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책 들어오는 날이라 힘들었지? 고생했다.”
교진문고 앞치마를 벗으며 정희수는 밝게 인사했다. 같이 일하는 대학생 선배가 수고했다며 정희수의 어깨를 두드리자 그는 씩 웃었다.
“아뇨, 재밌었어요.”
“동생, 각성자라며. 알바 안 해도 되면서 왜 힘든 걸 사서 해.”
“에이, 제 앞길은 제가 정해야죠. 동생이 밥 먹여 주나요.”
“음… 밥 먹여 주지 않을까?”
“그… 그건 그렇긴 해요.”
대학생의 말에 희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제 동생 정한솔은 모르젠트 소속으로 아직 어린 나이라 게이트 일에 나서진 못하고 있지만, 월급은 따박따박 받고 있었다. 그게 다 나중에도 이적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라며 홍희는 말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미리 당겨서 조금씩 주는 것임을 모르지 않아. 어차피 이적할 생각도 없었다. 모르젠트에 입은 은혜는 갚기도 힘들었다. 무려 목숨을 살려 주지 않았는가. 그리고 모르젠트의 길드원 모두 나이 어린 한솔이를 꽤나 예뻐했다. 그게 가장 좋았다. 어딜 가든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었는데…. 희수는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얼른 가라는 선배의 손짓에 재빨리 앞치마를 풀며 직원 휴게실로 가 사물함에 앞치마를 집어넣고 가방을 꺼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이제 겨우 3일째였다. 그동안 고된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전전해 보았으나 이번 일이 가장 환경도 깔끔하고 좋았다. 무엇보다 책을 만지니 기분이 새로웠다.
희수는 가방을 메고 휴게실을 나서며 정한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아, 대박.
“왜? 왜? 뭐가 대박이야?”
-해주니 형 사진 찍어! 화보래! 대박 멋있어!
“헐 진짜? 대박, 대박!”
지최경의 우수 회원으로서 이 소식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화보라니! 무려 한야의 화보라니! 지금 제 동생은 직관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 한솔아, 지금 어디야? 나도 가서 봐도 돼?”
-와도 될 거 같은데!
차해준. 제 몸을 희생해서 한솔이를 구한 그는 정희수에겐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강한 무위, 잘생긴 얼굴, 마치 책 속에서 튀어나온 주인공 같은 사람이었다. 정희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한솔이에게 위치를 물었다.
-어, 근데 형. 촬영 더 길어질 것 같다고 먼저 가 보래.
“크흑, 그래?”
-응, 응. 좀 오래 기다리긴 했어. 해주니 형이 미안해해서 새벽이 형이 그냥 가자고 하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길드에 있으면 형이 데리러 갈게.”
-웅! 좀 이따 봐!
“응, 근데 한솔-”
한솔이가 전화를 뚝 끊었다. 저녁 메뉴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정희수는 가면서 한 번 더 통화하기로 하고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목역으로 가는 지하철은 분당선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정희수는 재빨리 시간을 확인하고 뛰었다.
놓칠 뻔했던 열차에 간신히 올라탔다. 지하철은 퇴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가득 했다. 끼어서 간신히 환승역에 도착했다.
정희수는 승강장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가기 전에 먹을 메뉴 정해서 미리 시켜 놓을 생각이었다.
“어 한솔아.”
-응, 형. 나 지금 길드 가고 있어.
“응, 응. 저녁 뭐 먹을래?”
-저녁? 으엄… 새벽이 형아, 저녁 같이 먹을래?
한솔이가 옆에 있는 새벽이에게 저녁을 권유하는 것을 들으며 정희수는 열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쳐다봤다. 알림 화면을 보니 이제 곧 들어올 것 같았다.
정희수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내려오는 계단 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사내만이 굉장히 여유롭고 느릿하게 걸어와서 시선을 끌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구두와 정장을 빼 입은 그는 겉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아직 여름이 다 가지 않은 더운 날씨에 코트라니…. 정희수는 희한하다 싶어 남자를 쳐다봤다. 천천히 내려오던 남자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정희수는 남자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유려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갈색 머리. 조금은 온순한 듯한 인상의 그는… 한쪽 눈이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라.
정희수는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 특이한 남자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분명 눈에 띄는데 말이다. 정희수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수화기 너머로 자신을 부르는 한솔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형!
“응. 뭐 먹고 싶어?”
-치킨! 양념 반 프라이드 반!
“뿌링뿌링은 안 먹어? 너 그거 좋아했잖아.”
-질렸어…. 형 치즈 볼도 먹어두 돼?
“당연히 되지. 새벽이도 먹는데?”
-응!
“그럼 형이 미리 시켜….”
마침 열차가 들어왔다. 정희수는 스크린 도어가 열리는 것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많은데, 그사이에 아까 본 남자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밀려 지하철에 올라탔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이었다. 차창 밖, 플랫폼 한가운데 남자가 허공을 보고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
“아, 응. 형이 미리 시켜 놓을게.”
-응, 좋아. 길드에서 먹구 집 갈까?
“그래….”
-형?
허공을 보던 남자가 고개를 내려 지하철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모두 무심하게 그를 지나치고 있었다. 정희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저 남자 내 눈에만 보이는 거야? 귀신, 뭐 그런 거야? 기겁해서 눈을 돌리려 했으나, 붙잡힌 것처럼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남자도 자신을 응시하는 정희수를 알아챈 듯 입꼬릴 올렸다. 정희수는 목 뒤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형? 왜 말이 없어. 무슨 일 있어?
“…….”
동생의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정희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몸이 바짝 굳어 버린 거 같았다. 남자의 시선 때문에.
사람들이 열차에 모두 올라탔다. 희수는 눈을 깜박였다.
남자는 이제 곧 닫힐 것 같은 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정확히 희수를 보며 웃었다.
“네가 희수구나.”
“…….”
“세계의 기둥이 될 뻔한.”
“…하, 한솔아….”
-형? 왜 그래!
“안타깝네. 원래 그 자린 네 것이었는데. 동생에게 빼앗겨 버렸네.”
뭘 빼앗겼다는 건지,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가 그렇게 이상하게 문 앞에서 희수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남자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정희수는 빨리 열차가 출발하길 빌었다. 그리고 입을 열어 한솔이에게 괜찮다고 말하려 하는 순간, 정희수의 눈이 커졌다.
남자의 한쪽 눈이 퍼렇게 빛나면서, 그의 뒤로 파지직 소리와 함께 동그란 마력 파장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개수는 여러 개였다. 소름이 돋았다. 힘 빠진 손에서 휴대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운명이란 참 웃기다. 그치, 희수야.”
남자는 환하게 웃었다. 그 뒤로 검은 게이트가 쩍 하고 입을 벌렸다. 꿈틀거리며 무언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 주춤대다가 이내 게이트인 것을 알아채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방이 어지럽게 변했다. 정희수는 그 가운데서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손을 뻗었다.
❖ ❖ ❖
[재난 알림! 5호선 소형 게이트 다수 출현!
긴급 대피 바랍니다!]
[각성자 긴급 소집 안내.
소형 게이트 집결로 인해 긴급 사태 발생.
민간인 대피부터……]
호출기가 요란하게 울려 댔다. 나는 통화하고 있는 송류진을 바라봤다. 놀이공원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재난 문자를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퍼레이드는 멈추고 말았다.
바탈이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허니, 지금 무슨 문제가 생긴 거야?”
물어 오는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잠시 송류진을 가리키며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자고 말했다. 그러곤 손에 쥔 호출기를 내려다봤다.
설마… 희수가 그 자리에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송류진이 통화를 마치고 우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알림 받으셨죠. 보셨다시피 게이트가 터졌습니다. 그런데….”
송류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는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게이트 시스템이 이번에도 먹통이었다는군요. 소형 게이트가 출몰한 곳이 지하철 역사 안이어서, 지금 상황이-”
“지하철? 말이 안 돼. 보통 게이트는 높은 곳에서만 열리지 않았나? 못해도 지상이었을 텐데.”
“…이변입니다. 예측하지 못한. 그래서 게이트 시스템이 반응하지 못한 것일 수도.”
“오우…. 이거 설마, 저번 제로 게이트처럼….”
바탈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상 현상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맞는 거 같아.”
“설마, 허니. 진짜로?”
“그놈이 아니라면… 이런 일을 벌일 수 없어.”
진마하. 그 자식이 아니라면 게이트가 여태껏 열린 적이 없던 지하에 열릴 리가 없다. 녀석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놈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다시 만나자는 게, 이런 뜻이었는지 전혀 몰랐다. 이런 식으로…!
또 다른 희생을 막아야 했다.
“먼저 갈 테니 따라와.”
나는 어둠의 포식을 전개했다. 검은 안개가 나를 삼킨다. 송류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탈은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몸이 완전히 어둠에 삼켜지기 전에, 송류진이 나에게 말했다.
“해준 씨, 같이 움직이기로 한 거, 잊지 않았죠? 혼자 나서지 마세요.”
“맞아, 허니. 절대 혼자 맞서지 마!”
바탈이 옆에서 소리쳤고 나는 웃었다.
“빨리 와. 가서 기다릴 테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솔직히 잘될지 모르겠다. 나에겐 모두가 소중해서… 막상 같이하자고 했지만, 일이 닥치니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게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둠이 완전히 나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