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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84)화 (181/201)

백루찬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긴 복도를 마주했다. 한 뼘 간격을 두고 서 있는 경호원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백루찬은 서늘한 기색을 풍기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성큼성큼 걸어가 경매장 입구로 보이는 곳 앞에 섰다. 

앞길을 막은 자는 나라시처럼 얼굴에 흉터가 있었다. 남자가 비죽 웃었다.

“무엇을 사시려고?”

“알 바야?”

“예민한 고객님이시네. 각성자?”

백루찬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잿빛 눈동자가 어두운 복도에서 짙게 잠겼으나, 이내 곧 황금빛을 번쩍이며 안광을 발했다. 남자는 눈썹을 으쓱이더니 제 옆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스테인리스 재질처럼 번쩍이는 철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백루찬은 남자를 힐끔 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의외로 얼굴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테이블마다 나뉘어 있었으나, 모든 테이블에 와인부터 안주, 위스키 등 술병이 가득 올려져 있었다. 백정같이 취해서 불콰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람부터, 고급스러운 양복을 차려입고 와인 잔을 드는 남자까지 군상이 다양했다.

백루찬은 중간에서 좀 더 뒤쪽 출입구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자마자 웨이터가 와인 잔과 숫자가 쓰인 팻말을 테이블에 놓고 갔다. 다른 테이블로 향하는 웨이터에게 무심한 시선을 던지며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뒤늦은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이 형은 무모한 건지, 도전 정신이 강한 건지, 제 강함을 믿고 나대는 건지 정말 구분을 못 하겠다. 차해준에 대한 감상이었다. 적진에 쳐들어와서 ‘상품’으로 잠입할 생각을 하다니.

뭣하면 판을 뒤집자고 그가 말했지만, 백루찬은 그 뭣하는 순간까지 기다려 줄 마음 따위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신의 것이 저 더러운 자들의 욕망 어린 시선을 받을 거란 생각만 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나타나기만 하면. 차해준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드러내고 그의 안전을 확보한다면, 그리고 형의 목표대로 진마하의 모습이 보인다면, 백루찬은 지체 없이 여기 있는 모두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어차피 게이트 안에 있는 놈들이고,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다짐했을 때 경매가 시작되었다.

❖ ❖ ❖

나는 철창 너머로 세즈를 보고 당황했다. 누가 봐도 백루찬 미니미…라기엔 좀 커 보이긴 하지만 아무튼 본체보다는 조금 작은 백루찬이다.

당황해서 얼굴을 보고 눈을 끔벅거리자, 세즈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가벼운 수갑형 구속구만 채워진 나와는 다르게 세즈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두르는 벨트 달린 구속구까지 낀 모습이었다. 백루찬 얼굴로 저런 모습이라니 진짜 적응 안 된다. 나는 다시 한번 세즈를 힐끔 쳐다보곤 손목에 힘을 줬다.

- 파직.

마력이 튀며 반동이 있었지만, 난 내 손목을 구속했던 구속구를 손쉽게 부쉈다. 뭐야, 이거 싸구려냐. 그냥 살짝 힘줬을 뿐인데…. 아까 잘못했다가 흥분했으면 잠입 자체도 못 했을 수 있었다. 부서진 잔해를 털어 버리고 일어나 입을 막고 있던 개구기를 빼 버렸다. 그제야 숨 쉬는 게 좀 편해졌다. 세즈가 그런 나를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철창의 굵기를 가늠했다. 몸 안의 마력을 움직이자 핏줄을 타고 손끝까지 퍼지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대로.

- 끼이익.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굵기의 철창을 양옆으로 벌렸다. 엿가락 늘어지듯 늘어난 철창 사이로 빠져나와 세즈에게 다가갔다. 함께 갇힌 사람들의 시선이 흥분으로 얼룩지면서 개구기로 막힌 입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구해 달라는 말이겠지. 아무리 여기가 게이트 안이고, 이건 다 가짜라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인다. 나는 일단 세즈가 갇혀 있는 철창의 잠금을 한야를 꺼내 가볍게 부수곤 문을 열었다.

“세즈? 조금만 기다려.”

“으읍…읍!”

넌 뭐냐고 말하는 것 같은데. 나는 몸부림치는 녀석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일단 몸을 꽉 죄고 있는 구속 벨트부터 풀었다. 이제 보니 발목에 쇠고랑까지 차고 있다. 하 이 새끼들 진짜 악질이네. 나는 각성자이니 마력만 잡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은데. 세즈는 왜 이렇게 꼼꼼히 묶어 놓은 거지?

그 생각을 하며 일단 개구기를 빼고 손목을 옥죄는 구속구를 풀었다. 그러자 세즈가 나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너 뭐야!”

“어….”

일단 상체를 뒤로 빼며 피하고 뒤이어 후려치는 주먹을 막았다. 와, 센데. 각성자는 아닌 거 같은데 힘이 장난 아니었다. 나는 주먹을 막고 상냥해 보이게 웃었다.

“널 구하러 온 사람.”

“…뭐?”

세즈는 순간 당황한 듯 손에서 힘을 뺐다.

나는 그대로 주먹을 밀어 버리듯 놓고선, 철창 밖으로 나가 녀석에게 나오라 손짓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한 명씩 풀어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흐윽… 흑!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세즈는 그 모습을 눈살을 찌푸린 채 쳐다봤다. 이왕 잠입하는 거 좋은 일도 하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울면서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 손짓했다.

“밖에 지키는 놈들이 오기 전에 벗어나야죠.”

“…네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나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왜?”

세즈는 뺨을 씰룩이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세즈의 몸이 상처투성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수없이 탈출했지만 결국 길은 하나였어. 여긴 지하고, 저놈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는 이상-”

“그러면 돼?”

“뭐?”

“모조리 죽이면 나갈 수 있어?”

담담한 어조로 꺼낸 내 말에 세즈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모조리 죽여야만 나갈 수 있다라…. 나는 세즈를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조금 화가 났다. 아니… 지금 우리 루찬, 아니 세즈를 저렇게 만들었다고? 열이 받는다.

“너… 너 뭐 하려고!”

“뒤집어엎어야 도망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 주게.”

“…야!”

어느새 내 손엔 한야가 잡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굳게 닫힌 철제문을 향해 휘둘렀다.

- 콰과강!

곧이어 한야에서 날아간 검기가 철제문을 완전히 우그러트리며 부숴 버렸다. 나는 세즈를 보며 웃었다.

“이렇게.”

세즈는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봤다. 영… 적응되지 않는 얼굴이다. 백루찬의 얼굴로 저런 놀란 표정을 짓다니. 좀 색다르긴 하네.

“이 새끼들이…!”

“뭐야!”

그때 자욱하게 이는 먼지를 뚫고 다크썬 조직원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풀려난 우리를 보고 당황한 듯 주춤댔다. 그리고 곧 원인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저 새끼부터 잡아!”

“뛰어!”

나는 소리치며 앞으로 쏘아지듯 몸을 날렸다.

❖ ❖ ❖

“다음 물건은 이국에서 넘어온 것으로….”

백루찬은 감흥 없는 얼굴로 경매가 진행되는 단상을 쳐다봤다. 쓸데없는 물건들이 족족 올라오고 빠르게 팔려서 주인을 찾아갔다. 인간 경매는 마지막에 진행되는 하이라이트인지 순서를 기다렸지만 계속해서 보석, 오래된 유물, 아티팩트 같은 것만이 나왔다.

지루하게 와인 잔을 굴리며 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을 때였다. 자신이 들어오고 나서부턴 내내 닫혀 있던 출입구가 작은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있었다. 백루찬은 멈칫했다가, 다시 와인 잔을 굴렸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특유의 발걸음이 고막을 사로잡았다. 시끄럽게 떠들던 진행자가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고, 수행원을 잔뜩 끌고 온 한 남자가 백루찬이 있는 곳과는 세 테이블이 떨어진 곳에 앉았다.

검은 코트와 목까지 잠근 셔츠. 그리고, 손을 가린 장갑. 가죽 구두. 백루찬은 직감했다. 저놈이다.

저놈이… 진마하다.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스트레칭 하듯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시선이 남자를 스쳐 갔다.

저렇게 생겼었던가. 백루찬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진마하의 얼굴은 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잊히는 존재라더니, 그렇게 몇 번이고 부딪치며 싸워 댔는데도 얼굴은 희미한 잔상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기억하려고 해도 놈의 존재는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었고, 차해준이 세계의 기둥에 대해 설명하고, 게이트에 들어와서야 그나마 잔상만이라도 진마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알아보았다. 저 남자가 진마하라는 것을.

조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고, 결 좋은 갈색 머리와 평범한 갈색 눈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얼굴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았다. 자꾸만 인상이 변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백루찬은 처음으로 제대로 ‘인지’한 필요의 아이를 힐끔 쳐다봤다. 진마하는 우아한 손짓으로 수행원들을 물리고, 와인 잔을 들어 입가심했다.

백루찬은 생각했다.

다크썬에서도 아주 제대로 해 먹고 있나 보군.

심상 세계가 섞인 게이트 안이라, 차해준의 말로는 진마하가 백루찬 본인이 겪은 심상 세계처럼 현실에 대한 기억을 못 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대로 진마하는 현실에서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위험한 듯, 하지만 그 누구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런… 기묘한 느낌.

아니 어쩌면 현실에서의 진마하도 저런 모습일 수도. 백루찬은 고개를 돌려 단상을 바라보며 손끝으로 테이블을 느리게 툭, 툭 쳤다. 이제 곧이다. 진마하를 찾았으니, 이제 되찾을 건 차해준이었다. 백루찬은 차해준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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