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다. 결론은….
“아니 내가 왜….”
“그렇게 말하고 아무것도 안 할 줄 알았어요? 게이트만 들어가서 보스 몹만 쓱싹하고 나오면 될 줄 알았냐고.”
백루찬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멋쩍은 얼굴로 이마를 매만졌다. 졸지에 의견을 꺼냈다가 검은해와 닫히지 않는 게이트 소탕 작전(홍희가 명명했다) 작전 팀장을 맡게 되었다. 대한민국 S급 각성자들을 내 손끝으로 부려 먹을 수 있는 엄청난 기회…라기보단 부담이 얹어진 것이다. 당황스럽다.
“난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한데….”
“이제라도 바꿔 봐요, 그거. 나도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너나 혼자 움직이지 마라.”
꿍얼거리는 말에 한 소리 했더니 백루찬이 나를 흘겨본다. 이게 사돈 남 말하고 있어. 맨날 혼자 움직이는 게 누군데.
어쨌든 우리는 닫히지 않는 게이트에 진입해 공략을 완료하기 전까지 그 안에 있을 진마하를 먼저 쫓고, 게이트 공략을 완료하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솔직히 잘될지는 모르겠다. 쫓는다는 것도… 왠지 진마하가 나를 찾아올 거라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있어서 꺼낸 말이었는데 다들 찬성해 버렸다.
“이게 한야 이름값이다, 이 말이야!”
홍희가 자랑스럽게 소리치며 깔깔 웃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름값, 무시 못 하지.
어쨌든 진마하는 나를 찾아올 테고, 아니면… 내가 찾아야겠지. 시나리오에서 봤던 장면을 쫓아서 움직여 보면 될 것이다. 시나리오에 나왔던 건 조금씩 바뀌어도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세부적인 게 바뀌어도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한일고도 그랬고, 한솔이를 만났던 게이트도 그랬다.
닫히지 않는 게이트. 그건 상위 차원의 간섭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말했다. 솔직히 진마하가 거기까지 어떻게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놈이 이제 더 이상 불필요한 희생을 만드는 건 두고 볼 수 없다. 나는 무조건 이번 기회에 진마하를 잡을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그러니까 이 녀석들 힘도 필요하다. 나를 멀뚱멀뚱 보고 있는 백루찬과 다른 이들을 보며 씩 웃었다. 그런 내게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건지 백루찬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지만 다른 이들은 서로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움직일지 대화하고 있었다.
“나는 무조건 한야의 곁에. 알지? 허니. 내 마음? You’re the only one I love and respect….”
바탈이 내게 팔을 뻗으며 칭얼거렸다. 장성한 남자 새끼가 그러니까 죽빵을 한 대 날리고 싶었지만 옆에서 아서가 대신 기겁한 얼굴로 바탈의 뒤통수를 후려쳤기에 참았다.
“그럼 한국의 저력을 믿겠습니다.”
아서가 회의를 정리했다. 계획의 큰 틀은 이러했다.
첫 번째, 진마하를 찾는다. 이건 검은해에서 나눠 주는 팔찌를 통해 역추적을 가해 본다.
두 번째, 역추적 실패 시 차해준의 말을 따라서, 혹은 그를 미끼로 진마하를 불러낸다. 그조차 여의치 않을 시 그가 나올 장소에서 대기 탄다.
세 번째, 진마하를 붙잡고 닫히지 않는 게이트에 대해 상세히 알아낸 뒤, 게이트에 진입한다.
네 번째, 게이트를 닫고 진마하는 처리한다.
일단 이렇게 얘기를 해 놓고, 우리는 각자 상세히 계획을 짜기로 했다. 각본, 모르젠트, 다해와 바탈이 같이 팀을 이루고 움직이기로 했다.
자리를 파하고 이동하려는데, 송류진이 나를 붙잡았다.
“우리 쪽에 역추적 가능한 요원도 있고 관련 전문 부서도 있어요. 최대한 먼저 찾아볼 테니, 해준 씨는….”
송류진은 망설이다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절대 혼자 움직이지 마세요. 되도록 같이…. 연락은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 알겠죠?”
“위험한 일은 안 할게요. 기다릴 테니까 각본에서도 추적 성공하면 제일 먼저 연락 주세요.”
“네….”
송류진은 그러고서 내 옆에 있는 백루찬을 힐끔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어라… 무언가 미묘한… 얘기가 오고 간 거 같은 눈빛인데? 의심하며 둘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홍희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가자, 한야! 이제 우리 한야를 한야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니! 기뻐서 미치겠군. 음하하핫!”
“그런 게 기쁘냐….”
“그동안 쌓아 놓았던 셀카와 사진들을 지최경에 풀 수 있게 되었다고! 어찌 안 기쁠 수가 있을까!”
“초상권 침해다, 그거.”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
홍희가 시끄럽게 들러붙어 조잘조잘 떠들었다. 나는 뒤에서 얘기를 하는 송류진과 백루찬에게 신경이 쏠렸지만, 결국 홍희에게 말려서 그 둘이 어떤 얘기를 하는지는 전혀 듣지 못하고 끌려가듯 호텔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송류진은 제 앞에 서 있는 백루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흰 머리칼. 잿빛 눈동자. 참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하늘의 구름같이 잡을 수 없는 사람 같으면서 수증기 덩어리인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그 누구보다 존재감이 큰 남자. 송류진은 그를 보다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모르젠트를 못 믿는 건 아닙니다. 다만 걱정이 되어서요.”
“그러니까… 각본의 황태자께서 무슨 걱정을 하시나 했는데.”
백루찬은 어느새 홍희와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차해준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송류진은 지금 차해준을 걱정하고 있었다. 차해준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냐고? 정작 보호받는 건 나인데. 백루찬의 입가가 심술궂게 삐뚤어졌다.
“우리 형을 걱정하신다….”
“그동안의 일들이 있었으니 하는 말입니다. 차해준 씨는 너무 많은 것을 홀로-”
“기억은 하시고요?”
“네?”
“차해준 씨가 무엇을 홀로 겪어 왔고, 이겨 냈는지 기억은 하시냐는 거예요.”
“…네? 기억을… 당연히,”
당황했는지 말끝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눈을 보며 백루찬은 싱긋 웃었다. 송류진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떠들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모를 수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는 한야로 알려져 있고….”
“그렇죠. 많죠. 한야로서… 많은 일을 했죠. 그 후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저는 또, 송류진 씨가 다른 걸 떠올린 게 있나 싶어서 물어본 거예요. 혹시나 이제 와서 아는 척하면 내가 너무 짜증 나니까.”
송류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백루찬은 지금 자신이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잊은 게 있었나. 자신은…. 이상한 기시감이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았다. 송류진이 흠칫하며 백루찬을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다만 아주 질렸다는 눈으로, 아니 비웃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는 겁니까?”
“제가 어떻게 봤다는 거죠? 저는 아주 친절하게….”
아주아주 꾹꾹 눌러서 참고 있는데. 백루찬은 피식 웃고는 송류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해 주세요. 그렇게 걱정은 하시되 가까이 설 수 없는 채로. 영원히 몰라도 돼요. 그냥 그렇게-”
백루찬이 제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치며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더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렇게 송류진을 쳐다보더니 등을 돌렸다.
“백루찬 씨…! 대체 무슨 말인지 제대로 말을…!”
“무슨 말이요? 형은 제가 잘 살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더 간섭 안 하셔도 돼요. 지금처럼 맴돌기만 하는 건 허락할게요. 아시겠죠?”
송류진이 다급하게 백루찬을 붙잡았지만, 그는 살짝 고개만 돌려 송류진을 훑어보곤 산뜻하게 웃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다 떠나가는 뒷모습을 송류진은 굳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잊어?”
무엇을? 이상한 소리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잊은 게 없다. 멀쩡했고… 또….
송류진은 복도에 한참을 서서, 그렇게 찾을 수 없는 기억을 더듬었다.
❖ ❖ ❖
백루찬의 펜트하우스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솔이가 나를 반겨 왔다.
“형아아~!”
“어이구, 우리 한솔이!”
전보다 더 훌쩍 큰 한솔이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해 줬다. 나는 한솔이를 번쩍 들어 올리다가 확연히 키가 크고 몸무게가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하, 우리 꼬맹이 아주 착실하게 잘 크고 있구나.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네. 슬쩍 웃으며 뽀얀 볼따구니에 뺨을 한껏 비비며 힐링하는데, 홍희가 나에게 손짓했다.
“지금 당장 세수하고 와! 뽀득뽀득 깨끗하게!”
“어? 씻으려고 하긴 했다만… 너 안 가냐?”
“할 일이 있다. 아주 중대한…!”
“으음…?”
“빨리 씻고 와! 기다릴 테니까!”
“아니 민망하니까 가라고….”
“우리 사이에 민망은 무슨. 가족끼린 그런 생각 하는 거 아니야.”
홍희의 단호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가, 가족이지…. 엄청 당황스러웠지만 홍희 말대로 씻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거실 소파엔 같이 온 새벽이와 한솔이가 누워 있었고, 홍희가 이상한 마스크처럼 생긴 기계의 전원을 켜고 있었다.
“그건 뭐냐?”
“누워.”
제 앞자리를 팡팡 치며 말한다. 미심쩍은 눈으로 망설이자 홍희의 눈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어허, 차해준 씨. 내 말 들어서 손해 보는 거 봤어?”
“너무 많았지…. 험난했다.”
“아잇, 됐고 빨리 누워!”
홍희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ㄷ자로 된 소파엔 이미 새벽이와 한솔이가 얼굴에 마스크 팩을 얹고서 양손을 모으고 얌전히 누워 있는 상태였다. 팩… 하네. 그 모습이 웃겨서 사진 찍으려 핸드폰을 꺼냈다가 홍희가 쓰읍- 하는 소리에 군말 없이 누웠다.
“아니 뭐 하려고 이래?”
“있어 봐.”
홍희는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그릇에 담아 만들었다. 그리고 끈적이는 액체가 된 그것을 가지고 내 앞으로 오더니 앞머리를 넘겨 핀으로 고정했다. 이윽고 알 수 없는 액체가 덕지덕지 묻은 것을 내 얼굴에 바르려 했다. 기겁해서 몸을 일으켜 피하며 소리쳤다.
“새로운 암살 시도냐! 뭐야, 그거!”
“아, 좀 가만히 있어!”
홍희가 내 어깨를 잡아끌며 눕히곤, 얼굴에 맹렬하게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킁킁 냄새를 맡으니 향은 또 좋았다.
“노폐물 쫙 빼 주는 팩이야. 하고 나면 잡티도 없어지고 피부에서 광이 난다니까! 아주아주 비싼 특제 팩이라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어쩐지 불안감을 가중시켰지만 이미 얼굴에 액체를 올린 상태라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액체로 뒤덮여 눈앞이 뿌옜다. 내가 으아악 소리 지르자 홍희가 가슴팍을 탁 치며 깔깔 웃었다.
“음화하핫! 이 몸은 다 계획이 있노라!”
아니 그 계획이 뭐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도 막혔다. 결국 나는 그날 오이 팩까지 받으며 하루를 마쳐야 했다. 일이 끝나고 들어온 백루찬이 저도 이마에 오이 붙이고 가열 차게 나를 비웃었던 건… 좀 짜증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