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유럽의 카페 거리같이 생긴 거리를 걸었다. 하늘 위에도 비슷한 건물들이 불쑥불쑥 솟아 있었다. 눈을 좁혀 그곳의 거리를 확인했더니 거기도 개미 떼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게 다 시스템이 만든 NPC란 말이지.
걸어가면서 백루찬이 물었다.
“그래서 양만철이란 놈을 어떻게 찾을 건데?”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파악하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주소가 박힌 판을 찾았다. 분명히 있을 텐데.
열심히 건물 사이나 문 옆, 혹은 표지판을 찾는데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뭐 찾아?”
백루찬이 흠칫하며 경계하고 나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봤지만 그저 평범하게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일 뿐 말을 건 사람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또 목소리가 들렸다.
“위에.”
고개를 들자, 2층 테라스 난간에 기대 담배를 뻑뻑 피우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랐다.
“우, 우반희?!”
“어, 안녕.”
“뭐야! 너 게이트에 들어온 거야?”
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자 우반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게이트? 난 우반희가 맞지만 여기서 산 지 백 년이 넘었는데. 근데 내 이름 어떻게 알았지?”
“…….”
[급하게 하느라… 여러 각성자의 모습을 가져다 썼어요ㅠㅠ ]
시스템이 불쑥 튀어나와 설명했다. 하 그러니까 지금 저 남자는 우반희이되 우반희가 아니란 얘기였다. 아씨, 진짜 깜짝 놀랐잖아.
그나저나 백 년이라니, 설정 대체 뭐야?
그렇게 생각할 때, 우반희의 모습을 한 NPC가 담배를 뻑뻑 피우며 말했다.
“뭐 찾는 거 같은데. 도와줄까?”
우반희는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덧붙였다.
“왠지 이상하게 너희를 보니까 무척 도와주고 싶은 욕구가 치미네. 뭐지?”
아 저게 시스템이 설정한 건가 보다.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만드는. 이 부분은 마음에 들었다. 백루찬이 눈살을 찌푸리며 우반희를 보다가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할 거냐는 시선이었다.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너무 좋죠! 도와주신다면 감사하게-”
“그래. 뭘 찾아?”
“아 네, 저희는 몰디베리 17번가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도 알 수 있을까요?”
“하?”
우반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는 그것도 모른 채 돌아다녔어? 그렇게 안 생겨서 상당히 멍청한 애들이네. 여행하려면 정신 차리고 움직여야지.”
“아하하….”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우반희는 한심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여기는 루스턴 28번지야. 몰디베리는 가만 보자.”
난간에 기대어 있던 우반희가 그다지 의욕적이지 않은 얼굴로 몸을 쭉 빼고는 저 멀리 한 군데를 가리켰다.
“저쪽으로 5km 정도만 가면 몰디베리가 나오지. 근데 거기 썩 치안이 좋진 않은데. 여행할 거면 그냥 여기서 하지?”
“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
“그래? 뭐 그럼 할 수 없고. 근데….”
“네.”
“너 이름이 뭐야?”
우반희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눈을 껌벅이며 우반희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이름을 물어봐? 옆에 있던 백루찬이 하- 실소하며 내게로 한발 다가왔다.
“차… 해준인데요.”
내 대답에 우반희가 씩 웃으며 새로운 담배를 물었다.
“너 마음에 든다. 거기 네 옆에 있는 놈은 버리고 나랑 어때. 여기 건물 내 소유거든. 재밌는 밤이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허- 참나.”
백루찬이 놈을 째려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야 둘만 남았나 했더니 이젠 게이트 NPC가 난리야. 이건 형이 문제인가?”
“야,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조용히 해요.”
[…현실에서 본 떠 구현한 인물들은 애정도까지 복사된 상태라서 그렇습니다.(◞‸◟;) 클리어런스의 양해를.]
애정도라니…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뭣도 않는 플러팅이 왜 나온 건데. 우반희에게 애정도? 뭐 저놈도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그런 무서운 헛소리할 거면 그냥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그렇게 생각하자 시스템은 떠오르지 않았다. 뭐야, 진짜였냐!
백루찬이 내 팔을 잡아끌며 등을 돌렸다. 녀석은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했나 보다. 내가 우반희를 돌아보자 녀석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할 생각 있으면 와. 난 항상 여기 있으니까.”
“그럴 일 없다고 말해.”
“아-”
“뭐가 아야? 나 버리고 가려고?”
“아니 뭔 소리야. 내가 널 왜 버려.”
“근데 왜 혹하는 얼굴이지?”
“내가 뭘 혹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가기나 해.”
내가 그런 소리 말라는 듯 밀자 백루찬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성큼성큼 나를 끌고 걸었다. 나는 다시 우반희를 돌아보았다. 그는 난간에서 몸을 떼고 우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우반희가 눈썹을 으쓱였다.
그렇게 우반희의 모습을 한 NPC가 알려준 방향으로 우리는 계속 걸어갔다. 지나치는 도시는 여러 모습이 섞여 있었다. 마치 유럽의 거리 같은 모습에서 갑자기 노점상이 나온다든가. 동양풍 양식으로 보이는 기와집이 나온다든가 하는. 그런 제멋대로인 모습이었다. 이번엔 높게 솟은 빌딩들이 있는 곳을 지나쳤다.
계속 건물마다 표시된 주소를 확인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은 어둑해지고 우리는 몰디베리 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그런 거 같은데.”
도착한 곳은 목조건물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2층으로 된 주택은 쓰러질 것처럼 낡아 보였다. 나와 백루찬은 잠시 건물을 살피다가, 문 앞에 있는 오래되어 보이는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띵동-
“…아무도 없는 거 아냐?”
“잘못 왔나?”
그러나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주소를 확인했다. 여기가 맞았다. 몰디베리 17번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누르려고 손을 들었을 때였다. 그때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 낡은 경첩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잡상인 출입금지란 팻말 못 봤나?”
동양인의 남자는 누렇게 변질된 흰 티셔츠를 입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덜 깎아서 덥수룩한 수염에, 얼굴 낯빛은 우중충한 남자였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남자를 보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잡상인은 아니고요. 양만철 씨를 찾으러 왔는데, 혹시 양만철… 씨?”
남자가 인상을 쓰며 나와 백루찬을 번갈아 보더니 쩝 입을 다셨다.
“빚쟁이?”
“아뇨! 우리는,”
아니 뭐라고 말해야 해. 순간 말문이 막혀서 우물쭈물하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양만철이긴 한데… 뭐를 찾으러 오셨소? 아니, 일단…뭐 들어오시오. 얘기나 들어봅시다.”
양만철은 몇 번 쓰읍 하며 고민하더니 문을 활짝 열었다. 아까까진 그렇게 경계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행동이었다. 내가 의아하게 보자 양만철이 말을 덧붙였다.
“거참, 이상하게 도와주고 싶네.”
시스템 덕분이구나. 나는 화색이 된 얼굴로 백루찬의 옆구리를 찔렀다. 들어가자! 하지만 백루찬은 어딘지 찝찝한 얼굴로 양만철을 볼 뿐이었다. 결국 마지못해 내 손에 이끌려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뭐라도 마시겠소?”
“아, 아뇨. 괜찮습니다.”
안은… 마굴이었다. 한마디로 정의가 되었다. 온통 때가 낀 벽지와 먼지 쌓인 가구들. 제멋대로 늘어진 책들, 먹은 음식 봉투와 쓰레기가 가득하다. 바닥은 끈적였고… 형광등 불빛은 노랬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사는 거지. 입을 떡 벌리며 주변을 살피는데, 백루찬이 기겁한 몸짓으로 나한테 딱 붙어 귓가에 속삭였다.
“형, 너무… 끔찍해.”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 이놈 결벽증 있었지. 잊고 있었다. 백루찬에게 이 공간이 얼마나 지옥일지 생각해 봤다. 왠지 놀리고 싶은데, 하지만 여기서 놀렸다간 진짜 벼락 맞을 거 같아 참았다. 발밑으로 바퀴벌레…로 보이는 무언가가 스윽 지나갔다. 백루찬이 그것을 딱 보고 소름 돋는다는 듯 부르르 떨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지금 방금 거 봤어? 나 저놈이랑 눈 마주쳤어. 여긴 아니야. 아닌 거 같아.”
“아냐. 여기 맞아. 좀만 참아봐. 방금 지나간 거 나도 봤는데 그놈 네가 발만 굴러도 죽어.”
“그딴 게 내 구두에 닿을 리가 없잖아!”
“…그래.”
“형이 잡아줘.”
“…하아, 벌레면 뭐…알았어.”
기겁하는 녀석을 붙들고 간신히 달래며 우리는 양만철이 앉으라 권하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도 낡아서 부서질 것 같이 삐거덕거리고 더러웠다. 솔직히 찝찝했지만… 뭐 어쩔 수 없어서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백루찬은 고개를 저으며 소파 뒤에 섰다. 몸에 닿는 것까진 곧 죽어도 허락할 수 없다는 태세였다.
양만철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우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선 먼저 입을 뗐다.
“찾는다는 게 뭐요?”
“사람입니다.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흐음.”
“혹시 진마하라고 아십니까?”
“진마하?”
양만철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는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 새끼를 왜 찾는단 말이오? 혹시 그놈에게 뭐 당하기라도-”
“아뇨.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만.”
“하, 내 이럴 줄 알았지. 거렁뱅이를 거뒀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예? 거렁뱅이요?”
“모르고 나를 찾아온 거요? 진마하 그 자식, 내가 불쌍해서 거둔 부랑자 중 한 명이었소! 그놈이 나를 아주 철저히 망하게 했지!”
“…예?”
아니 이건 또 무슨 설정이야. 당황해서 눈을 꿈벅이자 양만철은 잔뜩 신경질적인 얼굴로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의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 자식,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줬더니 뒤통수를 아주 제대로 쳤지. 사고만 쳐서 돈만 깨지게 만들더니, 결국 어디로 간지 아오?”
“어… 어디로 갔는데요?”
“사우스웬드 조직폭력배! 다크썬에 들어갔단 말이오! 내가 원 쪽팔려서 말을 못 해!”
“다크… 썬이요.”
“그래, 그놈들이 얼마나 악독한 새끼들인데!”
양만철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짜증을 부렸다. 불콰하게 올라온 얼굴은 취기가 묻어 있었다. 나는 백루찬을 돌아보았다. 우리 둘이 눈이 마주쳤다.
“다크썬… 검은해 아니야? 이놈이 여기서도 그런 조직을 만들었다고?”
“그렇게 키워줬는데 나에게 십 원 한 장 보내지 않고 있지! 이 집이 망한 건 그 새끼 탓이야! 거렁뱅이를 주워다 키웠더니, 내가 미쳤지!”
나는 주사를 부리는 건지 말하는 건지 구분할 수 없는 양만철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생각했다.
게이트였지만, 꼭 무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여기저기 문명과 문화가 뒤섞였고 이상한 설정들이 가미되었다. 이게 진마하의 심상이 섞였다는 게… 맞아?
한숨을 삼키고 이마를 부여잡고 백루찬을 쳐다봤다. 백루찬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아, 여기서도 검은해를… 찾아야 하는구나. 진마하를 찾아서 치고받고 싸울 줄 알았는데 하는 건 엉뚱한 사람 찾기였다.
이게… 맞는 건가. 나는 떫은 얼굴로 턱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