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마하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내 허- 하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해준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해 주겠다고. 네가 원하는 거.”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꼭…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하며 쳐다보는 것 같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녀석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기억해.”
“…너.”
“진마하. 나는, 너를 잊지 않아. 그 무수한 회귀 속에서도 내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내 손을 잡아.
홀로 외로워서 견디기 괴롭다면 나는 그렇지 않게 만들어 줄 것이다. 혼자라는 게 얼마나 괴로운 건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진마하가 나에게 동지라 칭했던 것처럼 나는 녀석처럼 선택받아 회귀를 반복하는 삶을 살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으로 오류가 해결된다면 모든 게 끝나지 않을까?
그러면 필요로 태어난 존재도 괴로워하지 않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선택받은 건 순전히 진마하가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세계를 무너트리려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나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너를 위해,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하는 행동.
진마하는 내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진마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전혀 몰랐던 거 같았다. 그리고 갈등하고 있었다.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진마하는 나와 다시 눈을 맞췄다. 그가 말했다.
“너는 모두에게 이런 편이야?”
“…….”
“내가, 지금의 내가 이런 말을 들으면 너를 어떻게 할 줄 알고 쉽게 말하는 건지…. 나는 이해가 안 가, 해준아.”
순간 녀석이 한 발 다가왔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경우의 수를 생각해 이 녀석이 나를 다시 공격한다면… 나는 막을 방법이 없다. 지금 몸 상태로는 공격도 피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나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모든 두려움을 숨긴 채 녀석을 보았다.
“너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며.”
“…….”
“이해해 볼게. 사실 나는…. 네가….”
“내가?”
“…불쌍해.”
진마하의 얼굴이 울컥하듯이 일그러졌다. 진마하는 당황했는지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 표정은 더 슬퍼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보인다.
“너를 알아. 너에게 공감해. 그러니까 내 손을 잡아.”
“해준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내가 해 줄게. 내가 널 봐 줄게.”
시스템은 나에게 세계의 기둥을 구하라고 말했다. 세계의 메인 캐릭터. 주축이 되는 중요한 사람들을 말이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라면, 진마하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힘과 능력을 가진 존재가 과연 아무것도 아닐까? 혹시나, 필요의 아이인 진마하가 메인 캐릭터라면….
그래. 확인을 해 보면 된다.
나는 녀석의 흔들리는 눈을 보다가 슬쩍 웃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녀석에게 말했다.
“나는 차해준이야.”
“…….”
진마하는 나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녀석이 천천히 손을 올려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상상 이상으로 욕심이 많아.”
“…….”
“해준아 너를, 그대로 두지 않을 거란 말이야. 내가 너의 소중한 것을 그냥 둘까? 내가 백루찬이 네 옆에 있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까? 아니, 사이좋게 하하 호호 하는 상상은 버려.”
“…….”
“네가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거. 알겠어?”
진마하의 눈이 기묘하게 번뜩였다. 묻어나는 집착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어우러져서 나를 보는 눈빛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녀석을 보자, 진마하가 손에 힘을 꽉 주며 나를 확 끌어당겼다. 몸이 끌려가면서 녀석이 나를 품에 안고 귀에 속삭였다.
“나는 진마하야, 해준아.”
그 순간이었다.
[메인 캐릭터 ‘진마하’와 각인되었습니다.]
[※각인 주의: 대상의 각인 상대에게 가지는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컨트롤 비정상 확률: 50%]
눈앞에 시스템창이 떴다.
❖ ❖ ❖
송류진은 모르젠트 빌딩 앞에서 내렸다. 저녁 늦게 도착해 이미 어두워진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고 다시 한번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무리하게 일정을 소화한 후 한걸음에 달려온 참이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모르젠트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에 들어 점점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시 자신이 어떤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이상한 생각을 말이다.
이상하게 차해준을 보면, 어떠한 감정이 가슴팍에서 줄줄 새어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벅차서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그 감정은 툭 터질 것처럼 커졌다가 이내 괴로울 정도로 큰 슬픔으로 변해서 자신을 짓눌렀다.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요즘 들어 자꾸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한 소년이 나왔다. 눈 오는 날 홀로 서서 추위에 벌게진 손을 한 남자애가.
얼굴은 마치 도려낸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그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괴로웠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하면 아이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 남자의 뒷모습을 보여 줬다. 그 남자는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자신은 잡기 위해 뛰어간다. 하지만 끝끝내 남자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눈을 뜨면 이상하게 차해준과 그 남자가 겹쳐 보였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기억에도 없는 사람이 꼭… 차해준인 것처럼.
우리가 오랫동안 알아 왔던 사이였던 것처럼.
그 기시감은 사라지지 않고 내내 송류진을 괴롭혔다. 송류진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빌딩을 올려다보다가, 깊게 숨을 내쉬고 안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병동이 있는 층에서 내렸다. 병동의 복도는 한산했다.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가 무어라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송류진은 가볍게 묵례하며 그들을 지나쳐 차해준의 병실로 향했다.
“어, 저기-”
다른 동료와 얘기하던 간호사가 뒤늦게 송류진을 인지하고 그를 부르기 위해 손을 드는 순간이었다.
그 앞으로 불쑥 나타난 백루찬이 간호사를 지나쳐 송류진의 뒤를 쫓았다.
송류진은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뒤를 돌아보았다. 백루찬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송류진은 잠깐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조용히 만나고 가려고 했는데, 역시 모르젠트 안에서 백루찬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아무런 말 없이 쳐다보는 눈빛이 따갑게 자신을 찔러 왔다. 송류진은 큼 헛기침을 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잠깐 차해준 씨를 보러-.”
“…만나는 것까지 막진 않죠. 꽤 늦은 시간에 오셨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잠시만 뵙고 가겠습니다.”
“네… 뭐. 근데.”
몸을 돌리려는 송류진을 보며 백루찬이 애매한 얼굴로 말을 줄였다. 송류진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그를 돌아봤다. 백루찬은 건조하게 웃었다.
“그런 표정으로는 안 돼.”
“…무슨 뜻입니까.”
백루찬이 한 발 다가와 가까이 서서 송류진을 응시했다.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었다. 백루찬은 결국 못 만날 거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송류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당신과 내가 무슨 사연으로 얽혀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얼굴 말이야.”
“…네?”
“내가 분명 저번에 경고했을 텐데. 간섭하지 말라고.”
“…백루찬 씨, 무례하십니다. 지금 해준 씨가 당신의 소유물이라도 됩니까?”
백루찬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여전히 못 알아듣는 편이구나.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그의 말에 송류진이 흠칫하며 굳어서 백루찬을 바라보았다. 저번에도 백루찬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를… 놓친 것처럼. 잃어버린 것처럼.
백루찬은 서늘한 조소가 어린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무례하다니, 정중하게 말할게요. 아무것도 모르면, 더 이상 다가가지 마세요. 나는 나름 페어플레이 했는데, 먼저 걷어찬 건 당신이거든.”
“…무엇을 알고 있는 겁니까.”
“글쎄. 내가 무엇을 알고 있으려나. 아, 한 가지는 아는데.”
백루찬의 웃던 얼굴이 다시 천천히 굳어졌다. 냉기 어린 시선이 송류진에게 꽂혀 들었다.
“송류진 씨에게 허락한 건 맴도는 것뿐이라고 말한 내 기억.”
“…….”
“그런데 이제 좀 눈에 거슬려요. 다가가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형이 착해서 다 받아 주지만… 당신 좀 너무했잖아?”
“…무슨.”
그때 백루찬의 뒤로 간호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간호사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더니, 백루찬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순순히 그의 말을 들어 주던 백루찬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일그러졌다. 그는 송류진을 제치고 차해준의 병실 앞으로 가 문을 쾅- 열어젖혔다.
당황해 그를 말리러 쫓아간 송류진은 아무도 없는 빈 병실을 보고 다시 백루찬을 돌아보았다.
“차해준 씨가 어디로 간 겁니까?”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백루찬은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