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68)화 (166/201)

검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주변에 몬스터들이 쌓였다. 나는 플랫폼 중앙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계속 걸어 들어갔다. 

-크어어!

숨어 있던 몬스터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한 마리씩 덤벼들었다. 다가오는 것들을 베어 넘기며 혹시나 있을 생존자를 찾았으나, 긴 지하철 통로에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몬스터들에게 자극이 될까 걱정된 나는 발소리조차 죽이고 움직였다.

출구들은 대부분 막혀 있는 데다, 스크린 도어마저 닫혀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중간부터는 사방에 핏자국이 낭자했고, 날카로운 유리 잔해들이 다양했다.

널브러진 시체들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고, 그 잔혹한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움직였다.

분명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정희수도 거기 있을 거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방에서 악취가 풍긴다. 썩은 내가 풍기는 역사 안은 어둠 속인데도 흐릿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게 뭐지. 불이 난 건 아닌 거 같았는데. 안개 낀 것처럼 이상했다.

중간 정도 왔을 때 열차 끝부분을 발견했다. 창문이 깨진 열차 안엔 시체를 뜯어 먹는 몬스터가 고개를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노란 눈. 입가에 덕지덕지 묻은 살점과 피. 놈이 이를 드러낸다.

“X발….”

욕이 튀어나왔다. 그대로 한야를 던져 놈의 목을 찌르고 나는 열린 스크린 도어를 넘어가 열차 안으로 진입해 놈의 목을 잘랐다.

- 크르륵!

피 끓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가 죽었다. 열차의 전등이 깜박거리며 켜졌다 꺼지길 반복했다. 칸마다 중간 문이 열려 있었다. 즐비한 시체에 울컥하는 기분이었지만, 일단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앞부분으로 가까워질수록 몬스터가 몰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 케에엑!

검은 두건을 쓴 몬스터 서너 명이 내 인기척에 등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놈들이 나에게 덤벼들기 전 먼저 그들 사이로 뛰어 들었다.

[그림자 밟기(Lv.99)]

순식간에 한 칸에 있던 모든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검을 털며 바로 서자 저 앞에서 이번엔 아까 봤던 것보다 꽤 큰 빛이 일렁이며 확 퍼졌다.

각성자가 있는 건가? 생존자? 빠르게 그쪽을 향해 가까워질수록 빛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였다. 그건 새하얀 방패였다. 반투명한!

“희수야!”

그 앞에 서 있는 녀석의 얼굴을 발견하자 소리쳤다. 그러자 앞을 경계하고 있던 정희수가 휙 고개를 들더니 이내 화색을 띤 얼굴로 답했다.

“해준 형!”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어!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그대로 달려가 녀석을 꽉 끌어안았다. 나인 것을 보자마자 방패를 해제한 녀석은 살짝 놀란 듯 멈칫했다가 이내 마주 껴안아 주었다.

“네가 한 거냐, 하아. 진짜 잘했어, 잘 버텼어…!”

“형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감격의 상봉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나는 녀석이 멀쩡한지 얼굴을 살펴보고 몸을 살펴봤다. 녀석도 나도 피투성이였다. 그것이 몬스터의 피라는 것을 확인한 녀석과 나는 서로 안도했다.

“형 뒤에 칸부터 사람들 있어요.”

“여기 모여 있었구나.”

빼곡하게 들어찬,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희수 뒤에서 느껴졌다. 생존자들이 많았다. 각본 말대로 진짜 포기했더라면 더 큰일 날 뻔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들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이제 좀 안심이 되네요. 하….”

정희수가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위에 각본도 와 있고, 길드도 여럿 와 있어. 금방 구출될 거야. 진짜 다행이다.”

희수 네가 진짜 고생했다. 위험한 순간에 각성이라니. 나는 희수가 각성했다는 것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원래 시나리오에 따르면, 정한솔이 아니라 정희수가 각성해야 맞았으니까. 세부적인 게 변경이 되더라도 시나리오에 나오는 굵직한 사건들은 반드시 일어난다. 그것을 생각하니 이해가 빨랐다.

“몬스터 더 나올 거야. 그 전에 대피할 방법을-.”

그때,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손짓이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자, 정한솔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피를 잔뜩 뒤집어쓴 몰골이라 두려움에 낯을 가릴 만도 한데, 남자애는 되레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안녕? 형아는 구하러 왔어. 의젓하게 잘 버텼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정희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희수는 방패를 쓴다. 옷이 난잡하게 찢어진 팔뚝에 근육이 빳빳이 선 것이 보였다.

[이름: 정희수

칭호: 수호의 디펜서

클래스: auxiliador(아옥실리아도르)]

클래스 이름만으로는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 제대로 각성한 건 알겠다. 정희수는 주먹을 폈다 쥐며 말했다.

“힘도 세졌어요. 제가 몬스터를 몇 마리나 잡았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다행이다. 너랑 나랑 힘을 합치면 여기 돌파할 수 있을 것 같다.”

디펜서와 딜러니까 궁합이 나쁘지 않다. 나는 희수랑 어떻게 할지 얘기하려고 했다. 그때 또다시 옷깃이 잡아당겨졌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나를 향해 미소 지었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소년이 갑자기 씩 웃었다. 순간 소년의 한쪽 눈이 파랗게 빛났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왜 방심하고 그래.”

- 푸욱!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소년이 든 낡은 검이 내 복부를 꿰뚫었다.

“컥…!”

소년의 등 뒤로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나와 시선을 맞추고 웃고 있었다. 정희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형!”

소년이 멍한 얼굴로 웃으면서, 복부에 찌른 칼을 비틀었다. 나도 모르게 휘청이며 나는 내 뒤를 가로막았다. 정희수와 다른 사람들은 안 된다. 진마하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비웃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경계했어야지. 그렇게 맹한 얼굴로 웃으니까 이런 짓을 당하는 거야, 해준아.”

“이…!”

정희수가 나서려는 것에 나는 온몸으로 녀석을 막았다. 하, 미친. 뒤늦게 고통이 올라온다. 목구멍으로 피가 넘어오는 것을 느끼곤 간신히 삼켰다.

“저 자식이에요! 저 자식이 오자마자 게이트가 열렸어요! 형, 피해야 돼요. 피해야…!”

흥분한 정희수를 툭툭 다독이고는 나는 내 복부를 꿰뚫은 검을 더듬거리며 잡았다. 아직도 소년이 순진한 얼굴로 그것을 비틀고 있었다.

진마하가 그런 나를 보며 소년에게 속삭였다.

“아이야, 이래도 괜찮겠니?”

그제야 멍한 눈빛을 하던 소년이 눈을 몇 번 껌벅이더니, 자신이 무엇을 잡고 있는지 알아채고 화들짝 놀라 물러나려 했다. 나는 다급하게 그 손에서 검을 빼내고 소년을 잡아당겨 희수에게 넘겼다.

“얘부터 챙겨.”

“형, 상처가, 아니…!”

“괜찮아, 물러나.”

“형!”

“물러나! 넌 뒤에서 사람들 지켜. 믿는다, 정희수.”

녀석을 앞 칸으로 밀고, 나는 칸막이 문을 닫았다. 복부에서 흐르는 피가 바지를 적시는 게 느껴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 칸막이 위에 난 창으로 정희수를 보고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다시 진마하를 돌아보았다.

“진… 진마하.”

다행히 진마하는 그때까지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떻게 행동할 거라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진마하는 바닥에 떨어진 피 묻은 단검을 들고 살펴보더니, 이내 그것을 뒤로 던졌다. 녀석의 파란 눈이 기묘하게 일렁거렸다.

“우리 드디어 이렇게 마주 보네. 참 많은 시련이 있었어. 어때,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된 소감은?”

“…지랄하지 마.”

“넌 참 말도 험하게 한다. 유일무이한 동지에게.”

진마하가 씩 웃었다. 저 얼굴을 한 대 갈겨 버리고 싶다. 나는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젠장, 찔린 상처의 충격이 꽤 크게 다가왔다. 머리를 흔들어 정신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진마하를 노려봤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이건 그냥 환영 인사였어.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가워서. 나의 유일무이한 동지.”

“개소리… 작작 해라.”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된 소감은 어때?”

소감, 소감, X발. 개X같지 뭘 어때. 나는 다시 한야를 쥐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면서, 이 녀석을 처리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렵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방법을 떠올려라, 방법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죽어도 죽지 못하는 삶에서.”

“…하.”

“질렸잖아. 솔직히 말해 봐. 저렇게 힘없는 인간들 뒤를 봐주는 것도. 너만 피투성이가 되고, 세상은 그럼에도 너를 몰라주며, 자신에게 피해가 가면 되레 원망하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지랄한다….”

“아니라고 말 못 하는 거 알아, 동지. 나는 너를 십분 이해하거든. 오직 나만이, 너를 이해할 수 있거든.”

어떻게 해야 각본이 도착할 때까지 진마하의 주위를 끌며 이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까. 저놈이 손끝 하나 까닥하면 몬스터들이 튀어나온다. 녀석은 아직 게이트를 열 수 있었다.

그때 시스템과 얘기했을 때 분명 권한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던 거 같은데…. 시스템은 말이 없었다. 눈앞에 어떤 창도 뜨지 않는다. 이 새끼들은 꼭 불리할 땐 입 꽉 닫지!

화가 났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네가 하는 행동들이, 정당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난 그런 걸 바란 적 없어. 다만 잊히지 않고… 사람들 기억 속에 심어지길 바라긴 했지.”

“그래.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 흉악하고 못돼 처먹은 심보를 가진 새끼였다- 라고 말이야.”

“아하하, 진짜….”

진마하의 눈이 번뜩였다. 웃음기 어렸던 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틀렸어. 멸망시키려 한, 이 아니라 멸망시킨, 이라고 해야지, 해준아.”

“미친놈. 정신 차려.”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미치겠는데, 해준아.”

“그렇게 부르지 마라. 너한테 허락한 적 없다.”

“허락도 받아야 하는 거였어? 왜… 백루찬처럼 애달프게 불러 볼까. ‘형’이라고.”

나는 이를 악물고 한야를 쳐올렸다. 순간 놈의 신형이 흐려지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다시 만들어졌다. 진마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왜 그 애에겐 그렇게 잘해 줘? 모든 걸 다 허락해 준 사이인 것처럼.”

“닥쳐…!”

나는 이를 악물고 놈에게 덤벼들었다. 어떻게든 이곳과는 멀리 떨어져야 한다. 미친 듯이 쫓아가며 환영과도 같은 진마하의 분신을 베어 냈다. 놈은 계속해서 환영을 만들어 내며 떠들어 댔다.

“왜 너와 나였어야 했을까?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할까? 영원의 회귀 속에 갇혀서, 나는 영원의 삶에 갇혀서. 혼자 외롭게… 그 누구도 봐 주지 않는 길을 걸어가야 할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