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은 바탈을 낀 국제 이상 게이트 감지 관리부와 세 번째 회의가 있었다. 아무래도 한국이 큰일을 겪으며 게이트를 힘겹게 닫았다지만, 닫히지 않는 게이트도 중요한 문제여서 더 미룰 수가 없었다. 게이트 폭발 전까지 15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고 말이다.
“선생… 아, 형!”
모르젠트 정문에서 홍희가 부른 차를 타러 로비를 가로지르는데, 정문 앞에서 서성이던 새벽이가 나를 보고 뛰어나왔다. 이 녀석 이제야 형이라고 부르네. 화색이 도는 얼굴을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처음 회동 때 함께 있었고 게이트도 같이 들어가기로 한 만큼 이번에도 오게 된 모양이다. 나는 교복을 입고 있는 새벽이를 보고 말했다.
“학교는 어떻게 했어?”
“제 진로 아시니까 빠져도 아무 말 없으세요. 홍희 님이 공문도 보내 주셨어요.”
“공문? 아하… 홍희가 잘해 줬네. 그래도 되도록 빠지지 않는 게 좋은데. 친구들도 있고.”
조금 걱정된다는 듯 말하자 새벽이는 나를 보고는 씩 웃었다. 어라, 웃음이 뭔가 전과는 달라진 느낌이다. 좀 더… 어른스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새벽이는 내 손을 잡아당기며 앞서 걸었다.
“형이 걱정해 주는 건 좋지만 괜찮아요. 친구들도 다 이해해 주고… 무엇보다.”
한걸음 앞서가던 새벽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이렇게 형이랑 있을 수 있는 게 더 좋아요.”
“에이… 낯간지럽게.”
수줍음은 많이 사라진 얼굴이 활짝 핀 웃음을 달고 저렇게 말하니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선생님이 아니라 형이라고 해서 그런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더니 그런 나를 보고 되레 킥킥대며 웃었다.
새벽이가 나를 힐끔 보더니 무언가 더 말하려 입을 달싹거렸다. 가만히 녀석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깨에 팔이 둘러지며 내 몸을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지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딱 마주친 시선에 나도 모르게 웃음부터 튀어나왔다.
“어, 루찬아.”
“잠은 잘 잤어요?”
백루찬이 내 흐트러진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평소보다 더 바짝 붙어 오는 얼굴에 나는 움찔하며 고개를 옆으로 뺐다.
“내가 애냐. 잠도 잘 못 자게.”
“나 없이 혼자 자니까 걱정돼서 그런 거지.”
“…야. 남들이 들으면 오해해.”
“뭘 오해해요? 우리 같이 사는 거?”
백루찬이 하도 엉겨 붙는 탓에 새벽이가 잡은 손을 빼며 녀석의 고개를 밀어냈다. 그러자 놈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웃었다.
“오해 많이 해 줬으면 좋겠다. 우리 한집에서-.”
“아, 좀, 이상하게 말하지 말라고.”
한 소리 하자 백루찬은 말을 멈추고 킥킥 웃었다. 목덜미에 가까이 붙어 웃어 대니 숨결이 느껴져서 목을 움츠렸다. 앞에 있던 새벽이가 우리 둘을 빤히 보고 있었다. 눈빛이 어쩐지 편치 않아서 나는 백루찬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툭툭 치며 밀어냈다.
“어, 새벽아.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아까 뭐라 말하려고 한 것 같았는데. 새벽이는 잠시 입술을 말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곤, 내 옆에 딱 달라붙었다. 어… 왜 달라붙지?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내가 멀뚱히 녀석을 보자 새벽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휙 들고, 백루찬을 노려보더니 다짐하듯 말했다.
“나도 포기 안 해요.”
백루찬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든가.”
“…뭐 하냐, 둘이?”
“있어요, 그런 게.”
요상한 신경전이 나를 가운데 두고 펼쳐졌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충 싸웠나 싶어 넘겼다. 두 녀석을 달고 나는 홍희가 기다리고 있는 차로 갔다.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타려고 하는데 갑자기 새벽이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바짝 붙었다. 당황하는 사이 백루찬이 새벽이의 뒷덜미를 잡아당겨 떼어 낸다.
“학생, 앞에 타.”
“…….”
“엉…?”
백루찬이 새벽이를 보며 씩 웃었다. 뭐야, 뒤에 타고 싶었어, 둘 다? 나는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다가 혀를 차곤 앞좌석으로 갔다.
“뒤에 타고 싶었어? 보통 조수석에 타려고 하지 않나. 내가 여기 앉을 테니까 둘이 뒤에 타고 가.”
“…하, 눈치 진짜.”
“뭐라고?”
“됐어요.”
백루찬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흘겨보더니 홀랑 차에 올라탔다. 천새벽도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올라탄다. 뭐야… 순수하게 비켜 주려고 한 내 의도에 어울리지 않는 눈빛인데?
“배려를 해 줘도 난리냐, 너희는.”
“그런 배려는 넣어 두세요.”
백루찬이 콧방귀를 뀌며 투덜댔다. 뭐야 진짜?
❖ ❖ ❖
현실 시간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모이는 것 같은 길드 회동이었다. 회의는 모르젠트가 잡아 놓은 호텔 콘퍼런스 룸에서 진행되었다. 가약동 게이트 이후로 파파라치부터 기자들이 엄청나게 달라붙는 바람에 비밀리에 이동해서 들어가는 것도 뒷문을 통해 입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콘퍼런스 룸에 도착했을 땐, 우반희와 송류진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각본 요원들이 복도부터 쫙 깔려서 주변을 경계했다.
“어 오랜만이네.”
“멀쩡해 보인다?”
“처음 보자마자 하는 말이 그거냐.”
가약동 때는 일을 해결하느라 정신없어서 우반희를 보지도 못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워 인사했더니만 반응이 참 띠껍다. 이놈은 변하질 않아, 하여간.
“들어가요, 형.”
“잠깐만. 차해준 씨, 나랑 얘기 좀 하자.”
백루찬이 내 등을 밀며 룸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우반희가 붙잡았다. 백루찬이 샐쭉한 얼굴로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아오, 이 자식은 적당히 들러붙을 것이지. 좀 귀찮아져서 밀어냈더니 이제 불퉁한 얼굴로 나를 본다. 내가 손을 휘저었다.
“뭐 얘기하려는 건지 들어 볼 테니까 먼저 들어가.”
“…계속 이러기야?”
“뭘 이러기야. 넌 좀, 조신하게 말 좀 들어.”
내가 새벽이랑 같이 백루찬의 등을 떠밀며 룸 안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우반희가 그 꼴을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왜 그따위 시선으로….”
“하는 꼴이 웃음도 안 나온다. 근데 너 이제 말 막 나가자는 거지? 반말을 찍찍 내뱉네.”
“듣기 싫으면 댁부터 말 좀 예쁘게 하시든가.”
“댁? 대엑?”
“…권위주의자 새끼. 그래요, 우 팀장님. 됐습니까?”
우반희가 짜게 식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는 듯 품을 뒤지다가 빈 갑만 꺼내 들고 작게 욕을 읊조렸다. 어차피 호텔 안이라 피우지도 못할 거 아주 신경질 대놓고 부리네.
“폐 썩어서 나중에 숨 쉴 때 쌕쌕거리고 싶냐?”
“각성자는 그딴 거 신경 안 써.”
“아주 잘나셨다…. 그래서 뭔 얘기 하려고.”
“너….”
우반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어쩐지 오묘했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다가 머리를 매만지더니 고개를 다시 휙 돌려 버렸다.
“아니다. 됐다.”
“뭐야.”
“됐다고. 걍 들어가라.”
“사람이 불렀으면 말을 끝까지 해야지. 지금 우 팀장 얼굴이 할 말 많은 얼굴인데요.”
“됐어.”
우반희는 떫은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젓더니 이번엔 옆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등을 돌렸다. 뭐냐, 싱겁게. 복도로 사라지는 놈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송류진이 다가왔다. 송류진은 어쩐지 재밌다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류진 씨.”
“해준 씨, 잘 지냈어요?”
“네. 뭐… 류진 씨는.”
“저도 뭐, 똑같죠.”
“하하, 근데 우 팀장님은 왜 저러신데요?”
“아… 제가 보기엔.”
송류진이 우반희가 사라진 곳을 힐끔 보고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다.
“걱정한 거 같은데요.”
“누구를요?”
“해준 씨를요.”
“…오해하신 거 같은데요, 류진 씨가. 저 사람은 걱정할 인간이 아닌데.”
“에이, 반희 형이 겉은 그래도 속은 좀 여려요.”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송류진을 쳐다봤다. 우반희가 여려…. 단어 자체부터 성립 불가한데요. 착각 거하게 한 거 같은데. 송류진은 그런 내 턱을 올려 다물게 하더니 말을 이었다.
“분명 할 말이 있었을 텐데, 말을 꺼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거예요.”
“무슨 할 말… 아니 말할 게 있으면 똑바로 설명을 하면 되지….”
“그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는 거죠. 아무튼 해준 씨, 건강하게 다시 봐서 좋네요. 그때 헤어진 후로 이러저런 얘기도 못 해서 좀 서운했어요. 걱정 진짜 많이 했는데….”
“아….”
그때, 백루찬이랑 모르젠트 챙긴답시고 정신없었지. 새벽이도 울며불며 매달리고 있었고 홍희도…. 송류진도 몬스터 뒤처리와 각본 일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 많이 했다니, 나는 잊고 있었네, 그냥. 송류진이니까 어련히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졌다.
송류진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나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달싹였다.
“해준-.”
“뭐 하냐. 이것들아. 비켜.”
그러나 송류진과 나는 뒤늦게 등장한 카리나에 의해 양쪽으로 퍽 밀쳐졌다. 카리나가 우리 둘 사이를 가르고 콘퍼런스 룸 문을 활짝 열었다.
“문 앞에서 뭐가 좋다고 서로 내숭 떨고 있어. 짜증 나게!”
버럭 소리치는 카리나는 화가 나 보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은 복수심에 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카리나가 입고 있는 옷은 검은 정장에 팔뚝엔 상주 완장을 차고 있었다.
이번 가약동 게이트가 검은해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카리나는 더욱 분노했다. 다해 길드가 이번에 희생자가 많았지…. 카리나는 장례식이 끝났음에도 저 옷을 벗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도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카리나를 보고 있을 땐 나도 좀 힘들었는데, 다시 괄괄하게 돌아온 그녀를 보니 픽 웃음이 나왔다. 안에서 새벽이와 앉아 있던 백루찬이 송류진과 있는 나를 보고 팔짱을 끼며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아오, 저거, 조신하게 굴라니까 또 질투하는 것 봐.
“우리도 들어가죠.”
이 일상이, 정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케 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은 즐겁다. 하,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도 진짜 멍청하고.
앞으로는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지. 그런 결심을 하면서, 나는 송류진을 이끌고 콘퍼런스 룸 안으로 들어갔다. 룸 안으로 들어가서 송류진이 무어라 말하려고 했던 것이 생각 나 물었다.
“그런데, 할 말이 뭐였어요?”
“음….”
송류진은 모호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고는 백루찬 쪽을 눈으로 흘기더니, 한 발 가까이 다가와 귀를 가까이 대라는 손짓을 했다. 자연스럽게 가까이 얼굴을 대자 송류진이 속닥거렸다.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그리고 나중에.”
“나중에?”
“바탈 씨는 빼고 우리 둘이 데이트해요.”
“…예?”
“저도 서울 구경시켜 주세요. 각본 일이 너무 바빠서 논 적이 없어 가지고.”
송류진이… 바쁘게 살긴 했지.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하고…. 역시 기억을 잃었어도 내가 가장 친근해서 그런 건가. 나는 멀뚱히 송류진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노는 거야 뭐… 일도 아니지.
얘기를 끝마치고 자리에 앉자, 백루찬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때리고 있었지만, 녀석이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저래, 쟤는 또…. 왜 또 저기압이야.
“형은 참… 그래서 좋아.”
“왜.”
“아냐. 그게 매력이지….”
그게, 매력…. 이를 악문 백루찬이 혼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