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74)화 (199/201)

눈앞이 어두웠다. 나는 무중력 상태로 우주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 저 멀리서 빛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가 보고 싶다는 마음에 발을 내딛자 다행히 걷는 게 가능했다. 어느덧 빛 앞으로 도착한 순간이었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이제 저 앞으로 나갈 수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경고!]

[ERROR! ERROR!]

붉은색으로 뜨는 글씨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방을 감쌌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러라고? 무엇이?

사방으로 퍼지는 에러 글자를 보며 당황한 나머지 등을 돌렸다. 그러자 온통 붉은 글씨로 가득 찬 공간에 다른 남자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우주 공간같이 붕 떠 있던 곳은 어느새 남자를 중심으로 바닥이 생겨 있었다. 남자는 피투성이로 널브러져서 끊어질 듯 약한 숨을 간신히 몰아쉬고 있었다. 안쓰럽게 꿈틀거리는 남자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절로 인상이 써졌다.

그가 누군지 알았다. 그놈이다. 세계의 오류, 진마하.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정신 나갈 것같이 사방을 뒤엎은 에러 문구가 발에 밟혀 바스러졌다. 흩어지는 가루 같은 것을 내려다보고, 나는 다시 녀석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서자 창백하게 질린 진마하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느리게 눈을 끔벅이면서 내가 아닌 허공을 보고 있었다. 오드아이로 빛났던 두 눈은 공허했고, 멍하니 벌린 입술은 다 부르터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응시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이상하지. 이놈은 못된 놈인데. 살인자에, 방관자에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그때 진마하가 마치 나에게 내미는 것처럼 앞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필요의 아이라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진마하가 허탈하게 웃었다. 온통 검고, 붉은 글씨로 가득 찬 세상. 이건 혹시 진마하가 보고 있는 세상인가.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 다시 진마하를 바라봤다.

“세계가 나를 삼키려 해….”

진마하가 중얼거렸다. 그는 몹시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세계가 나를…….”

나는 한없이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마른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왜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거야. 자초한 일이잖아. 처음부터, 네가-.

“…외로워.”

허공에 뻗었던 진마하의 손이 툭 떨어졌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놈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멍하니 굳은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왜, 왜 너는…. 생각조차 이어지지 않는다. 순간 가슴이 그냥 너무 아파서, 욱신거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입을 다물고 신음을 삼켰다. 빌어먹을 자식, 왜 이렇게, 왜… 왜!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수그린 순간이었다. 귓가로 삑-삑- 하는 일정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있던 세상이 뒤집어졌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하얀 천장이 먼저 보였다. 언제 옮겨졌는지, 나는 병동에 누워 있었다. 일정하게 울리는 바이탈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옆에는 환자복을 입은 백루찬이 링거가 꽂아진 내 손끝에만 슬쩍 닿도록 손을 잡고는 팔을 괴고 잠들어 있었다.

아… 살았구나.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모르젠트의 힐러들이 실력이 참 좋다. 복부에서부터 올라왔던 고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그것만으로도 잠시 힘들어서 숨을 가누어 쉬었다. 확실히 이번엔 좀 심각하게 다치긴 했다. 손가락을 움찔대며 칼에 찔렸던 곳을 더듬어 보다가 붕대도 감겨 있지 않고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 손을 내렸다.

나는 쌕쌕거리며 잠든 백루찬을 가만히 바라봤다. 흔들리는 백금발과 감긴 눈꺼풀에 촘촘히 박힌 속눈썹을 구경했다. 뺨에 상처가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백루찬은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것인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하… 이거 뭐야. 왜 다친 거야.

걱정스러워 조심스럽게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감기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잠든 백루찬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여전히 참 잘생긴 놈이야.

괜히 감탄이 나왔다. 이 귀한 몸이 이렇게 다치다니, 괜히 내가 제대로 해결 보지 못한 탓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좀 더 강하게 나갔어야 했는데, 진마하 그놈의 말을 듣다 보니….

침울한 기분으로 다시 생각에 잠겼다. 방금 내가 본 것은 꿈이었을까, 아니면 진마하의 현재였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온통 에러로 뜬 사방에 홀로 있는 건 미치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마하는 계속 그런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자신이 자초한 거지. 나는 쓰게 웃었다. 본인이 자초한 거다. 하지만, 하지만….

“왜 멈춰, 형.”

그때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백루찬을 쳐다봤다.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뜬 백루찬이 제 머리 위에 올려진 내 손을 붙잡아 깍지를 끼었다. 고개를 드니, 뺨에 붙인 화상 밴드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너….”

말을 하려다 보니 목구멍이 턱 막혀 쿨럭 기침이 나왔다. 하, 며칠을 누워 있었길래 이러냐…. 가만히 목을 매만지자 백루찬이 벌떡 몸을 일으켜 내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요?”

다급하게 나를 살펴보는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옅게 웃었다. 다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괜찮아, 인마. 너야말로 이게 뭐야.”

다친 얼굴에 온몸에도 붕대를 칭칭 감고선. 대체 이게 뭐야.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서, 눈썹을 한껏 찡그리며 백루찬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백루찬이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에 제 뺨을 비빈다. 나는 약간 울컥하고 말았다.

하, 진짜 마음 아프게. 얼굴이 제일 봐 줄 만한 놈이 얼굴을 다치면 어쩌자는 건데.

“형이 얼마나 위급했는지 알면, 나한테 뭐라 못 할 거야.”

백루찬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불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심했었냐…. 근데 지금 보니 꼴은 네가 더 심한 거 같은데.

뭐라 말을 못 하고 눈만 껌벅거리자, 백루찬이 내 손목을 꽉 붙잡고 손바닥에 입을 가져다 댔다. 연신 춥춥 키스해대니 살갗이 간지러웠다.

“뭐 해.”

민망하기도 해서 손을 떼자, 백루찬이 이번에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녀석은 한참 동안 나를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나도 따듯하게 다가오는 녀석의 온기와 풍기는 은은한 샴푸 냄새, 백루찬의 체향에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 같아서 얌전히 안겼다.

“루찬아, 괜찮은 거 맞지?”

그러고 한참 있다가, 백루찬에게 물었다. 다친 게 너무 걱정되기도 하고… 여러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정희수는 괜찮은지, 다른 생존자들은… 무사한 건지. 백루찬은 똑똑하게 내 말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형이 제일 문제였어.”

“무사하니까… 나는 이제 괜찮은 거 같아.”

“바보 같은 인간.”

“야, 아픈 사람 욕하는 거 아니야.”

“못된 남자.”

“너는 아닌 거 같지?”

“진짜 못된….”

백루찬이 다시 나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웅얼거리며 고개를 묻었다. 녀석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슬그머니 나를 도로 눕혔다. 내 위를 차지한 백루찬의 표정을 보고, 나는 녀석을 밀치지도 못했다.

“…교활해.”

“이제 안 거야?”

울 듯이 쳐다보는 눈이, 너무 안타까워서. 백루찬답지 않아서 한편으로는 또 당황스러웠다. 백루찬이 조심스럽게 내 뺨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스치고 부르튼 입술이 겹쳐졌다. 혀끝이 파고들며 입 안을 훑어 내렸다.

지나치게 깊은 키스였다. 딥하게 느껴지는 건, 백루찬의 처절했던 심정. 나는 백루찬을 끌어안았다.

“하나도 놓칠 수 없어.”

입술을 뗀 백루찬이 금방이라도 다시 키스할 것처럼 바짝 붙어서 중얼거렸다.

“절대로 놓지 않아. 하나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

설령 신이라고 해도.

집착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백루찬은 다시 입술을 겹쳐 오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정말로, 절대 놓치지 않을 사람처럼.

❖ ❖ ❖

창문 밖으로 비가 계속 온다. 장마 기간이라 그런지 정오가 훨씬 지난 한낮인데도 하늘이 어두웠다.

“아직도 밖에 기자들 쫙 깔려 있는 거 알아요?”

“그래, 허니. 절대 나갈 생각 no, no.”

“이 몸으로 어딜 나가.”

“지금 눈빛, 아주 수상했어. 밖으로 절대 못 나가. 내가 막을 거야.”

병문안을 온 송류진과 바탈이 병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바탈이 강경하게 손을 엑스 자로 그으며 소리쳤다. 아직도 뼈마디가 쑤시는데 가긴 어딜 가. 자꾸 창밖만 보아도 저렇게 말하는 것이 웃겼다. 나는 피식 웃었다.

“할 일 없냐. 여기 와서 죽치고 있게.”

“허니를 간호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지.”

바탈이 아주 결연하게 말했다. 그 옆에서 송류진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진중한 얼굴에 수심이 그득하다. 짜식, 또 혼자 땅 팠냐.

“길드장도 그렇고, 많이 다쳤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아요. 모르젠트 힐러들이 진짜 힘을 다해 줘서. 루찬이는 화상을 좀 입었는데, 피부가 약해져서 붕대를 감고 있는 거라 하더라고요. 금방 풀 겁니다.”

“다행…입니다.”

지금 백루찬은 화상 입었던 곳을 살펴보러 잠시 병실을 나갔다. 하도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홍희가 아주 귀청이 떨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나도 같이 가서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의사들이 아직은 절대 안정이라고 하도 말리는 바람에 같이 가지 못했다. 송류진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는 고민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깍지 낀 채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다시 되묻기엔 미안하지만, 두 분, 누구와… 싸웠던 겁니까?”

“…예상했을 텐데.”

“정말 그자가 그렇게….”

송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마하. 검은해의 교주. 설마 나와 백루찬이 심하게 다칠 정도로 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경고했었다. 놈은 게이트를 열고, 정신을 세뇌시키고, 분신을 꺼내 싸울 수 있었다. 그놈은 무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와 백루찬이 거하게 한 방 먹였지만, 솔직히 죽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루찬은 끝냈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진마하는 끝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