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를 선택했지만, 몇 초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이상해서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눈앞에 초록색 선이 식물 줄기가 기어오르듯 사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흰 빛무리가 터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어느새 나는 마치 디지털 데이터들로 이루어진 무수히 많은 0과 1로 감싸인 공간에 서 있었다.
숫자들과 네트워크 선들이 사방으로 일렬로 뻗어 나가며 발광하고 있었고, 반투명하게 보이는 초록색의 배경 뒤로는 여전히 내가 있던 거실이 보였다. 나는 앉아 있던 소파를 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숫자들이 급속도로 퍼지며 공간이 구부려졌다 펴졌다.
이게… 뭐야. 대체.
그때 시스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차원 시스템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차원 시스템? 텍스트는 마치 실제로 만질 수 있을 것처럼 4D로 눈앞에 떠올랐다. 신기해서 입을 벌리자 글자가 바뀌었다.
[차원 24563 지구: 관리자 인사드립니다! (。⌒????⌒)⋆.˚⊹⁺ヾ(o˃̵͈̑‿˂̵͈̑o)シ]
“이건….”
[드디어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었네요! 클리어런스, 당신은 우리가 선택한 두 번째 차원 해결사! 이곳에 온 사람은 당신을 포함 딱 두 명밖에 없었답니다!o(*'▽'*)/☆゚’]
텍스트가 뿅뿅 소리를 내며 바뀐다. 뭐야, 이건. 이놈이 여태 나에게 말을 걸어왔던 그… 시스템인가? 글자뿐인데도 발랄함이 느껴져서 더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둘뿐이라고? 이곳에 왔던 사람이 더 있었던 거야?
[그 사람은 클리어런스도 만나 본 사람이에요!]
아, 진마하. 시스템의 말에 그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놈이 했던 말을 조합해 보면, 그놈도 나처럼 클리어런스인지 뭔지 오류를 해결하는 퀘스트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왜 되레 오류를 일으키는 사람이 된 걸까.
내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시스템이 텍스트를 나열했다.
[차원 관리자로서 제대로 된 아이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모든 건 제 탓이에요!]
“만들… 뭐? 뭘 만든다고? 아니 그보다, 왜 네 탓이야?”
[진마하는 애초에 오류를 바로잡는 역할로서 이 세계에 필요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랍니다! 신과 차원 관리자인 제가 열심히 빚은 아이였지요. 생성되는 오류를 막고 이 세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꽤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필요로 의해 ‘만들었다니’. 내가 말이 없자 시스템 관리자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애초부터 오류를 흡수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예요. 세계의 기둥인 메인 캐릭터들처럼요!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했어요.]
시스템은 진마하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이 바뀌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접속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바뀐 풍경 어둡고 삭막한,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었다.
거기에 자그마한 아이가 있었다. 갈색 머리에 한쪽만 푸른 오드아이. 아이는 어두운 그곳이 무섭지 않은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자신의 손을 보거나 몸을 만지는 등 신기해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오류를 해결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제거자이자 학살자.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고, 그 또한 누군가에게 남겨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입니다.]
그건 너무….
불쌍하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시스템은 내 생각을 알아챈 듯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었을 뿐입니다! 세계를 유지하려면 차원에 일어나는 오류를 잡아야 했거든요. 하필 게이트라는 다중 차원의 습격이 시작되면서 차원은 더욱 불안정해졌답니다.]
어린아이는 계속해서 성장해 갔다. 아주 어릴 때부터 혼자였던 그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지냈다. 혼자 떠들고 혼자 웃었다. 그리고 오류를 바로잡았다. 세계로 나와서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며 차원 오류를 바로잡고 게이트를 처리하고, 몬스터를 잡았지만 아무도 그를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의 순간은 아주 잠깐일 뿐. 진마하는 그 순간을 즐기며 부평초처럼 세계를 떠다녔다.
무수히 많은 게이트를 처리하고 오류를 잡았지만, 그에게 고마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금방 진마하를 잊어버렸다.
인간의 미성숙한 모습부터 완연한 성인으로 자라기까지 진마하는 많은 일들을 겪으며, 자신이 이 세계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결국, 오류를 바로잡는 일도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에게 많은 것을 심어 주었답니다. 사명, 숙명, 운명, 동정, 책임감, 존재의 이유, 존재의 가치…. 하지만 그는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을 깨달아 버렸어요.]
“…그게 뭔데.”
눈앞의 풍경 속에서 진마하는 혼자 있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나쳤지만, 아무도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진마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외로움.]
느리게 깜박이던 눈꺼풀을 치켜 올리며 진마하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게이트가 열렸다. 차원의 구멍과도 같은 것. 게이트. 진마하는 나서려고 움직이려다가, 금세 걸음을 멈춰 섰다.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죠.]
게이트가 닫히지 않아 웨이브가 일어나고, 몬스터들이 인간을 짓밟았다. 거기서도 진마하는 움직이지 않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배신감을 느껴 버렸어요. 이렇게 인간을 위해서, 이 차원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해결하는 그 자신에 대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요.]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진마하는 꽤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았다가, 부서지는 도로에서 등을 돌렸다. 게이트를 바로잡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지만, 그것을 저버린 거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랍니다. 오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다른 건 필요가 없었어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그를 위해야 했을까요?]
시스템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내게 물어 왔다.
나는… 정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짧은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언노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존재. 외로움. 하….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진마하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어쩐지 조금 납득이 갈 것도 같아서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진마하는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기억할 수 있도록 시스템 오류를 일으켰죠. 그렇게 해서 검은해를 만들었답니다. 그들의 숭배로, 외로움을 없애고자 한 거죠. 하지만 그건 소용이 없었어요.]
“…그때 시스템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하필 차원 시스템 권한이 그에게도 있었어요. 우리는 필요에 의해 만든 아이를 ‘관리자’로 만들려 했거든요. 하지만 실패했죠. 진마하는 권한을 가로채 관리자인 제가 차원 시스템에 관여할 수 없도록 막아 버렸답니다. 지금 보시는 이곳, 차원의 틈새에 가둬 버렸어요.]
“……그래서.”
[그래서 많은 희생이 따랐죠. 차원 시스템으로 보면, 사실 그 희생은 데이터 수치에 불과하니 큰 오류는 아니었답니다. 문제는 진마하가 차원 시스템을 이용해 게이트를 소환하는 거였어요. 이러다간 차원이 멸망으로 갈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시스템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말줄임표가 한동안 계속 떴다. 나는 그게… 왠지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같이 느껴졌다.
[최종 관리자이신 신의 허락을 맡아서 당신을 선택했어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는 잘못된 길로 빠졌으니 이번엔 조건에 부합하는 인간을 선택하자고 뜻을 모았답니다. 그리고 선택했어요. 당신을.]
“…조건이라는 게 뭐야.”
[이타심]
[인의]
[신의]
[이해]
[배려]
시스템이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모든 텍스트가 사라졌다. 나는 실소했다. 무슨… 그런 것으로 나를 선택했다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하실 필요 없답니다. 우리도 알 수 없었어요. 인간의 마음이란 수치화되거나 그래프로 표기할 수 없잖아요. 매일 매분 매초 변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고 감정이며 생각이죠. 그래서 우리는 클리어런스를 선택하기에 앞서 많이 망설이고 고민했어요. 혹시 또 필요의 아이처럼 변하면 어떡하지, 라는 고민도 해 보았지만 답은 하나였답니다. 세계에 속한 당신을 선택하는 것 말이죠. 반복된 회귀 또한… 그 결과였죠. 괴로워서 피하고 싶었겠지만, 그것까지 이겨 낸 클리어런스를 우린 자랑스럽게 생각해요!\\\\٩(˃̶͈̀௰˂̶͈́)و ////]
뿌득 이가 악물렸다. 누구에겐 트라우마로 남아서 아직도 괴로운데 그걸 이렇게 발랄하게 말하냐….
[하지만 클리어런스는 회귀를 통해서 더욱 강해지고, 결국 진마하가 일으킨 오류를 바로잡았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것 때문에 나는 현실 도피하려고 꿈에 빠지고 말이야. 내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노려보자 시스템이 당황해서 허둥대는 이모티콘을 띄웠다.
[그것까지 계산하지 못했던 건 우리의 실수였어요! 인간이 섬세하고 망가질 수 있는 종족이라는 것을 간과해 버린 거죠! 제아무리 프로그램이라 해도 그 또한 인간을 모델로 만들었는데 말이죠. 이게 다 제 불찰입니다! 신님은 잘못이 없으세요!]
“…됐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알게 된 사실에 머리가 아팠지만 별로 더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보기에 관리자라는 놈은… 정말 마치 인공 지능 컴퓨터 프로그램 같았다. 지금 하는 행동도 그렇고 이 공간도 그런 느낌을 더해 주고 있었다.
얘기해 보았자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만 돌아올 테니 더 말하고 싶지도 않고….
“어쨌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야. 오류가 일어나지 않게 막을 방법은 없어?”
[필요의 아이가 일으키는 오류는 클리어런스가 바로잡을 수 있어요! 벌써 세계의 기둥으로 선택받은 메인 캐릭터들을 네 명이나 지켜 냈잖아요? 본인 자신까지요.]
“아직 한 명이 남았잖아. 모두 해결하면, 내 시한부 삶도 끝나는 건 맞아? 그리고 이 시한부… 혹시 설마… 설마 하는데.”
[Σ(‼❍ฺω❍ฺ‼)]
“시한부라는 게 생명이 끊기는 게 아니라,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회귀를 말하는 거 아니지?”
설마. 그 정도로 양아치일 리가 없다. 내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웃자 시스템도 웃는 얼굴을 띄웠다.
[(ᐢ._.ᐢ;)՞ ՞맞아요!‧₊˚(✘﹏✘)]
이런 X발! 나는 단단히 화가 나 눈앞의 텍스트를 잡아 집어 던졌다. 웃기게도 글자는 낱말로 잡혀서 날아가 벽에 박혔다. 씩씩대며 띄워진 이모티콘을 붙잡아 우그러트릴 듯 힘을 주자 시스템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그! 일부러 그런 거는 아니에요!]
“일부러는 아니겠지. 시스템상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겠지. 프로그래밍이다 뭐다, 어?”
[마, 맞아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클리어런스를 선택할 수가 없어서 당신이 죽으면 문제가 너무 커져 버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설정을 넣었어요…!]
하, 진짜 이것들이 인간과 생각과 개념이 모두 다른 게 여기서 느껴졌다. 결국 괴로운 건 나 아냐. 나…. 그동안의 트라우마나 겪었던 모든 힘든 일도 다 이놈들 탓이라 생각하니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숨을 고르고 참았다.
누군가는 해야 했을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게 내가 된다고 해서 원망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 해야 했다면… 아씨 열 받는데? 존나 화나는데?
빡쳐서 고개를 휙 돌려 노려보자 시스템이 띄운 이모티콘이 내 주변을 빙빙 돌며 눈물을 흘렸다.
[그, 그게 그렇게 괴로울 줄 몰랐어요! 그래서 우리의 권한이 진마하에게 넘어갔지만, 그 와중에 꿈에서 당신을 이곳으로 다시 빼 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요…!]
그래서 ‘초전 박살 게이트’라는 웃기지도 않은 이름의 책을 만들어 냈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