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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64)화 (162/201)

다소 긴 하루가 끝이 났다. 촬영을 마치자 스태프들은 모르젠트에서 회식비를 주었다며 같이 가자고 했지만 초면인 사람들과 거기까지 가기엔 친화력 부족으로… 거절했다. 

어휴 밤새 싸워도 멀쩡했는데 고작 몇 시간 촬영했다고 눈꺼풀이 무겁다. 촬영 내내 도망가 있던 홍희가 다 끝나고 나서야 차를 끌고 나타났다. 

“…넌 인마, 나중에 한번 보자.”

“하나도 무섭지 않네, 흐흐흐.”

홍희는 사진사 칼스에게 받은 B컷들까지 모조리 저장한 것을 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렇게 좋냐…. 아니, 좀 웃긴 게 바로 실물이 앞에 있는데 정작 사진 보고 더 좋아한다. 이게 말이 되나? 나는 홍희의 머리를 꾹 눌렀다.

“내가 좋아, 저놈이 좋아.”

“당근 우리 한야지!”

홍희가 사진을 품에 안으며 버럭 소리쳤다. 그래, 그 한야가 나인데. 아무튼 네 앞의 나는 아니라는 거군. 짜게 식은 눈으로 홍희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침 일찍 끌려 나왔는데, 끝나고 보니 밖에 해가 지고 있었다.

백루찬은 일하러 갔고, 새벽이와 한솔이도 너무 기다리는 것 같아 미리 보내서 지금 온 사람은 홍희밖에 없었다. 나는 홍희가 가지고 온 차에 올라탔다. 그때 호출기가 울려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의 번호가… 저장이 안 되어 있네. 누구지.

“여보세-.”

-허니이!

바탈이구나. 목소리 듣자마자 알아챘다. 나는 조금 김샌 느낌으로 좌석에 깊숙이 기댔다. 홍희가 끌고 온 차량은 SUV라 꽤나 널찍해서 좋았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왜 전화를 다 하고.”

-나는 허니의 연락만을 기다렸는데, 허니는 어떻게 회의 날 이후로 연락을 전혀 안 할 수가 있어? 허니, 나 서운해! 빨리 풀어 줘야 해, 

“듣기론 신나게 놀았다던데….”

-누,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허니에게 한 거야! 오직 나는 허니를 기다리며-

“…예. 바탈 씨, 많이 기다리시고요. 저는 피곤해서 이만 끊을게요.”

-안 돼! 허니, 나 지금 누구랑 있는 줄 알아?

“누구랑 있는데?”

-미스터 송!

송류진? 걔랑 왜 같이 있어? 바탈은 모르젠트가 책임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홍희를 슬쩍 봤지만 홍희는 여전히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바탈에게 물었다.

“각본… 송류진? 왜 같이 있어?”

-그야 우리! 데이트! 악, 아니래. 데이트 아니래. OK, OK, 폭력 NO.

송류진이 옆에서 한 소리 했나 보다. 허우대 큰 남자 둘이서 붙어 다녔을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와 풉 웃었다. 아니 왜 둘이 붙어 다녀.

-그러니까, 허니, 지금 당장 와야 해. 우리 둘은 너무 삭막해.

“남자 셋이 모이는 건 안 삭막하겠냐….”

-허니가 있는 건 다르다고!

“무슨 기준인지 모르겠는데.”

-허니, 데리러 갈 테니, 기다려.

“어, 엉?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 다 알지. 기다려, 허니.

그러고서 갑자기 통화는 뚝 끊겼다. 당혹스럽게 호출기를 바라보자, 홍희가 나를 살펴보더니 물었다.

“바탈이야?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지금 날 데리러 오겠다는데.”

“어잉…?”

차는 이미 출발한 지 오래였다. 우리는 도로 한가운데서 달리다 신호가 걸려 잠시 멈춘 상태였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통화가 종료된 호출기를 집어넣었다. 밑도 끝도 없이 데리러 오겠다니.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신경 끄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있으려고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러나 그때, 홍희가 내 몸을 흔들어 깨웠다. 

“왜 그래?”

“아니 저기 앞.”

운전석에 앉은 기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앞 유리 너머로 횡단보도를 가로막고 있는 바탈이 보였다.

“…어떻게?”

“모르겠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래?!”

“너지.”

“아냐! 뭐 툭하면 나야!”

홍희가 잔뜩 찔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쭉 지켜보자, 우리 뒤에 있던 차들이 빨리 가라고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앞은 여전히 바탈이 가로막고 있었다. S급 각성잔데 그냥 밀어 버려도 털끝 하나 안 다칠 텐데. 그냥 밀어 버릴까. 그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똑똑 하며 차량 창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 조금 뻘쭘한 얼굴을 한 송류진이 서 있었다.

“…….”

그래서 둘이 짜고 친 거냐고.

홍희가 킬킬댔다. 나는 고심했다. 홍희 이 자식을 어떻게 요리해야 잘 복수했다고 소문이 날까.

❖ ❖ ❖

“퍼레이드가 7시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우리 제일 앞자리에서 쫓아가자!”

“알았어, 알았어.”

“자 빨리, 추로스야, 핫도그야. 결정해.”

“나는 핫도그.”

“저는 커피면 됩니다.”

“하아, 하여간 미스터 송은 낭만이 부족해, 낭만이!”

나는 귀염 뽀짝한 머리띠를 금발 머리 위에 대충 눌러쓴 바탈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녀석은 지폐를 세며 추로스와 핫도그를 사 오겠다고 사람들을 헤치고 사라졌다. 그렇다. 나는 바탈에게 끌려와….

“…에버랜드는 처음이네요.”

“…그러게요.”

꿈과 희망의 나라, 놀이공… 아니 이게 아니지. 아무튼 여기로 오게 되어 버렸다. 이게 다 퍼레이드를 보고 싶다고 떼쓰는 바탈 때문이었다. 아니 미국엔 더 크고 유명한 게 많은데 굳이 한국에서 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씻지도 못하고 화보 찍고 나서 세팅한 그대로라서 어떻게 하기도 애매했다. 얼굴이라도 가려보고자 모자를 꾹 눌러쓰려 했지만 송류진이 극구 만류해서 말았다. 

“오늘… 조금 다른 느낌이 나요.”

“예? 아, 제가 화보 찍고 와서.”

“화, 화보요?”

내 말에 송류진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왜 이렇게 놀라지. 얘도 몇 번 찍은 걸로 아는데. 송류진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물어 왔다.

“어느 잡지입니까? 인터뷰도 하셨나요? 제가 나오면 10권씩 사겠습니다.”

“아니, 안 사도 돼요.”

눈을 반짝이며 하는 말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내가 웃자 송류진이 나를 빤히 보다가, 같이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짜식, 여전하구나. 골든 레트리버처럼 순한 웃음은. 나도 모르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멈칫하며 손을 내렸다. 기억도 못 하는 녀석에게 무슨 짓이냐. 뻘쭘하게 고개를 돌리자 송류진이 옆에 바짝 붙어 질문해 왔다.

“그럼… 차해준 씨, 여러 착장으로 찍으셨겠네요?”

“그렇죠? 꽤 많이 갈아입었어요.”

“와, 진짜 빨리 보고 싶어요.”

“에이, 실물이 앞에 있는데.”

“당연히 실제로 보는 당신이 훨씬 멋있고 예쁘지만, 아무래도 사진 같은 게 없으니 보고 싶을 때-”

“…네?”

“…아뇨.”

얼굴이 새빨개진 송류진은 말하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듣는 나도… 조금 부끄러워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큼큼 목을 가다듬고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고 싶을 때… 뭐라고 하려고 했던 거야. 아우, 민망하게.

힐끔, 송류진을 쳐다보자, 어쩔 줄 모르며 눈가를 파르르 떠는 게 보였다. 긴장한 듯 입가를 가린 손도 살살 떨고 있었다. 이 녀석은 대체, 다 잊었으면서 왜 이렇게 설레어 해. 

예전의 녀석이라면, 기억이 돌아온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송류진은 정말 나를… 좋아했으니까. 그 감정에 대해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우린 서로의 어린 시절 모습까지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돌렸던 송류진이 머뭇대며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웃었다. 행복하면, 지금이 전보다 괴롭지 않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는.

“…어. 해준 씨.”

“네.”

송류진은 나와 눈을 맞추고, 우뚝 멈춰 섰다. 나도 덩달아 멈춰 서서 송류진을 쳐다봤다. 송류진은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했나? 무슨 말 하려고….

“해준 씨, 제가….”

“추로스와 핫도그 배달 완료!”

송류진이 무어라 말하려고 할 때, 간식거리를 사러 갔던 바탈이 불쑥 끼어들며 음식을 내밀었다. 덕분에 우리는 뒤로 한 발씩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송류진이 한숨을 쉬며 살짝 빡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바탈은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얼굴로 나와 송류진을 번갈아 보며 추로스와 핫도그를 들이밀었다.

“으응? 응? 왜, 또 이런 분위기? 나만 빼고? 응?”

“나 핫도그.”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손에서 핫도그를 빼내 한입 물었다. 화보 찍는다고 긴장해서 제대로 밥도 못 먹었더니 맛있네. 열심히 핫도그를 먹자, 추로스를 손에 든 송류진이 시무룩한 얼굴로 그것을 한입 물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저런 간식을 먹어 보았으려나 몰라. 

“……!”

송류진이 화들짝 놀라며 바탈을 쳐다봤다. 무척이나 맛있다는 듯 손에 든 추로스를 가리키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열심히 씹고 있는 탓에 입을 열지 못하고 격렬하게 추로스를 가리키기만 한다. 나는 풉-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맛있지, 친구야?

바탈이 씩 웃으며 그런 송류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언제부터 둘이 저렇게 친해졌냐. 바탈은 능글맞게 웃으며 손에 든 핫도그를 베어 물었다.

“그치, 미스터 송.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아.”

“…와, 이거 맛있네요.”

“설마 처음? 이럴 수가. 인생의 즐거움 절반을 느끼지 못한 친구 같으니라고!”

바탈이 씩 웃으며 송류진을 구박했고, 그는 피식 웃으며 추로스를 먹었다. 에버랜드 야간 개장으로 인해 조명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풍경이 아주 예뻤다. 꽃이 잔뜩 심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바탈이 그렇게 원한 퍼레이드를 보러 향했다.

이제 막 퍼레이드가 시작되려고 할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 놓은 호출기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눈앞에선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차려입은 퍼레이드 인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형 모양으로 만든 관람차 위에서 인형 탈을 쓴 사람이 손을 흔든다. 

“오우, 흥미로워!”

바탈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 한국 와서 좋은 추억 많이 쌓고 가라. 제로 게이트 처리까지 도와줬으니 이 정도야 충분히 해 줄 수 있었다. 나는 계속 울리는 진동 때문에 호출기를 꺼내 들었다. 한솔이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못 받아서 꺼진 것을 다시 눌러 통화를 연결했다.

“어, 한솔이, 전화했었어?”

-혀… 형.

어쩐지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다. 순간 목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과 함께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 왜 그래?”

-형아가… 희수 형아가….

“한솔아,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희수 형아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전화가 갑자기 뚝 끊기면서 연락이 안 돼, 형… 근데, 근데에… 지하철이.

“지하철? 아, 알았어. 한솔이 지금 어디야?”

- 모르젠트….

“거기서 형 누나들이랑 잠깐 기다리고 있어. 형이 빨리 알아보고 찾아볼게. 희수. 너무 걱정하지 말고.”

-흐엉… 형아….

한솔이가 울면서 통화를 끊었다.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다니?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바로 홍희에게 연락해 서울 시내 지하철에 문제가 생긴 곳이 있는지 확인을 부탁했다. 연락은 5분도 지나지 않아 바로 왔다. 내 호출기가 울려서 받으려고 할 때, 갑자기 동시다발적으로 재난 문자 알림이 터졌다. 사방에서 삐삐- 울리는 소리가 울렸다. 송류진이 나를 보더니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자신의 호출기를 받았다.

우리는 굳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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