는 거 알면서. 홍희는 인상을 쓰고 입을 열었다.
“너 때문에 자꾸 비가 오잖아.”
“하하, 내가 너무 잘나서.”
“바보 같으니라고.”
실없는 농담 던지듯 얘기했으나 홍희는 이렇게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알고 있다. 저 자식의 마음에도 비가 내리니까 그의 강력한 능력이 날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꾸만 폭주하려는 것을 붙잡고 버티다 보니 마력의 표출이 다른 방향으로 퍼지는 거였다. 홍희는 생각했다. S급들은 이래서 문제라고.
백루찬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홍희가 사 온 커피를 들었다. 홍희는 씩 웃었다. 이거라도 먹는 게 어디야, 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표정을 읽은 백루찬도 피식 웃었다.
“어린애 보듯 보지 마.”
“지금 네 모습 보면 그냥 애야, 애.”
“희야.”
“…잊을 건 잊고 살아가야지. 그래야….”
홍희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백루찬만이 아니었다. 홍희 또한 코를 훌쩍이며 뜨거운 라테를 꿀꺽 마셨다. 슬픈 사람들끼리 모이면 이게 문제였다. 자꾸 떠올라서. 그 사람이… 떠올라서.
홍희는 커피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1시니까! 숍에 가서 반짝반짝하게 세팅 다 해 놓고 기다려!”
“…난 이대로도 반짝거려.”
“웃기고 있네. 수염이나 깎아.”
“…….”
백루찬이 턱을 쓸며 입을 다물었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추레하긴 했다. 밖에 나가서 멀쩡하다는 것을 또 보여 주려면 공작새처럼 꾸미긴 해야 했다. 그래야 어느 정도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가려질 것이다. 물론, 표정 연기 따위야 껌 씹는 것만큼 쉬워서 별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홍희는 길드장실을 벗어나면서 혀를 쏙 내밀고 사라졌다. 백루찬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하하- 웃었다. 공허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건 문이 닫히자 사라졌다. 백루찬은 멍하니 홍희가 나간 문을 응시하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습기처럼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었다.
❖ ❖ ❖
게이트 연합 지구 국제 교류 행사는 꽤나 크게 치러졌다. 세계 각지에서 유명한 각성자들이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전 세계에 생중계하기 위해 방송국에서도 나와 카메라를 만졌다. 입장부터 연예인들 연말 시상식처럼 간단한 인터뷰와 함께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고, 그 모습은 모조리 인터넷 생중계로 전 세계에 퍼질 예정이었다.
행사장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보기 힘든 해외의 유명한 저력들, 각성자들을 보기 위한 팬들과 일반인들, 그리고 기자들이 진을 치고 레드 카펫에서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백루찬과 홍희는 밴에 타서 입장을 대기하고 있었다. 손에 대본이 들려 있었지만 무의미했다. 오늘 앞서서 대한민국 대표로 축사를 내뱉어야 했지만, 그는 전혀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홍희가 옆에서 부산을 떨며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그러다가 옆을 본 홍희는 부산떠는데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창밖만 보고 있는 백루찬의 멱살을 잡아 옷매무새를 만져줬다.
“이봐, 이봐! 내가 아니면 항상 엉망진창이라니까!”
홍희가 인상을 찡그리며 넥타이를 꽉 졸랐다. 백루찬은 그제야 실금같은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드디어 레드 카펫 입장 순서가 되었다. 내리기 전, 홍희가 작게 속삭였다.
“루찬아, 오늘 행사 잘하자!”
“희야, 난 항상 잘해.”
“……아 좀, 억지로라도 웃어. 그래야 기뻐져.”
백루찬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홍희가 확 인상 쓰며 혀를 찼다.
“하여간 진짜… 잘하자. 문제 일으키지 말고!”
“희야 그건 네가 더-”
“나가자고!”
백루찬은 반박하려 했으나 타이밍을 놓쳤다. 차량의 문이 열리자마자 카메라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보니 햇빛이 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좋은 날이었다. 비가 오던 아침과는 다르게.
“홍희 씨! 여기 좀 봐 주세요!”
“모르젠트 길드장! 오늘 기분이 어떻습니까!?”
“오랜만의 외출인데 심경이 어떤가요! 왜 그동안 칩거했습니까!”
사진을 찍으라고 펼쳐 준 레드 카펫인데, 사람들의 환호성과 기자들의 질문 세례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홍희가 먼저 앞서가며 부길드장답게 시크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백루찬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자신에게 손을 뻗으며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레드 카펫을 지나자 포토 타임이 다가왔다. 백루찬과 홍희가 단상에 올라서자 MC가 마이크를 쥐여 주며 질문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모르젠트 분들을 이렇게 실물로 보다니 영광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안부로 시작한 물음에 홍희가 마이크를 들고 대답했다.
“네, 뭐, 우리가 못 지낼 일이 있나요.”
“아하하. 오늘도 화려하게 자리를 빛내 주셨는데요-”
연달아 MC의 쓸데없는 질문이 쏟아졌다. 모든 것은 홍희가 다 받아쳤고, 백루찬은 옆에서 그림같이 서서 입가에 미소를 띠기만 했다.
시간이 꽤 흐르고 인터뷰가 끝날 때쯤 MC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백루찬에게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듣고 싶은 건지 집념이 어린 눈으로 마이크를 내밀며 물었다.
“한국 각성자 역사상 가장 강하기로 손에 꼽히는 모르젠트 길드장이십니다! 괜찮으시면 소감이 어떠하신지 들을 수 있을까요?”
백루찬은 그를 힐끔 쳐다봤다. MC로서 사명을 다하는 모습이 나쁘진 않았으나 그의 말은 틀렸다. 홍희가 빨리 대답하고 들어가자는 듯 백루찬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한마디라도 하란 뜻이다. 느릿하게 마이크를 잡은 그가 MC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가장은 아닌데요.”
“네?”
“가장 강한 각성자는 따로 있지 않나요? 차해준 헌터요. MC님 정보력이 좀 부족하시다.”
“아, 하하, 하하하…….”
갑자기 꺼내 든 말에 홍희가 바짝 굳었다.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이 저마다 시선을 맞추며 수군대고, 한쪽에서 비명같이 큰 함성이 들렸다. 동조한다는 듯이. 그때 촬영하던 기자 한 명이 황급히 끼어들어 크게 소리쳤다.
“백루찬 길드장님! 그 말은! 한야의 죽음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까?”
기자의 큰 목소리에 모여든 사람들 모두가 일순간 조용해졌다. 시선이 모조리 백루찬에게 꽂혀 들었다. 홍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 모르젠트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오면, 사람들은 그것으로 무수한 기사를 써 내고 어떻게든 백루찬을 몰아갈 것이다. 차해준의 죽음을 파헤친다며 그날 일을 물어 올 것이다.
그것만큼 고통도 없었다. 하지만 백루찬은 홍희의 격한 반응에도 눈꺼풀을 깜박이며 잠시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어떤 얘기를-”
그 순간이었다. 백루찬의 감흥 없던 눈이 커진 것은.
백루찬이 말하다 말고 눈을 부릅뜨며 멈춰 서자, 기자들이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며 그런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댔다. 한야에 대한 질문이 백루찬의 트라우마를 일깨웠다고 여겨져서인지, 대중들은 일제히 기자에게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루찬은 그것 때문에 멈춘 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레드 카펫이 펼쳐진 저 끄트머리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검은 모자를 쓴 하얀 얼굴의 남자.
시선이 마주치자 상대 또한 좀 당황한 것처럼 모자를 눌러쓰고 돌렸다.
“어떤….”
당황한 백루찬은 빠르게 눈을 깜박이며 중얼거리다 이내 도망치는 남자를 보고 마이크를 내던졌다. 그리고 다시 레드 카펫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야, 백루…!”
홍희가 뛰어가는 백루찬을 부르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돌발 행동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돌발 행동.
백루찬은 사방에서 자신에게 손을 뻗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오직 저와 눈이 마주친 남자를 보며 움직였다.
“백루찬…!”
“모르젠트 길드장…!”
사람들의 비명 같은 소리가 터졌다. 모두 그의 돌발 행동에 놀란 눈으로 레드카펫을 되돌아가는 그를 돌아봤다. 하지만 백루찬은 그 모든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제 눈앞에 나타났다. 그 남자가.
그 사람이.
백루찬은 정신을 놓은 것처럼 사람들을 헤치고 남자를 쫓아 뛰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당황한 것처럼 뛰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고, 몰려드는 인파 속에서 자신을 쫓는 백루찬을 보고 멈춰 섰다. 백루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속에서, 계속 꾹꾹 눌러 담았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차해준!”
모든 것이, 아니, 세상이 멈춰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백루찬은 그렇게 느꼈다. 남자가 흠칫하며 놀라서 자신을 쳐다본다. 쳐다보는 시선. 흔들리는 눈동자. 어색한 웃음. 그것에 주변의 모든 것이 지워졌다. 오직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백루찬은 그렇게 느꼈다.
돌아온다던 저 사람만이.
돌아온다던 형이.
울 것 같이 잔뜩 찡그린 얼굴을 보자 그제야 루찬이 쫓던 남자, 차해준이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진짜 차해준이었다. 진짜, 자신의 형.
백루찬은, 제 앞을 막아서는 장애물들을 헤치고, 그 남자에게 달려가 확 끌어안았다.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몸이었다.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는, 무게 없던 몸이 아닌, 실존하는 사람의 몸.
머리를 끌어당기자, 목덜미에서 숨결이 느껴졌다. 백루찬은 그를 바짝 끌어안았다가, 다시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몸을 뗐다.
눈앞에 그가 있었다. 차해준이.
차해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머쓱한 듯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백루찬과 눈을 마주했다. 흔들리는 눈. 이게 정말 현실이냐고 묻는 눈.
차해준은 그런 백루찬을 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안녕. 그, 루찬아. 오랜만이지. 이게… 관리 시스템 이놈들이 오류 데이터와 나를 함께 분류해 버리는 바람에… 상처를 복구하느라 좀 늦었어.”
“…형.”
“그… 그래서 이제야 왔는데, 마침 네가 있길래 지금은 얼굴만 살짝 보고 가려고 한 건데… 그,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하자, 백루찬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웃는 듯이. 차해준은 결국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웃었다. 그리고 백루찬을 껴안았다.
“돌아왔어, 루찬아.”
“…진짜 형이야?”
“응, 진짜 형이야.”
“…….”
“약속했지? 이제 평생 지킬게, 그 약속. 네 옆에 있겠다는 약속.”
“…….”
“인마, 그러니까…….”
울지 마.
작은 속삭임에 되레 더 눈물이 터지는 건 줄도 모르고, 차해준은 백루찬을 달랬다.
“보고 싶었어.”
정말로.
해준은 환하게 웃었다. 백루찬을 꽉 끌어안고.
그런 두 사람의 위로, 행사를 축하하는 폭죽이 터져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 외침,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진다. 그런 상황이었다. 부산스럽고, 소란스럽고 정신없는.
그러나 두 사람의 세계엔, 두 사람만이 있었다.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첫 장의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완전한 세계에서, 사랑만을 기록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