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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43)화 (197/201)

스르륵 검을 내렸다. 과거의 나를 마주하니,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이러했었다. 그래서… 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벅차서, 혼자는 계속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도망쳤다. 꿈속으로. 

놓아 버렸다. 스스로를.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운명이라는 것도, 삶도.

과거를 마주하니 울컥하는 기분에 입술을 짓씹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끝낼 거면 빨리 끝내.”

차해준이 중얼거렸다. 뭘 끝내냐. 여기서 포기해 봤자, 도로 돌아갈 뿐인데.

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너야.”

그제야 차해준이 다시 눈을 떴다. 동요도 없는 눈을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미래에서 온 너야.”

그제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차해준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이건 무슨 정신 공격이지? 몬스터 주제에 지금-.”

아직도 몬스터라고 생각하냐. 한숨을 푹 내쉬고, 녀석의 멱살을 잡아 들었다.

“몬스터로 보이냐? 아니라고. 난 ‘너’야. 미래의 너.”

“…….”

녀석이 말없이 손을 쓰려 했지만, 나에게 다시 꽉 잡혔다. 검은 떨어트렸어도 스킬은 쓸 수 있을 테지. 아무 짓도 할 수 없도록 몸을 압박했다. 놓칠 수 없다. 시간도 없고.

“게이트가 있는 세상에 미래에서 온 사람이 있는 게 뭐가 이상해.”

“스킬이 있는 각성자인가?”

“아니라고.”

뭐 처음부터 보면 나라도 그런 생각 하겠지만. 나는 한숨을 삼켰다.

“한라동 폭발 사건.”

말을 꺼내자마자 차해준의 몸이 바짝 굳었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얼어붙은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혼자만 알고 있던 비밀이었잖아.”

입을 여니, 말은 술술 나왔다. 답답한 속과는 다르게.

“회귀를 반복하는 것도.”

“뭐… 뭐라는 거야.”

몸을 뒤틀며 벗어나려 하는 녀석을 더욱 꽉 붙잡았다. 차해준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혼자 외롭고 세상 모든 짐은 다 짊어진 것처럼 하던 너, 차해준 이 자식아.

“네 탓 아니야.”

“…네가 그걸.”

“그리고 해준아.”

나는 감당하지 못하고 혼자 흔들리는 눈을 한 녀석을 보며 웃었다.

“너도 변할 수 있더라. 즐겁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더라. 잡고 싶은 사람이… 결국 생기더라. 내가 알아.”

“…….”

“그러니까, 내 말 들어 줘.”

다 생략하고 쏟아 내도 내 말 좀 믿어 줘. 지금 그 사람 구해야 하니까. 그리고 세계를 구해야 하니까. 이젠 피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도망치지 않을 거니까.

“나 좀 도와줘.”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미래의 네 사람을 살릴 수는 있단다.

❖ ❖ ❖

아직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운 듯 차해준은 여전히 혼란스럽게 나를 쳐다봤지만, 그래도 한라동 사건을 거론하니 조금이나마 믿는 거 같긴 했다.

그런 녀석을 데리고 가까운 공원으로 와 벤치에 잠시 앉았다. 옆에 놓여 있는 자판기에서 차해준이 음료수를 꺼내 왔다. 본인이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왜 하필 식혜냐?”

“…맛있어.”

“구라 치지 마. 입에도 안 대면서.”

식혜 싫어하는 거 뻔히 아는데 지금. 내 말에 차해준이 머쓱하게 음료수를 건넸던 손을 거뒀다. 내가 모를 것 같냐. 엉? 몇 번을 말해야 제대로 믿겠어. 너는… 에흐. 물론 의심이 많은 것은 요즘같이 험난한 세상에 좋은 거긴 하지만.

나는 내 옆에 서서 이쪽에만 시선을 두는 차해준을 바라봤다. 도와 달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과거의 내가 해 줄 일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이 몇 번째 회귀인지 알려 주는 것.

차해준은 악마의 눈동자를 막아야 한다. 몇 번의 회귀를 반복해도 그것을 보고만 있지 않는다. 그랬었다.

내 시선에 손가락을 움찔거리던 차해준이 결국 먼저 입을 뗐다.

“알고 싶은 게 뭐야.”

“…밥은 먹고 다니냐.”

“…야, 너 나라며.”

“그래 인마, 알아서 묻는 거다. 알아서. 말라비틀어져 가지고…쯧.”

“너나 나나….”

차해준이 뭐가 다르냐는 듯 비웃음을 날렸다. 나는 혀를 찼다. 그래도 너보단 나아, 짜식아.

“좀 잘 챙겨 먹어. 어디 가서 검 휘두르다 픽 쓰러지지 말고.”

“경험담이냐? 미래의 내가 겪을?”

“좀, 너무 어둡게 다니지도 말고. 무섭잖아. 밤에 보면 무서워서 다 너 피해 다닌다고.”

“…….”

그 부분에 대해 할 말은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문다. 나는 잔소리에 어색하게 반응하는 차해준을 보고 웃었다.

“…말이나 해. 알아야 하는 게 뭔데.”

“지금 몇 번째 회귀야?”

차해준이 나를 쳐다봤다. 찡그린 얼굴엔 회한이 담겨 있었다. 해결하지 못한 순간을 떠올리듯이.

그는 모자를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

“…지금은 세 번째야. 네가 나타난 건 전에 없던 일이고. 그래서….”

녀석의 말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세 번째라면, 두 번째 때 집회 장소가 걸렸던 진마하가 집회 장소를 바꿨던 때였다. 기억이 난다. 원래 있었던 장소에 갔을 때 놈들은 없었고, 게이트만 열려 있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게이트.

악마의 눈동자가 열리기 전 예고라도 하듯 많은 게이트들이 열렸다. 쓰나미가 오기 전 일어나는 지진처럼 말이다. ‘나’는 그것들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었다. 어디에 터질지 알고 있었으니, 더 막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씩 나서며 해치웠다.

실패하면 모두가 죽는다. 그리고 차해준은 회귀한다. 백루찬에겐 지금 시간대가 처음이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내 눈앞의 차해준에게도.

나는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차해준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

슬쩍 웃으면서, 녀석의 손을 붙잡았다. 꽉 붙잡고, 조금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네가 할 일을 해.”

이맘때의 차해준이 뭘 해야 하는지, 뭘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게 내 운명이었고, 그것을 위해 지난한 시간을 홀로 지나오며 회귀를 반복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진마하는 악마의 눈동자 때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그 게이트도 자신이 열었다고 했고.

그렇다면 지금 차해준이 하는 일들은 진마하를 막아서는 시작점이었다. 세계의 오류를 바로잡는. 그러니, 바뀌지 않을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차해준까지 끌어들일 수 없었다. 손을 꽉 붙잡고 있자니 차해준이 어색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멍하게 눈만 깜박이는 녀석의 손을 놓고, 이번엔 양 뺨을 붙잡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

뻑뻑해지는 눈가에 힘을 주며,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말 너무 뻔하지. 그런데….”

시스템이 만들어 낸 꿈속에서 오랫동안 헤맸던 나는 알아 버렸거든. 도피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결국 마주치고 깨져야 끝난다는 것을.

우리의 적은 단순한 게이트뿐만이 아니다. 너와 내가 마주 봐야 할 것은 더 큰 세계의 오류였다.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니… 지금은 잠깐의 시련이었다. 이길 수 있는. 과거가 아닌 미래의 내 존재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이건 잠깐의 시련이야. 너는 이겨 냈어. 이겨 냈으니까 포기하지 마.”

“…….”

차해준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처럼 울컥하는 듯했다. 일렁이는 눈을 보자니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나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도망치지 마.”

“…….”

“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묵묵히 듣고 있는 녀석을 보며, 속으로만 간직해 왔던 얘기를 꺼내 들었다.

“아버지 일은 네 탓이 아니야.”

차해준이 눈을 깜박인다.

“네가 그렇게 외롭게 살아왔던 건 네 탓이 아니야.”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지만, 나의 탓도 아니다. 어쩔 수 없던 것. 이겨 내면 되는 과거다.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으니까.

“이겨 내자. 그리고 구하자.”

너의 소중해진 사람들을 위해.

나는 웃었다.

차해준도, 슬쩍 웃은 거 같기도 했다.

❖ ❖ ❖

[남은 간섭 시간: 16:32:23]

시간은 새벽 네 시를 넘어갔다. 좀 있으면 동이 터 오를 시간이다. 여름엔 해가 빨리 뜨니까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나는 간간히 어둠의 포식 스킬을 사용하며 뛰었다.

차해준을 만난 이재동은 중림동과 가까운 곳이었다. 중림동은 명동 옆이었고. 명동까지 금방 갈 수 있었다.

세 번째.

나는 차해준이 알려 준 회귀 시간대를 계속 떠올렸다. 검은해 집단. 그 당시에 그들이 검은해인지 제대로 알고 있진 못했다. 그들이 드러났던 건 악마의 눈동자 이후로 크게 이슈가 되면서였다.

그러니 그 뒤로 꿈이나 꾸고 있었던 나는 제대로 모르는 게 맞았다. 다만 기억하는 건 이상한 집단이 게이트로 모여 뛰어들었다는 것. 그것이 여러 번 반복되었고, 그들을 막아서려 했다는 것.

세 번째에서 검은해는 인근 대학교에서 집회를 했다. 남산과 가까웠던 학교로 기억한다.

그쪽에 대학교만 해도 세 개가 붙어 있었다. 확인을 해야 하는데 혼자 확인하기엔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백루찬과 같이 하면 좋을 텐데. 홍희의 도움도 얻고. 휴대폰이 없으니 진짜 불편했다. 간단히 연락이라도 해서 어디로 오라고 말하면 좋을 텐데. 뭐라도 받아 놓을 것을 그랬나. 뒤늦게 후회하면서 나는 어둠의 포식 스킬을 사용했다.

검은 어둠 속에 삼켜지고 나서 도착한 곳은 명동, 백루찬과 헤어졌던 그 거리였다.

늦은 새벽 명동 거리에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취객 몇만 보일 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말을 듣고, 백루찬은 어디로 갔을까. 하, 여기서 다시 만나자고 말을 할걸.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어깨가 휙 잡히며 누군가가 내 몸을 당겼다. 몸이 휙 돌아갔다.

“그러고서 도망을 쳐?”

“…백루찬?”

백루찬이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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