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세계의 나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디서 찾지?
내가 걸음을 멈추자 지켜보던 백루찬이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정신 차려. 왜 아까부터 자꾸 넋을 빼놓고 있어.”
생각에 잠겼다가, 백루찬을 바라봤다. 김세영이 없어진 뒤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몇 달 붙어 있었다고 보인다. 불안함을 숨기려 되레 깊게 가라앉은 눈. 계속해서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작은 행동들. 백루찬은 지금 초조해 하고 있었다.
안다. 알고 있다. 검은해가 어떻게 나올지 나는 더 잘 알고 있으니, 백루찬이 불안해하는 것을 너무도 잘 이해 할 수 있었다. 녀석은 모르겠지. 그놈들이… 신도들을 데리고 어떤 짓을 하는지.
가약동 게이트가 열려서 한 개체뿐인 몬스터가 튀어나와 옥상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그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그런 개죽음은. 말도 안 된다.
진마하 그놈의 개 같은 수작으로 인해, 말도 안 되는 계략으로 인해 그렇게 된 거다. 나는 입술을 꾹 악물었다가, 한숨을 쉬고 멀어지려 하는 백루찬을 붙잡았다.
“…찾을 사람이 있어.”
“누군데.”
물어보는 말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심상 세계의 나…라고 하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지. 지금 가뜩이나 의심투성이인 이놈을 간신히 설득시켜서 여기까지 왔는데.
“사람 찾는 건 홍희가 잘하긴 하는데, 지금 연락할 수-”
“그게… 내가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일단 너는 이쪽을 둘러보고 있어. 내가-”
“…야. 너 지금 나랑 장난해?”
백루찬의 얼굴이 야차 같이 일그러졌다. 백루찬은 한쪽 뺨을 실룩였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갑자기 내 멱살을 틀어잡았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나와 똑같이 생긴 과거의 ‘나’를 보면 네가 무슨 생각을 하겠냐고…. 그 생각에 어쩔 수 없이 혼자를 자처했다. 매섭게 쳐다보는 눈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야, 야. 너 지금 흥분했다. 말은 끝까지 들어.”
“듣긴 뭘 들어. 여기까지 온 것도 네가 안다고 해서 온 거야. 근데 지금 혼자 내빼겠다고?”
“내뺀다고 한 적 없어. 왜 오버해서 말을 이해해?”
“네가 말하는 게 그게 아니면 뭐야. 봐줬더니만, 주제를 모르고….”
“말 자꾸 심하게 하지 마라.”
“하. 네가 한 행동부터 생각해.”
“말했잖아. 내빼는 거 아니라고.”
“야.”
백루찬이 눈을 부릅떴다. 회색 눈동자가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길드원이 되고 싶었다며. 얼굴 보고 접근한 것도 아니라며. 근데 지금 그렇게, 하… 말을 말자. 꺼져, 그냥.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마.”
백루찬이 던지듯 멱살을 놓았다. 그런 녀석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아니 루찬아.”
“그렇게 부르지 마!”
팔을 거칠게 뿌리치며 하는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자식이 근데…!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어디까지 쫓아왔는지도 모르면서. 너 때문에 내가…. 아 씨.
백루찬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속상함도 차올랐다. 그렇게까지 못 믿겠어?
기억도 없는 녀석과 마주쳤을 때부터 각오했긴 하지만, 마음이 쓰렸다. 물론 바로 정을 줄 순 없겠지. 하지만 너, 하루 만에 나를 붙잡았잖아 이 녀석아….
나를 붙잡고. 나를 잡아줬잖아. 그런 과거가 있었는데도.
“어떻게 하면 믿을래.”
성큼성큼 걸어가는 백루찬을 보며, 나도 쫓아가서 다시 녀석의 몸을 돌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거 이해해. 하지만 나에게도 제발 기회를 줘라. 너를 구할 기회를. 이게 아니면 검은해를 놓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네가 그 아픈 광경을 또 봐야 할지도 모른다고. 이 자식아.
“나는 지금 너를 걱정하고 있는 거라고. 너를 위해서…!”
다 말하지 못할 게 차고 넘쳐서 목구멍까지 걸렸지만, 결국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백루찬이 나를 보고 실소했다.
“네가 나를 걱정한다고? 걱정? 보통은 믿음에 대한 기만이라고 하지. 그런 것을.”
“…너 나 믿었어?”
내 말에, 백루찬이 잠깐 멈칫하더니,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붙잡힌 팔을 빼내려 하는 녀석의 팔을 나는 더욱 꽉 붙잡아 당겼다.
“너는 나를 믿었어?”
“그럼 씹…. 장난하지 말고 꺼져. 더 상대하고 싶지 않으니까.”
“믿어서, 네 옆에 있게 해 준 거야?”
백루찬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너를 가만히 놔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게 아니었다면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죽여버렸을 거야. 그런 거 나한텐 어려운 일도 아니거든.”
“…….”
“네가 우리 엄마 앞에서 웃고 떠들며 목메는 거. 구한다고 어쩌고 지껄인 거. 그래, 내가 믿었나 봐. 그래서 기대를 했던 거지. 좀 다를 거라고.”
“백루찬.”
“처음부터 수상했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오질 않나. 헌터 등록도 안 되어 있고, 검은해에 대해선 아는 척하면서 홍희랑 떨어지게 만들고. 그런 자식을 믿어 볼까 싶어서 여기까지 쫓아온 나도 참 기가 막힌다.”
“루찬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진짜로 친한 거 같잖아. 고작해야 너와 난 어제 처음 봤는데.”
“백루찬.”
나는 살기 등등하게 노려보는 녀석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백루찬은 밀리지 않고 버텼다. 하는 수 없었다. 내가 다가가는 수밖에.
뒤로 물러나는 녀석의 눈을 피하지 않고 보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와…. 어떡하냐.”
“놓고 꺼져. 진짜 죽여 버리기 전에.”
“나 이번에 진짜로 반한 거 같은데.”
“허-”
백루찬의 미친놈을 보는 것처럼, 어이없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눈앞의 이 녀석이 너무… 하 젠장맞을, 그렇다. 솔직히 좀 너무… 사랑스럽게 보여서.
나를 믿었다고? 믿어서 그랬다고?
“나는 미래에서 왔어. 현재를 바꾸지는 못해. 그럴 수는 없는데.”
“뭐라는 거야.”
“내가 여기서 과거를 바꾼다고 너를 괴롭히는 기억이 지워지진 않을 거야.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의 네가 그 고통을 겪지 않게 만들어 줄 수는 있어. 나는 그러고 싶거든. 네가….”
“야, 너.”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더 보고 싶지 않아.”
백루찬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당혹스럽게 깜박이는 눈을 마주 보며, 나는 옅게 웃었다.
“지워지지 않는 과거라서 네가 잊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보고 싶지 않아.”
꿈속에서조차 괴로워하는 너를. 심상 세계에서도 과거를 꿈꾸는 너를.
“처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네놈이 단단히 돌은 새끼라는 걸.”
뺨을 씰룩이며, 허탈하게 고개를 돌리려 하는 녀석의 뺨을 붙잡아 나를 보게 만들었다.
근데 너 왜 내 손은 그대로 두냐. 전류로 지져버리면 끝나는 것을. 그렇게 하면 나는 너에게 손을 댈 수도 없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자니,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맘때 백루찬은 경계심도 강하고, 어머니를 지켜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홍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다. 모두가 적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니. 그 믿음이 기꺼웠다. 맞아. 나는 달라.
세계의 기둥인 메인 캐릭터를 구하러 심상 세계로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그 이유뿐인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조금 더 알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망설임 없이 너의 세계에 뛰어들었는지.
결국 이거였구나. 내가 너를 구하고 싶었던 이유. 어쩌면 더욱 맹목적으로 된 이유.
세계의 기둥 그딴 거 나 모르겠고…. 아니, 개같지만 내가 챙겨야 하는 거 맞긴 한데. 나는… 하, 나는.
“게이트가 있는 세계에 미래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 게 뭐가 이상해? 나는 네가 있는 미래에서 왔어. 너를 위해서.”
꿈에서 깨도록. 꿈이 꿈이 아니길 바라겠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살아가도록.
현실에 있잖아. 너를 걱정하는 홍희도, 너를 걱정하는… 어쩌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나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
마주친 눈이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기가 차 보이면서도, 혼란에 가득 찬 백루찬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뺨을 쓸어내렸다.
세계의 기둥. 내가 지켜야 할 메인 캐릭터. 내가 지켜야 할 사람.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
나는 너보다도 먼저, 기억을 잠그고, 홀로 다른 곳을 유영하며 꿈을 꾸었다. 그리고 다시 세계가 안배해 놓은 것처럼, 현실로 돌아왔다. 모든 과거를 뒤에 놓은 채로.
잊고 사니, 재밌더라. 다른 사람들과… 너와 함께하는 게.
네가 진마하의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네가 나에게 숨겨 왔던 진실을 꺼내 들었을 때. 나는 안타까웠다. 그런 내가 싫었고… 너를 아프게 한 원인이 나라는 게 슬펐다. 많이 슬펐다.
“장난치는 거 아니야.”
“…야.”
“네 말이 어쩌면 맞는 것도 같다.”
나는 스킬을 전개했다. 내 밑에 진 그림자가 짙어지고, 몸 주변에 검은 마력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둠의 포식 스킬.
“나 네 얼굴에 반했나 봐.”
“…….”
“어떡하냐. 첫눈에 반한 건 답도 없다는데.”
물론 너를 본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꾸준히 들러붙던 너를 굳이 밀어내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던 거 같다.
“…뭐라는 거야.”
“네가 나한테 네 이름을 새겼잖아. 그래서 난 더 도망도 못가.”
손목에 새긴 게 아니라 내 마음에 새겨졌다. 네 이름이.
어둠이 내 몸을 삼키는 느낌이 든다. 백루찬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 번만 더 믿어 봐. 절대… 너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아.”
“…….”
“나는 널 구할 거야.”
고개를 좀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백루찬이 항상 나에게 해왔던 것처럼. 현실이 아닌 공간에서도 느껴지는 백루찬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훅 부는 바람에 느껴지는 체향도.
녀석은 바짝 굳어서 내 행동에 아무런 제재도 하지 못했다. 슬며시 그를 향해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이었다.
맞닿은 입술은 거칠었지만 따스했다. 매번 다가오던 녀석의 온기처럼.
갑작스러운 부딪침에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놀라서 입만 벙긋거리는 것이 백루찬답지 않게 귀여웠다.
어둠 속에 잠겨져 가는 나를 녀석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부딪쳤던 입술을 떼며, 뺨을 슬며시 두드리고 웃었다.
“참고로, 키스는 항상 네가 먼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