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사람인데…. 아직 어린아이였는데. 왜 다 나를 무서워하기만 했을까?”
“…….”
“그런 내 손을 엄마만이 유일하게 잡아 준 거야.”
입술을 말아 물었다. 목구멍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알아. 엄마도 나를 버렸었어, 처음엔.”
“…….”
“그런데 돌아왔잖아.”
“…….”
“결국 나를 혼자 두지 않았잖아.”
어린 백루찬이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맹목적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이잖아. 나밖에 없는 사람이잖아.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어. 그런데… 자꾸 돌아보게 만들었어. 자꾸 내가… 모든 것을 바치고 싶게끔. 행복하게 해 주고 싶게끔. 그런데 결국 잃어버렸어.”
“…….”
“형.”
“…응.”
“엄마는 나를 사랑해 줬어. 인간 같지도 않은 나를. 사랑은 뭘까, 무엇인데… 그렇게 엄마를 강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그저 내가 알고 있는 건,”
“…….”
“잃으면 다시 눈을 뜨고 세상을 보고 싶지 않아진다는 거야.”
심장이 저리다는 건 이런 것을 뜻하는 건가. 나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잡았다. 울컥하고 끝없이 올라올 것 같은 감정이 머리까지 차올라서 숨이 찼다. 울컥하며 내뱉고 싶을 만큼.
백루찬은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다시 나를 불렀다.
“형아.”
“…응.”
“깨지 않으면 안 될까?”
“…루찬아.”
“끝이 어떨지 알아도 붙잡고 싶어. 보내기 싫어.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나는… 너무 후회가 돼.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거 같아. 나도 말할 수 있었는데. 사랑한다고 해 줄 수 있었는데. 한 번도 말하지 못했어.”
어느새 울상이 된 아이가 울먹이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낼 수 없었는데, 그렇게 갈 줄 몰랐는데. 내가 구할 수 있었는데. 나는….”
“루찬아….”
“형아아… 깨고 싶지 않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다시 느끼고 싶어. 나를 사랑해 주는 엄마가 내 손을 잡아 주는 걸. 따듯하게 바라봐 주는 것을. 불러 주는 내 이름을. 맹목적인 사랑을. 포기할 수가 없어….”
“루찬아.”
“안 깨면 안 돼? 꿈인 거 아는데,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이렇게라도 보면 안 돼?”
아이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나도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반복되는 삶을 사는 건 너무 괴로워. 사라질 것을, 이게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건 너무 외로워.
나는 가족에게 애정을 받아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폭력만 휘둘렀다. 그렇게 살아와서일까. 그래서 나는 백루찬에게 가야한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붙잡고, 간신히 울음을 삼키면서 말했다.
“루찬아, 외로웠어?”
“응. 아니. 응…. 모르겠어.”
“나는 잘 몰라. 나는…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바빠서… 아무도 돌아보지 못했어. 소중한 사람도 없었어. 그런데 루찬아. 그러면….”
그러면.
“내가 해 주면 안 될까? 맹목적인 사랑.”
“…….”
“내가 해 줄게. 흑백으로 보이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에서 외로우면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할게. 소중한 사람이 없어졌더라도 내가, 내가 너를 버티게 해 줄게.”
나는 진심을 담아, 아이를 바라봤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아이가 불쌍해서. 백루찬이 불쌍하고, 또 너무….
“내가… 네가 사는 이유가 될게. 그러면 안 될까?”
아이는 빨갛게 물든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준 나는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 너도 나처럼 혼자라서 외롭다면….”
“…….”
“우리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자.”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어 주자.
“그래서 버틸 수 있게, 그래도 살아갈 수 있게… 응? 이대로는… 너무 외롭고 슬프잖아. 꿈에만 있는 건, 아무도 너를 돌아보지 못하는 건 너무 슬프잖아.”
그러니까 잊히지 않게 같이 나가자. 같이 삶을 살자. 어머니도 그러길 바랄 거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 말은 하지 않을게. 다만 허망한 꿈을 꾸고, 결국 깰 때 괴로움을 느끼지 않게. 그렇게 함께하면 안 될까.
“같이 가자. 나랑.”
…그렇게 함께하자.
바라만 보고 있던 아이가 손을 뻗어 왔다. 작은 온기가 뺨에 닿았다.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나는 아이의 손을 꽉 붙잡고 웃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에 어린 백루찬이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돌아가자. 함께.”
백루찬이 내가 잡은 손에 힘을 줘 꽉 붙잡았다. 얼어붙은 손은 이상하게 따듯하게 느껴졌다.
노을 지던 풍경의 놀이터가 변해 갔다. 세상이 다시 어둠에 서서히 잠겨 들었다. 어린 백루찬도 사라지고 나는 홀로 어둠 속에 놓였다.
그리고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간섭 시간이 모두 소요되었습니다.]
[심상 세계 접속을 해제합니다.]
[클리어 조건 달성!]
[게이트 ‘허구의 왕 가르디오스의 두 번째 방’이 닫힙니다!
심상 세계의 주인이 가르디오스의 허구를 깨고 의지를 일으켰습니다! 영원한 꿈과 현실 중에서 현실을 택함으로, 가르디오스가 물러납니다.]
[게이트 클리어!
가르디오스가 허구의 방에서 다시 잠에 빠집니다!
게이트가 닫힙니다!
난이도: 0
보상: 심상 세계 탈출]
그리고 눈 깜박할 사이,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 ❖ ❖
게이트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게이트가 있던 옥상에 서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두운 새벽의 하늘. 마력 파장이 사그라들고 있는 탓에 푸른빛이 감도는 하늘을 보다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엉망이 되었던 그대로다.
가슴이 허했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이 마치 눈물처럼 뺨을 타고 흘렀다. 제대로 돌아온 게 맞는 건가. 심상 세계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현실과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가만히 있는데, 어느 순간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머리 위로 우산이 씌워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숨을 죽인 백루찬이 우산을 내쪽으로 씌워준 채, 나 대신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탓에 안색이 나빠 보였으나 눈빛은 예전의 백루찬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백루찬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형.”
“…비가 와서 그래.”
“…….”
“우는 거 아냐. 빗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그렇게 변명하며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젠장맞을, 이렇게 자꾸 가슴이 아픈 건, 백루찬의 과거에 동화되어 그 모든 것을 겪어 버려서 그런 것이겠지. 아직도 미미하게 손이 떨렸다. 악마의 눈동자 자체도 나에겐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는데 거기다가 김세영까지…. 그것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더 슬픈 건 백루찬의 얼굴을 봐서였다.
돌아왔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백루찬은 내 하찮은 변명에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씌워 줬던 우산을 내렸다.
“그래. 형.”
“…….”
“비가 너무 많이 오네.”
백루찬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 끝없이 내리는 비. 삭막한 흑백의 세상은 노을 진 놀이터와 달랐다. 과거와 다른 현재였다.
백루찬은 다시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나 때문인가 봐.”
“…….”
“미안.”
슬쩍 웃으면서, 백루찬은 내 팔을 잡아당겨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녀석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잠시 동안, 정말 잠시 동안만 숨죽여서 눈물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