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 세계에 들어와서 쉽게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지금 닥친 일은 너무 준비도 없이 코앞까지 밀려와서 약간 숨이 막혔다.
백루찬은 묵묵히 겉옷을 집어 들었다. 긴 코트였다. 미래나 지금이나 코트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실없이 다른 생각으로 복잡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생각에서 벗어나 보려는 의도였다. 허나 그것은 쉽게 되지 않았다.
달궈졌던 홍희의 팔찌는 30분 간격으로 변화되었다. 아마 이것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모임 장소에 모두 도착하면 끝나는 신호였지 싶었다. 홍희는 빨갛게 자국이 난 손목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쓰다듬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빈집.
김세영이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백루찬은 일말의 동요를 잠시 비쳤을 뿐, 곧바로 미리 준비한 것처럼 나갈 준비를 했다. 시간은 어느새 12시를 넘긴 새벽 0시 20분.
“급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건가.”
내 말에 코트 주머니에 아티팩트로 보이는 몇 가지를 쑤셔 넣던 백루찬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잠깐 머뭇대다가 말을 이었다.
“아까, 그대로 쫓아갔으면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얘기한 건 20분 정도밖에….”
“김 여사만 잡는다고 다 끝나면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아니잖아. 너, 생긴 것만큼 멍청하구나.”
“…야.”
이게…. 그냥 생각보다 난리 피우지 않는 녀석들을 보고 한 말이었다. 백루찬은 옷장 깊숙이 숨겨 놨던 목함을 꺼냈다.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마력이 느껴지는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저건 또 무슨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지. 참 여러 개도 사 놨다….
“김 여사에게도 여러 개 채워 놨으니까 그딴 눈으로 쳐다보지 마.”
“어 그래….”
내 시선을 느낀 백루찬이 나를 흘겨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생각으로 본 거 아닌데. 뭐 변명할 것도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예비 길드원 질문 좀 받아 줘라.”
“급해.”
“김세영 씨, 왜 검은해와 접촉하게 된 거야?”
김세영은 주관이 뚜렷한 편이고, 아들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 힘든 세월을 홀로 버텨 왔으니 독기도 넘쳤다. 동화돼서 보았던 김세영의 모습은 그랬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이비에 빠지게 된 걸까.
내 질문에 홍희가 백루찬의 눈치를 보곤 입을 열었다.
“그런 분 아니었어, 원래.”
한숨을 푹 내쉰 홍희는 또다시 벌겋게 변하는 실 팔찌를 보다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들이 S급으로 각성하니 문제가 되어 버린 거지. 들러붙는 날파리 같은 새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아, 이해했다. S급으로 각성한 아들. 백루찬은 단번에 이름을 날렸을 테고, 그만큼 여러 일이 있었을 것이다. 홍희는 김세영이 아들을 빌미로 잦은 협박과 가스라이팅, 그리고 뭐라도 얻어먹으려는 빌붙는 거지 같은 세간의 시선에 내몰렸다고 했다.
“목표가 아들뿐이었는데,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아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니까…. 그리고, 그런 아들에게 유일한 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셨어. 주변이 그렇게 만들었거든. 언론이든 어디든.”
김세영은 그런 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고생으로 점철된 삶과 희생 따위는 그녀에게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존재 자체가 짐이 된다는 말은, 상처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백루찬이 부정해도, 그녀의 귀에 박혀 들어와 가슴을 후벼 팠다.
“주변에 알게 모르게 접근하는 놈들이 많았지. 경계를 많이 하셨는데, 처음엔 강하게 버티시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고서부터 자꾸 흔들리기 시작하셨어. 그때부터야. 집회에 나가시게 된 건. 아마 검은해 신도였겠지.”
“검은해 때문이야.”
백루찬이 단호한 음성으로 홍희의 말을 멈췄다.
“그놈들만 없애면…. 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
그건 마치 그렇게 바라는 듯한, 말이었다. 그렇게 만들리란 확신이기도 했다.
홍희는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백루찬도 준비를 다 끝낸 상태였다. 휴대폰을 두드리며 무언가 확인하던 홍희가 말했다.
“도와줄 놈들 몇 명 불렀어.”
“믿을 만한 놈들이어야 할 텐데.”
“요즘 난다 긴다 하는 녀석들이야. 한 손이라도 거들겠지.”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백루찬이 떨떠름한 얼굴로 나에게 손짓했다.
“넌 빠져. 돌아가라.”
“뭐?”
“갑자기 끼어들었으니 끼어들지 마. 이건 내가 처리할 문제야.”
“다른 사람들도 돕는다며, 근데 왜 갑자기 나만 빠져?”
백루찬이 나를 돌아봤다. 시선이 그윽하게 꽂혔다. 저저… 애매한 시선은 뭐냐.
“못 미더워.”
“와 이거 진짜. 고작 S급 주제에….”
“나가.”
“내가 도울 수 있어.”
내 말에도 백루찬은 등을 돌리고 홍희와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녀석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검은해! 나도 알고 있다니까! 아까도 내가 먼저 얘기했잖아.”
“그러니까 못 미덥다고.”
백루찬이 노려본다.
“네가 거기 끄나풀이면? 신도면? 네가, 내 뒤통수를 치면?”
나는 손목을 뒤집어 놈에게 가리켰다.
“이딴 것도 새겨 넣었으면서 못 믿냐?”
백루찬이 눈썹을 꿈틀하고는 휙 몸을 돌렸다. 거기선 할 말이 없었나 보다. 나는 놈의 팔을 붙잡았다.
“증명하라며. 기회는 줘야지.”
“하….”
띠껍게 노려보는 백루찬 뒤로, 홍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곤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뭔가 했더니 그거야?”
“뭐가 그거야?”
“아, 저놈의 얼굴 진짜 존나 문제야, 하여간. 개나 소나 다 끌어들인다니깐….”
혀를 차며 먼저 가 버리는 홍희를 보고 나는 더욱 기가 막히고 말았다. 저거 또 이상한 오해 하고 혼자서 생각 정리한 거 같은데!? 미래에서도 그러더니 과거에서도 똑같이 혼자 오해하고 납득하고!
“얀마, 그거 아니야!”
“쯧쯧…. 이래서 생긴 것들은….”
“아니라고!”
백루찬이 시끄럽다는 듯 고막을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알아서 따라오라는 것처럼 손짓했다.
“아씨, 아니라니깐!”
나는 다급한 순간임에도 혼자 엄청나게 억울해져서, 그들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 ❖ ❖
홍희는 먼저 실 팔찌를 받았던 집회 장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김세영과 먼저 접촉하려는 계획이었다. 손을 보태기 위해 불렀던 이들도 홍희와 함께 갔다.
그리고 나와 백루찬은 명동으로 나온 상태였다.
검은해가 악마의 눈동자 앞에 모인다면, 결국 일이 터지는 건 명동 이 장소였다. 그 많은 신도가 집회 장소 한 곳에만 모여 있을 리 없다. 홍희가 간 곳 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명동과 가까운 곳에.
나의 심상 세계를 지나고 나서 차해준의 기억은 모두 떠오른 상태였다. 그때, 당시, 나는 계속해서 악마의 눈동자를 막기 위해 회귀를 반복했다.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어 집중해야 떠오를 정도였지만, 겪었던 일은 인처럼 박혀 있어서인지, 지금 명동에 가까워지자마자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심박수가 높아지고 손발이 떨리는 건…. 이건 진짜 PTSD가 아니면 말이 안 된다.
나는 떨리는 손을 감추고 백루찬과 함께 악마의 눈동자가 열렸던 거리로 향했다. 분명 큰 백화점이 하나 있었고, 4차선 도로로 된 사거리 앞이었다. 익숙한 건물의 외벽을 하나씩 보면서 걷는데, 백루찬이 내 팔을 붙잡아 당겼다. 돌아보니 표정이 이상했다.
“너 왜,”
“어?”
“창백하잖아, 안색이.”
“아.”
얼굴에서도 티가 났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돼서 그렇지.”
“…그런 게 아닌 거 같은데.”
“뭐가 아냐. 넌 걱정도 안 되냐?”
내 대답에 백루찬이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먼저 걸음을 옮겨 버린다. 나는 녀석을 쫓아 옆에서 걸으며 주변을 관찰했다.
이 주변에도 검은해가 있을 것이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 그들이 제물을 바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미래에서 홍희가 검은해에 대해 설명해 줄 때 그렇게 말했었고….
시간대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오늘 일어날 일이란 건 확실했다. 그 전에, 제물이 희생되기 전에 찾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솔직히 심상 세계이니 그들을 구한다 해서 미래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아마 현실은 그대로겠지. 그럼에도 나서고 싶었다. 구하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미처 구하지 못했던 희생자를 구하고 싶었다. 나는 과거에도 시간을 반복하면서 그들 모두를- 아.
순간 번뜩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췄다. 백루찬이 나를 따라 멈춰 섰다.
“또 왜 이래.”
“아, 잠깐만.”
여러 번 반복되었던 시간. 나 ‘차해준’에게 이 순간은 ‘여러 번’ 찾아왔었다. 하지만 미래에서는 검은해 희생자들이 있는 채로 나탈리스와 전투를 마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가 나탈리스를 죽이는 마지막 회귀를 했을 때에야 집단 행위를 성공했으니까!
나는 기억을 더듬어 갔다. 마지막 회귀에서야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성공시킨 검은해. 그 전에는 어땠더라.
처음 악마의 눈동자를 마주쳤을 때는 그들이 실패했다. 수상한 집단에 대한 신고가 들어와서 각본이 막았었고 두 번째에는…. 두 번째에는 집회 장소를 바꾸고 각본에게 걸리지 않은 채 등장했다. 검은해는 어떻게 자신들이 들켰던 위치를 바꿨지. 회귀했던 건 나뿐인데. 아, 나는 생각하면서 깨달았다. 진마하. 그놈 때문이다. 그놈은 회귀하던 나를 ‘모두’ 지켜보았다. 돌아가는 시간까지도.
그래. 그놈이 키였구나. 놈이 바꾼 거다. 들켰던 위치를.
두 번째는 어디였지. 아니 지금은…. 지금은, 몇 번째 순간이지.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나는 백루찬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회색 눈.
이것을 알려면, 나는 한 명을 더 찾아야 했다. 다름 아닌 심상 세계의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