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가기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같이 느껴졌다. 김세영을 발견하자마자 용인족들을 뚫고 게이트로 내달렸다.
교법사들의 인도에 따라, 그녀는 다른 신도들과 함께 게이트 앞에 섰다. 환희에 젖은 얼굴은 오직 하나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본다.
그녀가 원래 맹목적으로 사랑을 바쳤던 어린아이는 잊은 것처럼.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녀는 게이트를 보고 있었다.
눈을 부릅떴다. 앞을 가로막는 괴물이 너무 많았다. 아스팔트 도로를 박살 내며 쿵- 떨어진 거대한 용인족 하나가 장대와 같은 긴 창을 휘둘렀다. 시뻘건 살점이 들러붙은 것들이 피를 뿌리고 이제 나를 후려쳐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몰아친다. 순간적으로 바닥을 박차고 몸을 띄웠다.
내가 있던 곳에 떨어진 장창이 땅에 깊숙이 박히며 부르르 떨렸다. 놈이 다시 창을 들어 올리려 움직인다. 짧은 순간, 장창을 지지대 삼아 밟고선, 이형환위를 전개했다. 가로등만 한 장창을 타고 올라가며 한야를 옆으로 뻗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도착한 나를 보고 용인족이 사납게 이빨이 튀어나온 입을 벌렸다. 그 앞에 마치 브레스처럼, 붉은 마력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곧 그것은 내게로 쏘아졌다.
눈을 부릅뜨고, 자세를 낮추었다. 검날에 마력을 씌웠다. 우웅- 우웅- 한야가 급속도로 구겨 넣는 마력에 미친 듯이 울었다. 나는 내게로 쏘아지는 브레스를 갈라 버렸다.
-크아아아!
갈라진 브레스가 양 갈래로 땅에 처박힌다. 나는 그대로 돌진하여 용인족에게 검을 올려 쳤다.
거대한 놈의 세로로 길쭉하게 찢어진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좁혀진다. 그리고, 둘로 갈라졌다.
쿠웅.
거대한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교법사가 나를 보고 흠칫하며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신도들이 움직이고, 이내 한 명씩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땅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김세영을 잡아야 했다. 절대- 이대로!
“흐읍…!”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도착했다. 나는 김세영의 팔을 성공적으로 낚아채고, 잡아당겼다. 갑자기 멈춰 서서 확 잡아당기자 반동으로 인해 뒤로 넘어졌다.
김세영이 고개를 돌리고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여전히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내 손엔.
“아-”
의수만이 잡혀 있었다. 김세영이 아들을 위해 게이트로 들어가 얻고 나온, 위험을 무릅쓴 결과인 의수.
돌아본 김세영의 얼굴이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순식간에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아무런 말도,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바짝 굳어서 그저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게이트를 쳐다봤다.
이렇게… 이게….
순간 넋을 놓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순간 갑자기 몸이 무언가와 세게 부딪히며 튕겨 나갔다.
정신없이 바닥을 굴렀다. 그런 나를 보고 누군가 달려와 황급히 나를 부축해 왔다.
“차해준! 차해준!! 정신 차려! 안 돼!”
고개를 들었다. 홍희였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머리는 온통 산발이 되어서, 교복은 피에 젖어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입술이 떼려는데, 그 뒤에 있는 백루찬이 보였다.
“루찬… 루찬이….”
“정신 차려! 일어나! 다른 거 보지 마! 너부터 생각해!”
이러다 너까지 게이트로 빨려 들어가면 어쩌려고 거길 막아서! 홍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목이 메도록 고함을 쳤다. 정신 차리라고 말하는데 되레 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백루찬도 넋을 놓고 있었다. 완전히 죽어 버린 눈을 하고서, 넋을 놓고서 게이트를 보고 있었다. 손을 뻗었다. 우는 홍희를 달래면서, 나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백루찬에게 가야 한다. 저놈 지금,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게 없을 텐데 이대로 두면 안 된다. 나는 그제야 아직도 내 손에 김세영의 의수가 들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숨이 턱 막혀 버렸다.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멈춰 섰다.
꿈이어도, 과거는 바꿀 수 없었다.
잃어버린 건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무어라 말하던 홍희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엔 진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풍경이 그대로 멈춰 섰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던 나탈리스도, 각성자들을 곤죽으로 만들기 위해 비늘로 촘촘히 싸인 팔을 휘두르던 용인족도, 도망치던 사람도. 모두가 멈췄다.
[심상 세계에의 시간이 되돌아갑니다.]
[백루찬이 심상 세계의 시간을 돌렸습니다! 간섭이 길어지면 백루찬의 심상 세계에 붙들려 영원히 헤매게 됩니다. 당장 빠져나가야 합니다!]
[남은 간섭 시간: 00:13:00]
시스템이 긴급하게 경고 문구를 띄웠다. 그것들을 읽던 나는 저 멀리 백루찬을 바라봤다.
멍하니 서 있는 백루찬은… 울고 있었다.
괴롭게 잠겨 든 눈과는 다르게 표정은 멍했고, 부릅뜬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녀석은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녀석이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린다. 나는 백루찬에게 다가가 녀석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멈춰 버린 세계가 소리도 없이 무참히 유리 조각처럼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세계가 부서져 내렸다. 나탈리스도, 게이트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어느새 사방은 짙은 어둠만이 남은 공간으로 변했다. 눈앞의 백루찬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루찬아.”
온통 무(無)로 가득 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백루찬을 불렀다.
녀석의 심상 세계가 부서졌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저 앞에서 혼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했다.
무릎을 감싸 안고 웅크린 아이만이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마르고 왜소한 그 등에 손을 올려 아이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고 무릎을 꿇는 순간, 아이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안 가.”
아이가 작게 말했다. 커다란 눈망울. 백루찬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말문이 막혀 잠깐 굳어 있던 나는 뛰는 아이를 뒤쫓아 달렸다.
이가 악물렸다. 깨어나지 못하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이미 경험한 것이니만큼 더욱 잘 알았다. 몽중몽 속에서 더없이 행복하다고 믿으면서 잠들어 있었으니까. 그게 꿈인 줄도 모르고. 결국에는 깨야 할, 허망한 것인 줄 모르고!
뛰어가는 어린 백루찬을 쫓았지만, 달려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잡을 수 없었다. 아이가 뛰어갈 때마다 어두웠던 공간에 변화가 일어났다. 시작은 게이트가 터진 명동 앞이었다. 그 뒤로, 시계를 거꾸로 돌리듯 모든 것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각성한 백루찬, 김세영이 다치고 응급실에서 혼자 비를 맞았던 백루찬, 졸업식 날의 백루찬. 어린 날 혼자 낡은 월세방에서 공부하던 백루찬, 어머니를 기다리던 백루찬.
기억은 계속해서 돌아갔고, 어느덧 풍경이 바뀌었다. 노을에 붉게 물든 하늘, 높다란 나무가 심어져 있던 놀이터 앞에 도착한 아이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나는 뛰던 것을 멈추고, 어린 백루찬이 벤치에 앉아 놓여 있던 인형을 껴안는 것을 바라봤다.
“흐으음, 음음.”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백루찬만이 혼자 앉아 높은 벤치에 의해 바닥에 닿지 않는 짧은 다리를 흔들면서, 편안한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인형을 껴안고 뺨을 부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방향을 보고, 혼자 손장난을 한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런 백루찬을 응시했다. 어린 백루찬이 누굴 기다리는지 알았다. 이제 곧 다가올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다.
백루찬은 되돌리는 것을 선택했다. 나가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알아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르겠다. 먹먹하게 다가오는 감정은 나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어린 루찬이에게 다가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다가가, 그 앞에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백루찬은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계속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김세영이 돌아올 방향을 쳐다보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백루찬이, 희미하게 웃었다.
“혼자 살아 가는 건 의미가 있을까?”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작아진 백루찬의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인형을 꽉 안은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유순하게 나를 쳐다봤다.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수많은 회귀를 반복하면서,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 죄책감에 혼자 시달리면서 괴롭게 살아왔다. 목표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가진 건 얕은 이타심.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나 하나만 희생하면 괜찮을 거라는… 자기만족.
끝없이 희생하던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연민.
그런 것들 속에서 살았다. 어린 백루찬이 슬그머니 웃었다.
“소중한 것이 없어졌는데….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고, 사랑해 주지 않던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를 잡아 줬던 그런 소중한 사람이 없어졌어.”
김세영에 대한 이야기다. 백루찬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음율을 맞추듯 말을 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없어진 채로… 그렇게 사는 건 재미가 없어.”
아무도 나를 같은 동족이라고 보지 않았거든.
어린 백루찬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