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75)화 (172/201)

나는 굳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으로 나를 보고 있는 송류진의 얼굴이 비쳤다.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이다. 그리고 자신이 돕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진짜 거하게 땅을 팠나 보네. 하여간… 너무 착해도 문제다. 송류진이 할 일을 안 한 것도 아니고. 그 또한 게이트 밖에서 고군분투하며 각본에서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했을 것이다.

이렇게 상황이 만들어진 건 다 진마하가 의도했기 때문이었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탓할 거라면 진마하를 탓해야 했다. 무의미한 희생이 일어난 건 그놈이 벌인 짓 때문이니까. 나는 일부러 입꼬리를 올리며 돌아서 창가에 기대앉았다.

“왜 그런 얼굴이에요.”

“…아뇨. 그냥….”

“병문안 와서 죽상으로 있으면 환자 더 아픈데.”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괜찮으니까 얼굴 폅시다. 바탈 보세요. 사람이 얼마나 밝아.”

“오우 허니, 나 칭찬하는 거?”

바탈이 히죽대며 나를 쳐다보았다. 장난스럽게 말해도 송류진의 굳은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쉬고 나를 쳐다봤다. 나를 보는 눈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잔뜩 얽혀 있었다. 송류진은 힘없는 조소를 지었다.

“다만… 제 마음이.”

“…….”

“당신이 이렇게 다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함이… 너무 끔찍하네요.”

“…류진 씨.”

“그래서 화가 납니다. 저 자신한테. 자꾸만… 손도 내밀 수 없도록….”

“우리 각본 황태자님께서는 감수성이 여려서 문제야. 그렇지 않아, 형?”

그때 그의 말을 툭 끊으며 백루찬이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왔다. 송류진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타이밍도 참…. 백루찬은 소파에 둘러앉은 송류진과 바탈을 흘겨보더니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에 팔을 두르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이미 그렇게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 송류진 씨, 괜찮아요. 내가 형 옆에 있을 거니까.”

“…….”

어깨에 머리를 기댄 백루찬이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었다. 어쩐지 경계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두 사내의 시선이 마주쳤다. 굳은 시선들이 오고 가는데, 무슨 기 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아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봤다.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된 기분인데….

“하하, 뭐… 아무튼, 루찬이 너 몸은 어떤데. 검사 잘 받고 왔어?”

내가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말을 돌리자, 백루찬이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또 나를 꽉 끌어안았다. 왜 자꾸 이렇게 엉겨 붙어, 숨 막히게.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는 녀석을 차마 밀어내진 못하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백루찬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능력이 과하게 흘러나와서 다친 거라 애초에 큰 문제도 아니었어요.”

“야, 그게 뭐가 큰 문제가 아니야. 무리했다는 얘기잖아.”

“나보다 형을 더 걱정해. 그냥 겉에 상처 좀 입은 사람이랑 칼에 뚫려서 속까지 진창 뒤집힌 사람이랑 누가 더 문제 같아?”

거기서 할 말이 사라졌다. 입을 다물자 백루찬이 어딘지 한심해하는 얼굴로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진짜 이길 수가 없네.

머쓱해져서 조용히 있자니 바탈이 벌떡 일어나 송류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송류진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휴, 우리 허니를 더 간호하고 싶지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 버렸네~. 각본하고 시당 5동 게이트에 대해 회의하기로 했었는데.”

“아 바탈 씨, 그건-”

“그치, 그치, 미스터 송. 우리 아주 바빠. 시간이 없어.”

바탈이 시계도 안 찬 손목을 탁탁 치며 송류진을 끌고 문으로 향했다. 시당 5동? 신당 5동 게이트면 닫히지 않는 게이트 말하는 거다. 하씨, 그 문제도 있었지. 순간 잊고 있었던 게 떠올라서 나는 이마를 잡았다.

“바탈, 그거 나도 갈-”

“잘 가요~”

바탈을 잡으려 움직이자 백루찬이 나를 꼭 끌어안고 선수 쳐서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어이없다는 눈으로 백루찬을 쳐다봤다. 바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씩 웃고는 송류진을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그가 마지못해 바탈을 따라가며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난 백루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야, 중요한 일인데 왜 그래?”

“형 혼자 다 안 한다며.”

“뭐?”

“분담. 모르젠트가 검은해를 맞은 격이 되었으니, 남은 사람들이 신당 5동 게이트를 처리하는 게 분담이지. 형이 한 말도 잊었어요?”

“아니 그래도… 게이트 어차피 내가 들어가야 하는데.”

닫히지 않는 게이트는 첫 출입자가 아니면 열리지 않는다. 이왕이면 지금부터 같이 움직이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백루찬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혀를 찼다.

“이러니까 문제야. 자기가 빠지면 무슨 일이든 안 돌아가는 줄 아는 거. 회의 정도는 알아서 하라고 해요.”

“아니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내 말 들어. 눕기나 해요. 아니, 이참에 둘만 남았으니….”

갑자기 백루찬이 말하다 말고 그윽하게 나를 쳐다본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백루찬은 나를 침대에 앉히더니 자기도 옆에 앉고서 슬쩍 몸을 붙여 온다. 고개를 들이미는 것에 기가 찼다. 이 자식이 은근슬쩍….

나는 그대로 입을 맞추려는 듯 고개를 내미는 녀석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턱 가로막았다.

“진짜 쉴 테니까 너도 가서 쉬어라.”

“난 형 옆에 있는 게 쉬는 건데.”

“지랄 그만하고.”

“냉정하게 굴 거야?”

“이게 한 번 허락했다고 두 번도 프리 패스인 줄 아나.”

“아니었어?”

“윽, 백루찬, 떨어져!”

백루찬이 내 어깨를 확 밀며 침대에 눕히고 내 위에 올라탔다. 버둥거렸지만 녀석이 꽉 끌어안는 바람에 꼼짝없이 붙잡혔다.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면서 피했지만 백루찬이 턱을 꽉 잡고 춥 하며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 에휴, 어리광이 왜 는 거 같지. 뭐 이해는 한다만….

결국 나는 몸에서 힘을 빼고 백루찬을 꽉 끌어안고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들러붙은 체온 덕분에 몸이 더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 ❖ ❖

송류진과 바탈이 병문안을 온 뒤엔 한솔이와 새벽이, 그리고 정희수가 찾아왔다. 희수는 꽤 밝은 얼굴이었는데, 각성하고 자신이 사람들을 지켰다는 것에 무척이나 자부심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이게 다 형 덕분이에요.”

“내가 뭘 했다고.”

“형이 아니었으면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옆에서 보고 배운 게 있었으니까, 형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 많이 했어요. 형이라면, 분명 포기하지 않고 지켜 냈을 테니까.”

나는 씩 웃고 말았다. 그건 정희수가 정의감 넘치고 착한 사람이어서지 나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반짝이는 눈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정희수를 보고 아니라고 내빼기는 좀 그래서 나는 대신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장한 놈. 장하다, 내 새끼. 한솔이도 내 새끼니까, 희수도 내 새끼 맞다.

기특한 녀석을 보며 웃자 한솔이가 내 품에 폭 안겨서 한참 동안 고개를 묻고 있었다. 한솔이는 아직 어리니까 그때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려 주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자기 형이 각성해서 사람들을 지킨 일에 뿌듯해하다가도 내가 자신의 연락에 다쳤다는 것에 몹시 슬퍼했다.

열심히 한솔이를 달래 주고, 아무 힘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는 새벽이도 열심히 달래 주었다. 어린애들이 뭔 생각이 이렇게 많아서.

그래도 나를 걱정해 준다는 것이 참 좋긴 했다. 앞으로도… 절대 잃지 말아야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모두가 돌아가고 저녁이 되었다. 특급으로 배식된 병원 밥을 백루찬의 감시 아래 싹싹 비우고, 드디어 혼자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며 세상을 더욱 어둡게 물들였다.

오늘 하루 종일 해가 뜨지 않은 것 같네. 나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슬리퍼를 신고 창문 앞에 섰다. 모르젠트 빌딩 앞에서 죽치고 있던 기자들도 다들 물러간 거 같았다. 야경이 번쩍이는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

자꾸만 꿈꾸는 것처럼 엿보았던 진마하가 떠오른다. 경고 문구로 가득 차서 살벌하고 어두운 그 공간에 홀로 있던 진마하가.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나는 버틸 수 있었을까. 괜히 쓸데없는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불쌍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괜스레 안쓰러운 감정이 몰려온다. 홀로 감당하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면서, 사람들에게 잊히면서 진마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낸 것일까.

그 진득한 외로움에 공감이 가 버렸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박복한 집안 환경과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던 그런 삶을 살면서 회귀를 반복해 왔다. 현실을 버티지 못해 꿈으로 도망칠 만큼 나는 괴로웠다. 짊어진 것이 너무 무거워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시스템은 말했다. 만약 오류를 바로잡는 데 실패한다면, 나는 여전히 회귀를…. 씁. 자꾸 생각이 우울해지네. 머리를 흔들고 정신을 부여잡았다.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면 되는 거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여러 고민을 하며 창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우산을 쓰고 빌딩 앞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 중 유독 검은 우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산의 주인은 빌딩 앞에 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서 그를 보다가 이제 그만 다시 침대에 누우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우산을 든 사람이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 멈춰 서 굳고 말았다. 스쳐 가듯 지나간 시선이 도로 그 사람에게 꽂혀 들었다.

우산을 쓴 채 빌딩 위를 올려다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진마하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파리한 얼굴과 눈이 마주친 듯했다. 나는 굳은 채로 멈춰 서서 놈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굳은 얼굴. 빌딩의 조명 사이로 놈이 피투성이인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위로 걸친 코트도 군데군데 타들어 가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이상하다고 쳐다보지 않는다.

진마하는 혼자 있었다. 모든 사람 사이에서 혼자.

나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진마하는 표정 없는 얼굴로 빌딩을 올려다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진마하는 가만히 서서 나를 잠시 동안 보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검은 우산을 쓴 진마하가 사람들 틈으로 사라진다. 나는 다급하게 의자에 걸쳐 놓았던 카디건을 챙겨 입고 혹시 몰라 내 호출기를 챙겨서 병실을 뛰쳐나갔다. 진마하를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