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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헌터는 당신을 공략 중 (139)화 (139/201)

“기가 막힌다.” 

우리의 분위기가 더욱 어색해지려 하기 전, 홍희가 나타났다. 홍희는 떫은 표정으로 나를 힐끔 쳐다보곤 손가락질했다.

“이걸 믿어?”

“못 믿어서 그런 거야.”

“허튼짓하면 죽인다 쳐도, 옆에서 방해하면 어떡할 건데?”

“보험을 하나 들어 놓으려고.”

백루찬이 손을 까닥였다. 취급 죽인다, 진짜…. 나는 불만이 일었지만 군말 없이 놈에게 다가갔다. 백루찬이 대뜸 내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뭐 해?”

“이건 약간 불법이긴 한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백루찬은 혈관이 도드라진 손목 부근에 펜같이 생긴 것으로 무언가를 휘갈겨 적었다. 손목에 낙서한 듯 큼지막하게 적힌 건 녀석의 이름이었다. 다 적은 뒤 ‘발동’이라 중얼거리자, 글씨가 푸른색으로 빛나면서 찌잉 하고 몸속으로 마력이 스며들었다.

“이게 뭐 하는 거야?”

“제작자가 만든 특별 아이템. 일종의 사술이지. 네가 내 말에 복종하게 만드는.”

와, 이건 너무하지 않냐. 기막힌 얼굴로 쳐다보자 백루찬이 불만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불만…이 있을 리가 없죠. 그쵸.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내 뜻을 거스르는 짓을 하려고만 해도 스며든 마력이 독이 돼서 네 핏줄을 타고 돌아다니게 될 거야. 잘 생각하고 행동해. 알겠지?”

백루찬은 살포시 웃으면서 내 뺨을 툭툭 쳤다. 나는 조금 넋이 나간 채로 이름이 새겨진 손목을 쳐다봤다. …뭔가 좀 X된 느낌이지만, 심상 세계니까…. 하하. 그리고 진짜로 내가 저 녀석에게 위험할 일을 할 리도 없고. 한숨을 삼켰다.

“아 그거 좀 아까운데. 진짜 괜찮은 각성자 만나면 쓰려고 했던 건데.”

홍희가 조금 짜증 난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희 믿을 만한 각성자를 그런 식으로 만들려고 했었냐…. 어이가 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홍희가 표정을 굳히고 나를 흘겨봤다. 서늘한 게, 진짜 남을 보는 얼굴이었다. 야이… 너는 내 팬이었다면서…. 아, 지금은 드러날 시기가 아닌가. 그래도 이렇게 남 보듯 보는 건 좀 서운하다, 야.

벽에 기댄 홍희가 그제야 본론을 꺼내 들었다. 내가 아무 짓도 못하게 된 지금에서야 괜찮다고 생각한 듯했다. 나는 무심코 백루찬의 이름이 쓰인 손목을 쓸어내렸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진짜 조심해야겠는데.

“김 여사님, 역시 좀 이상해.”

김세영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뭐가 이상한 거지? 나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진 못했지만 백루찬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오랫동안 가까이서 봐 온 그들 눈엔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백루찬은 벽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삼키듯 목울대를 울렁거렸다. 녀석은 복잡한 시선으로 어둡게 잠긴 하늘을 올려다보다 시선을 내렸다.

“…그 조직은 알아봤어?”

그 조직? 불안감이 팍 꽂혀 들었다. 그 조직이라니, 무슨 조직을 말하는 거지. 가만히 듣고 있자 홍희가 그런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못마땅한 눈치를 보내면서도 입을 열었다.

“이상해. 낡은 건물에서 집회를 여러 번 하는 것도 그렇고…. 여사님 따라갔을 때, 이상한 짓을 했어.”

홍희가 손을 들어 보였다. 팔목에는 웬 실 팔찌가 끼워져 있었는데, 흰색 배합에 검은색이 섞인 그저 평범한 디자인이었다.

“이거 마력 팔찌인가? 마력이 느껴져.”

“구리로 마력 회로를 만들어서 실에 감아 만든 거야. 제작자가 껴 있다는 거지.”

“이걸 그냥 받아 들고 왔어? 위험하면 어쩌려고.”

“그래 봤자-.”

“희야.”

“아니, 아…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 없는 분위기였어. 세 번 이상 집회 참여한 신도에게 주는 거라고 하면서 걸어 주는데, 김 여사님이 옆에서 좋아하셔서.”

“거길 세 번이나 갔어?”

“김 여사님 따라갔던 거라니까. 아무튼, 수상해. 간판도 없는 낡은 건물은 그렇다 쳐도 장소를 매번 바꾸니까…. 그리고 모이면.”

“모이면 뭘 하는데.”

홍희의 얼굴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기도해. 이상향으로 가는 문을 내려 달라면서.”

거기서 나는 바짝 굳어 버렸다. 거기다. 검은해. 그놈들이다. 이때부터, 이렇게 침투했던 것인가? 가만…. 백루찬은 내가 세상을 구한 날 가족이 죽었다고 했다. 그냥 일반 게이트 사태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나밖에 없다. 지금 김세영이 무사하고, 이 년 전이라면.

소름이 돋았다.

이걸 왜 놓치고 있었지? 김세영은 나탈리스, 악마의 눈동자 게이트에 휘말려 사망했다. 그리고 진마하가 말했었다. 그 게이트 또한 자신이 열었다고. 악마의 눈동자 때 검은해 집단이 제물을 통해 신도들을 게이트로 밀어 넣었고.

“지, 지금은 며칠이지? 몇 월?”

이걸, 이걸 놓치고 있었다니. 나는 다급하게 날짜를 확인했다. 홍희가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호출기. 아니 휴대폰. 어딨지. 그러나 만져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 나는 심상 세계에 끼어들어 왔으니까 그런 게 구현되었을 리 없지! 백루찬에게 손을 내밀어 휴대폰을 달라고 손짓했다.

놈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갑작스러운 내 모습에 당황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주었다. 다급하게 빼앗아 들어서 날짜를 확인했다.

액정엔 8월 3일이라고 떠 있었다. 나탈리스가 나타난 때는 한여름이었다. 그들은 날짜에 의미를 더해 게이트를 열었다고 주장했다. 그때가 며칠이었지? 정확하게 날짜가 기억나지 않아 머리를 싸맸다가, 번뜩 무언가 떠오르자 백루찬에게 잠금을 풀어 달라고 했다.

“얘 왜 이래…. 갑자기 미쳤냐?”

“희야, 말 좀 이쁘게 해.”

“너도 드럽게 하면서 나한테만 지랄이야….”

백루찬이 한숨을 쉬며 잠금을 풀어 줬다. 바로 달력 어플로 들어가 날짜를 확인했다. 8월, 나탈리스. 게이트. 악마의 눈동자가 열렸던 날. 검은해 놈들이 하필 그날 악마의 눈동자를 열었다고 주장한… 칠월 칠석. 오작교가 연결된다고 해서, 이 세계와 다른 세계가 연결되는 날이라는, 그런 뜻을 담아 그들이 움직였던 날.

“아… 미친.”

그때 액정에 표시되었던 시간이 바뀌었다. 밤 12시 46분. 47분…. 눈가가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칠월 칠석, 음력으로 8월 4일. 내일이었다.

❖ ❖ ❖

“야, 뭐 땜에 이래? 얼굴도 하얗게 질려서는.”

홍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며 다가왔다. 나는 애써 빨라지려는 호흡을 추슬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 조직… 검은해, 맞아?”

내 말에 홍희가 인상을 썼다.

“뭐야, 너 그걸 어떻게 알아.”

“검은해, 맞아?”

“신흥 종교라고 듣긴 했는데 게이트 생긴 이후로 그런 게 한두 개 생겼어야지. 걔네 교단 이름이… 그러니까.”

심각해 보이는 내 표정에 홍희도 덩달아 당황하며 더듬더듬 기억을 더듬었다.

“가서 김 여사만 신경 썼지… 아, 어. 맞아, 검은해. 근데 네가 그걸… 너 설마?”

운명은 예상 못 할 속도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기운이 빠져 비틀거릴 뻔한 걸 정신을 다잡고 다리에 힘을 줬다. 심상 세계이고, 백루찬의 세계이지만 이건 너무 가혹한데. 그럼… 혹시 이 세계에 ‘나도’ 있는 건가. 조금 허탈해져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젠장. 이렇게 코앞이라니.

아니야. 차해준 정신 차리자. 견디기로 했잖아. 이건 시작이다. 그리고 백루찬을 구할…. 구할 일이다.

당장 내일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8월 4일이 되기까지 10분이 남았다.

하, 뭘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백루찬은 여기서 또 제 가족을 잃은 그 상황을 마주하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혼란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남은 시간 18:44:14]

시스템이 깜박거리며 간섭할 수 있는 제한 시간을 알렸다. 저 시간을 넘기면, 그것도 위험해진다.

여러모로 제약이 많이 뒤따랐다. 답답하다. 나는 백루찬을 쳐다봤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백루찬은 탐탁잖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직은 저 회색 눈이 메마르지 않았다. 감정 따위는 보이지도 않던 눈에는 아직 생기가 담겨 있다.

뭐라 입을 떼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머뭇대며 백루찬과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였다.

“아-!”

고통 어린 탄성이 터졌다. 홍희가 손목을 움켜쥐고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백루찬이 놀라서 먼저 홍희에게 성큼 다가갔다. 나도 멍하니 잠겨 있다 깨어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홍희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왜 그래?”

“아 씨…. 이거.”

홍희가 실 팔찌가 걸려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마력 회로가 깔려 있던 팔찌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뜨거워.”

홍희가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이게 왜 이렇게….”

“이제 알겠네. 이거 부르는 신호였어.”

“뭐라고?”

“이거, 부르는 거 같다고…! 머릿속에서 자꾸 울리는데…. 이거…씹,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김 여사…!”

백루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홍희도 같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쫓았다. 향하는 곳은 녀석의 집.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 골목이어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백루찬이 급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잠금을 여는 손이 다급하게 버튼을 눌러 실수를 연발했다. 삐빅삐빅- 울리는 잘못 입력했다는 소리에 홍희가 백루찬을 밀치고 비밀번호를 입력해 문을 열었다.

“…젠장.”

적막에 잠긴 집 안은, 아까 인사를 하고 나올 적 그대로였다. 불이 켜진 거실과 안방. 살짝 열린 문틈 새로 침대가 보인다. 하지만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집은 훈훈한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김세영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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