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루찬? 너 어떻게 여길….”
“형 찾으러 왔지.”
백루찬은 앞뒤 설명을 생략하고 간략하게 말했다. 아니 분명 백루찬이 찾으러 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여기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여기 나갈 입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나가려고 이렇게 들어온 건지, 기가 막혔다. 나는 순간 욱해서 나를 끌어안은 백루찬을 떼어 냈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입구도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들어와?”
“형만 떼어 놓을 순 없잖아.”
“그래도 그렇지, 왜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해…!”
화가 나서 쏘아붙이자, 백루찬이 기가 차다는 듯 허- 하고 실소했다.
“형 무모하다는 건 형보고 하는 말이고, 나는 착실한 거고.”
“야, 백루찬.”
“형이야말로 너무하다고 생각은 안 해? 그렇게 사라지면,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하, 그땐-”
“형은 너무 이기적이야.”
“야.”
내가 잡히고 싶어서 진마하에게 잡혔냐. 이기적이라니.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거창하게 계획을 세워 놓고, 진마하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하지 않은 내 탓도 있으니까. 나는 입술만 달싹거리다 다물었다. 백루찬은 나를 끌어안고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거봐. 아무 말도 못하잖아. 형도 알고 있는 거야.”
“…너 근데 왜 자꾸 반말이야.”
“할 말 없으니까 말 돌리긴.”
“…….”
정말 그랬던 거라, 뻘쭘하게 안겨있다가, 한숨을 내쉬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했겠지. 내가 백루찬을 걱정한 만큼.
“별일은 없었어.”
“옷이 바뀌었는데 별일이 없었어?”
“찢어진 거 계속 입고 있을 순 없잖아.”
“형이 갈아입었어? 그놈이 갈아입혀 줬어?”
“…뭘 그런 것까지 따져.”
“이봐, 이봐. 그러니까 내가 열이 받아, 안 받아.”
키스도 했다고 하면 여기서 더 폭발하겠지. 나는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백루찬을 밀어냈다. 일단 얼굴부터 보고 진정시키는 게 낫겠다. 백루찬은 순순히 밀려나서 나를 쳐다봤다. 잿빛 눈동자가 여태껏 잘 보지 못했던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래도… 난 네가 날 찾으러 올 줄 알았다.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슬쩍 웃으며 녀석의 뺨을 툭 쳤다.
“루찬아, 고맙다.”
내 말에 백루찬이 눈을 끔벅거렸다.
“구해 줘서. 우리 무사히 게이트를 나가자. 절대 다치지 말고.”
“…짜증 나.”
“왜?”
“화도 더 못내게 만드네.”
그래, 인마. 화내지 말라고 달래는 짓이다. 백루찬은 내 손을 꽉 잡고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봤다.
“근데 형, 여기 생각보다 좋네. 게이트 밖이랑 똑같은 공간이고.”
“알아보는구나?”
“공격하기 전에 계속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백루찬은 내 손을 꽉 붙잡고 현관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폭발로 뒤집힌 저쪽과 달리 이곳은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백루찬과 같이 있으니 이상하게 진정이 되어 버렸다. 하, 근데 진마하는 어떻게 떼어 놓고 들어온 거지. 순순히 들어올 리는 없고, 누군가 진마하를 상대하고 있어야 할 텐데- 그곳에 그런 인물이 있을 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을 힐끔 쳐다볼 때였다. 백루찬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평화롭네. 이런 곳에 있었구나. 힐링 되었겠어.”
“나 혼자 힐링하면 뭐하냐. 너는 고생했는데.”
“고생한 걸 알아주니 다행이다.”
“여기 나가는 입구가 없어. 잡아야 할 보스몹도 없고, 뭐라 힌트도 없고.”
“그놈이 형을 가두기 위해 만든 거니, 그딴 게 필요할 리가 없겠지. ”
“…넌 걱정도 안 되냐?”
“무슨 걱정? 세즈?”
백루찬의 물음에 나는 기함했다. 설마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는 게 전부 세즈가 도와줘서 그런 거야? 그럼 지금 밖에서 진마하를 상대하는 게 세즈고?
“얌마, 너…! 세즈 두고 온 거야?”
“도움 좀 받았는데.”
“그럼 세즈 다치지 않게 해줘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놈도 은혜 갚으려고 한 거고. 그 녀석보단 형이나 먼저 걱정해. 아무리 나 닮았다지만 내 앞에서 다른 사람 챙기지 말고.”
닮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너 판박이라고! NPC라고 해도 실제 인물을 복제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하, 내가 세즈를 왜 챙겼는지 모르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루찬은 내 손을 꽉 잡고 정원을 걸었다. 푸른 잔디가 심긴 넓은 뜰은 유럽의 어느 공원을 연상시켰다. 백루찬은 흐음, 목소리를 내며 그저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한 주변을 살피다, 갑자기 잔디밭에 털썩 앉더니, 이내 등을 대고 벌러덩 누웠다. 녀석의 행태에 나는 기가 막혔다.
지금 게이트 안의 게이트로 들어와서 입구도 못 찾았는데 태평하게 뭐 하는 거냐.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백루찬이 나를 잡아당겼다. 졸지에 옆에 털썩 앉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찬아, 이럴 때가 아니야.”
“여기 좋은데 왜. 조금만 쉬다 가자. 형도 나도, 제대로 쉰 적이 없잖아.”
“…지금 상황이.”
“왜. 형, 이대로 조금만 있자.”
햇빛을 가득 받아, 빛나는 얼굴로 백루찬은 느긋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또 입이 떨어지지 않아 다물었다. 맞아. 연달아 게이트 해결하고 진마하가 현실 세계에서 벌인 일을 수습한다고 뛰어다녔고, 나를 구한다고 심하게 다치기까지 했다. 그 뒤로 제대로 휴식도 없이 또 제로급 게이트가 열려서 안으로 들어와야 했고.
지칠 만도 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진마하를 자극한 건 나였기 때문에. 그게 멸망을 막는 일이었더라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였다.
나는 누운 녀석을 쳐다봤다. 부드럽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눈을 감은 녀석은 확실히 나와 다시 만나서인지, 초조한 기색보단 여유로운 기색이 느껴졌다. 나도 안심이 되었고.
감은 눈꺼풀의 속눈썹, 얌전하게 다물린 입술을 보다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졌다. 백루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조심스럽게 뺨을 매만졌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쓸데없는 걱정이었지. S급을 걱정하다니. 하지만 그래도….
그때 백루찬이 느릿하게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깜박이는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서인지 옅은 금빛으로 빛이 났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얼굴은 햇빛 아래 더 찬란했다. 아니 그냥… 이 녀석이 나에게, 그렇게 찬란하게 다가왔다.
나는 뚫어져라 녀석을 응시했다. 위험한 상황 속에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하지만 나는 햇빛 아래 누운 녀석을 보며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깊은 안도감. 같이 있다는 것에서 오는 충족감. 그리고 혹시나 얘까지 잃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 소리가 백루찬의 귀에도 들릴 것 같았다.
빨리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다. 위험 속에서 제 발로 걸어들어오는 일 따윈,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은 물론, 백루찬을 이런 위험한 일에 내던지게 하고 싶지 않다.
마지막으로 진마하가 떠올랐다.
그 불쌍한 놈이. 아무도 곁에 없어서, 거짓된 세계에서나마… 사람의 온기를 바랬던 녀석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도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대체 신이란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필요로 만들어진 아이가 죽는 것을, 그저 오류로 죽는 것을 원했다면 세계의 기둥으로 삼지 말았어야지.
그런 게 아니었다면, 좀 더 진마하를… 이해해 줬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씁쓸한 얼굴로 작게 웃자, 백루찬이 팔을 괴고 몸을 옆으로 돌려 나를 쳐다봤다. 백루찬이 나를 불렀다.
“형.”
백루찬은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까보다 좀 더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녀석과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백루찬은 조금 굳은 얼굴로,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무거운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았다.
“형, 나와 함께하겠다고 말했잖아.”
“…루찬아.”
“서로가 되어주자고, 형이 해 주겠다고 했잖아.”
백루찬은 복잡한 심경이 얽힌 한숨을 내뱉었다. 백루찬은 지금…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근데 나 왜 형이 떠날 거 같지.”
“…그럴 리가 없잖아.”
“내 손도 잡아주고 나와 함께 하는데… 형이 짊어진 게 너무 많아서. 나도 그냥 짐으로 생각하는 거 같아.”
“아니야.”
“형,”
“루찬아. 왜 그런 말을 해. 내가-”
“형, 나를… 좀 더 사랑해 줘.”
“…….”
“나를 더 맹목적으로 바라봐 줘. 나만 봐 줘. 내가 형 옆에서 무너지지 않게.”
“…루찬아.”
“나는 눈치가 빨라. 그 남자, 형이 불쌍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쯤은 다 눈치챈 지 오래야.”
백루찬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그 남자, 진마하를 말하는 거구나. 알 수 있었다. 백루찬은 흔들리는 내 눈에 시선을 맞추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항상 마지막은 내 손이어야 해. 형이 해야 할 일을 아니까 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백루찬이 내게 팔을 뻗었다. 안기라는 듯. 나는 쓰게 웃으며 누워있는 녀석을 끌어안았다. 우린 거짓된 평온 안에서 그렇게 서로를 껴안았다. 백루찬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나를…더 많이 사랑해줘. 나는 형을 사랑하니까.”
작게 웃었다. 나의 결심은 변하지 않을 거다. 이 녀석에게 기댈 수 있는 ‘서로’가 되어주기로 한 것을. 나는 티 내지 않으면서도,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는 녀석을 가만히 끌어안고 다독였다.
“루찬아. 약속 지킬게.”
“…….”
“네가 원하는 거, 내가 해줄게.”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
진마하가 눈앞을 스쳐 가는 것 같았다. 홀로 외로웠던 남자. 나 또한 그랬다. 나 또한… 혼자였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그놈이 신경 쓰였다.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을 아니까.
그러니까 루찬아, 우리 그 불쌍한 자식 조금만… 조금만 도와주자.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백루찬의 품에서 쓰게 웃었다.
조금만… 조금만 외롭지 않게 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