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지만 고작 심상 세계의 일 따위 궁금해할 여유는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차해준이었다. 백루찬은 다시 불타오르는 고저택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즈는 어딘지 떨떠름한 얼굴로 이마를 매만졌다.
“그래, 이런 행운은 쉽지 않지. 그 남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걸 계획할 수도 없었어.”
“이렇게 열성적으로 도와줘도 형은 못 줘.”
“개소리하는 걸 보니 나랑 닮은 새끼가 맞네.”
“안 반했어? 나라면 분명 형을 보고 반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세즈는 잠시 침묵하다 백루찬을 비웃었다.
“그렇게 제멋대로 목숨 거는 남자는 이쪽에서 사절이야.”
“제멋대로인 편이긴 해.”
백루찬은 웃었다. 차해준은 그 점이 미친 듯이 안달 나게 만드는 사람이긴 했다.
멋대로 목숨을 걸고, 멋대로 희생하고 자신을 놓아 버리는 사람. 그리고 모든 것을 내주면서… 함께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
아주 괴롭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그래서 이런 짓을 순순히 받아 주고 있는 것일 테다. 진마하의 소굴에 스스로 잡혀 들어가 결국 새장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새처럼 굴어도 참아 주는 짓을 말이다.
“패거리가 다크썬에 의해 피해를 입었단 말이지.”
“패거리가 아니라 패밀리야. 전력을 다해 싸우겠지만 승패는 장담 못 해. 놈은… 신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 봤자 인간이야.”
백루찬은 웃었다. 신과 같은 능력. 자신도 지니고 있었다. S급을 상회하는 각성자의 능력은 일견 신에 비할 정도다. 차해준을 통해 진마하가 다른 인간들처럼 잉태 과정을 통해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았지만 백루찬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도 강해.
이미 한 번 놈을 죽을 때까지 밀어붙여 본 적이 있다. 그만큼의 피해를 입었지만, 그 정도라면 다시 또 몸을 던져 볼 만했다. 일단, 차해준을 구하고 나서.
백루찬은 전투복 위에 입고 있던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흰 코트를 벗어 세즈에게 던졌다. 그가 불퉁한 얼굴로 받아 들었다.
“우리의 계획, 안 잊었지?”
“넌 방금 전에 말한 것도 잊는 멍청이인가 보지?”
세즈가 짜증 내며 코트를 입었다. 그러자 정말 백루찬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이 세계가 거짓된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말했을 때도 세즈는 동요하지 않았다.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 모습까지도 자신과 똑같았다. 그래서 이 계획을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백루찬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열심히 번개를 충전해 놨으니 알아서 터질 거야. 여기서 나인 척해 줘. 내가 형을 찾을 때까지.”
“애저녁에 알아들었으니 두 번 말하지 마. 귀 따가우니까.”
계획은 이러했다. 세즈는 자신의 패거리를 앞세워 진마하를 공격하고, 그 뒤에 ‘백루찬’인 척, 있는다.
그리고 그사이, 백루찬이 뒤돌아 들어가 차해준을 구한다.
생각한 계획은 여기까지였다. 세즈는 차해준을 구하면 전투에서 얄짤 없이 빠지겠다고 말했다. 그 뒤 진마하를 완전히 죽여 버리는 것에 대해선 백루찬이 맡았다. 차해준을 구하고 나면, 형의 의사보단 일단 진마하를 죽이고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양손에서 전류가 치직거리며 일어났다. 주변을 감싸듯 서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백루찬은 몸을 날리기 전 고저택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하늘 위로 낙뢰가 번뜩이며 고저택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때였다. 낙뢰가 저택을 완전히 부수기 전, 둥글고 반투명한 방어막이 떠오르며 낙뢰를 튕겨 냈다.
사방에 전류가 튀어 오른다. 그 영향으로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백루찬은 눈을 빛냈다.
드디어 진마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하늘 위로 어둠을 뚫듯 마력 파장 여러 개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허공에 송송 구멍 난 것처럼 생성된 마력 파장이 둥근 입을 벌리자, 그 안에선 이계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백루찬은 단숨에 뛰어올라 저택으로 향했다.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보던 세즈가 한숨을 쉬며 손짓했다.
“자, 우리도 살아남아 보자고.”
빌어먹을 각성자들 사이에서, 비록 이곳이 거짓된 세계라도 자신의 생이 이어진 곳이다. 지킬 이유는 충분했다. 세즈의 말에, 패밀리들도 함께 화기와 무기를 장전했다. 곧이어, 그들은 몬스터들을 향해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백루찬은 다가오는 몬스터를 피해 움직였다. 다행스럽게도 현실 세계처럼 강한 개체를 뽑아낼 순 없는 것인지, 몬스터들의 등급은 낮아 보였다. 그저 손을 휘둘러 가벼운 전류를 흩뿌리는 것만으로 앞을 감싸고 있던 몬스터들을 도륙 낸 백루찬은 정원을 지나 고저택 안으로 숨어들었다.
현관과 로비는 원래는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볼썽사납게 부서져 있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 벽면에 커다란 그림이 담긴 액자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기우뚱거렸다. 백루찬은 시끄러운 밖과 달리 조용한 내부를 훑어보며 걸음을 옮겼다.
어딘가에 차해준이 있을 것이다. 진마하가 그냥 숨겨 두진 않았을 텐데, 그사이 무슨 짓을 당했을까?
백루찬의 표정이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다. 그 생각을 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는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것이 분노에 의한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나와 함께하겠다면서….”
매번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까지 여지를 줘 버리고 말지.
그러면서 내 손을 붙잡고 그렇게 괴로운 낯으로, 울음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함께하겠다고 얘기하지.
그러니 형… 이제 집착은 받아 줘야 해.
백루찬의 입가에서 설핏 웃음기가 번졌다. 이 정도로 휘둘려 줬으니, 차해준은 할 말이 없다.
그는 1층을 휘휘 둘러보곤 바로 2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밖에서는 고함 소리와 몬스터의 괴성. 그리고 폭죽 터지는 폭음이 들려왔다. 세즈는 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진마하가 고저택에 파고든 자신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도착한 2층 또한 조용했다. 아직 폭발의 여파가 제대로 닿지 않아서 대부분의 방들이 멀쩡했다. 하나하나 방문을 열어 가며 해준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이렇게 쉽게 놓아두지 않았을 테지만, 한 곳이라도 놓친다는 게 불안해서 세세히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2층에서도 결국 소득을 얻지 못하고 백루찬은 3층으로 향했다. 복도를 꾸며 놨던 장식품들이 충격에 의해 난잡하게 부셔진 3층은 폐가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2층과 달리 3층은 꽤 어두웠다. 그리고 올라서자마자, 지나치게 짙은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방이다. 백루찬은 천천히 그 방으로 움직였다.
고풍스러운 양문으로 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직감이 말했다. 여기구나.
그 생각을 하자마자 힘으로 문고리를 뜯어냈다.
부서지는 것들을 바닥에 내던지고 나서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보았다.
열려 있는 게이트를.
“…하.”
방 안을 채운 것은 오직 게이트뿐이었다. 마력 파장이 불길하게 일렁이지만, 이것은 여태껏 봐 왔던 게이트와는 다른 기운을 풍겼다.
그것을 보자 진마하가 차해준을 어떻게 숨겼는지 감이 왔다. 백루찬은 눈치가 아주 빨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게이트를 향해 뛰어들었다.
❖ ❖ ❖
“…여길 어떻게 나가는 거야.”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온 게이트 안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도무지 나갈 입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보통 게이트들은 보스를 처리하고 나면 입구가 열리는데, 여기는 잔잔하게 스치는 바람과 나무, 고저택뿐,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뿐이었다.
“젠장….”
백루찬이 미치도록 걱정이 되었다. 더불어 진마하도.
영혼석을 빨리 찾아서, 어떻게든 게이트를 깨야 하는데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남은 시간: 5:24:36…]
더불어 제한 시간까지 나를 불안감에 떨게 만들었다. 착실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느껴졌다. 나는 저택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확인해 보다가, 결국 로비에 털썩 드러누웠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에 따듯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미적지근한 그 느낌은 여기가 정말 현실이라도 되는 양 기이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하, 이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진마하의 뜻대로 되면 어떡하지.
지금 상황은 진퇴양난이었다. 이리해 봐도 저리해 봐도 결국 눈앞에 닥치는 건 메인 퀘스트 실패, 세계 멸망뿐이었다.
이럴 때 시스템이 뭐라고 나서서 해결을 해 줘야 하는데, 이 자식은 여태껏 텍스트 하나 띄우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여길 벗어나냐.
불안해 미치겠는데, 주변 환경은 너무 평온해서 기시감이 몰려왔다. 진마하는 대체 어떻게 이런 것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지?
지금의 진마하는 불안정하다. 시스템은 과부하로 인해 세계의 비틀림이 심화되고 있다고 말했고, 녀석도 분명 그 영향을 받고 있을 터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 때였다. 갑자기 위층에서 무언가 우당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이곳엔 분명 나뿐이었다. 혹시 입구가 열린 건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게이트가 열렸다는 건 저쪽 세계도 어떻게든 결판이 났다는 소리 아니야? 설마 루찬이가…!
아니 진마하는…! 하씨,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때였다.
“형!”
위층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2층 난간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난간에 기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백루찬이었다.
“여기서 혼자 사색을 즐기고 있었던 거야?”
백루찬이 나른하게 웃으며 난간을 붙잡고 폴짝 뛰어올랐다. 로비로 가볍게 착지한 녀석을 보며 나는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였다.
녀석은 입술을 삐죽이며 나를 보고 양팔을 벌렸다.
“이럴 땐 보통 달려와서 안기던데.”
“…야, 너!”
“형이 안 오면 내가 가지, 뭐.”
백루찬이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