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마하가 사라지면서 천천히 폭야의 스킬을 거뒀다. 그러자 하얗게 부서지는 세계가 시야에 담겼다. 아, 이건….
게이트가 부서지는 거구나.
몸이 떨어지고 있었다. 진마하가 사라지니 그의 심상 세계도 완전히 부서지는 것이다. 하하, 이렇게 끝인가.
이제 온몸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끝을… 낸 건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빛무리에 눈을 감아도 표백된 것처럼 하얗던 눈앞이 순식간에 어둠에 물들었다. 나는 움찔했지만, 그 순간 거대한 책이 눈앞에 떠오르자 살짝 안도했다. 종전의 기록이다.
책이 열렸다. 천천히 페이지가 넘어가는 책 위로, 종이에 적혀 있는 글자들이 허공으로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글자들이 얽히고설킨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응시했다.
페이지가 무수히 넘어가면서 종이에 적혀 있는 글자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소멸되기 시작했다.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그리고 책은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다.
[……외면한 세계는 멸망했다.
세계의 기둥은 모두 무너졌다. 모두가 버티지 못했다. 다들 죽었다.
차원이 뚫려서 상위 차원이 침략을 거행했다. 식민지가 된 지구는 전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자원은 갈취당했고,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을 내질렀다.
최종 장이었다.
이것이… 세계의 끝.]
이것은 나의 심상 세계에서 봤던, 멸망이 기록되었던 부분이다.
마지막에 봤던 저 문장들, 뇌리에 아직도 선명하게 박혀 있던 것들이다. 곧이어 그 글자들도 허공에 떠오르며 떠 있던 글자들과 섞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종전의 기록은 모든 것이 깔끔하게 지워졌다.
왜 다 지워진 걸까. 마무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보여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할 때 눈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마지막 메인 캐릭터를 찾았습니다, 클리어런스.]
[‘종전의 기록’ 현재 페이지 수: 451/451]
[현재 초전 박살 게이트의 스토리 진행률: 99%]
[시나리오가 초기화되었습니다. 클리어런스는 종장(終場)에 도달했습니다.]
[클리어런스, 축하합니다.]
[당신은---]
책에서 벗어난 글자들이, 뭉쳤다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도록 말이다.
그 뒤로 심상에 뜨던 거대한 책, 종전의 기록은 옅은 빛무리를 뿌리며 눈앞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어둠이 걷혔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부서지던 게이트는 사라졌고, 돌아온 곳은 현실 세계였다. 도시가 바다 위의 윤슬처럼 야경을 뿌려 대고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자, 시스템이 말했다.
[종장(終場)에서 페이지가 이어집니다.]
눈앞에 다시 거대한 책이 떠오른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어간 그것은 묶이고 닫히더니, 이제 새로운 책이 펼쳐졌다. 그것의 첫 장이 열린다.
열린 페이지에는… 시나리오가 쓰여 있었다.
[끝을 냈지만, 끝이 아니었다. 세계는 살아남았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
[…….]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세계에 이어질 것이다.
.
.
챕터# 에필로그.
부서지는 햇살. 눈이 부신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몰려 있다….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
앞으로 펼쳐질 시나리오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찬찬히 읽으면서, 나는 어느새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뜩 고개를 들자, 뺨 위로 툭 하니 물기가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누구의 눈물이지…? 하고 사위를 둘러보니 한 인영이 보였다.
울고 있었다, 백루찬이.
“형….”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했다. 자식아, 왜 우냐. 간신히… 간신히 진마하의 폭주를 막았는데.
간신히 세상을 구했는데.
눈을 깜박이자 책은 사라졌다. 그리고 내 눈엔 나를 보고 그렁그렁 눈물을 흘리는 백루찬만이 들어찼다.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눈물을 닦아 주려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라, 몸이 왜 이러냐. 당황해서 손가락을 꿈틀거렸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폭주로 인해 흡수한 힘과 오류가, 내 몸을 산산이 부쉈다는 것을.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피식 웃었다.
“…울지 마, 인마.”
“…….”
벌게진 눈으로 입술을 꾹 깨문 백루찬이, 나를 보더니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꽉 끌어안은 온기는 망가진 몸뚱어리로 느껴지지 않았으나, 녀석의 감정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슬퍼하고 있구나. 이 녀석.
“왜 울어. 우리 무지막지한 게이트도 닫았는데… 너와 나, 세상을 구했어.”
“…그게, 그게 무슨 소용이야.”
백루찬은 이를 악물고, 짓씹듯이 중얼거렸다.
“그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조용히 내뱉는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가 씨익 웃었다. 그게 왜 소용이 없어.
“…네 세계가 무사하잖아.”
“…형.”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형 제발-”
“내가 사랑하는 네가, 무사하잖아.”
백루찬이 입술을 악물었다. 붉게 충혈된 눈이 깜박이며 눈물을 흘렸다. 벌게진 눈가가 안쓰러운데 닦아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루찬아…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형이, 형….”
왜 소용이 없어. 네가 무사한것만으로도 나는 기뻐 미칠 것 같은데. 이제 정말, 정말 끝이 난 거구나. 종전의 기록이 모두 넘어가고, 내가 봤던 그 결말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남았다. 다시 쓰여 갈 새로운 이야기들만.
나는 웃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눈물을 뚝뚝 떨구는 백루찬이 안쓰러워서 그만 울라고, 눈가를 쓰다듬고, 이마에 키스를 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 몸뚱어리는 너무 아쉬웠다. 그러니 더욱 환하게 웃었다.
“형… 이러지 마. 이러지 마. 진짜… 이러면 안 돼.”
“루찬아.”
“형 제발, 나를 놓고 가면 안 돼.”
백루찬이 서글프게도 울음을 꼭꼭 씹어 삼키면서 말했다. 나는 눈을 내려 내 몸을 바라봤다.
아….
손끝에서부터, 흩어지고 있는 육체가 보였다. 내 몸은 세계로 흡수당하듯이, 빛무리로 흩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백루찬을 쳐다봤다. 제대로 울부짖지도 못하는 녀석은 처음 겪는 상황에 정신 차리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었다. 계속 울면서 사라지는 나를 끌어안기만 했다.
순간 나도 울컥하고 말았다. 어떡하냐. 어떡해.
“루찬아.”
“혀엉… 형….”
“형이, 형이 미안해.”
네게 이런 슬픔을 줘서 미안해.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
하지만… 나는 네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너와 함께해 준다고 말했는데, 잠깐 동안은 약속을 못 지킬 것 같네.
어쩌냐, 우리 백루찬. 싸가지 없고… 신경질적이고, 곁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우리 루찬이.
나 없으면 사회생활도 못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어이없이 비죽 웃음이 터졌다.
백루찬이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지막까지 제 눈에 나를 담으려는 것처럼. 나는 그 눈 속의 나를 바라봤다. 부서지는 나.
하지만 루찬아.
“형이… 형이 꼭 네 옆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
“형. 형… 그만 말해.”
“내가 꼭, 너와 한 약속 지킬 테니까.”
“형 제발-!”
“그러니까 울지 마.”
“안 된다고… 안 돼…!”
“슬퍼하지 마. 진짜야. 나는 꼭 다시 네 옆으로 올 테니까….”
그만 울어.
결국 나도 눈물이 터졌다. 빛무리는 어느새 나를 덮어 갔다. 몸이 공기보다 더 가볍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사랑하는 세계를 지켰다.
무수한 회귀를 반복해 가며. 무수한 죽음을 마주하며….
결국 무섭고 힘들고 서러워서 도망쳤지만 다시 마주 보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리고 결국엔,
[퀘스트: 초전 박살의 메인 캐릭터들을 구하라!
다섯 명의 메인 캐릭터! ‘신’인 작가가 만들어 낸 이 캐릭터들은 세계를 구축하는 기둥이다. 이들이 죽으면 초전 박살 게이트! 세계는 부서지고 마는데-! ]
[클리어런스는 오류를 바로잡고 세계를 구했습니다.]
[보상: 완전한 세계]
지켜 냈다.
나는 점점 사라진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지켜 냈어.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된 거다. 이제 끔찍한 회귀도, 반복되는 죽음도 없는 세계다.
완전한 세계.
빛무리가 내 시야를 덮기 전까지 나는 백루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루찬아, 세상의 모든 글자를 조합해도 나는 너에게 이 말 하나밖에 할 수 없다.
사랑해.
졸음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때 눈앞에서 마지막으로 제발 봐 달라는 듯이 재빠르게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마지막이 아니에요, 클리어런스.]
[…사랑하는 차해준 씨.]
나는 웃었다.
❖ ❖ ❖
“아… 으….”
품 안에서 차해준이 빛무리로 화하며 사라졌다.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현실로 돌아왔지만 가장 곁에 두고 싶었던 이가 사라졌다. 세계는 지독히도 잔인하여 위험과 그의 목숨을 맞바꿔 갔다. 이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닌데. 나는… 나는.
백루찬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빛무리를 보며 오열했다. 가슴속에서 미친 듯이 쏟아지는 것은감정은 저조차도 자신에게 있는지 몰랐던 서러움이었다.
그리고 미칠 듯한 슬픔.
그는 내내 오열하며 울다가 입술을 꽉 깨물어 울음을 삼켰다. 주먹을 꽉 쥐었다. 신처럼 군림하는 힘을 가졌다고 해도 결국 사랑하는 이 하나 살리지 못했다. 무력했다. 후회와 서러움, 아득한 고통이 온몸을 잠식하고 뇌는 녹아내릴 것 같았다. 눈물에 잠식되어 죽고 싶을 만큼 감정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백루찬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끝이 아니야.”
아직. 아직 아니야.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차해준은 돌아올 거야.
눈물에 벌게져 달아오른 눈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뜨고 있는 하늘은 어스름하게 잠기고 있었다. 남빛으로 물드는 하늘. 이제 곧 해가 뜰 것이다.
“…기다릴게.”
어느 순간이든 다시 찾아와.
제발.
백루찬은 밝아 오는 여명을 마주한 채 손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