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륵 눈이 떠졌다. 새가 우는 소리와 함께 햇살이 침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몸을 일으켰다. 대리석으로 촘촘히 꾸며진 방은 오밤중에 봤을 때와 상당히 다른, 여름의 느낌을 풍겼다.
멍하니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다 한쪽 뺨에 따갑게 닿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진마하가 같은 자리에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다만 입고 있던 코트는 벗어 둔 채였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녀석을 바라봤다.
물끄러미 보고 있는 놈과 시선이 마주쳤다.
진마하의 얼굴에 미미한 기쁨이 어렸다. 녀석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잘 잤어?”
나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젠장, 왜 저렇게 보는 건데. 마치… 내가 깨어난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마주하자니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애써 주의를 돌렸다.
다 찢어져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옷은 어느새 갈아입혀져 있었고, 손목에 구속구는 없었다. 대신 목을 조이는 느낌에 목덜미를 매만지자 마치 목줄처럼 채워진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이건 또 뭐냐. 한숨이 나왔지만 꾹 삼키곤 녀석을 쳐다봤다. 이게 뭐냐는 뜻임을 알아차린 듯 진마하가 말했다.
“네 움직임이 불편해 보여서 다른 걸로 바꿔 봤어. 내 선물이야. 마음에 들어?”
“개 목줄이?”
“목줄이라니… 목걸이인데.”
진마하가 침대맡 탁자 위에서 탁상 거울을 들어 올려 비췄다. 핼쑥하게 질린 내 얼굴과 목에 걸린, 노란빛을 뿜어내는 보석 달린 초커가 보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거 새로운 구속구냐. 여전히 마력을 쓸 수 없는 거 보니 맞는 거 같은데.
“웃기는 짓 좀 하지 마.”
“웃기려고 한 적은 없어. 네가 기쁘길 바랐을 뿐이지.”
“너, 너……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부스럭거리는 것에도 주목하고, 숨소리 하나에도 반응하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것조차 기쁘다는 것처럼.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그런 표정 하지 마.
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진마하가 게이트를 열기 전, 나에게 속삭였던 것이 떠오른다.
사랑이라고 했지.
나는 고개를 돌리며 녀석의 손에 들린 거울을 쳐 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카펫 위에 떨어져 완전히 깨지지 않았지만 금이 잔뜩 가 버렸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순간 각인에 대한 거부감에 홧김에 저지른 행동이었으나 조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 자극했나…. 나 잡힌 몸인데. 그런 생각이 들어 녀석을 힐끔 쳐다봤다.
진마하는 딱히 화가 나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냥 순한 척 눈을 껌뻑이면서 나를 쳐다봤다. 하 진짜, 나는 또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렇게 보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속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 방 밖으로 향했다. 커다란 양문을 여니 난간부터 보였다. 그 앞은 탁 트인 로비와 함께 투명한 창문으로 햇빛이 안으로 쏟아지는 풍경이 보였다. 그걸 보고 나는 잠깐 멈춰 선 채 멍하니 섰다. 젠장…. 젠장.
기분이 이상했다. 진마하가 나를 보는 시선은 무언가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이 영 익숙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런 평화로운 여름의 분위기를 띠는 주택도 말이다. 다크썬이라는 어두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좀 어두운 데 처박혀 있지, 그것도 아니고 자기랑 어울리지 않게 이렇게 예쁜 저택이라니.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 저 녀석이 이곳에서 무엇을 채우려 했는지 이해가 갔다. 어두운 곳에서 온통 에러 표식만 보던 놈이…. 그래, 이런 걸 원했구나 싶어서…. 하. 진짜 한숨만 나온다.
진마하가 나를 따라 나왔다. 가죽 장갑을 낀 손이 살며시 내 손목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녀석은 작게 웃고는 나를 이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맨발에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닿는데 춥지가 않았다. 여긴 온통 온기로 가득했다.
“이거 놔.”
반항이라도 해 보고자 심통 맞게 중얼거렸으나, 진마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녀석을 쳐 내지 않았다. 밀어내 봤자 또 아까와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볼까 봐 할 수가 없었다. 진마하는 산책을 나가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며 나를 보고 웃었다.
“밤새 들여다봤는데도 질리지 않아.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하, 여긴 어디야.”
“어딘지 알면, 나를 떠날 거야?”
“널 죽이기 전엔 안 가.”
진마하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함께해 준다며.”
“…네가 게이트를 열기 전 얘기였지.”
“지금은 아니야?”
“게이트 닫고 널 처리할 거야.”
단호한 대답에 진마하는 다소 힘없는 조소를 그렸다.
“그러면 내가 죽기 전엔 네가 떠나지 않겠네.”
“…….”
“좋아, 나는.”
뭐가 좋다는 거야! 이 자식아! 욱해서 목구멍까지 화가 치솟았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이 녀석에게 뭐라고 말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진마하는 나를 끌고 1층에 있는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커다란 하얀 식탁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의자를 빼 나를 앉힌 진마하는 자연스럽게 그 옆에 앉았다.
“늦었지만 아침이야. 먹어.”
“게이트에서 먹는다고 배가 차나.”
“…거짓된 세계만은 아니잖아. 너와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까.”
진마하는 씁쓸한 얼굴로 내 손에 식기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또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본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데 뭐가 넘어가겠냐.
나는 한숨을 쉬고, 일단 진마하가 하라는 대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스튜부터 천천히 먹었다. 그러나 제대로 속에서 받아 주지 않아 몇 입 먹고선 그만뒀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밥을 챙겨 먹겠어.
그렇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나는 백루찬을 생각했다. 루찬이는 거기서 잘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진마하를 보자마자 시야가 암전돼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물어볼까 했지만,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는 놈을 보며 그 말은 음식과 함께 꿀꺽 삼켰다. 혹시 진마하가 백루찬을 표적으로 노리고 공격하면 더 걱정되니까. 물론 S급이니 어떻게든… 저번처럼 이겨 내 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위험에 빠지는 건 싫다. 내가 잡아 두는 게 차라리 나았다.
식사를 대강 마치고, 진마하는 또 내 손을 꽉 잡고 정원으로 나갔다. 따사로운 햇빛과 살랑이는 바람.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하늘. 그 평화로운 광경을 보며 나는 진마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심했다.
하지만 정작 녀석은 별생각이 없는 것인지, 내 손을 꽉 잡고 느긋하게 정원을 거닐기만 했다. 내리쬐는 햇빛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지만 녀석은 환하게 웃었다.
“이런 거 해 보고 싶었어. 나를 기억하는 사람과….”
진마하는 나를 돌아보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수줍은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여유를 부리는 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너와 내가 그런 한가로운 짓을 할 때인가. 그리고 지금 나는 거의 납치되다시피 놈에게 끌려온 상황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뭐 하는 짓이냐고 미쳤냐고 떠들어야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고 되레 다물렸다.
고작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이 녀석이… 안쓰러워서.
나는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웃는 녀석을 보며 말없이 뒤따라 걸었다. 잘 꾸며진 정원이 있는 저택과 정원은 어디 이탈리아 남부에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진마하는 장갑을 낀 손으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볕이 좋은 따사로운 모습. 마음은 무거운데 게이트 안임에도 지금 보는 풍경은 평화로웠다. 길게 펼쳐진 넓은 들판. 그 위로 한가롭게 일을 하는 농부. 넓게 펼쳐진 하늘과 들판만 보였다. 저 지평선쯤엔 도시가 걸려 있었지만 그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평화롭다.
나는 또다시 불쑥 솟아오르는 진마하에 대한 먹먹한 감정에 빠지기 전에, 생각을 돌렸다.
루찬이. 그래, 백루찬.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히 빠져나왔겠지. 설마 다크썬에 나처럼 잡혔다거나… 그러진 않았겠지.
애써 생각을 돌리며 백루찬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작은 허밍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허밍의 주인은 진마하였다. 내 손을 붙잡고 걷는 녀석은 평온한 얼굴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음… 음….”
나는 순간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녀석을 본 순간, 말문이 막히고,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진마하는 여태껏 본 적 없는 가장 평온한 얼굴로, 그리고 매번 미소로 가리던 거짓된 얼굴이 아닌, 본연의 제 모습으로 내 손을 잡고, 따사로운 햇빛을 즐기듯이 걷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흥얼거리는 녀석을 보며 올라오는 감정을 꾹 눌렀다.
“이런 건 처음 해 봐.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것.”
“…햇빛도 처음 본다 하지, 왜.”
진마하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야. 나는… 네가 알다시피 어둠 속에 있었거든.”
“…….”
“삭막한 광경이었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거리를 걸어도 태양조차 나를 외면하고 있는 기분 알아?”
“…동정심을 유발하는 거라면….”
“설마 해준아. 나는 그냥 너와 이렇게 걸어서 기쁠 뿐이야.”
…모든 것이 거짓으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진마하가 만들어 낸 심상 세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녀석은, 정말로 기쁘다는 듯 웃었다.
나를 보는 얼굴에 다채로운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랑에 빠진 얼굴로,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 웃는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러다가 더 동정하게 되고 말까 봐, 녀석이 잡은 손을 빼냈다. 녀석을 빠르게 지나쳐 앞서서 성큼성큼 걷자, 뒤에서 걸음이 멈췄다. 그러나 이내 곳 터벅터벅 나를 쫓아온다.
정원을 걷는 내 뒤를 녀석이 느긋하게 따라왔다. 등 뒤로도 시선이 느껴져 나는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분수대 앞에 도착해서 햇빛에 반사되어 무지개를 그리는 물방울들이 퍼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진마하가 옆으로 온다. 또 뚫어지게 나를 보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녀석이 조용한 환희에 가득 차 있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정말로 기쁘다는 듯 행복하다는 눈으로, 사랑을 숨길 수 없는 눈으로.
“해준아,”
진마하가 나를 불렀다.
“어떡해.”
눈을 피하고 싶었다. 저 눈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깊은 감정을 쏟아 내고 있는 저 눈을.
진마하가 말했다.
“이대로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떡하지.”
“…….”
“너와 있으니까,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춰도, 혹은….”
진마하는 뒷말을 삼키고 잠시 머뭇대더니, 실금 같은 미소를 띠며 웃었다.
“사랑이란 게 이런 거구나.”
“…….”
“사랑해.”
속이 한없이 답답해졌다. 무언가가 명치를 꾹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나를 보는 진마하는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처음인 것처럼 좋아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녀석이 쏟아내는 것이 온전히 내게로 떨어진다. 그것은 감당하기 벅찼고, 또…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