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42)화 (142/201)

녀석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나는 다른 도로 위에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수그리고 바닥에 쪼그렸다. 잠깐… 잠깐 진정 좀 하고 가자.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순간 믿었다고 말하는 백루찬이 참을 수 없게 귀여워 보여서… 하. 쭈그려 앉아 머리를 움켜잡았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동안 동화가 되어 버렸던 탓일까, 온몸으로 백루찬의 과거를 마주하니 더 마음이 커져 버린 것을 느꼈다.

한동안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다가 벌떡 일어났다. 말한 대로, 난 녀석을 구할 거니까. 지금 이 상태로 시간을 보내기엔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바뀐 도로의 풍경을 보다가 다시 스킬을 전개해서 이동했다. 그렇게 두어 번 더 어둠의 포식 스킬로 이동하고는, 명동에서 가까운 지역인 이재동에 도착했다. 새벽이라 조용한 거리를 홀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이때쯤의 내가 무엇을 했었던가. 기억을 열심히 더듬었다.

이재동. 명동에서 악마의 눈동자가 터지기 전날, 나는 이재동에서 열린 게이트를 처치하고 있었다. 회귀할 때마다 그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이재동에 3급 게이트가 터졌고, 왜 때문인지 각본이 출동하지 않은 탓에 내가 나서서 그 게이트를 해결했다.

가까운 편의점 창문 너머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지금쯤이면 나올 때가 되었을 텐데….

새벽 중에 한곳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밤늦게 화재라도 나서 대피한 사람들처럼 급히 손에 잡히는 것을 걸쳐 입은 듯 차림새가 다양했다. 수군대는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재난 알림만 뜨고 각본이 안 왔다고?”

“지금 다른 지역에서도 난리라던데….”

“아씨, 여기 인구 밀집 지역이라 중요 재난 격파 지역 아니었냐? 나 그거 믿고 여기로 이사 온 건데….”

게이트가 해결되었는지, 그들은 터덜터덜 걸으며 이런저런 불평을 쏟아 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낌새를 보니까 확실히 게이트는 닫힌 것 같았다. 그럼 나올 때가 되었는데. 나는 그들을 따라 걸었다.

옅게 느껴지는 게이트 마력이 느껴졌다. 원래 같았으면 각본의 통제로 바리케이드가 쳐졌을 텐데, 여기는 그런 것도 없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니 다른 곳에서도 게이트가 많이 열려서 출동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게이트는 완전히 닫혔겠지? 괜히 걱정이 된다. 이때 다쳤었나…. 그 뒤에 튀어나온 악마의 눈동자 레벨이 너무 세서 어땠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일단 빨리 가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 블록을 지나치고 골목을 빠져나올 때였다. 새파란 게이트가 주택 단지로 연결되는 도로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서서히 닫히는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나’다. 과거의 ‘나’.

남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멍청하게 굳어 버린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 것인지 몬스터의 것인지 모를 피가 튄 뺨은 창백했다. 마력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않아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에 푸른빛이 튀었다. 검은 모자를 눌러써서, 그의 얼굴은 더욱 어둡게 보였다.

고독에 짓눌린 것처럼, 쓸쓸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 심상 세계의 ‘차해준’이, 눈앞에 있었다.

❖ ❖ ❖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는 건 이런 기분인 건가.

남자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을 보고 당황스러워 할 법도 하건만, 남자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심상 세계의 차해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웬 낯선 검이 들려 있었다.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아, 이때는 아직 나탈리스를 잡기 전이니까… 한야를 챙기기 전이겠구나.

“분명.”

낮은 목소리. 내 목소리인데도 낯섦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심상 세계의 차해준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마주치자마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다가, 그제야 나는 한 발을 더 떼었다. 이런 식으로 마주치는 건 생각도 못 했는데. 과거의 나를.

“게이트는 닫았는데,”

내가 저런… 분위기를 풍기고 다녔던 건가. 이건 뭐 고독한 한 마리 늑대도 아니고. 뭐라고 입을 열어 해명을 해야 하는데, 민망함과 당혹감, 그리고 두려움이 앞섰다. 만나도… 되는 거겠지? 여긴 진짜 과거는 아니니까. 심상 세계이니까.

과거의 차해준은 어쩐지 위험해 보였다. 날이 섰으나… 날이 다 닳아 버린 검 같았다.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고, 끝엔 힘이 빠져 기어들어 갔다.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한마디를 꺼내야 하는데, 과거의 ‘나’에게 뭐라고 말하냐.

“몬스터인가? 인간의 모습을 베끼다니.”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나’는 이내 확신한 듯 마력을 일으킨다. 야… 얀마. 너, 진짜 너무 살벌했잖아.

마력이 일렁거리며 녀석의 몸을 감쌌다. 나는 다급하게 녀석을 말리려 외쳤다.

“아, 안녕…하세요? 몬스터 아니고요! 저기, 나는…!”

“…….”

내가 뭐라 지껄이건 과거의 차해준은 아무런 말 없이 검을 휘둘렀다. 내던진 검기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아니 인사했는데 왜 공격부터 하냐고!

-쉬이익!

날아오는 검기에 한야를 꺼내 들었다. 카앙- 소리가 울리며 검기를 쳐 냈더니, 손이 후들거린다. 와씨, 역시 S+급. 감탄하는 사이 쏘아지듯 몸을 날린 차해준이 검을 휘둘렀다. 한야를 세워 막고 몸을 뒤로 날렸다.

“아니 몬스터 아니라니까!”

“…동체 시력까지 베낀 건가?”

“아니 말 좀, 좀…!”

“몽마인가? 진화종?”

“아니라고!”

차해준은 전혀 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하, 곱게 설명해서 일을 정리하려다가 되레 당하게 생겼다. 급해 죽겠는데 진짜…! 나는 이를 악물고 녀석의 공격을 쳐 냈다. 등급에 대해 제대로 못 느꼈었는데, 지금은 제대로 느껴졌다. 강한 놈은 기세부터 남달랐다. 저게 랭킹 1위 위압감이란 말이지.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랭킹 1위거든.

잠시 차해준과 몸을 떨어트렸다. 손목을 돌리며 한야를 바로잡고 다시 부딪쳤다.

카앙- 캉!

맹렬히 쏘아붙이는 내 공격에 이번엔 차해준이 밀렸다. 녀석의 눈빛이 당황한 것처럼 흔들렸다. 전투라면 눈 감고도 이겼는데 이번엔 쉽지 않지? 나는 씩 웃었다.

크게 사선으로 휘두르고, 그대로 허리를 틀어 다시 사선으로 틀어 올렸다. 새파란 검의 궤적이 일어난다. 마력이 손끝에서 요동치고 검을 따라 쭈욱 올라갔다.

막아 내지 못하고 밀리며 피한 녀석의 어깨와 목 사이를 노리고 훅 찔러 넣었다. 어깨를 돌리며 피한 녀석이 그대로 몸을 돌려 후려치려 했다. 나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아쳤다.

쾅!

검기와 검기가 부딪쳐 폭발하는 듯한 소음이 터졌다.

“윽-.”

그러나 밀린 건 한 명뿐이었다. 차해준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비틀거렸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짓쳐 들었다. 녀석의 손을 쳐 내자 중심을 잃은 녀석이 검을 놓쳤다. 그대로 팔을 붙잡아 꺾으며 어깨를 눌러 바닥에 밀쳤다.

그리고 넘어진 녀석 위에 올라타 턱 끝에 검을 붙였다. 칼날이 실낱같은 틈만 남겨 두고 바짝 붙었다.

“…….”

우린 둘 다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과거의 차해준과 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탈리스를 잡고 한야를 얻은 것. 그리고 경험의 차이. 그게 지금의 나를 더 우세하게 만들었다.

거친 숨소리 따윈 없었다. 우리 둘 다 지치지 않았으니까.

나는 흐릿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차해준을 살펴보았다.

녀석은 미동도 없이, 잡힌 손에서 힘을 풀었다. 벗겨진 모자로 인해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그 사이에 드러난 눈빛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공허했다.

“…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 아까는 맹렬하게 공격해 왔으면서도, 목에 검을 들이대고 있는데도 그 이상의 반응이 없었다. 져 버린 상대가 보통 보이는 두려움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꼭 마치…

“…야. 너.”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죽든 말든 제 의지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처럼.

“왜 그런 눈으로 살아.”

과거의 나를 보며, 처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이랬었나. 내가… 이렇게 죽은 눈을 하고 있었나.

폭주로 인해 사람을 해쳤다는 생각에 빠져 있던 과거.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왔던 과거. 송류진이라는 친구가 있었지만, 나와는 너무 다른 삶을 사는 녀석과 공감할 수 없었던. 그래서 혼자 외로웠던 나.

지금의 나와는 너무도 다르다.

차해준은 여전히 삶의 의지가 없는 눈으로 나를 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