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짤막하게 대답하며 검을 휘둘렀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오류를 해결하고, 세계를 지키고, 세계의 간섭을 막기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일 뿐이다.
녀석이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진마하에겐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누군가는 해야 했고, 그게 내가 된 것뿐이었다.
진마하가 우뚝 멈춰 섰다.
“하하, 진짜….”
휘둘러진 내 검을 살짝 비껴간 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곤 이내 표정을 굳혔다.
“재수 없어, 차해준.”
왜, 설마 네 말에 공감하고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냐! 녀석은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녀석의 손에서 새파란 검기가 퍼졌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어쩐지 평소 내가 쓰던 검기와 닮아 있는 공격이었다. 반달형 검기가 나를 향해 쇄도한다.
간신히 몸을 틀어 피하자 이번엔 눈앞까지 훅 다가온 녀석이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이었다. 녀석이 갑자기 삐끗하며 비틀거렸다. 진마하도 당황한 듯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대로 녀석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놈은 여태껏 잘 피하던 내 공격에 맥없이 날아가 지하철 구석에 처박혔다.
- 쿠당탕탕!
“쿨럭…!”
진마하가 상체를 숙이며 피를 토해 냈다. 그때였다. 눈앞에 그토록 기다리던 시스템이 떠올랐다.
[진마하의 시스템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차원 간섭이 튕김과 동시에 구현된 육체가 깨지고 있습니다. 이때예요. 클리어런스! 오류를 바로잡으세요!]
기회다. 나는 눈을 빛냈다.
❖ ❖ ❖
백루찬은 정신이 없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떻게 이 역 앞까지 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차해준.
“백루찬…!”
“백루찬! 여기 좀 봐 주세요!”
“길드장님! 지금 사태에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각본의 바리케이드에 떠밀린 기자들이 아우성치며 그를 불러 댔다.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졌다. 환자 이송을 기다리던 응급대원들도 멍하니 옆을 지나치는 백루찬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그 무엇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무심한 얼굴로 사람들을 지나쳤다.
그의 눈앞엔 전투를 치른 흔적이 있는 대여섯 명의 요원들이 우반희와 무어라 얘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꽤 떨어진 거리였으나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안에 혼자 남았습니다. 독 안개가 깔려 있어서 일반 요원으로는 무리입니다. 길드 쪽에 요청하는 것이.”
“지금 모인 놈들이나 길드 중에 광덕역 안의 몬스터를 감당할 만한 곳이 없어. 게이트 측정도 A급 이상으로 확인된다. 우리가 해결해야 돼. 지금 골든 타임 끝나면 더 이상 생존자를 기대하기 어렵다. 기다릴 수 없어.”
작전팀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떠들었다.
“안 됩니다. 감당 못 해요! 생존자 없습니다! 제가 보고 왔어요. 저 안에 열린 게이트가 하나가 아닙니다. 몬스터 개체가 달랐어요.”
“그래서 엉? 지금 팀장 말은 어쩌자는 거야. 이대로 손 놓고 구경하자는 거야, 뭐 하자는 거야.”
“구경이 아니라 기다리자는 겁니다! 그 남자가 나섰어요, 우린 벌써 세 명이나 잃었습니다.”
“…그게 각본으로서 할 말이냐?”
“뭐가 문제입니까! 도와준다는데! 알아서 하겠다고 먼저 보낸 것도 그 남잡니다! 버틸 수 있는 것도 그 남자고!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 걸 어떻게 밀어붙입니까!”
“야, 김재혁, 그걸 지금 말이라고-”
“다 죽는다고요, 여기 봉쇄해야 합니다! 안에 아무도 살아 있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했어요?”
작전팀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할 때였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우반희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온 건지 백루찬이 그들 뒤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살기 어린 시선이 팀장에게 꽂혀 있었다.
“아… 그, 그러니까.”
작전팀장이 당황해서 주춤하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백루찬은 그에게 다가가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아무도 살아 있지가 않다고요? 그래서 포기하겠다?”
“야. 모르젠트 길드장, 일단 진정 좀 해. 넌 또 왜 이렇게 흥분했어.”
“한 명이 혼자 남아서 다들 올라가라 했다고, 쪼르륵 피해서 도망쳐 올라와 놓곤 하는 말이 봉쇄하자고요? 생존할 가망 없을 테니 가둬 놓고 죽이자.”
백루찬이 작전팀장의 멱살을 낚아챘다. 우반희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백루찬의 눈에서 금빛 안광이 서슬 퍼렇게 터졌다. 그 시선을 마주한 작전팀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저 안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 두자고… 너 따위가 지금-”
“백루찬.”
작전팀장의 멱살을 잡은 손에서 지지직 하며 전류가 휘감겼다. 발끝에서 사방으로 뻗치는 전류에 우반희는 급히 백루찬을 잡아당겨 자신을 보게 했다.
“내가 잘못 교육시켜서 그래. 용서해라. 일단 급한 건 다른 거잖아. 정신 차려.”
“…….”
서슬 퍼런 눈으로 우반희를 노려보던 백루찬은 잡았던 멱살을 던지듯 놓았다. 작전팀장이 뒤로 넘어지며 쿨럭거렸다. S급의 살기를 정면으로 마주치니 다리에서 절로 힘이 풀린 것이다. 백루찬은 그대로 광덕역 입구로 향했다.
머릿속이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작전팀장이 떠든 말이 자꾸 엉켜서, 메아리처럼 울려 댔다. 혼자서, 나머지를 다 올려 보내고…. 생존자는 없다….
형은, 진짜 너무해. 자꾸 나를….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루찬! 야! 기다려! 아직-.”
“필요 없어. 내가 갈 거니까.”
우반희가 성큼성큼 돌진하는 백루찬을 막아서며 붙잡았지만, 되레 그는 그 손길을 쳐 냈다.
“어쩌려고.”
“어쩌긴.”
백루찬의 걸음걸음마다 금빛 전류가 뱀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다 죽여 버려야지.”
그리고 차해준을 구해 낼 것이다. 이번에는 절대로 잃을 수 없었다.
❖ ❖ ❖
나는 옆으로 반 바퀴 몸을 돌리며 반동을 이용해 검을 후려쳤다.
카캉!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진마하는 쓰러진 몬스터의 검을 들고 나와 대치하고 있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갔지만, 녀석은 내 공격에 밀리고 있었다. 권한이 축소되면서 육체가 깨지고 있다고 말했듯이, 녀석은 지금 나에게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칼에 찔린 공격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앞이 흐릿했다.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고르며 녀석에게 다시 쇄도해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머리 위로 뇌격을 닮은 일직선의 선이 떨어졌다. 검기다.
“…!”
나는 이를 악물고 열린 지하철 옆문으로 몸을 날렸다. 스크린 도어를 깨고 그대로 플랫폼 바닥을 굴렀다가 일어났다. 진마하가 천천히 걸어서 지하철에서 나왔다.
“정 떨어지게 말하면 내가 슬퍼.”
“슬플 것도 많다. 빌어먹을 자식아…!”
진마하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플랫폼 사방에 녀석의 분신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하나, 둘, 셋… 네 명이다. 진마하의 분신 모두가 본체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하며 손목을 돌렸다. 검날에 묻은 피가 흩날렸다.
“이해와 공감, 그렇게 잘만 해 주던 사람이 나에게만 냉정하니까 화가 나잖아. 뭐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 거야? 근게 그게 왜 나였어야 해. 왜 나는 그래야 됐는데? 왜 너조차 나를…. 이해하지 않아?”
진마하는 혼자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분신들과 함께 동시에 짓쳐 들며 공격해 왔다.
“윽!”
바로 앞에서 목을 노린 공격을 피했지만, 제대로 피하지 못해 뺨이 긁혔다. 고개를 숙여 앞으로 몸을 날리자 다른 분신이 부딪쳐 온다.
카앙- 캉!
검을 튕겨 냈지만 상체를 베였다. 그 순간 내 뒤를 선점한 놈이 검을 휘두른다. 하, 씨 진짜…! 깨진 육체라고 시스템이 떠들었지만 진마하는 여전히 강했다. 공격을 피할 수 없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자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콰지직!
마른 천장에서 노란 번개가 떨어져 내 주변에 붙은 분신들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번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백루찬이 왔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놈이 내가 뽑아내던 검기를 흉내 내 날렸다. 바람의 칼날처럼 나에게 쇄도하는 그것들을 하나씩 쳐 내자 분신이 코앞까지 짓쳐 들었다. 나는 검을 들어 내려치는 녀석의 검을 막았다.
캉!
“큭…!”
분신과 검을 맞대며 뒤로 밀렸다. 그리고 다시 천장에서 전류가 일렁이는 순간이었다. 분신 뒤의 진마하가 땅에서 솟아오르듯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분신을 찔렀다. 그 검은….
- 푸욱.
내 복부에도 틀어박혔다.
“아까부터 말했는데.”
몹쓸 진마하가 중얼거렸다.
“자꾸 방심하네.”
나는 그대로 뒤로 밀리며 넘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계단 쪽에서 달려오는 백루찬이 보였다. 녀석의 얼굴이… 말이 아니다. 하얗게 질려서는. 나는 흐릿한 시야로 녀석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하, 미친 진짜 너무 아프다. 몇 번이고 다쳐 보았지만 이놈의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진마하는 검을 더 깊숙이 꽂아 넣으며 나를 끌어안듯이 가까이 붙었다. 고개 옆으로 진마하의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쓸었다. 녀석은 복부에 꽂아 넣은 칼을 비틀면서 웃었다.
“사랑하는 동지, 나와 함께 가자.”
이제 더는 혼자선 외로워 미칠 것 같거든.
나는 쿨럭이며 피를 토해 냈다. 머리 위로 사방을 밝히는 전류가 일렁이며 터졌다. 백루찬이 나를 불렀지만, 목구멍으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륵 하며 핏물이 올라온다. 진마하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차해준!”
인마… 늦게도 부른다. 정신이 순식간에 아웃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